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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배웅하는 길, 꽃비 쏟아지다

글 | 조정육 미술칼럼니스트 2019-04-19 09:43

▲ 조재임. ‘바람숲’. 65×53cm. 채색한지에 수간안료. 2018
언니가 세상을 떠났다. 3월 29일 오후 6시48분이었다. 함께 행복하게 살자면서 신나게 좌판을 깔아놓고서 변심한 듯 황급하게 혼자 손 털고 가버렸다. 그것으로 언니는 64년 동안의 세연을 끝마쳤다. 유언 한마디 남기지 못하고 떠난 죽음이었다. 부정맥 수술을 받고 병원에 입원한 상태에서 뇌출혈로 세상을 떠난 만큼 언니의 죽음은 불가피하고도 불가항력적이었다. 창졸간에 덮친 변고라 남겨진 자들의 충격은 컸다. 슬픔도 참담함도 온전히 남겨진 자들의 몫이었지만 감당하기 힘든 무게였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낼 때면 실감하게 되는 사실이 있는데 죽음은 단순히 삶의 반대말로 쓰이는 보통명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죽음은 그것을 맞닥뜨린 사람들에게 너무나 개별적이고 구체적이어서 단순히 생명체의 삶이 끝난다는 보통명사로 규정할 수 없는 어둠이 깔려 있다. 유족들이 겪어야 하는 치명적인 슬픔은 설명되거나 해석될 수 없다. 그저 무차별적인 사살에 속절없이 쓰러져야만 한다.

언니는 내게 엄마 같은 존재였다. 그러니 언니의 죽음은 부모상(父母喪)을 뜻하는 ‘종천(終天)의 비통함’이나 다름없다. 공자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이 너무 먼 곳에 있었다면 언니의 가르침은 내 삶의 굽이굽이에서 곧바로 적용 가능한 현장지침서였다. 그러므로 언니는 평범하게 죽은 것이 아니라 ‘역책(易簀)’한 것이다. 

그러나 참혹한 슬픔에 통곡하며 하늘을 원망해도 다만 죽음은 죽음의 길을 갈 뿐이어서 한 번 눈을 감은 언니는 결코 눈을 뜨지 않았다. 단호하고 매몰찬 죽음 앞에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단지 젖 먹던 힘까지 다 쏟아내며 우는 것이 전부였다. 대책 없이 통곡하고 땅을 치며 몸부림치다가 필경에는 애별리고의 쓰라림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 상을 당한 사람들의 의무다. 죽음 앞에서 인간은 백전백패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금강경’에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꿈 같고, 환영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으며 이슬 같고, 번갯불 같다(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고 적혀 있다. 참으로 우리 인생이 그러하다.
   
쌍계사 십리벚꽃길을 걷다
   
조재임의 ‘바람숲’은 한지 색종이를 수없이 덧붙이는 수고를 되풀이한 결과 탄생한 작품이다. 봄날의 산에 오르면 볼 수 있는 은대난초, 애기나리, 산괴불주머니, 노루풀이 하늘을 향해 사부작사부작 고개를 내민다. 그런데 그 꽃 이름이 맞을까. 틀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어쩌면 평생 이름을 가져보지 못한 잡초일지도 모른다. 이름은 알 수 없지만 잡초라 부르기에는 너무 고운 풀꽃들이 맑은 하늘을 배경 삼아 봄날의 화사함을 노래한다. 바야흐로 목숨 가진 꽃이라면 전부 뛰쳐나와 살아있음의 환희심을 뚝뚝 떨어뜨리는 날이다. 어느 꽃이든 조재임의 손을 거치면 하늘 향해 두 팔 벌려 생명의 찬가를 부르는 고귀한 꽃다발로 전환된다. 
   
언니의 생애도 그러했다. 언니는 자신에게 부여된 시간을 충만하게 살다 갔다. 비록 장미나 백합처럼 대중적인 지명도를 가진 꽃으로 불리지는 못했지만 ‘바람숲’의 풀꽃처럼 지상의 한편을 환하게 밝히며 살다 갔다. 언니 곁에 있던 사람들은 언니가 밝힌 꽃등 아래를 걸으며 안온한 삶을 누리고 음미할 수 있었다.
   
