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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펜젤러 문헌 통해 ‘애국가 1897년 윤치호 작사’ 최초로 규명”

애국가 작사자 논쟁 종결 金煉甲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이사

⊙ 1955년 국사편찬委, 애국가 작사자 확정 표결 11대 2를 받았으나 ‘미확정’ 결론
⊙ “1897년 8월 배재학당 학생들, 尹致昊 작사한 ‘무궁화 노래’ 불러”(아펜젤러 傳記)
⊙ 1908년 출판한 尹致昊 《찬미가》 14장에 오늘날의 애국가 등장
⊙ 서지학자 安春根, 1903년 출간한 ‘애국가 자료 3종’ 발표… 위작 판명
⊙ “자녀들에게 애국가 작사자 未詳으로 가르치는 일 끝내야”

글 | 오동룡 월간조선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2015-09-15 09:50

  “올해는 광복 70주년이자 국사편찬위원회가 애국가 작사자 조사를 시작한 지 6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애국가 작사자를 미상(未詳)으로 가르치는 부끄러운 일은 올해로 끝내야 합니다.”
 
  서울 세종로 코리아나호텔 커피숍에서 만난 한겨레아리랑연합회 김연갑(金煉甲·61) 이사는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가 애국가 작사자 논쟁을 끝내지 못하고 방치하던 것을 60년 만에 사료 발굴을 통해 논란에 종지부를 찍게 됐다”면서 “애국가 작사자 윤치호(尹致昊·1865~1945) 선생을 향한 모든 의문점을 해결했고, 올해 서거 70주년에서는 윤치호의 애국가 작사 공로를 제대로 기념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김연갑 이사는 30여 년 이상 아리랑과 애국가 연구에만 종사해 온 한국의 대표적 서지학자다. 김 이사는 “윤치호 선생은 애국가를 국가(國歌) 개념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 우리 국민의 계몽과 단결을 위해 애국적 찬송가로 지었다”며 “당시 그의 노래가 배재학당을 비롯한 기독교학교로 확산되고, 3·1운동 기간 민중이 선택하고, 임시정부가 수용하여 광복 후 대한민국이 채택했던 것”이라고 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作詞者 조사
 
좌옹 윤치호.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1948년 정부 수립과 함께 자연스레 국가로 자리 잡은 애국가는 작곡가 안익태(安益泰·1906~1965)가 1935년 11월 작곡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안익태 선생은 우리 민족의 혼이 담긴 이 가사가 외국 민요에 실려 불리는 것을 가슴 아파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안익태 선생이 애국가를 만들게 된 계기는 바로 가사였다고 한다. 그런데 애국가 악보를 살펴보면, 작곡가는 ‘안익태’지만, 작사자 자리는 ‘여백’으로 남아 있다. 작사가가 누구인지 아직도 여러 설이 대립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사의 작사자는 광복 70주년이 되도록 논란만 분분한 채 표류해 왔다. 지금으로부터 60년 전인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는 애국가 작사가가 누구인지 공식적으로 조사에 착수했다.
 
  당시에도 6명이 거론돼 꽤 논란이 많았던 듯하다. 당시 조사위원 중 한 명인 황의돈(黃義敦)은 윤치호의 자필 가사지(歌詞紙)에 침을 묻혀 문질러 보고 “이는 10년 내외에 쓰인 것으로, 1907년 작(作)이 아니다”라고 하는 바람에 신문들은 윤치호의 애국가 가사지를 위작(僞作)으로 보도하기도 했다. 작고 직전 가족에게 남긴 가사지 존재도 김연갑 이사가 발굴했다.
 
  그러나 이것을 제출할 때 미국 거주 가족들은 작품 뒷면에 1945년 10월 가족의 요청으로 윤치호가 쓴 것이라고 ‘단서’를 달았고, 윤치호의 사위인 정광현(鄭光鉉) 당시 서울법대 교수가 ‘애국가 작사자에 대한 의견서’에서 밝힘으로써 해결됐다. 그 결과 최종 한 명으로 압축됐다. 바로 좌옹 윤치호였다. 당시 국사편찬위원회는 윤치호를 작사자로 확정하는 문제를 표결에 부쳤고, 11대 2라는 압도적 결과가 나왔음에도 국사편찬위원회는 ‘미확정’으로 결론을 내렸다. 바로 이 결정이 기나긴 논란의 발단이 됐던 것이다.
 
  ―왜 국사편찬위원회가 미확정으로 결론을 내렸을까요.
 
  “1955년 미확정은 윤치호가 아니라는 뜻이 아니라 애국가 작사자가 윤치호라는 걸 확정하여 발표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작사자 규명이 정체된 상태로 논란만 거듭해 온 데는 ‘애국가 가사를 친일파가 썼다’는 정서적 불편함이 담겨 있다는 얘기였거든요. 당시 신문은 ‘이것은 당시 조사위원의 상황한계를 벗어난 지나친 불평이며, 또한 윤치호씨는 친일한 사람이므로 작사자가 돼서는 안 된다는 뜻이 고의적으로 작사자 판명에 무형의 압력을 가한 오류를 범한 일이라 하겠다’고 국사편찬위원회의 직무유기를 질타했습니다.”
    
  충청도 사투리로 作詞
 
도산 안창호.
  그 이후 안창호설, 공동작사설 등이 제기됐지만 현재 전문가들은 윤치호설을 거의 확정적으로 보고 있다. 객관적인 자료가 이를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연갑 이사는 “윤치호 선생은 1907년 애국가 가사와 후렴이 같아 원형으로 보는 ‘애국적 찬미가(무궁화가)’를 1897년 8월 13일 조선 개국 505주년 기념식 때 기념가로 작사했다(서재필의 ‘편집자 노트’)”고 했다.
 
