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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역사사전 단독입수...세종대왕·유관순 없고, 김일성 집안 미화에 A4 6장씩 할애

⊙ 북한 역사사전에 세종대왕·유관순 등 없어… 빈자리는 북한 역사에만 나오는 항일 혁명투사로 메워
⊙ “김일성 모친 강반석이 일본 경찰 얼굴에 침 뱉자, 질겁해 도망갔다”… 기독교인 강씨를 열렬한
공산주의자로 묘사
⊙ 김일성이 하녀 부리듯 한 첫째 부인 김정숙을 백발백중 명사수로 설명
⊙ 북한이 자랑하는 김일성의 보천보 전투… “김일성이 보천보에 없었단 증거 있어”
(중국 공산당 길림성 당사 연구소 비밀문서)
⊙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를 격침했다는 김일성 증조부 김응우는 만경대 묘지기로
소작 얻어 생활
⊙ 김일성의 탁월한 전략전술로 인천상륙작전에서 승리했다는 북한
⊙ 1950년 9월 15일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우익 인사를 학살한 신천 사건을 미군이 저지른
학살로 왜곡
⊙ 국정교과서 씨 말리려는 세력은 북한 역사사전에 대해서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글 | 최우석 월간조선 기자

전교조·민노총 등 좌파단체가 고등학교 한국사, 중학교 역사 국정(國定)교과서를 막고 있다. ‘최순실 교과서’ ‘박근혜 교과서’라는 게 이유다. 황당하기 그지없다. “이유가 그게 다인가”라고 지적하면 그나마 내놓는 게 ‘박정희 미화’다. 10월 유신을 “국가 안보를 명분으로 대통령의 권력을 강화한 독재체제였다”고 한 부분은 읽지 않은 모양이다.
 
  국정 역사 교과서는 ‘굴욕적 한·일 회담’의 한계와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했다. 국민의 정당한 시위와 민주화 운동에 대한 ‘탄압’ 사례도 열거했다. 좌승희 박정희 대통령기념재단 이사장은 “너무 눈치를 봤다”고 했다. 고등학교 한국사 국정교과서 검토본의 현대사 부문에서 경제·사회 분야 집필을 담당한 김낙년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박정희 미화 교과서’라는 비판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한국 경제의 고도성장은 1950년대의 자유시장경제 제도 정착, 후발주자로서의 이익, 인구구조와 교육열, 냉전하 중국의 봉쇄 등이 영향을 미쳤다. 이런 요인들을 제대로 설명했는지는 보지 않고 박정희 시기의 경제를 몇 쪽 서술했는지 계산하는 것은 유치하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김 교수는 일본 도쿄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일제하 한국 경제》 《한국의 경제성장》 《한국의 장기통계: 국민계정 1911~2010》 등의 편·저서를 냈다.
 
  국정 역사 교과서 반대 운동에 앞장선 대표적 역사학자인 주진오 상명대 교수가 주도해 쓴 검정(檢定) 고교 한국사 교과서에는 박정희 사진이 딱 한 장 실려 있다. 반면 어떤 대통령은 사진이 넉 장 실려 있다. 대통령 취임식과 민주화 운동, 김정일과의 남북 정상회담 때 모습이다. 하나같이 당당하거나 환하게 웃고 있다. 교과서는 1998년 그가 베트남 호찌민 묘소에 가 헌화하는 사진을 싣고는 “베트남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고 썼다. 교과서에는 ‘신선한 충격’ 같은 주관적 표현은 쓰지 않는다. 좌파단체는 이 교과서에 대해서는 관대하다. 특정 대통령을 미화했다는 비판은 이 교과서에 더 어울린다는 지적에는 침묵으로 일관한다. 침묵은 긍정으로 해석될 여지가 많다. 그렇다면 북한의 역사 교과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할까. 《월간조선》은 A4용지 255장 분량(글자 크기 4포인트) 북한의 역사사전(력사사전으로 표기)을 입수했다. 북한의 초·중·고 교과서는 이 역사사전을 토대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김일성 모친 강반석, 유관순 열사를 대신한 김금순
 
김일성의 부모인 김형직, 강반석의 묘.
  북한은 김일성의 모친인 강반석을 설명하는 데 A4용지 7장을 할애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북한식 표기 그대로 옮긴다.
 
