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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대통령이 베이징대서 언급한 ‘김산’의 진실

글 | 김태형 주간조선 기자 2017-12-27 08:21

▲ 김산 photo 동녘
“마오쩌둥 주석이 이끈 대장정에도 조선 청년이 함께 했다. 그는 한국의 항일군사학교였던 ‘신흥무관학교’ 출신으로 광주봉기에도 참여한 김산이다. 그는 연안에서 항일군정대학의 교수를 지낸 중국공산당의 동지다.”
   
   지난 12월 15일 중국 국빈방문 중이었던 문재인 대통령이 베이징(北京)대 강연에서 한 말이다. 중국 방문 사흘째였던 이날 문 대통령은 일제의 전승축하기념식에서 폭탄을 던진 윤봉길 의사, 마오쩌둥 주석과 대장정을 함께했던 김산을 거론했다. 김산은 일반인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특히 김산은 중국을 방문해 베이징대와 칭화대에서 강연한 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 역대 한국 대통령들이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던 인물이었다. 김산이 누구이길래 문 대통령이 그를 거명했을까.
   
   
   중국공산당원으로 광저우 봉기 가담
   
   김산은 그의 본명이 아니다. 김산의 본명은 장지락이다. 그의 이름이 본명보다 김산으로 더 알려지게 된 이유가 있다. 김산의 생애는 1984년 ‘아리랑’(동녘)이라는 책이 국내에 번역·출간되면서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아리랑’은 1937년 미국의 여류작가 님 웨일스가 중국 공산혁명의 수도 옌안(延安)에서 김산을 만나면서 함께 대화를 나눈 내용을 담아 1941년 미국에서 발간한 책이다. 장지락은 장명, 장북성, 한국유 등 10개가 넘는 가명을 썼다. 김산은 님 웨일스와 인터뷰 과정에서 만든 그의 마지막 가명이다. 이후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가 자신의 저서인 ‘대한민국史’에서 김산을 비중 있게 다뤘다.
   
   김산은 1905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 3·1운동의 좌절을 바라보며 정치의식을 갖게 된다. 그는 열다섯의 나이로 압록강을 건넌다. 김산은 만주 유하현 삼원보에 있던 신흥무관학교를 찾아가게 된다. 민족주의자들이 세운 신흥무관학교는 입학연령이 18세로 제한돼 있었다. 이 때문에 당시 열다섯 살의 김산은 입학을 거부당했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700리 길을 한 달여 동안 혼자 걸어온 사연을 얘기하며 입학을 간곡하게 요청했다. 결국 신흥무관학교는 예외적으로 김산에게 3개월 코스의 속성반 입학을 허가했다.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김산은 임시정부가 있던 상하이로 향한다. 상하이에서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의 식자공(植字工)으로 일하면서 김산은 자신의 영웅이던 이동휘와 안창호를 만나게 된다. 상하이 시절 김산을 매료시킨 것은 테러행동이었다. 무정부주의에 관심을 가진 민족주의자였던 김산은 상하이에서 의열단을 만나 무정부주의에 빠져든다. 김산이 마르크스주의를 본격적으로 접한 것은 1921년 그가 베이징으로 옮긴 뒤의 일이었다. 1920년대 초반 중국과 한국의 무정부주의자들 중 상당수가 1922년에서 1924년 사이에 마르크스주의로 경도됐다.
   