  “특히 이날 독립협회 주최 행사에서 배재학당 학생들이 ‘무궁화 노래(National Flower)’를 불렀다고 하는 내용이 2013년 발간된 아펜젤러의 전기(《아펜젤러와 한국: The Appenzellers: Who They Preached》)에 등장합니다. 《독립신문》 사장 서재필(徐載弼)은 그의 취재노트(Editorial Note)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1897년 8월 13일 독립협회 주최 조선 개국 505회 기원절 행사는 오후 3시 배재학당 학생들의 찬양(Praise)으로 시작돼 독립협회 안경수(安駉壽)가 인사말을 하고, 외국인 참석자들이 소개되었다. 와병 중인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을 대신하여 한성판윤 이채연(李采淵)이 국가주의를 주창하는 연설을 했다.
 
 배재 청년들이 ‘무궁화 노래’를 불렀다. 이 노래 가사는 한국의 계관시인(Poet Laureate) 윤치호가 이날 행사를 위해 작사한 것이다. 학생들은 이 시를 스크랜턴(Scranton) 여사(이화학당 설립자)가 오르간으로 반주한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 곡조에 맞춰 불렀다.’”
 
  윤치호설을 뒷받침하는 결정적 증거는 1908년 재판을 발행한 노래집 《찬미가(讚美歌)》다. 윤치호가 펴낸 이 책에는 앞의 ‘무궁화 노래’와 ‘애국가’의 가사가 수록돼 있다. 김 이사의 말이다.
 
  “《찬미가》 14장(일명 무궁화가)에는 현재 우리가 부르는 애국가와 같은 후렴이 등장합니다. ‘승자신손 천만년은 우리 황실이오 산고수려 동반도난 우리 본국일세/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시작하는데, 충남 아산 사람이었던 윤치호는 성자신손(聖者神孫)을 ‘승자신손’이라고 충청도 사투리로 기록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윤치호는 성경을 ‘승경’이라고 했다고 해요. 윤치호가 애국가를 지었다는 증거지요.”
 
1955년 7월 30일 국사편찬위원회의 작사자 조사 최종 3차 회의가 끝난 후 윤치호가 유력하다로 결론났다고 보도하는 언론 기사.
  윤치호가 1908년 펴낸 노래집 《찬미가》 제14장(현재의 애국가)에는 애국가 가사가 온전하게 수록돼 있다. 가사는 이렇다.
 
  〈1절 동해물과 백두산이 말으고 달토록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 대한만세/2절 남산우헤 저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이슬 불변함은 우리 긔상일세/3절 가을하날 공활한대 구름업시 높고 밝은 달은 우리가슴 일편단심일세/이 긔상과 이 마음으로 님군을 섬기며 괴로오나 질거우나 나라사랑 하세/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미국 에모리대학교에는 윤치호가 1945년 10월 딸 윤문희(尹文姬)에게 직접 써주었다는 애국가 가사지가 소장돼 있다. 여기엔 ‘1907년 윤치호 작’이라고 쓰여 있다. 윤치호의 유족은 고인이 석사 학위를 받은 에모리대학에 이 가사지를 보존처리 후 위탁·보관시켰다. 김 이사는 “윤치호는 1907년에도 ‘아래아(·) 사용의 불편함 때문에 큰아(ㅏ)를 쓰고 아래아자를 사용하지 말자’고 할 정도로 국문에도 선각자적 면모를 보였다”고 했다. 김 이사는 “윤치호가 임종하기 직전인 1945년 10월, 개성에서 딸이 《찬미가》의 일부 가사를 새로 고쳐 써달라고 했고, 그것이 지금 우리가 부르는 애국가”라고 했다.
 
  최서면(崔書勉) 국제한국연구원장은 1911년 동경 유학생들이 모여 “지금까지 우리가 불렀던 애국가를 폐하고 윤치호가 새롭게 작사한 애국가를 부르자”고 결의한 내용을 조선총독부가 조사한 기록이 5건이 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치호가 작사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그의 친일 행적과 깊은 관련이 있다. 1890년 한국 최초의 미국 유학생으로 선발될 만큼 뛰어난 인물이었던 윤치호는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 체결에 반대해 고종에게 상소하며 관직을 떠났고, 이후 애국계몽운동에 투신했다. 1911년 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사건(105인 사건)에 연루돼 3년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러나 뒤로는 독립운동가들을 후원했으나, 일본 귀족원 의원 자리에 오르는 바람에 친일파로 몰리고 말았다.
    