언니는 사는 동안 자신에 대한 염려보다 타인에 대한 배려가 먼저였다. 그 삶의 철학은 가는 순간까지도 변하지 않았다. 언니의 배려 덕분에 쌍계사 십리벚꽃길을 가게 된 것은 느닷없는 축복이었다. 장례를 치른 조카가 49재를 하고 싶다고 해서 경남 사천에 있는 절에 초재를 지내러 갔다. 서울에 있는 하고 많은 절을 두고 굳이 머나먼 남쪽 지방의 작은 절을 찾아간 것은 그곳에 내가 믿고 존경하는 스님이 계시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네 시간을 달려 그곳까지 내려간 이유가 단순히 스님 때문만은 아니었다. 슬픔에 빠져 있는 조카들에게 쌍계사 십리벚꽃길에 데려가 벚꽃의 위로를 안겨주고 싶었다. 갑자기 고아가 되어버린 조카들이 벚꽃길을 달리면 앞으로의 인생에 격려가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게 해달라고 꽃 피는 계절에 떠난 것인지도 모른다. 내일모레면 마흔이 되는 조카들이지만 이별의 슬픔은 나이를 가리지 않는다. 내일모레면 환갑인 나도 이별의 슬픔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지 않은가. 
   
영정과 위패를 모시고 사천에서 초재를 지낸 후 섬진강으로 향했다. 섬진강가의 벚꽃들이 반쯤 지고 반쯤 남은 반면 쌍계사 십리벚꽃길은 절정을 이루고 있었다. 이렇게 모두 생명 가진 존재들은 삶 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잔인한 계절이다. T.S. 엘리엇은 ‘황무지’라는 시에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했다. 죽은 대지를 뚫고 생명이 태어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언니는 반대로 생명이 피어나는 날에 생명을 버렸다. 우리에게 이보다 더 잔인하게 느껴지는 달이 있을까.
   
찬란하게 피어나는 생명 앞에서 죽음을 목도한 자의 슬픔은 더 남루하기 마련이다. 엄마 같은 언니라고 했으면서 왜 살아있을 때 이런 꽃길 한번을 함께 걸어보지 못했을까. 꽃길을 조카들과 함께 걷는데 수습할 수 없는 회한과 자책이 몰려왔다.
언니는 형제자매 중에서 유일하게 균형감각을 갖춘 사람이었다. 그러면서도 자비스러웠다. 조카는 그런 엄마를 ‘살아있는 보살’이라고 평가했다. 아이를 낳을 때도 병원에 입원할 때도 김장할 때도 찜질방에 갈 때도 내 곁에는 항상 언니가 있었다. 다른 자매들도 있지만 속내를 털어놓고 대화하는 사람은 언니 한 사람뿐이었다. 아침마다 통화하고 수시로 카톡하며 일상을 공유했다. 언니가 없는 미래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 언니가 떠남으로써 내겐 친정이 없어져버렸고 언니와 연관된 커다란 세계가 사라져버렸다.
   
“다음에 이모한테 올 때는 순대 미니어처 가져와야겠어요.”
장례식날 화장을 끝내고 유골을 납골당에 안치할 때 아들이 한 얘기였다. 초등학교 때 학교에서 돌아오면서 순대를 사왔는데 집에 이모가 와 있더란다. 행여 이모가 알면 순대를 나눠 먹어야 할 것 같아서 몰래 감추고 방에 들어가 혼자 먹었단다. 그까짓 순대가 뭐라고 자신을 끔찍하게 아껴준 이모한테 주기 싫어서 숨기고 몰래 먹은 기억이 박사과정에 들어간 나이가 되어서도 잊히지 않은 모양이다. 아들의 가슴에도 이모에 대한 회한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모의 유골 앞에 순대 미니어처라도 가져다놓고 사죄하고 싶을 만큼 아들도 이모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아들의 가슴에만 회한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의 가슴에도 미안함과 안타까움은 선인장 가시처럼 촘촘히 박혀 있다. 몇 달 전이었다. 언니의 카톡 프로필에 피카소의 ‘꿈’이 올라왔다. 그림이라면 쳐다보지도 않던 사람이 갑자기 피카소라니. 그래서 나는 전화를 걸어 입방정을 떨었다.
   
“웬 피카소?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는데.”
   
그때 내가 그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언니는 살아 있을까. 그때 내가 그 말을 하는 대신 봄꽃 피면 쌍계사 십리벚꽃길을 함께 걷자고 했으면 지금 내 곁에는 언니가 걷고 있을까.
   