  〈조선인민의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를 낳아 키우신 어머님으로서, 혁명가의 아내 오직 조선혁명의 승리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신 열렬한 공산주의자이시며 탁월한 녀성정치활동가. 강반석 녀사께서는 김일성 동지께서 무송일대의 공산주의자들을 결속하여 조직하신 비밀혁명소조의 성원으로서 반일 부녀단체를 모으시고 그 조직을 도처에 확대하시면서 조국의 독립과 녀성들의 사회적 해방을 위한 투쟁을 적극 조직전개하시었다. 1928년부터 백산지구 부녀회 회장으로 활동하시었다. 녀사께서는 부녀회원들을 애국주의사상으로 교양하시는 한편, 낡은 봉건잔재의 유습으로부터 해방하며 정치적으로 각성시키기 위하여 힘쓰시였다. 집안에 비밀문건이 있다는 기미를 알아챈 일제경찰은 몇 시간 후에 말을 타고 달려와서 가택수색을 하려 하였다. 이때 강반석녀사께서는 추호의 동요와 주저도 없이 강의하고 도도한 태도로 경찰놈들에게 항거하시여 ‘자, 볼테면 봐라’고 엄하게 말씀하시면서 놈들의 낯짝에 침을 뱉으시었다. 강반석녀사의 강의한 기상에 질겁한 원쑤놈들은 가택수색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달아나버렸다. 녀사께서는 혁명을 위함이라면 서슴없이 바칠 고매한 기상으로 살며 싸우셨고 아드님의 혁명활동을 적극적으로 도우셨다. 김일성 동지의 발이 얼세라 귀중히 건사해오시던 자신의 머리채를 신바닥에 깔아주시기도 했다. 녀사께서는 일제의 갖은 박해로 하여 얻은 신병으로 그렇게도 바라마지않으시던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시고 1932년 7월 31일 만 40살을 일기로 애석하게도 세상을 떠나시었다. 참으로 강반석녀사의 온 생애는 모든 것을 혁명을 위하여 바치신 가장 영광스럽고도 빛나는 애국적이며 혁명적인 생애였다.〉 ※북한은 김일성 원수와 무찔러야 할 원수가 동음이의어이기 때문에 김일성을 지칭하는 것은 원수로 무찔러야 할 대상은 원쑤로 어휘를 바꿨다.
 
  강반석이 열렬한 공산주의자라는 첫 문장부터 오류가 있다. 공산주의자는 종교 자체를 부정한다. 강반석은 창덕학교 교장 강돈욱 장로의 둘째 딸로, 고향인 칠골동에 머물 당시 그곳에 있던 칠골교회에서 집사로 봉직했다. 반석이란 이름도 성경(베드로가 盤石이란 뜻)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반일 부녀단체를 구성했다는 것도 과장됐다. 유호열 고려대학교 북한학과 교수는 “(강반석에 대한) 북한의 주장은 확인할 근거가 없다”고 했다. 그 시기 악랄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일본 경찰이 강반석이 뱉은 침을 맞고 도망갔다는 주장도 난센스다.
 
  항일 투쟁을 부르짖는 북한 역사사전에는 유관순 열사가 없다. 대신 일본강점기 때 김일성이 조직했다는 ‘항일아동단’의 단원으로 통신연락 임무 수행 중 체포돼 갖은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조직의 비밀을 지키며 저항하다 최후를 마쳤다는 김금순이 있다.
 
  〈1934년 여름 김일성 동지의 지시 따라 김금순 동지와 아동단원들은 북만에 있는 반일 구국 군부대를 찾아가 유희대 활동을 하게 되었다. 김금순 동지는 유희 대공연을 통하여 김일성 동지의 위대한 혁명사상과 높은 덕성을 적극 선전하고 그들을 반일공동투쟁에로 불러일으키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1934년 늦가을 김금순 동지는 적구인 백초구에 갔다가 일제 헌병 놈에게 체포되었다. 김일성 동지의 품 안에서 참된 아동단원으로 자란 김금순 동지는 원쑤놈들의 갖은 고문에도 굴하지 않았다. 그는 고문에 피투성이가 된 얼굴을 떳떳이 쳐들고 수천 명의 군중이 모인 사형장에 나서서 원쑤놈들을 단죄하였으며 숨을 거두는 마지막 순간 ‘조선혁명만세!’를 소리높이 부르고 영웅적인 최후를 마치였다. 그가 희생되었다는 비보가 유격구에 알려지자 모든 사람이 비분에 떨리는 가슴을 안고 김금순 동지를 추모하는 추도식을 가졌다. 그들은 추도가를 부르며 복수의 시위행진을 오래 계속하였다. 김일성 동지의 충직한 전사인 나어린 혁명가 김금순 동지의 장렬한 최후에 대한 소식은 유격대와 유격구 인민들 속에서뿐만 아니라 당시 국제적으로도 널리 소개선전되었다.〉
 
 
  김일성 첫째 부인 김정숙
 
김일성과 그 첫 번째 부인이자 김정일의 생모인 김정숙.
  김일성의 첫째 부인이자 김정일의 생모인 김정숙에 대해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4천만 조선인민의 위대하나 수령 김일성 동지의 가장 중직한 전사이며 조선혁명의 종국적 승리를 위하여 몸바쳐 싸운 열렬한 혁명투사이며 견결한 공산주의자. 김정숙 동지는 장구하고도 간고한 항일무장투쟁의 나날에 수많은 전투에 참가하여 백발백중의 사격술로써 원쑤들에게 무리 죽음을 주었다. 김정숙 동지는 원수와는 용감하고 완강하게 끝까지 싸우는 투사였으나 인민들과 혁명동지들에게는 자기의 모든 것을 무조건, 그리고 묵묵히 다 바쳤다. 김정숙 동지는 항상 미소를 담은 상냥한 얼굴로 인민들과 혁명동지들을 대하였으며 몸을 돌볼 사이없이 부지런하게 일하였다. 김정숙 동지는 해방후 조국에 돌아와서도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 제시하신 새 조국 건설로선을 심장으로 받들고 불면불휴의 투쟁을 전개하였다. 특히 김정숙 동지는 새 나라의 주인이 된 녀성들을 수령의 주위에 굳게 결속시키기 위하여서와 녀성들의 정치조직인 녀성동맹을 창립하기 위한 투쟁을 정력적으로 벌렸다.〉
 