  具益均 증언 계기로 ‘안창호 작사설’ 본격 주장
 
윤치호가 작고 직전인 1945년 10월 그의 딸 윤문희의 청에 의해 고쳐 써준 애국가.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 황의돈 조사위원은 ‘1907년 윤치호 작’을 보고 “먹이 10년밖에 되지 않았다”며 위작이라고 했으나, 가족들이 1945년 10월에 쓴 것이라고 해명함으로써 의문이 풀렸다.
  도산의 유족과 지인들은 생전의 도산 안창호(安昌浩·1878~1938)가 애국가 가사를 지었다는 증언만을 들어 《흥사단 100년사》와 언론 등에서 작사를 주장하고 있다. 1907년 3월 20일자 《대한매일신보》에는 “미국에서 돌아온 안창호가 만리현 의무균명학교(義務均明學校) 학생들에게 조회 때마다 국기를 내걸고 애국가를 부르자”라고 했다는 기사가 게재되기도 할 만큼 안창호가 국기와 애국가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은 사실이다. 김 이사는 “‘안창호 작사설’은 1945년 이전 단 한 건의 문헌 기록도 없이, 그것도 간접 증언과 정황으로만 주장할 뿐”이라고 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주도해 만든 흥사단은 《월간조선》(2008년 6월호)의 구익균(具益均·1908~2013) 선생 인터뷰를 근거로 작사자규명위원회를 본격 가동해 안창호 작사설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구익균은 1928년 신의주 고등보통학교를 나왔고, 1929년 3월 신의주학생의거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았다.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중국 상하이로 피신해 그곳에서 한국독립당원으로 활동했다. 당시 인터뷰 내용이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애국가를 작사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내가 직접 여쭤보니 빙긋이 웃으시며 아무 대답을 안 하셨어요. 민영환, 김병연, 김인식, 윤치호 등 애국가 작사자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내가 여쭤볼 당시 느낌으로는 도산이 작사했다는 게 거의 확실해요. 도산은 거국가를 짓는 등 노랫말 짓기를 좋아했어요.”〉
 
  김연갑 이사는 “1947년 춘원 이광수가 도산 안창호 전기에서 ‘웃고 답하지 않았다(笑而不答), 그리고 부인하지도 않았다’라고 한 것에 이어, 구익균 선생이 ‘내가 직접 여쭤보니 빙긋이 웃으시며…’라는 새로운 말이 추가됐다”며 “구익균 선생은 1994년 발간한 자신의 회고록 《새 역사의 여명에 서서》에서 애국가에 대한 언급을 일절 하지 않은 것을 보면, 전형적인 학습에 의한 발언일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구익균 선생은 《기러기》 1980년 6월호 ‘도산 선생의 대공주의 사상’, 8월호 ‘상해에서 해방을 맞으며’, 11월호 ‘상해에서의 도산’ 등의 글에서도 애국가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고 한다.
 
윤치호가 1908년 발행한 노래집 《찬미가》. 윤치호의 애국가가 실려 있는 문헌이다.
  김 이사는 “광복 후 친일문제로 고민하던 이광수는 《백범일지》 집필을 시작했고, 이어 흥사단의 요청으로 《도산 안창호》라는 책도 1947년 펴낸다”면서 “그러나 안창호 평전에 등장하는 애국가 작사자 물음에 ‘웃고 답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광수와 안창호의 관계로 미뤄볼 때 구체적이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서지학적으로도 이광수 저작 원전에 누군가 가필(加筆)한 것이다”고 했다.
 
  더군다나 안창호는 1908년 대성학교를 설립하면서 개성의 미션스쿨인 한영서원(韓英書院) 설립으로 당시 명망이 높았던 윤치호를 교장으로 영입한 일이 있어, 당시 1908년 《찬미가》 재판이 나와서 불리고 있던 상황에서 애국가 작사자를 몰랐을리가 없다는 것이다.
 
  김 이사는 “임정 시절, 백범에게 작사자가 윤치호임을 듣고 젊은 독립운동가들이 애국가 작사자를 물으면, ‘우리가 3·1운동을 독립선언서, 태극기, 애국가로 했는데, 그런 것을 왜 묻느냐’고 반문하셨다”며 “그만큼 우리 민족의 지도자들은 한때 독립운동에 앞장섰으나 친일로 간 윤치호를 애석해하며 애국가에 대한 작사자를 차마 이야기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흥사단은 일간지에 ‘안창호 비서실장의 애국가 증언’을 퍼뜨리더니, 급기야 2012년 8월 ‘애국가 작사자 규명발표회’를 열어 오동춘(吳東春) 애국가작사자규명위원장을 내세워 애국가 가사를 쓴 사람이 안창호 선생이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그 근거로 독립운동가들을 비롯해 여러 인물의 증언을 담은 구술과 신문기사, 잡지, 단행본 기록 등을 내세웠다. 결국 흥사단은 2013년 발간한 《흥사단 100년사》(731쪽)에 안창호 선생이 애국가를 작사했다고 기록했다.
    
  다윗과 골리앗의 토론회
 
《찬미가》에는 총 15편의 노래가 실렸고, 이 중 1장, 10장, 14장을 윤치호가 작사했다. 특히 10장(무궁화가)은 후렴이 오늘날과 같고, 14장은 오늘날의 애국가와 동일하다. 10장 무궁화가의 시작 부분에서 ‘승자신손’은 충남 아산 사람인 윤치호가 ‘성자신손’을 충청도 사투리로 표기한 것이며, 1897년 8월 13일 서재필은 〈편집자 노트〉에 ‘계관시인 윤치호 작시(作詩)’라고 기록했다.
  지난 3월 31일 흥사단은 광복 70주년을 맞아 여의도 국회도서관에서 ‘애국가 작사자 연구발표회’를 열었다. 이 토론회에서는 순흥 안씨인 안용환 명지대 연구교수를 비롯해 김연갑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 김준혁 한신대 교수, 윤정경 애국가 연구가가 주제발표를 했다.
 
  그러나 팽팽한 토론이 예상됐던 발표회는 예상과는 달리 윤치호 작사설의 한판승으로 끝나고 말았다. 전문가들은 지금까지의 연구결과를 놓고 볼 때 구체적 사료와 물증이 뒷받침된 윤치호 작사설이 유력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윤치호가 직접 쓴 가사는 물론, 윤치호가 애국가의 작사자라는 기록들을 꽤 많이 확보했기 때문이다.
 
