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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은 요한 바오로 2세가 될 수 있을까

글 | 이장훈 국제문제애널리스트

▲ 프란치스코 교황(왼쪽)과 요한 바오로 2세.
폴란드 공산정권을 붕괴시킨 자유노조운동의 발상지인 그단스크에는 로널드 레이건 공원이 있다. 이곳에는 요한 바오로 2세 전 교황과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폴란드 국민들은 1989년 공산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기여한 두 지도자를 기리며 동상을 건립하고 지금까지 추모하고 있다. 실제로 레이건 전 대통령은 재임시절 폴란드의 자유노조운동을 적극 지원했다. 레이건 전 대통령은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 폴란드 공산당 서기장이 자유노조운동을 탄압하자 “자유세계 사람들은 폴란드의 형제자매 편에 서 있다”면서 “그들의 대의명분은 우리와 같다”고 강력한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폴란드 출신 교황인 요한 바오로 2세도 자유노조운동을 그 누구보다 앞장서 후원했다.
   
   1920년 폴란드 바도비체에서 태어난 요한 바오로 2세는 크라쿠프 신학교를 거쳐 26세 때인 1946년 사제서품을 받았고 1958년 38세로 주교가 됐고, 1963년 크라쿠프 대교구장, 1967년 추기경에 서품됐다. 1978년 10월 16일 하드리아누스 6세 교황 이후 456년 만에 비(非)이탈리아인이자 최초의 슬라브인 교황이 됐다. 최초의 공산권 출신 교황이었던 요한 바오로 2세는 즉위한 지 불과 8개월도 채 되지 않은 1979년 6월 2일 공산체제로 고통을 받고 있었던 고국 폴란드를 전격적으로 방문, 자유를 갈망하던 폴란드 국민들의 가슴에 불길을 지폈다. 요한 바오로 2세가 9일간 바르샤바, 크라쿠프 등을 돌며 미사를 집전하고 연설하는 모습을 직접 보기 위해 폴란드 전체 인구 3500만명 중 3분의 1인 1000만여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요한 바오로 2세는 구름처럼 모인 모국의 동포들에게 연설에서 “인간의 존엄을 위해 투쟁을 두려워하지 말라”면서 “성령이 이 땅을 치유하고 새롭게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민주화 불씨가 된 바오로 2세
   
   요한 바오로 2세의 연설은 폴란드 민주화운동의 불씨가 됐다. 요한 바오로 2세의 역사적인 폴란드 방문이 있은 지 14개월 후인 1980년 8월 14일 그단스크 조선소의 노동자들이 중심이 된 자유노조인 ‘연대’(솔리다르노시치)가 파업을 선언했다. 파업 현장에는 노조 지도자인 레흐 바웬사의 얼굴사진이 들어간 포스터와 함께 요한 바오로 2세의 초상화와 교황청의 깃발들이 내걸렸다. 이후 자유노조는 조직적인 반체제 저항운동을 벌임으로써 폴란드 민주화운동의 구심점이 됐다. 야루젤스키 서기장은 1981년 12월 자유노조를 탄압하기 위해 계엄령을 내렸다. 그러자 요한 바오로 2세는 폴란드 자유노조 등 민주화운동 세력을 적극 지원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1983년 폴란드를 두 번째 방문해 당시 바웬사를 비밀리에 만나 격려했고 야루젤스키 서기장과 협상을 벌여 폴란드의 계엄령을 해제시켰다. 폴란드 공산정권은 1989년 4월 5일까지 자유노조와 협상 끝에 민주적인 의회를 구성할 것을 약속했다. 이에 따라 같은 해 6월 4일 첫 민주주의 선거에서 자유노조가 압승을 거둬 세계 최초로 공산정권이 붕괴됐다. 이후 폴란드의 자유노조운동과 민주화 물결은 동구권 전체를 휩쓸었다. 바웬사는 1990년 치러진 첫 대선에서 승리하면서 ‘민주 폴란드’의 첫 대통령이 됐다. 바웬사는 “폴란드에서 공산정권이 붕괴되고 민주주의 체제가 들어서게 된 공로의 비중을 보면 요한 바오로 2세가 50%를 차지하고, 자유노조가 30%, 나머지는 다른 모든 사람들의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폴란드에서 가톨릭교회는 나치 독일과 소련의 전체주의에 저항하는 힘의 거점이었다. 폴란드가 18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지도상에서 사라져버린 망국의 140여년 동안에도 가톨릭교회는 폴란드 민족을 하나의 공동체로 유지하는 역할을 해왔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은 레지스탕스에 참여한 폴란드 성직자의 4분의 1을 살해했다. 이들 중엔 아우슈비츠수용소에서 사형에 처해질 젊은이를 대신해 자기 목숨을 내놓은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도 있었다. 콜베 신부는 1982년 성인(聖人)으로 추증됐다.
   