  김정숙이 쐈다 하면 백발백중의 명사수였을 수 있다. 그런데 어디에도 김정숙이 사살한 일본군 인원 등이 정확히 명시돼 있지 않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저격수들은 이런 부분에 대한 설명이 비교적 명확하다. 예를 들면 세계 최고 저격수로 꼽히는 핀란드군 출신의 시모 해위해(Simo Hayha)는 1939년 9월 소련이 핀란드를 침공한 겨울전쟁에서 총 800명을 사살했고, 소련의 대표적인 총잡이 바실리 자이체프(Vasily Zaytsev)는 2차 대전 당시 400명의 독일군을 해치운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 밖에 이반 시도렌코(Ivan Sidorenko)는 스탈린 그라드 전투에서 500명을 저격했고, 여성인 루드밀라 파블리첸코(Lyudmila M, Pavilchenko)는 오데사 지역에서 약 2달 동안 187명을 사살했다.
 
  미 중앙정보국(CIA)에서 24년간 일했던 마이클 리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김정숙은 빨치산 활동을 할 때 야영지에서 그 빨치산 대원들의 양말, 옷을 세탁하고 페치카에 불을 지피고 심부름하는 하녀 비슷한 여자였습니다.”
 
  하녀 비슷한 여자가 무슨 명사수이고, 무슨 최고 전술가냐는 이야기다. 마이클 리는 CIA에서 주로 북한 정보를 분석하는 일을 했다. 그는 1961년 김일성이 박정희 전 대통령을 만나라며 급파한 간첩 황태성을 심문했고, 한국 여객기 테러 사건을 일으킨 김현희와 북한에 납치됐던 신상옥·최은희씨도 직접 만나 조사하는 등 굵직한 사건을 많이 맡아 온 인물이다.
 
  김성민 자유북한방송 대표도 “빨치산을 했던 사람들도 (마이클 리의 발언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그런 말 전하다가 수용소 간 사람도 꽤 된다고 들었다”고 했다.
 
  《동아일보》는 1962년 5월 30일부터 김일성의 직속 담당기자로서 온갖 연설문, 담화문을 대필한 한재덕씨가 쓴 ‘김일성을 고발한다’는 글을 실었는데 거기에 김정숙이 어떤 인물인지 예상할 수 있는 내용이 있다.
 
  〈나는 전후 두 번 김일성의 가정에 초대받아 그 아내와 애들까지 만날 수 있었다. 그의 아내는 삼십 전후의 키가 조그마한 아주 평범한 가정부인으로 보였는데 그 촌뜨기 같은 소련식 옷차림이 그를 더욱 소박하게 보이게 하였는지도 모른다. 어느 모로 보나 이전에 빨치산 투쟁을 하였다는 여성으로는, 더욱이나 소문 같은 명사수의 여장부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김일성이 예상외로 우락부락 큰소리를 내며 가정폭군 노릇을 하였는데 그 아내는 그 앞에서 벌벌 떠는 꼴이었다. 대개 밖에서 여성을 위하는 체 말이 많은 사람일수록 가정에서는 폭군이라고 했다. 김일성도 예외가 아니었다.〉
 
 
  조국 광복회
 
  북한은 ‘조국 광복회’에 대해 “혁명의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 항일무장투쟁시기 위대한 주체사상을 구현하시여 창건령도하신 우리나라에서의 첫 반일 민족통일전선조직으로 1936년 5월 5일에 창건되었다”고 했다. 〈조국 광복회창건은 국제 반파쇼인민전선운동의 확대발전을 촉진했으며 특히는 세계식민지 및 예속국가 인민들의 반제민족해방투쟁에 커다란 고무적 힘을 주었다.〉
 
  실제 조국 광복회는 중국 공산당 동만주특위 정치비서 위극민이 정치위원 오성륜에게 지시하여 만든 것(《김일성 바로 알기》 중)이다. 북한은 조국 광복회를 전국적인 조직체인 것으로 날조했으나 국내에는 함북 갑산군에만 지부가 있었다. 몇몇 검정 역사 교과서에는 조국 광복회를 미화(美化)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동녕현성 전투
 
  동녕현성 전투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천재적 군사전략가이시며 백전백승의 강철의 명장이신 김일성 동지의 총지휘 밑에 1933년 9월 항일유격대가 반일부대와 련합하여 전개한 전투. 동녕현성은 당시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쏘련을 침공할 목적으로 각종군사시설과 병력을 증강한 놈들의 정치군사상 중요지점이었다. 여기에는 일본군 1개 대대(500명)와 위만군 1개 련대(약 2000명) 그리고 일만 경찰 약 80명과 자위단놈들이 주둔하고 있었다. 김일성 동지의 총지휘 밑에 진행된 동녕현성전투에는 항일유격대를 주력으로 하여 오의성, 사려장, 리삼협, 채사령 부대 등 많은 반일부대가 인입 되었다. 동녕현성전투는 김일성 동지의 탁월한 지휘 밑에 빛나는 승리로 끝났다. 이 전투에서 항일유격대는 일제침략군 약 200명과 위만군 300여명을 살상하였고, 많은 군수품을 로획하였다. 이 전투를 통하여 전투에서 항상 주도권을 틀어쥐고 백전백승하는 김일성동지의 탁월한 령군술을 보여주었으며 일제의 소위 《무적황군》의 신화를 깨뜨려버리고 조·중인민들에게 승리의 신심을 더욱 굳게 안겨주었다.〉
 