  김연갑 이사는 “순흥 안씨인 새정치연합 안민석 의원 등은 안창호 선생이 애국가를 작사했다는 결정적이고도 새로운 기록이 없으므로 간담회를 통해 ‘안창호-윤치호 합작설’로 몰아가려 했다”면서 “그러나 구체적 물증부터 유족들의 증언까지 윤치호 작사라는 역사적 사실을 명확하게 가리키고 있다”고 했다.
 
  ―흥사단 측은 행사에서 어떤 근거를 댔습니까.
 
  “도산 안창호의 외손자인 필립 안 커디(Philip Ahn Cuudy)가 어머니(안수산)의 책에 도산이 애국가 가사를 썼다는 내용이 나온다고 말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도산의 부인 이혜련(李惠鍊)도 남편이 애국가를 지었다고 이야기를 한 적이 없거든요. 아무튼 안수산 저서의 참고문헌에 이광수의 도산 전기가 들어 있는 것을 보면, 딸조차 애국가 인식이 몇 년밖에 안 됐다는 의미지요. 또 구익균 선생에게서 도산이 애국가를 썼다고 들었다고도 했고요. 미국에서 돌아온 안창호가 만리현 의무균명학교 학생들에게 조회 때마다 애국가를 부르자(《대한매일신보》 1907년 3월 20일자) 했다는 기사를 마치 안창호가 지은 애국가를 부르자고 했다는 식으로 왜곡해 주장했습니다.”
 
한국독립당원으로 활동하며 안창호와 교유한 고 구익균 선생.
  ―흥사단 측은 윤치호 작사설에 대해 어떤 논리로 반박했나요.
 
  “안민석 의원은 미 에모리대 소장 윤치호 친필의 ‘애국가 가사지’가 과연 윤치호의 친필인지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독립기념관 이명화(李明花) 학술연구팀장은 1910년 미국 발간 《신한민보》에 ‘윤티(치)호작’으로 명기한 애국가 가사 4절이 수록된 것을 ‘안창호가 보급을 위해 이름을 바꿔 발표했다’는 해괴한 논리를 폈고, 중앙대 노동은(魯棟銀) 명예교수는 무궁화 노래를 ‘배재학당이 불렀다’는 《독립신문》 기사를 ‘배재학당이 지어 불렀다’로 왜곡했을 뿐만 아니라, 1908년 6월 25일 발행한 윤치호 역술 《찬미가》에 대해 ‘역술(譯述)’은 영어로 ‘translation’으로, ‘번역해 기술한다’ ‘번역한다’는 뜻이므로 《찬미가》의 애국가는 윤치호가 번역·감수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렇다고 이들이 안창호 작사설을 주장한 것은 아닙니다.”
 
  ―그 자리에서 김 이사께서는 어떻게 답변했나요.
 
  “노동은 교수가 1903~1905년 기록된 애국가 필사자료가 있고 윤치호가 지은 현 애국가(찬미가 14장)와 동일한 후렴을 가진 무궁화가(찬미가 10장)는 ‘배재학당 작사’라고 황당한 주장을 하는 겁니다. 내가 1998년 쓴 《애국가 작사자 연구》에 그것에 대한 답변이 있다고 하자, 노 교수는 ‘그 책 버려라’고 했습니다. 참석자들은 저를 보고 깔깔 웃었어요. ‘생각해 보니 안창호가 작사했다고 들었다고 했다’(김경래 저 《안익태》)는 애국가 작곡자 안익태도 순흥 안씨이고, 애국가 작사설의 안창호 선생도, 공동작설을 내세운 안민석 의원도, 위작 자료 세 건을 1981년 공개한 서지학자 안춘근씨도, 최근 ‘안창호와 김일성 관계’를 끌어들인 의외의 안용환 교수도 모두 순흥 안씨여서 ‘순흥 안씨 종친연구회’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튿날 ‘뉴시스’에 ‘노동은의 조작’이라는 글을 실었는데, 흥사단 측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하는 내용이었죠.”
 
  ―노동은 교수의 ‘역술’은 ‘번역’으로 봐야 한다는 지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최근 문헌에 나오는 역술의 유권해석은 ‘대부분 번역, 일부 창작(7할 번역, 3할 저술)’이라고 합니다. 유길준(兪吉濬)도 《서유견문(西遊見聞)》을 쓰면서 판권에 ‘집술(輯述)’이란 말을 썼습니다. 책 뒷부분에 자신의 감상을 덧붙였거든요. 윤치호도 《찬미가》 15장 가운데 1장, 10장, 14장을 지었으니, 역술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봅니다.”
    