   
▲ 김두량·김덕하. ‘사계산수도’ 중 봄(세부). 1744. 비단에 연한색. 8.4×184cm. 국립중앙박물관
복숭아꽃 오얏꽃 핀 향기로운 뜰에 모여
   
내가 ‘춘하도리원호흥경’을 다시 봤을 때 가슴이 뭉클했던 것은 쌍계사 십리벚꽃길을 다녀와서였다. 늦은 봄일 것이다. 사방이 확 트인 건물에 앉은 사람들이 추위를 느끼지 않을 정도의 날씨인 것을 보면. 세 명의 선비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술잔을 주고받으며 시를 읊조린다. 시를 읊다 흥에 겨우면 붓을 들어 먹을 적시고 종이 위에 시를 써내려간다. 걸핏 던지는 우스갯소리에도 서로 어깨를 들썩이며 박장대소한다. “절창이로세.” “하늘이 그대에게만 재주를 주셨구만.” 시 한 편을 읊을 때마다 공감하는 사람들의 추임새와 탄식소리가 뒤따른다. 

나른한 봄날 공기 속을 뚫고 와르르 웃음소리가 터진다. 술잔을 거듭할수록 시를 적은 두루마리는 수북이 쌓여가고 어린 동자는 술과 새 두루마리를 나르느라 분주히 마당을 오고간다. 오랜만에 마음에 맞는 사람들끼리 만났으니 오늘을 즐기지 않고 무엇하리. 신선들이 잠시 지상에 내려와 여유로운 시간을 즐기는 듯한 마당에 복숭아꽃, 오얏꽃이 가득 피었다. 사슴과 학이 깃든 집의 버드나무와 대나무 줄기에는 생명의 기운이 가득하다.
   
김두량(金斗樑)과 그의 아들 김덕하(金德夏)가 그린 ‘춘하도리원호흥경(春夏桃李園豪興景)’은 오래전부터 즐겨 보던 작품이다. 딱 이즈음에 보면 좋다. 봄꽃은 피었는데 사정상 그 속으로 걸어 들어갈 수 없을 때 이 작품을 보는 것만으로도 상춘(賞春)의 갈증을 달랠 수 있다. 좁은 방에 앉아 먼지 쌓인 책 사이에서 컴퓨터만 두드리고 있을 때, 병실에 누워 답답한 건물 사이로 언뜻 비치는 봄빛을 하염없이 그리워만 할 때 이 작품은 내게 무한한 위로가 되었다. 

그림의 역할은 그런 것이다. ‘춘하도리원호흥경’은 ‘봄 여름 도리원의 흥겨운 풍경’이란 뜻으로 봄, 여름, 가을, 겨울 풍경을 하나의 두루마리에 그린 ‘사계산수도(四季山水圖)’ 중 봄 장면이다. 이 그림은 이백(李白·701~762)의 시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를 형상화했다. 다만 그림에서는 ‘봄 밤’을 ‘봄 여름’으로 바꾸었다. 이백의 정원인 ‘도리원’은 복사꽃과 오얏꽃이 많이 피었던 모양이다. ‘무릇 천지는 만물이 쉬어가는 여관이요/ 시간은 긴 세월을 지나가는 나그네라’로 시작하는 이백의 시는 ‘부평초 같은 인생 꿈 같은데 즐긴다 한들 얼마나 되리’로 이어진다. 그리고 여러 아우들과 함께 복숭아꽃, 오얏꽃이 핀 향기로운 뜰에 모여 시를 지으며 술잔을 주고받는다. 이백이 굳이 그날의 일을 시로 남긴 까닭은 무엇일까. 그곳에 여러 아우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피붙이와 함께하는 시간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 것은 어쩌면 이백도 형제를 잃는 아픔을 겪었기 때문일지 모른다.
   
언니가 떠나고서야 알았다. 삶은 누군가를 위한 희생이 바탕이 되었을 때 그 희생과 연관된 사람들의 삶에 거름이 되어 그들의 삶을 기름지게 한다는 사실을. 그 진리를 이름 없는 영웅의 죽음이 말해준다. 우리의 삶이 꿈 같고, 환영 같고, 물거품 같지만 언니처럼 주변 사람들의 가슴에 생생하게 살아 있다면 죽어도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온 천지에 꽃비 가득히 내린 봄날에 언니가 살아온 삶을 되돌아본다. 그런 언니와 57년을 함께 했으니 나는 복 받은 사람임에 틀림없다.
등록일 : 2019-04-19 09:43   |  수정일 : 2019-04-19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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