  1933년 9월 동녕현성 전투 당시 김일성은 총지휘를 하는 위치에 있지 않았다. 1931년 9월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자 같은 해 10월 12일 중국 공산당 중앙은 ‘만주 병사공작지시에 관한 지시’를 내려 항일 유격대를 건설할 것과 이 유격대를 농촌으로 확대하여 항일 유격전을 전개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이에 따라 만주 지역에는 지역별로 공산 유격대가 형성됐다. 남만 유격대, 동만 유격대, 그리고 동북 인민혁명군 등이 그것이다. 동만 지역의 유격대는 1932년 초부터 같은 해 겨울까지 연길, 왕청, 훈춘, 화룡 등 4개 현을 중심으로 형성됐는데, 김일성은 왕청 유격대 소속이었다. 왕청 유격대 대장은 양성룡이었다. 동녕현성 전투에 나섰을 때 김일성은 왕청 유격대의 일개 소대장에 불과했다.
 
  “(중략) 33년 9월 오의성군은 동녕현성을 공격했다. 오의성군은 1100명이었다. 사충항이 인솔하는 구길림 구국군 제3단도 가세하였다. 여기에 왕청, 훈춘의 유격대가 참가하였다. 그들의 병력은 200명 정도였기 때문에 구국군의 작은 부분을 구성하는 데 지나지 않았다. 왕청의 부대는 양성룡이 인솔하고 있었으며, 여기에 김일성도 참가하고 있었다. 구국군은 성내로 진격하였지만 점령할 수는 없었고 결국은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 p.106, 와다 하루키 저
 
  김일성의 항일 투쟁을 우호적으로 기술했다는 평가를 받는 책에서조차 그의 활약은 없었다고 나와 있다. 김일성은 “대중을 속일 때에는 엄청난 거짓말을 하라”는 히틀러의 명제를 충실히 체현한 것이다.
 
 
  보천보 전투
 
양강도 혜산시 보천보전투승리기념탑.
  보천보 전투는 북한이 ‘김일성의 역사적인 항일 무장전투’로 선전하는 전투다. 그들은 여전히 김일성이 직접 보천보 주재소를 습격하고 군중에게 반일(反日) 연설을 했다고 선전한다. 북한이 매년 6월 4일을 ‘보천보 전투 승리의 날’로 정해놓고 김일성 업적을 찬양하며 ‘보천보 정신’을 강조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백전백승의 강철의 령장이시며 천재적인 군사전략가이신 김일성 동지께서 1937년 6월 4일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를 친솔하시고 일제의 전략상 요충지인 보천보를 들이쳐 일제침략자들에게 심대한 정치, 군사적 타격을 줌으로써 일제의 식민지통치 밑에서 신음하던 조선인민에게 민족해방의 서광을 안겨주신 력사적인 전투. 6월 4일 밤 10시 김일성 동지께서 올리신 한방의 총소리를 신호로 하여 전투는 개시되었다.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이 퍼붓는 복수의 총소리는 보천보 거리를 뒤흔들었다. 일제의 경찰관주재소가 삽시간에 불타버렸으며 면사무소, 산림보호구, 농사시험장 등 일제의 모든 기관에서 삼단 같은 불길이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이날 밤 산림보호구 주임(일본놈) 놈의 《영전》을 축하하느라고 시내에 있던 원쑤놈들 중 유력자는 거의 다 한곳에 모여 술상을 벌렸다가 모두 무리 죽음을 당하였다.〉
 
  객관적 증거자료를 보면 김일성의 함경남도 갑산군 보천보 전투 참가 여부는 불분명하다. 이 같은 사실은 《조선일보》 1993년 12월 7일 자에 실린 ‘보천보 전투의 진실’이라는 기사에 잘 나타나 있다. 당시 기사 내용을 그대로 옮긴다.
 