  “安春根의 ‘애국가 자료 3종’은 가짜”
 
1950년 미국 적십자사가 발간한 《세계의 국가》. 애국가 작사자가 윤치호임을 미국 거주 후손들이 증언한 내용을 담고 있다.
  지난해 7월 12일 방영된 SBS TV 〈그것이 알고 싶다(946회)〉는 ‘애국가 작사자는 누가-친일파냐, 애국자냐’며 진영논리로 몰고 갔다. 1903년 제작된 필사본 《기설(幾說)》에 수록된 ‘애국충성가’와 1904년 제작된 김수원(金壽垣)의 서예작품 ‘갑진(甲辰) 한시 애국가’가 현재의 애국가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이 자료는 1981년 서지학자 안춘근(安春根·1926~1993)에 의해 일간지를 통해 발표된 것으로, 기존 윤치호의 ‘1907년 작’을 전면 뒤집는 내용들이다. 안춘근은 1981년 4월 2일 《조선일보》에 1903년 《기설》의 ‘애국충성가’를, 1981년 8월 11일 《동아일보》에 1904년 ‘갑진 한문 애국가’를, 같은 날 《중앙일보》에 《기설》의 ‘애국충성가’와 ‘갑진 한문 애국가’, 간기(刊記·씌어진 연도)가 없는 독립운동가 송암 김완규(金完圭)의 ‘송암 김완규 애국가’ 등 ‘애국가 자료 3종’을 연속으로 발표했다.
 
  이어 안춘근은 1981년 12월 《월간조선》에 ‘국가 없는 한국’이란 글을 발표했고, 1986년 그의 저서 《한국고서평석(韓國古書評釋)》에서 이를 재수록해 의미를 부여했다. 안춘근은 “특정인을 작사자로 단정하는 것은 어렵다”는 주장으로, 결국 윤치호 《찬미가》 14장의 현 ‘애국가’는 자신이 공개한 두 자료를 윤색한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1907년 윤치호 작사설’은 기각되며, 애국가 작사가를 가리는 문제는 혼돈에 빠지고 말 것이다. 〈그것이 알고 싶다〉는 애국가가 특정인의 작사가 아닌, 1890년대 이후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며 집단 창작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을 냈다. 안민석 의원의 주장이 반영된 것이다.
 
1897년 8월 13일 독립협회 주최 행사에서 배재학당 학생들이 ‘무궁화 노래(National Flower)’를 불렀다고 기록한 《독립신문》 사장 서재필의 취재노트(Editorial Note). 2013년 발간된 아펜젤러의 전기에 등장한다.
  고서연구가인 박대헌(朴大憲·62) 완주책박물관 관장은 〈그것이 알고 싶다〉를 정면으로 반박했다. 박 관장은 최근 근대서지학회(회장 전경수)가 펴내는 반연간지 《근대서지》에 발표한 논문 “SBS TV ‘그것이 알고 싶다’ 〈애국가 작사 미스터리〉의 논쟁에 대한 고찰”에서 “안춘근의 ‘애국가 자료 3종’이 모두 후대에 위조된 것”이라고 선언했다.
 
  박 관장은 지난해 7월 28일 안춘근으로부터 자료를 입수한 소장자 윤형두(尹炯斗) 범우사 대표를 찾아 《기설》의 ‘애국충성가’를 직접 확인한 뒤, ‘애국충성가’의 글씨체, 먹의 농담(濃淡), 글씨의 격이 책에 실린 다른 가사와 확연히 다르다고 판단했다.
 
  《기설》 필사본은 4×6배판 120페이지의 한장본(漢裝本)으로 본문은 교화를 위한 고문(古文), 율시(律詩), 공성시(孔聖詩)가 적혀 있고, 책 뒷부분에 4페이지 분량으로 ‘운동가’ ‘애국충성가’ ‘시흥학교교가’ 등이 실려 있었다고 한다. 책 권말에 보이는 ‘계묘(癸卯)’는 1903년이므로 안춘근의 주장에 큰 문제가 없었으나, 이 책의 다른 세 곳에서 ‘명치 44년’, 즉 1911년 표기가 발견됐던 것이다.
 
  그렇다면 애국충성가가 1903년에 필사된 것이라는 단정은 근본부터 잘못된 것이다. 즉 뒤 4페이지 부분에서, ‘운동가’와 ‘시흥학교 교가’는 같은 필체였던 데 반해, ‘애국충성가’는 필체가 완전히 달랐다는 것이다. 박 관장은 ‘운동가’와 ‘시흥학교 교가’는 《기설》이 처음 완성된 1903년에 기록한 것이고, 명치 44년(1911년) 12월 25일 ‘토지매매 문서양식’은 1911년에 기록한 내용, ‘애국충성가’는 1981년 4월 2일 안춘근이 이를 신문에 공개하기 전에 누군가가 위작한 글이라고 보았다.
 
  ‘갑진 한문 애국가’ 역시 마찬가지다. 글씨의 크기, 구도, 함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그림과의 관계 등으로 추정해 볼 때 최근 위작의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박 관장은 안춘근이 발표한 다른 애국가 자료인 ‘송암 김완규 애국가’ 역시 ‘가짜 글씨’라고 판정했다.
    
  충분한 자료 검토 이뤄지지 않아
 
1908년 재판 찬미가 판권. ‘역술자’ 윤치호로 돼 있다. 광학서포는 윤치호가 인수해 한영서원 교재 등을 발행했다.
  ―위조 여부를 어떻게 판단합니까.
 