   김산을 마르크스주의로 이끈 사람은 김성숙이었다. 님 웨일스는 책 ‘아리랑’에서 ‘김성숙은 금강산 승려 출신의 공산주의자 김충창’으로 묘사했다. 두 사람은 당시 항일 무장독립운동 단체인 의열단 단원으로 조선 청년들과 생사를 넘나드는 우정을 쌓는다. 1922년 김산은 중국공산당에 입당해 중국 공산혁명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한다. 1925년 김산은 김성숙을 따라 베이징을 떠나 쑨원(孫文)의 정부가 세워진 광둥으로 가게 된다. 1927년 김산은 광저우(廣州)에서 공산당의 광저우봉기에 참가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베이징대 연설에서 언급했던 봉기가 바로 이 광저우봉기다. 공산당원 7000여명이 희생된 광저우봉기에서 한국인은 200여명이 희생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공산당의 광저우봉기가 중국국민당의 반격으로 실패하자 해륙풍(海陸豊) 소비에트로 철수한다. 소비에트(soviet)란 프롤레타리아 독재정권의 권력기관이나 권력 형태를 의미한다. 해륙풍은 지금의 행정구역으로 하면 중국 광둥성 산웨이시(汕尾市)에 속하는 하이펑현과 루펑시다. 해륙풍도 중국국민당의 공격으로 무너지면서 상당수의 조선인들이 희생되고 만다. 당시 살아남은 조선인들은 상하이나 옌안 등지로 옮겨 공산당 활동을 계속했다. 조선인들은 독립과 반제국주의 투쟁의 하나로 중국 공산혁명에 참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27년 추수봉기를 일으켰다 실패한 마오쩌둥은 주더(周德)와 함께 장시성 징강산(井崗山)에 해방구를 마련했다. 마오쩌둥은 농촌혁명이라는 중국공산당 고유의 혁명 방식을 새롭게 정립했다. 이를 바탕으로 마오쩌둥은 1931년 장시성 루이진(瑞金)에서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을 수립했다. 이것이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으로 이어졌다.
   
   
▲ 중국을 국빈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2월 15일 중국 베이징대학교에서 ‘한·중 청년의 힘찬 악수, 함께 만드는 번영의 미래’를 주제로 연설을 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일본 스파이로 몰려 처형당해
   
   이후 김산은 1930년과 1933년 두 차례에 걸쳐 베이징에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됐다. 김산은 일본 경찰의 고문에도 혐의를 부인해 풀려날 수 있었다. 하지만 공산당 동지들은 그를 일본 스파이로 오인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그가 감옥에서 쉽게 풀려나올 수 있었는지 의심했기 때문이다. 중국공산당도 김산이 쉽게 석방된 것을 의심해 출당을 결정했다. 그가 중국공산당을 떠나 1936년 상하이에서 김성숙·박근성 등과 함께 결성한 조선민족해방동맹은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이룬다. 정치적으로는 제3인터내셔널(코민테른·1919년에 결성된 각국 공산당 연합체)의 노선을 지향했지만, 조선에서의 사회주의 혁명을 민족해방 이후의 과제로 넘겼기 때문이다. 이후 김산은 1937년 중국공산당의 근거지인 산시성(陝西省) 옌안의 군정대학에서 한국어, 일본어, 물리학, 화학 등을 가르쳤다.
   
   김산은 1938년 사망했다. 김산은 어떻게 죽었을까. 그동안 그의 삶이 베일에 감춰졌던 것처럼 그의 죽음 역시 여러 추측이 분분했다. ‘아리랑’의 저자인 님 웨일스는 김산이 어디선가 병사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가 만주로 가서 항일전쟁에 동참하다가 죽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던 1986년, 그의 죽음에 대한 중요한 사실이 발견된다. 김산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짤막하게나마 공식 역사서술에 등장했는데, 내용은 이렇다.
   
   1938년 산간닝변구(陝甘寧邊區) 보안처에서는 김산의 역사를 심사했다. 김산을 가리켜 반역자, 일제특무 등 숱한 의문이 제기됐지만 결론을 내릴 만한 근거는 없었다. 하지만 중국공산당 고위간부 캉성(康生)은 김산을 죽이라고 지시했다. 캉성은 옌안에서 중국공산당의 초기 정보·보안기관인 중앙사회부장을 지내며 ‘내부 스파이’ 색출과 숙청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옌안 정풍’ 운동으로 알려진 이 광풍 속에 수많은 사람이 스파이나 반당(反黨) 분자로 내몰려 희생됐다. 결국 김산은 일본 스파이로 몰려 처형당한다. 그때 김산의 나이는 서른셋. 김산이 죽은 한참 후인 1983년 중국공산당은 “그의 처형은 특수한 역사 상황 아래서 발생한 잘못된 조치”라며 김산의 명예를 회복시켰다. 2005년 노무현 정부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주간조선 2488호
등록일 : 2017-12-27 08:21   |  수정일 : 2017-12-27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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