  〈얼마 전 중국 조선족이 경영하는 심양의 요녕인민출판사가 발행한 조선족혁명렬사전을 입수했다. 3권으로 된 이 책은 만주에서 항일운동을 하다 사망한 72명의 사회주의 운동가의 약사(略史)를 담고 있다. 요녕인민출판사가 지난 83년 제1권을 낸 이후 9년 만에 제3권을 낼 정도로 이 책은 로작(勞作)이다. 관련자들의 증언을 철저히 들으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김일성 주석의 가장 대표적인 항일투쟁이라는 보천보(혜산 근방의 지명) 전투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김일성이 사장으로 있었던 동북 항일연군 제1로군 2군 6사 간부들인 오중흡(1910~39·전 인민군 참모장 오극렬의 아버지), 권영벽(1909~45), 이동학(1911~38), 김산호(?~36) 등의 약사에 이 전투에 관한 소상한 기록이 적혀 있다. 권영벽은 보천보 전투를 앞두고 현지 정찰을 했으며 이동학과 오중흡은 전투에 직접 참가했다. 이동학 중대장이 책임진 경위중대는 보천보경찰주재소를, 7퇀4련은 영림소와 농사시험장, 소방대, 우체국 등 적 기관을 습격하기로 하고 7퇀의 오중흡 중대장은 일부 병력을 인솔하여 혜산 방향의 도로를 차단하고 그쪽에서 오는 적을 저격하며 8퇀의 일부는 경기 1정을 가지고 삼지연 방향에서 나타나는 적을 저격하기로 결정했다(여기에 나오는 퇀은 아마 중대보다 약간 큰 부대를 의미하는 것 같다-편집자 주). 돌격대는 이날 밤 10시 작전계획에 따라 보천보를 습격했다. 작전회의를 별동대 간부끼리만 했는지 사장인 김일성이 직접 주재했는지는 이 기록에 분명하게 나오지 않아 확인할 수 없지만 김이 전투에 직접 참가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1980년대부터 중국에서 김일성 부대 관련 연고자 130여 명을 인터뷰한 조선족 작가 유순호씨도 “보천보 전투 당시 김일성 부대에서 기관총 소대장으로 근무한 강위룡의 회고담을 들은 중국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2군 출신들을 1990년대 초반 만나 확인했는데 보천보 전투 당시 김일성은 압록강을 건너지 않았고 보천보에 없었다”고 했다.
 
  유씨는 “광복 후 1950년대 초까지 중국 옌볜에서 지낸 강위룡은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에겐 ‘보천보 전투 때 내가 기관총을 들고 김일성 곁에 딱 붙어 서 있었댔다’고 한마디로 일축했다”고 전했다.
 
  북한이 선전하는 보천보 전투 신화가 거짓이라는 것이다. 북한에 돌아가 평양위수사령관에 임명된 강위룡은 1967년 양강도 혜산에 ‘보천보전투승리기념관’이 건립됐을 때 현지 관계자들에게 진실을 말했다가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에 의해 숙청됐다. 유씨는 “중국 공산당 길림성 당사(黨史) 연구소 비밀문서고에 있는 자료에도 김일성은 보천보에 가지 않았다는 증언들이 기록돼 있다”고 했다. 필명이 청설(靑雪)인 유씨는 1980년 희곡 〈숲속의 메아리〉로 문단에 데뷔했다. 중국의 항일 영웅 조상지를 그린 《비운의 장군(1998)》을 썼고 2002년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 《만주의 파르티잔 허형식(2009)》을 펴내는 등 만주 항일 운동사를 연구해 왔다.
 
  설령 김일성이 보천보 전투에 참여했다고 하더라도 보천보 전투는 일제 파출소를 습격한 것에 그친 사건이다.
 
  강규형 명지대 교수는 “보천보 전투는 소규모 무장 병력을 기습 공격한 작은 전투로 북한에 의해 과대 선전됐다는 것이 정설”이라고 했다. 류석춘 연세대 교수도 “최근 만주 지역에서의 독립투쟁 기록을 살펴봤는데,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전투나 홍범도 장군이 이끈 봉오동 전투를 제외하면 사실상 무장 항일투쟁이 지리멸렬한 수준이었고, 김일성이 벌였다는 항일투쟁도 이런 흐름 속에 있다”고 했다.
 
 
  3·1운동
 
  북한 역사사전에 3·1운동은 이같이 기술돼 있다.
 
  〈조국을 해방하고 민족적 독립을 이룩하려는 조선인민의 불 같은 지향과 철천지원쑤 일제침략자들에 대한 쌓이고 쌓인 민족적 분노는 로씨야의 사회주의 10월 혁명의 영향 밑에 드디여 1919년 전민족적 3.1봉기로 폭발하였다. 김형직 선생께서 뿌리신 반일애국사상과 혁명의 불씨는 3.1봉기를 계기로 이르는 곳마다 세차게 타 번지였다. 김형직 선생께서 키우신 애국적인 인사들과 청년 학생들은 평양과 강동, 만경대와 자강도 중강을 비롯한 국내외의 여러 곳에서 봉기 군중의 앞장에 서서 일제침략자들과 그 주구들의 죄상을 폭로규탄하면서 원쑤들의 탄압을 박차고 완강하게 싸웠다. 투쟁은 료원의 불길처럼 전국 방방곡곡에 퍼져갔다. 3.1봉기는 이 운동을 맑스-레닌주의적 혁명로선과 전략전술에 의하여 이끌 탁월한 령도자와 혁명적당, 혁명적 계급이 없었고 게다가 일제의 탄압이 극심하였던 탓으로 결국 실패하였다.〉
 
  북한은 3·1운동을 당시 평양에서 시위에 참여했던 것으로 알려진 김일성의 부친 김형직 우상 선전의 소재로 활용하면서도, 3·1절을 공휴일로 지정하지 않고 기념행사도 갖지 않는다. 2011년 청년지식인포럼 ‘story K’가 오경섭 통일연구원 연구위원, ‘데일리 NK’와 함께 북한 관련 문서를 분석한 것에 따르면 김형직이 3·1운동에 앞장섰다는 것은 북한 당국의 일방적 주장일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3·1운동은 실패하지 않았다. 일제 식민지배로부터 독립한 이후 대한제국의 복고(復古)가 아니라 민주공화국으로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한다는 민족적 합의를 이끌어 낸 사건이기 때문이다.
 