  “가짜 글씨는 모본(母本)을 모사(模寫)하거나 모본 없이 글씨를 쓰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로 모본을 유리판 사이에 놓고 유리판 밑에서 형광등 불빛을 비춰 그대로 복사하듯 모사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이 경우 진품에나 나타나는 비벽(鄙僻·필자의 글씨 습관)이나 갈필(渴筆·붓에 먹물을 많이 묻히지 않고 쓰는 것으로 達筆이나 速筆에 나타나는 현상)이 보일 수가 없습니다. 글씨 꼴을 흉내 내는 데 급급하다 보면 속도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으니까요. 둘째로 모본 없이 글씨를 쓰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워 보일 수 있는데, 난고문학관에 진열된 김병연(김삿갓)의 경우처럼 친필이 존재하지 않을 때 많이 쓰는 수법입니다. 가짜 글씨를 쓰기 위한 옛날 종이나 비단은 책 뒤편에 빈 여백도 이용할 수 있고, 병풍 뒷장의 배접지를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박대헌 관장은 “안춘근 선생이 입수한 애국가 자료 3종이 진짜라면 우리의 애국가 역사가 새로 씌어야 할 대사건”이라면서 “이러한 자료가 언론에 공개되기 전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것은 자료에 대한 진위 검증 문제”라고 했다. 그의 말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애국가 자료 3종’은 언론에 공개하기 전 자료의 진위 여부에 대해 충분한 검토를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안춘근 선생은 탁월한 서지학자이고, 발표 당사자는 확신을 갖고 있었겠지만, 서지학 입장에서는 누구의 작품인가, 누구의 친필인가, 언제 쓴 것인가, 내용은 무엇인가 등은 기본적으로 검토해야만 합니다.”
 
1908년 발행한 한영서원 한문 교재 《유학자취》. 내용 중에 ‘대한제국 대한민국’이 들어 있다. 윤치호의 애국계몽운동기 의식을 볼 수 있다.
  김연갑 이사는 “이러한 중차대한 문제를 제기하면서 안춘근은 원본 공개는 고사하고 제대로 된 사진 한 장 제시하지 않았다”고 했다. 김 이사는 박대헌 관장이 안춘근의 자료를 확인한 경위를 설명했다.
 
  “《기설》의 속표지에는 ‘1981. 3. 27. 南涯(남애) 然(연) 20’이라는 볼펜으로 쓴 기록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1981년 3월 27일 남애가 연에게 2만원을 주고 샀다’는 뜻입니다. 제게 최초로 5만원을 제시했으나, 당시 여유가 없어 구입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남애는 안춘근의 호이고, 연은 김연창(金然昌)의 가운데 이름자입니다. 김연창은 1980~1990년대 장안평과 청계천에서 내로라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실제로 김연창은 1978년 고서와 고서화 등을 대량으로 위조, 판매한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다. 《동아일보》(1978년 10월 5일자)를 보면, 그는 가짜 낙관 800여 개를 갖고, 《조야회통(朝野會通)》이라는 이름 없는 책을 구입해 추사(秋史) 이름을 넣고 대원군과 육당 최남선의 가짜 낙관을 찍어 추사가 쓰고 대원군과 육당이 소장하고 있던 책으로 속여 팔기도 했다.
 
  김 이사는 “1980년대 중반, 김연창은 《의금돈신록(義金敦信錄)》 구한말 필사본의 여백에 ‘대한국가(大韓國歌)’를 여러 페이지에 써넣은 위작을 만들어 내게 판 적도 있다”면서 “그때 박대헌 관장에게 진위를 물었더니 가짜라고 해서 연구에서 제외했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김 이사는 “(안춘근이 3종의 애국가 자료를 공개한) 1980~1990년대는 이중섭(李仲燮) 등 근대 유명 화가와 민화 등의 가짜 그림이 대량 유통되는 시기였다”며 “위조범들의 수법도 지능화돼 안춘근의 ‘애국가 3종’처럼 연구자의 전공과 성향을 파악하고 위작이 많이 만들어졌다”고 했다.
 
  김 이사는 “안창호 작사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모든 국민에게 존경을 받는 도산 선생이 애국가의 작사자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정서가 존재한다”고 했다. 그러한 바람이 SBS 〈그것이 알고 싶다〉의 제목, ‘친일파냐, 애국자냐’처럼 나왔다는 것이다.
    
  安昌浩의 애국가 전파도 평가해야
 
SBS 〈그것이 알고 싶다〉 프로그램에 출연해 윤치호 선생의 판권에 등장하는 ‘역술’의 의미를 설명하는 김연갑 이사.
  김연갑 이사는 “안창호가 애국가 작사자는 아니지만 기여한 부분도 있으니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김 이사는 “윤치호가 1908년 《찬미가》 10장과 14장을 작사했고, 이를 ‘애국가’로 부른 것은 배재학당을 비롯한 기독교계 학교와 3·1운동 현장의 민중이었다”며 “이를 국가의 대용(代用)으로 1910년 미주 지역 국민회의에서 ‘국민가’로 부르면서 의례음악으로 정착시켰다”고 했다. 특히 안창호는 1919년 임시정부 의정원 개원식에서 국가 대용으로 애국가를 부르게 하는 데 기여했다고 한다.
 
서지학자 안춘근이 김연창으로부터 입수한 3편의 애국가 자료를 활용하여 저술한 책. SBS는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이 책을 이용해 윤치호 작사설을 공격했다.
  이후 애국가는 1940년 백범 김구(金九)가 임정에서 미주국민회 요청에 의해 애국가 곡을 기존의 올드 랭 사인에서 안익태의 신곡보(新曲譜)를 사용하도록 했고, 광복군 성립식에서 공식으로 연주했다. 1948년 8월 애국가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식 때 국가로 준용됐고, 현재 국가 대우를 받는 애국가로 자리매김했다.
 