   
▲ 폴란드 그단스크에 있는 레이건 공원의 요한 바오로 2세 전 교황과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 동상. photo 위키피디아

   바오로 2세와 레이건의 의기투합
   
   2차 대전 이후 소련과 폴란드의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폴란드 저항운동의 중심에는 스테판 비신스키 추기경이 있었다. 비신스키 추기경은 재판도 받지 않고 3년 동안 감금되기도 했다. 요한 바오로 2세의 멘토는 바로 비신스키 추기경이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폴란드는 물론 동구권의 공산정권 붕괴와 민주주의 체제 수립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소련의 침략과 지배에 신음하며 조국이 공산화되는 과정을 지켜봐야 했던 요한 바오로 2세가 조국을 공산주의 체제에서 해방시켜야겠다는 신념과 의지를 가진 건 어쩌면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인류 역사에서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은 인류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행위”라면서 “공산주의가 인류의 역사에서 영원히 빗장을 잠글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도 “동유럽에서 일어난 일들은 요한 바오로 2세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면서 요한 바오로 2세를 회고하기도 했다.
   
   레이건 전 대통령은 요한 바오로 2세의 폴란드 방문 장면을 TV로 지켜보면서 무릎을 쳤다고 한다. 소련의 공산주의 체제를 무너뜨리려고 했던 레이건 전 대통령은 요한 바오로 2세와 가장 중요한 동맹을 맺어야 한다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전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요한 바오로 2세는 소련과 공산주의 체제에 수백 개 사단 이상의 위협적인 존재”라고 평가했듯이 레이건 전 대통령은 요한 바오로 2세의 ‘보이지 않는 힘’을 간파한 것이다. 두 지도자는 1982년 6월 7일 바티칸 도서관에서 만나 공산주의 체제 붕괴를 위해 협력할 것을 다짐했다. 이후 두 지도자는 열다섯 번이나 비밀회동을 했다. 냉전이 한창이던 당시 두 지도자의 ‘의기투합’은 10년도 채 안 돼 소련과 동구권의 붕괴라는 세계사적인 드라마를 이끌어냈다. 뉴스위크는 두 지도자의 당시 만남이 소련과 동구권을 붕괴시키는 ‘회오리바람’(다니엘서 11장 40절)을 불러일으켰다고 평가했다.
   
   국제사회가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북 여부에 주목하고 있다. 특히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북할 경우 요한 바오로 2세가 폴란드의 공산정권 붕괴에 기여했듯이 김일성-김정일-김정은의 3대 세습 독재체제를 무너뜨리는 데 일조할 수 있을지 여부에 국제사회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10월 18일 바티칸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이 제3차 남북정상회담 때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구두(口頭)로 밝혔다는 평양 초청 의사를 전달하자 프란치스코 교황은 “초청장이 오면 응답을 줄 것이고 나는 갈 수 있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 피에트로 파롤린 바티칸 국무장관(추기경)은 “프란치스코 교황은 방북 의향을 표명했다”면서 “초청장이 우선 와야 하고 (방북) 가능성을 진지하게 고려하는 시점에 이르면 (방북) 성사를 위한 조건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 북한 평양에 있는 장충성당의 모습. photo 위키피디아