 
  셔먼호 사건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는 대동강에서 평안감사 박규수를 비롯한 관민 합동작전으로 격침됐지만, 북한 역사사전에서 이 사건의 주역은 김일성의 증조부 김응우로 대치돼 있다.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는 대동강에서 평안감사 박규수를 비롯한 관민 합동작전으로 격침됐지만, 북한 역사사전에서 이 사건의 주역은 김일성의 증조부 김응우로 대치돼 있다.
 
  〈샤만호의 침입사건은 실로 최근 100여년 동안이나 우리나라를 침략하여 조선인민에게 형언할 수 없는 불행과 고통을 가져다준 야수적 미제국주의의 조선에 대한 최초의 침략사건이었다. 1840년대부터 조선침략을 기도한 미국침략자들은 군함과 해적선들을 조선 근해에 자주 침범시켰다. 샤만호는 무장한 해적선으로서 여기에는 미국놈 프레스톤을 괴수로 하여 영국선교사 토마스라는 놈 등 수많은 침략의 무리들이 타고 있었다. 해적들은 불법적으로 만경대 부근에 기어들어 정탐과 살인, 강도행위를 하였다.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 동지의 증조할아버님이신 김응우 선생님께서는 인민들의 앞장에 서시여 샤만호를 무찌르는 싸움에 용감히 나서시였다. 미제침략자들을 쳐부수기 위한 판가리 싸움이 벌어졌다. 인민들은 상류에서 수많은 나무배에 장작을 싣고 그에 불을 달아 적선에 부딪쳐 불타게 하였다. 이리 하여 미제침략자를 반대하는 조선인민의 첫 투쟁은 력사적 승리로 끝났다.〉
 
  프랑스 신부 9명과 수천 명의 가톨릭 신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병인박해(1866년) 후, 프랑스 함대가 보복할지 모른다는 소문으로 조정에는 긴장감이 돌았고 민심 역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정체불명의 이양선 한 척이 대동강 어귀에 나타났다. 중국 톈진에서 출발한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였다. 무역선이라지만 대포가 2문이나 장착돼 있었고 24명의 선원도 중무장한 80t급의 증기선이었다. 평양 군민이 격분한 것은 이들의 접근을 막으려는 조선 관리 3명을 셔먼호가 감금하면서였다. 흥분한 평양 군민들은 소총과 활을 쏘아댔고, 셔먼호 역시 포격으로 맞섰다. 탄약이 떨어져 하류로 후퇴한 셔먼호가 줄어든 대동강의 수위로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되자 평안 관찰사 박규수는 기발한 생각을 한다. 땔감 운반선 3~4척을 연결한 뒤 인화물질을 가득 싣고 불을 붙여 셔먼호 쪽으로 떠내려 보낸 것이다. 셔먼호는 불타버렸고 선원 역시 전멸했다. 1866년 7월 24일이었다. 대원군은 이 사건에 고무돼 빗장을 더욱 걸어 잠갔으나 5년 뒤 신미양요를 겪어야 했다.
 
  전문가들은 김응우가 대동강에서 셔먼호를 불태웠다는 사실은 어떤 자료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사실무근 거짓이고 김응우가 게릴라 투쟁을 했다는 것 또한 완전히 날조된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북한문제전문가인 도준호 명지대 초빙교수는 “한마디로 말도 안 되는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했다. 김일성 증조부 김응우는 만경대에서 묘지기로 소작을 얻어 생활했다.
 
 
  인천상륙작전
 
  북한 사람들은 인천 월미도를 인천상륙작전 때 미제에 맞서 처절히 항거했던 ‘영웅들의 섬’으로 안다. 1950년 9월 13일부터 사흘간 월미도의 북 해안포병 중대가 미 군함 10여 척을 격침하고 수천 명을 죽이는 등 결사적으로 항전한 것으로 당국이 허위 선전한 탓이다. 이런 주장을 담아 북에서 1980년대 초 제작한 〈월미도〉는 애국심을 고취하는 대표적 전쟁 영화다. 사전에도 이렇게 나와 있다.(북한은 인천상륙작전을 ‘인천-서울지구방어전투’로 칭한다.)
 
  〈천재적군사전략가이신 최고사령관 김일성 동지의 탁월한 전략전술적방침을 높이 받들고 조선인민군부대들이 조국해방전쟁의 제2계단 초기시기 대규모적인 상륙작전을 감행한 미제침략군에게 인천-서울지구에서 섬멸적인 타격을 주고 전선의 인민군주력부대들의 조직적후퇴를 보장한 영웅적방어전투. 인민군부대들은 적 장병 1만3000여명을 살상하고 전차 64대, 수륙량육전차 13대, 함선 19척, 포 수십문(그중 로획 18문), 자동차 64대를 파괴하고 ‘비29’중폭격기 5대를 포함한 26대의 적비행기를 쏴 떨구는 큰 전과를 거두었다. 이 전투를 통하여 천재적인 군사전략가이시며 백전백승의 강철의 령장이신 최고사령관 김일성 동지의 탁월한 전략전술과 령군술을 다시 한 번 보여주었다. 또한 이 전투는 수령의 두리에 철석같이 뭉친 인민군용사들과 인민들의 불패 위력을 시위하였다.〉
 