  이제는 정부가 나서서 애국가 작사자 논란의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김연갑 이사는 “아리랑이 민족의 노래라면 애국가는 역사의 노래”라면서 “윤치호여서 안 된다면 국민의 뜻을 모아 애국가를 새로 제정할 수도 있겠으나 그렇다고 애국가 작사자가 윤치호라는 역사적 팩트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김 이사는 “‘윤치호 작사’ 사실을 들어 불편함을 느끼는 이들이 있다”며 “그러나 춘원 이광수(李光洙)의 ‘2·8 독립선언’, 육당 최남선(崔南善)의 ‘3·1 독립선언서’도 그들이 친일을 했다고 버릴 수 없듯, 윤치호 선생의 친일과 오늘날의 애국가 위상(位相)과는 관계가 없다”고 했다.
 
  그는 “미국 에모리대학에 소장된 윤치호 일기의 경우, 전면적인 번역과 조사를 해야 할 것”이라며 “국가를 대표하는 노래인 애국가 작사자의 규명은 재야학자들의 손에서 정부로 넘어갔다”고 했다.
등록일 : 2015-09-15 09:50   |  수정일 : 2015-09-16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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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용길  ( 2015-09-15 )  답글보이기 찬성 : 24 반대 : 1
좌파들은 뭐라고 할까? 친일파가 작사 했으니 새로 작사해야 한다고 할 건가?
신성기  ( 2015-09-15 )  답글보이기 찬성 : 31 반대 : 6
윤치호는 자신의 위해 친일한 자에 불과한가. 그의 일대기를 다룬 협력일기란 책이 있다. 그는 평생 영어로 자신만의 일기를 썼다. 조선의 고종과 민비는 오로지 자신이 가족만을 위해 관직을 팔고, 국가수입의 반을 민비의 미신에 쓸어붓는 그런 나라. 국민은 미개하여 온 거리가 오물로 뒤덮히고 서로간에 잡아먹을 듯 싸우는 나라. 다시말해 자력으로 근대화가 절대 불가한 조국. 그 방책으로 굴욕스럽지만, 일본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일정한 힘이 생길때까지 와신상담하자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그 시대적 절망 속에서 고뇌하는 그의 고독을 생각해 보았나. 그런데, 오늘 날의 사람은 그저 그가 김구와 같이 무력투쟁을 하지 않고 일본에 빌붙은 파렴치한 으로 몬다. 매파만이 옳고 비둘기파는 비겁자라 몰아세운다. 과연 이런 인식이 타당한가. 더욱 걱정스런 것은 많은 좌익들이 한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대한민국과 관련된 모든 것을 친일으로 치부하여 대한민국을 부끄러운 나라, 태어나지 말아야 할 나라로 묘사한다는 것이다. 미개하고 천박한 나라의 백성이 세계7대 무역국으로 급성장하는데 있어 수많은 착오와 오판, 부끄러운 일도 있었다. 그러나 멋진 작업이외에도 굴욕과 부끄러운 면도 전부 우리의 과거다. 이제는 과거에 돌을 던질 것이 아니라 과거와 화해를 하여야 한다. 윤치호는 친일은 하였지만 매국노가 아니다. 그는 조국을 근대화하고 국태민안을 위해 노력한 우국지사였다. 오히려 그를 매국노로 몰아붙이는 자들이야 말로, 모든 것이 다 갖추어진 따뜻한 아랫목에서 그 때 그것밖에 못하였느냐고 손가락질 하는 비겁한 자들이다. 윤치호를 알고 그를 이해하고 그의 선택을 존중하며 화해하면 우리는 진정한 선진국이 된다. 윤치호는 우국지사였다.
강대진  ( 2015-09-15 )  답글보이기 찬성 : 20 반대 : 3
나라가 자신들의 이념을 위해서 왜곡하는 것은 착한 왜곡이라고 생각하는 허접한 수준들에 위해서 질이 떨어지고 있다. 그래서 자기들 입맛에 맞게 역사를 왜곡하는 짓도 서슴치 않으니 애국가인들 오죽하겠냐. 애국가 얘기가 나왔기에 덧 붙여서 말하자면, 애국가에서 언제부터 하나님이 하느님으로 바꼈느냐이다.
분명히 원작에도 하나님이고, 정부 수립때도 하나님이었고, 70년대에도 하나님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어느새 시나브로 하느님으로 바꼈다. 기독교의 신이라서 국교가 기독교가 아니니 하느님이 맡다는 주장이 있다. 그런데 착각하는 것이 있다. 하나님은 기독교가 들어와서 만든 용어가 아니라는 거다. 원래부터 하나님이라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불렀기에, 기독교가 들어와서 하나님을 차용한 것이다. 기독교는 다른 나라에 선교할때 그 지역에서 통용되는 신의 명칭중에서 으뜸되는 명칭을 사용한다. 중국 성경은 상제라고 하고, 영어 성경은 대문자로 GOD 이라고 한다. 기독교는 유일신의 이름인 야훼 또는 여호와를 잘 부르지 않는다.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아버지 성명을 부르기보다는 아버지, 아빠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것이다.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원래 쓰였던 하나님을 차용한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은 하나라는 유일신의 개념이니 기독교가 들어
와서 만든 용어라고 오해내지 왜곡을 한다. 그리고 원래는 하느님이 원래 사용
하던 용어라고 한다. 그러나 그건 맞지 않는 말이다. 물론 하늘님에서 유래되서
하느님이 되었다고 할 수도 있지만, 음이란 것은 발음하기 편한쪽으로 변하기