   교황 방북 취소의 역사
   
   파롤린 국무장관의 발언처럼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북 의사 표명에도 불구, 북한 방문이 성사되려면 상당한 변수가 있다. 통상 교황의 해외 방문은 전 세계 가톨릭의 수장으로서 신자들을 찾는 ‘사목 방문(pastoral visit)’이다. 때문에 교황의 해외 방문은 개별 국가 정상의 초청과 아울러 그 나라 가톨릭 대표 단체인 주교회의 차원의 초청이라는 두 가지 조건이 선결되고, 교황이 이를 수락해야 이뤄진다. 초청도 공식 초청장을 보내야 효력이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북한과 바티칸은 수교를 맺지 않고 있다. 게다가 북한에는 주교회의도 없다. 바티칸이 초청을 수락할 만한 조건에 부합하지 않는 셈이다.
   
   무엇보다 김정은이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공식 초청장을 보내야 한다. 공식 초청장을 조건으로 내세운 것은 로마 교황청이 지켜온 최소한의 형식적 절차를 따라야 한다는 의미다. 문제는 김정은이 프란치스코 방북에 따른 종교의 자유와 인권 탄압 중지 등에 대한 요구를 수용할 수 있느냐이다. 김정은은 제3차 남북 정상회담에서 문 대통령에게 “교황님이 평양을 방문하시면 열렬히 환영하겠다”며 적극적인 환대의사를 밝혔다. 이런 발언에도 불구하고 김정은이 자칫하면 교황 방북으로 북한에서 종교에 대한 통제가 어려워질 위험을 감수하며 초청에 나설지는 미지수다.
   
   북한 정권은 1991년과 2000년 교황 방북을 추진하다 취소한 적이 있다.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공사의 저서 ‘3층 서기실의 암호’에 따르면, 김일성은 1991년 외교적 고립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교황 평양 초청 태스크포스’까지 구성해 교황 방북을 추진했으나, 가톨릭 열풍이 불 것을 우려한 김정일의 반대로 무산됐다. 당시 교황청은 북한 정권에 진짜 신자가 있다면 바티칸으로 데려오라고 했고 북한 정권은 수소문 끝에 가톨릭 신자 할머니를 찾았다. 하지만 이 신자가 바티칸을 방문해 “한번 마음속에 들어오신 하느님은 절대로 떠나지 않는다”는 믿음을 보이자 북한 정권은 교황의 방북으로 가톨릭 열풍이 북한에 불 것을 두려워해 이를 모두 취소했다고 태 전 공사는 주장했다. 이어 2000년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 제안으로 김정일이 당시 교황을 초청했지만,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다. 배양일 전 바티칸 한국대사는 당시 상황에 대해 “교황청은 방북을 위해 최소한의 성직자가 북한에 파견돼 신자들의 실태를 파악하고 방북 준비 등 북한 정권과 협조를 선행해야 한다고 강조했지만, 북한 당국은 성직자의 상주를 시기상조로 판단해 부정적 반응을 보였다”고 밝혔다. 배 전 대사는 “북한 정권의 이런 입장은 기독교와 서구 문화에 대한 개방으로 초래될 혼란에 두려움을 갖는 데서 기인하는 것으로 본다”고 지적했다.
   