  북한의 억지와 달리 유엔군은 한 명의 사상자 없이 인천항을 접수했고, 상륙 첫날 전투에서 미군 사망자는 20명에 불과했다. 무방비나 다름없었다. 《뉴욕타임스》 기자로 한국전쟁을 다룬 《콜디스트 윈터》의 저자인 고 데이비드 핼버스탬(David Halberstam)은 생전 “계획이 치밀하고 노련한 면도 있었고, 전쟁의 신이 인민군에게 김일성이라는 부주의한 지휘관을 내려준 덕도 있었다”고 평할 정도였다.
 
 
  신천 대학살
 
북한의 대표적인 반미(反美) 계급 교양 학습장인 신천박물관(황남 신천)에서 강사가 참관객들에게 전시 자료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북한은 신천 사건을 “미군이 저지른 학살”이라고 주장하며 반미교육과 계급교양의 구심체로 삼고 있다. 북한 김정은은 2015년 11월 말 신천박물관을 찾아 “조성된 정세와 혁명발전의 요구에 맞게 우리 군대와 인민들 속에서 반제반미교양, 계급교양을 더욱 강화해 천만 군민을 반미대결전으로 힘 있게 불러일으키기 위해 찾아왔다”고 말했다.
 
  〈위대한 조국해방전쟁의 일시적 후퇴시기 황해남도 신천군에 기어든 미제승냥이 놈들이 우리 인민들에게 감행한 대학살만행사건. 조선인민의 철천지원쑤 미제국주의자들은 조선에 대한 침략전쟁을 도발한 첫날부터 전쟁력사상 류례없는 가장 야만적인 전쟁방법을 다 적용하였으며 특히 우리의 일시적 후퇴시기에는 천인공노할 대중적 학살만행을 전국도처에서 감행하였다. 놈들은 신천군내에서만 하여도 50여일 동안의 강점기간에 군내 전체 주민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3만5000여명을 가장 잔인하고 야수적인 방법으로 학살하였다. 국적 인민들은 학살당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김일성 장군 만세!’를 소리높이 외치며 혁명적 지조를 굳게 지켜 용감히 투쟁하였다.〉
 
  신천 학살 사건은 1950년 10~12월 사이 북한 황해도 신천군 일대에서 벌어진 대규모 민간인 학살 사건을 말한다. 김일성대 도서관에는 1960년대 발간한 신천 학살 사건 재판기록이 있다. 북한이 신천대학살을 대국민 선전에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전에 발행됐다. 여기엔 신천에서 인민들을 학살하고 도망쳤다가 전쟁 와중에 간첩으로 다시 신천에 잠입했다 체포됐다는 전직 치안대원의 진술이 담겼는데, 미군의 악행이라고 할 만한 자백이 전혀 실려 있지 않다.(탈북자 출신 기자 증언) 또 한화룡 백석대 기독교학부 교수가 펴낸 《전쟁의 그늘-1950, 황해도 신천 학살 사건의 진실》에 따르면 신천 학살은 전쟁이라는 비정상적인 시기에 좌우익이 갈라서 서로 죽이고, 보복을 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사건이다. 시발은 인민군이었다.
 
  백 교수의 이야기다.
 
  “북한은 1950년 10월 17일 미군이 신천에 들어왔고, 다음날인 18일부터 여러 장소에서 학살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런 북한의 주장은 당시 미군의 행보와 각종 전사자료, 현지 월남자, 탈북자 등의 증언 등을 통해 완전히 허구임이 밝혀졌습니다. 당시 전사와 월남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18일 밤 10시경에 미군을 태운 트럭 한 대가 신천에 처음 나타났고, 다음날 오전(19일)에 1개 정찰 소대가 트럭을 타고 들어왔습니다. 그 직후 미군 탱크 3~4대와 보병들이 신천을 통과해서 지나갔습니다. 따라서 북한이 미군이 학살을 시작했다는 17~18일에는 미군이 신천에 있지 않았습니다.”
 
  백 교수는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뒤바뀌자 인민군과 공산당원들이 후퇴하면서 우익 인사들을 체포하고 학살하기 시작한 것”이라며 “신천, 안악, 은율 등지의 내무서에서 인민군에 의해 수많은 우익 인사와 가족이 처형당했다”고 했다.
 
 
  이순신과 정약용
 
  북한은 김일성 유일 영도체제를 뒷받침하는 주체사상이 통치이념으로 채택된 시점인 1967년부터 김일성을 제외한 누구도 명장이나 영웅으로 부각하지 않았다. 가난한 선비의 아들로 태어나 54년의 일생을 보내는 동안 온갖 고난 속에서도 충효인의와 애국애민 정신으로 일관한 민족사의 대표적 위인인 충무공 이순신 장군도 마찬가지다.
 