마련이다. 그것은 우리가 평소에 갑작스런 일을 당했을 때,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 맙소사 라고 그러지, 하느님 맙소사 라고 그러지 않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따라서 최소한 과거에 하나님과 하느님이 통용되었거나, 하나님이 대체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이란 용어는 하나의 신이란 기독교의 유일 신을 부르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란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애국가를 부를때도 발음하기 부자연스런 하느님을 고집하는 것은 무지의 탓이거나 왜곡된 탓으로 봐야 할 것이다.
원천식  ( 2015-09-16 )  답글보이기 찬성 : 10 반대 : 4
나는 윤치호가 젊은 시절 애국심을 갖고 애국가를 만들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나중에 친일파가 된 것은 조국이라는 대한제국의 부패가 너무 심하고, 외세에 의존해 고종이 아라사 공사관으로 도망가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허덕이는 모습을 보고, 차라리 이럴 바에는 조선은 러시아 보다는 영국의 식민지가 되는 것이 조선 사람들에게 더 좋은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는 것이다. 어느 누가 자기의 조국이 외국의 식민지가 되는 것을 바랄 것인가? 윤치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무력한 조국의 현실을 바라보며,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있었을까? 김구처럼 왜 윤치호는 독립운동을 못했냐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의 상황은 무기도 형편없는 병사가 1만명도 안되고, 제대로 된 대포 1문도 없고, 경제는 파탄이고, 백성들은 세금낼 돈도 없고, 호열자나 굶어죽는 현실을 보면서, 이럴 바에는 차라리 영국 식민지되는 것이 더 좋다고 윤치호는 생각한듯 하다.일본의 식민지나 러시아의 식민지가 될 바에는-- 동학혁명 당시 동학군을 죽인건 고종의 명령을 받은 병사와 일본군이 다 죽였다. 그런 상황에서 당시 사람들 중 조선에 대한 애국심이 있는 사람이 몇명이나 있었을까? 민영환같이 당시 고종도 국권이 피탈되었을 때 과감히 자결했다면 이에 흥분한 조선 사람 수십만이 일어나 격렬하게 일제에 저항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나는 조선의 임금 중 제일 한심한 군주로 선조와 인조, 고종이라고 생각한다. 병자호란, 임진왜란, 국가 멸망을 겪은 왕들. 하나같이 공통점은 엄청나게 오랜 세월 왕으로 있었고, 파천도 다 몇 차례한 임금들이다. 선조는 1번, 인조는 3번(이괄의 난, 정묘호란,병자호란 ), 고종은 1번(아관파천). 고종이 왕위에 40년 이상 있으면서 한 일이 무엇인가? 아라사 공사관 파천, 민씨세력 탐관오리 방치, 한일합방-- 등등. 그러면서 나라가 망한 뒤에도 자결하지 않고, 일제 치하에서 10년 동안 이태왕전하로 수많은 궁녀들을 거느리고 잘먹고, 잘 살았다. 일제의 독살설도 있으나 나는 그다지 믿지 않는다. 오히려 일제 입장에서는 고종이 이태왕으로서 대궐에서 천수를 누리는게 더 낮지, 죽여야 할 이유도 별로 없지 않은가? 죽일려면 한일합방 당시 죽이지, 왜 10년가까이 흐른 뒤 죽일 필요가 뭐 있었을까 의문이 든다. 이런 측면에서 고종은 40여년 동안 우왕좌왕만 했다. 그 귀중한 시간을 다 허비해 버렸다. 일국의 국왕으로서 창피하지않은가? 사실 우리 역사의 남북분단의 단초와 김일성 등장, 종군위안부 문제, 백성들의 수탈, 항일투사의 죽음도 누구 탓인가? 그런 인간을 요새는 무슨 대단한 애국자처럼 추켜 세워주고 있다.한편에서는 고종을 훌륭한 개명군주라고 띄우고 있다. 참으로 한심한 현상이다. 40여년 동안 왕위에 있었으면서 나라를 망하게 했으면 그만한 댓가를 치뤄야 하는 것 아닌가?그전 철종 때나 순조, 헌종 때도 망조가 들긴 했지만, 그때는 그 정도로 나라가 병들진 않았었다.민씨세력의 탐욕이 임오군란을 가져왔고, 그뒤 민씨의 친청세력이 귀중한 개화의 시간을 다 허비해 버리지 않았던가? 고종이 헤이그밀사를 파견하고, 을사늑약에 저항한 것도 순수한 애국심의 발로라기 보다는 자신들의 양반관료체제와 이씨 왕조를 유지하고 싶어서가 아니었을까? 만약 그당시 김옥균, 윤치호와 같은 조선의 선각자들이 조선을 영국처럼 입헌군주국으로 국체를 변경하려 했거나,미국처럼 자유, 평등의 새로운 세상인 대통령제로 바꾸려 했다면 아마 고종은 이에 극력 저항했을 것이고, 이들을 모두 만고역적으로 몰아 그 조상들까지도 부관참시했을 것이다.왕조 유지와 왕권강화에 목숨걸었던 민비나 고종은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우리 역사의 애국자가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될 것이다.
황인철  ( 2015-09-16 )  답글보이기 찬성 : 16 반대 : 8
애국가 작시자 하나 제대로 세우지 못하고 어떻게 이 나라의 정신이 바로 설 수 있을까? 학자적인 양심이 없는 사람이나 진리보다는 자기의 입장을 세우려는 사람들이 설치는 것이 문제로다. 설혹 도둑놈이 애국가 작사자라도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양심없는 인간들의 편협한 사고가 문제로다.
      답글보이기  박동한  ( 2015-09-19 )  찬성 : 6 반대 : 2
역사를 정확하게 보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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