   북한에는 관제 단체인 ‘조선가톨릭협회’와 1988년 평양에 세워진 ‘장충성당’이 있을 뿐 사제는 한 명도 없다. 공식적인 신자 수도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고 있다. 주일이면 70〜80명, 축일 때는 200여명의 신자(?)가 장충성당에 간다. 주일에는 미사 대신 평신도끼리 집전할 수 있는 공소 예절만 진행된다. 평신도인 공소 회장이 공소 예절을 이끌고 교리를 가르친다. 공소 회장은 사제가 아니므로 북한 신자들은 평소에 고해성사를 볼 수 없다. 정상적인 미사도 한국이나 외국에서 신부가 방문할 때만 봉헌할 수 있다. 특히 장충성당은 평소에는 출입금지 지역이다. 북한은 한국 천주교주교회의 관할 지역이다. 분단 전 3개 교구, 57개 성당이 있었다. 현재 평양교구는 서울대교구장, 함흥교구는 춘천교구장, 덕원교구는 왜관 베네딕도수도회 아빠스가 교구장 서리를 맡고 있다. 북한의 이런 특수한 상황을 고려해 교황청이 해외 방문 기준을 적용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반면 교황청이 북한 정권에 대해 종교 자유의 보장과 북한 내 기독교도 처지 개선 등을 교황의 방북 조건으로 강력하게 요구할 수도 있다.
   
   
▲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폴란드 바르샤바 승리의 광장에서 미사를 집전하고 있다. photo 유튜브

   교황 방북의 변수는 북의 비핵화
   
   프란치스코 교황 방북의 최대 변수는 북한의 비핵화 여부이다. 북한이 비핵화를 위한 핵 리스트를 제출하지 않고 검증도 거부한다면 미·북 협상은 좌초될 수밖에 없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물론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도 북한의 ‘최종적이고 완전하게 검증된 비핵화(FFVD)’ 없이는 북한에 대한 제재를 해제할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하게 밝혀왔다. 미국과 북한의 줄다리기가 팽팽하게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북이 성사되기는 어렵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북하더라도 북한 정권이 종교의 자유와 인권의 존중을 보장하도록 약속을 받아내야 한다는 국제사회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북한은 말 그대로 전 세계에서 최악의 종교와 인권 탄압 국가이다. 기독교선교단체인 ‘오픈 도어스’가 발표한 ‘2017 세계 기독교 감시목록’에 따르면 북한은 16년 연속 기독교 탄압국 1위 자리에 올랐다. 오픈 도어스는 “김정은 일가에 대한 숭배를 거부하는 주민들은 체포돼 고문 또는 살해당하고 있다”고 밝혔다. 미국 국무부가 발표한 ‘2018 국제종교자유보고서’에 따르면 북한 정치범 수용소에 8만~12만명이 갇혀 있으며, 이들 중 상당수는 종교적 이유 때문에 수감돼 있다. 보고서는 북한에서는 2017년 한 해 동안 종교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119명이 처형당했으며, 770명이 수감됐다고 지적했다. 유엔 북한인권 조사위원회(COI)는 사상과 양심, 종교의 자유가 북한에서 거의 전적으로 부인되고 있다고 밝혔다.
   
   로버트 갈루치 전 미국 국무부 북핵 특사는 “교황이 북한을 방문한다면 주민들의 인권을 탄압해온 북한 정권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로버트 코헨 전 미국 국무부 인권 담당 부차관보도 “교황이 북한을 방문한다면 종교의 자유 문제를 제기하고 수감돼 있는 기독교인들의 석방을 촉구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마이클 그린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부소장은 “교황이 김정은을 만나게 되면 지구상에서 종교의 자유를 가장 억압하는 지도자를 합법화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렉 스칼라튜 북한인권위원회 사무총장도 “프란치스코 교황이 2014년 한국을 방문했을 때 북한 주민의 인권 문제를 전혀 언급하지 않아 실망했었다”고 지적했다. 역대 교황들 중에서 가장 진보적인 프란치스코 교황은 가난한 민중들을 위해 독재 정권과 맞서 싸우다 살해당한 오스카 로메로(1917~1980) 전 엘살바도르 대주교를 가장 존경한다. 북한의 김씨 3대 세습 독재 정권은 중남미 국가들의 독재 정권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요한 바오로 2세가 폴란드의 공산정권을 붕괴시켰듯이 김씨 3대 독재 체제에서 북한 주민들을 ‘해방’시키길 기대해본다.
   