  〈리순신 장군은 임진조국전쟁때에 거북선을 만들고 왜적을 바다에서 물리치는데 공훈을 세운 애국명장이다. 그는 뛰여난 전략전술과 빛나는 승리로 하여 중세 해군전쟁사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세계적 명장으로 손꼽히고 있다. 하지만 그는 량반지배계급출신의 지휘관으로서 그의 애국심은 국왕과 봉건국가에 대한 충성심에 기초한 것이였다. 그의 념원은 왜적의 침략을 쳐 물리치고 량반지배계급의 통치질서를 바로 세우는데 있었다.〉
 
  이순신 장군이 왜란 당시 나라를 잘 지켜 싸운 것은 맞지만 양반·지주 계급이었고 또 무관이었으므로 어디까지나 인민이 아닌 봉건왕권에 충성해 지배계층을 위해 싸웠다는 것이다.
 
  깎아내린 건 다산 정약용도 마찬가지다.
 
  〈봉건 말기 조선의 대표적 실학자. 정약용은 《전론》에서 그가 제의한 대책은 봉건적 농본사상에 기초하여 대토지소유자들에 의한 토지의 겸병과 가혹한 착취를 다소 조절함으로써 봉건국가의 리익, 전체로서의 지배계급의 리익을 더 잘 보호하자는 것이였다. 즉 그가 내놓은 《전론》에서는 량반관리들은 여전히 후한 봉급을 받고 심부름꾼을 부리면서 호화롭게 살게 되어 있다. 그는 원래 노비문제와 같이 봉건 통치계급의 리익에 직접 관련되는 문제에 대해서는 사소한 변경마저도 반대하는 보수적인 입장에 서 있었다. 그가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에서 제기한 정치적 개혁안들은 봉건유교정치관에 기초하여 문란해진 봉건통치체계를 정리하고 봉건제도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다산의 저술과 그 사상의 요체는 ‘개혁(改革)’이다. 그가 살던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전반은 조선 봉건사회의 해체기(解體期)로서 누적된 봉건적인 병폐가 도처에 드러나 있었다. 이러한 총체적 위기의 상황에서 나라를 구하고 바로 세우는 길은 개혁밖에 없다는 사실을 다산은 깊이 통찰하고 있었다. 《경세유표》는 당시의 법질서를 초월한 국정 일반의 개혁지침서다. 다산은 일찍이 수령을 지낸 아버지를 통해 지방의 실정을 보았으며, 출사해서는 정조의 어명으로 경기도 암행어사가 되어 농민들의 고통을 직접 살펴보았다. 특히 전남 강진에서의 오랜 유배생활은 지방관리의 횡포와 무능, 아전들의 농간과 농민들의 억울하고 가엾은 사정을 소상히 체험할 기회를 주었다.
 
  북한에서 다산의 대표적 저서 《목민심서》는 금서 1호다. 박금철·이효순으로 대표되는 갑산파는 1930년대 말 김일성의 빨치산부대와 연계를 맺었던 인연으로 해방 후 권력 핵심에 진입했고 60년대 들어서는 당중앙위원회 부위원장에까지 오르는 등 상당한 지위와 권한을 누렸다. 그러나 이들은 67년 5월 초 열린 당중앙위원회 제4기 15차 전원회의에서 ‘반당종파분자’의 오명을 쓰고 숙청돼 버렸다. 당시 갑산파 숙청을 주도했던 인물은 김정일로 알려졌는데 이때 그는 당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중앙기관담당 책임지도원이었다. 공개된 자료를 보면 이들이 숙청된 사유 가운데 하나는 “민족적인 것을 살리고 주체를 세운다”는 구실 아래 봉건유교사상을 설교했다는 것이었다. 구체적인 실례로 다산의 《목민심서》를 간부들의 필독문헌으로 지정, 각급 당조직에 하달한 것이 문제가 됐다.
 
 
  북한 역사에만 존재하는 인물
 
  사전을 분석하면서 내린 결론은 북한의 역사는 김일성을 빼놓고는 그 어느 것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모든 역사적 현장 중심에는 김일성 혹은 그의 조부모·부모·형제, 사돈의 8촌이 있었다. 3·1운동을 김일성 아버지가 주도했다고 하니, 말 다했다. 북한은 사전에 김일성 주위의 모든 사람을 반일 혁명투사라 명시했다.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대왕은 삭제하면서도 최현, 김책 등 빨치산 1세대로 불리는 이들에 대한 설명은 길게 늘어놓았다. 그나마 이들은 이름이라도 알려졌지, 북한 역사에만 등장하는 우리에겐 생소한 이름의 항일 혁명 투사도 상당했다. 이들을 소개하는 첫 문장은 “혁명의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 조직령도하신 영광스러운 항일무장투쟁에 참가하여 수령께 끝없이 충직했던 혁명투사”로 모두 같았다. 기사를 통해 공개한 북한의 역사 왜곡 김일성 가계 미화 사례는 ‘빙산의 일각’이다.
 
  국정 한국사, 역사 교과서를 오류투성이 친일·박정희 미화 교과서로 낙인 찍고 씨를 말리기 위해 학교로 몰려가 아우성치는 전교조와 일부 단체가 북한의 역사사전에 대해서는 어떤 평가를 내릴지 궁금하다.⊙
 
[월간조선 2017년 4월호 / 글=최우석 월간조선 기자]
등록일 : 2017-04-19 09:33   |  수정일 : 2017-04-19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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