   김일성의 두 얼굴
   독실한 개신교 신자 vs 잔악한 종교 탄압자
   
   평양은 과거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불릴 정도로 개신교가 번성했던 곳이었다. 1945년 북한에는 2만6000여개의 교회가 있었으며 신자 수도 수십만 명에 달했다. ‘김씨 왕조’의 시조인 김일성도 개신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부친 김형직은 개신교 학교인 숭실중학교 출신이다. 이 학교는 1897년 10월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에 의해 설립돼 1912년 정식 인가를 받았다. 김형직은 이 학교에서 종교부장으로 활동할 만큼 신앙이 독실했다. 졸업 후 김형직은 기독교 계열의 명신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했다. 모친 강반석도 독실한 개신교 신자로 집사였다. 이름이 반석(盤石)인 것은 성경에 나오는 ‘베드로’라는 이름에서 연유했다. 김일성의 외조부 강돈욱은 평남 대동군 용산면 하리(현재 평양 만경대구역) 칠골 마을에 있던 하리교회 장로였다. 6·25전쟁 때 폭격으로 파괴된 하리교회는 1992년 칠골교회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세워졌다. 김일성이 1989년 광복거리 건설현장에 나왔다가 “다시 교회를 세우라”고 지시한 데 따른 조치였다. 김일성은 “어릴 적 어머니와 함께 교회 다니던 일이 생각난다”면서 교회를 재건하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김일성은 매주 교회에 나갔고 주일학교에서 오르간을 연주하기도 했다. 외조부 강돈욱은 성경을 가르쳤고 그의 육촌동생 강양욱은 소년 김일성의 주일학교 담당 교사였다. 강양욱은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됐다. 김형직은 독립운동단체인 조선국민회에서 활동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고 만주로 망명했다. 김형직은 1926년 간경화로 죽으면서 김일성에게 어머니를 모시고 지린(吉林)성에 있는 숭실중학교 동문이자 친구인 손정도 목사를 찾아가라는 말을 남겼다. 이후 김일성은 손 목사의 교회와 주일학교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손 목사는 상하이 임시정부의 의정원 원장을 지낸 항일운동가였다. 김일성은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서’의 2권에 있는 ‘손정도 목사’라는 제목의 글에서 “손 목사의 삶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고 밝혔다.
   
   북한 정권은 개신교를 비롯해 모든 종교를 강력하게 탄압해왔다. 개신교 등 모든 종교는 북한 정권이 수립된 1948년부터 아예 사라져버렸다. ‘종교는 아편’이라는 공산주의 교리에 따라 북한 정권이 모든 종교를 말살했기 때문이었다.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1945년 당시 북한 주민 916만명 중 22.2%가 종교를 갖고 있었다. 종교별 신자 수를 보면 천도교 150만명, 불교 37만5000명, 개신교 20만명, 가톨릭 5만7000명 등이었다. 북한 정권은 김일성의 지시로 각종 종교의 성직자와 신자 40만여명을 죽이거나 정치범 수용소에 수감시켰다. 김일성은 1962년 “종교인들을 함께 데리고 공산주의로 갈 수 없다. 개신교와 가톨릭의 성직자들을 모두 재판에서 처단해버렸다”고 밝혔다.
   
   북한에는 현재 조선그리스도교연맹, 조선가톨릭교협회, 조선불교도연맹, 조선천도교회 중앙지도위원회 등 4개 종교단체와 이들의 협의체인 조선종교인협의회가 있다. 이들은 모두 북한 정권이 만든 가짜 종교단체들이다. 북한 정권은 종교의 자유를 헌법으로 보장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종교의 자유가 전혀 없다. 북한 정권이 1988년 만든 봉수교회 소속 이성숙 목사가 평양을 방문한 외국 기자들에게 “북한에서는 하나님이 김일성 주석”이라고 밝혔듯이 북한에는 김일성교(敎)만이 존재한다.
등록일 : 2018-11-02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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