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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공연 때 '그리운 금강산' 노래 박수받았지만 금지곡돼"

‘그리운 금강산’ 작곡가 최영섭 선생 인터뷰

꽉 다문 입매에 형형한 눈빛과 흐트러짐 없는 자태에서 범접하지 못할 대가의 격이 느껴졌다.

평창 동계올림픽 개폐막식 남북 공동입장과 삼지연관현악단 서울·강릉 공연 소식에, 1985년 평양에서 불린 ‘그리운 금강산’ 작곡가 최영섭 선생을 ‘장광팔 만담가의 세상토크’ 초대석에 모셨다. 그는 “평화통일이 되어 이제는 그의 노래 ‘그리운 금강산’을 부르지 않아도 되길 염원한다”고 했다. “지금 옆에 있는 사람에게 잘하라”는 말로 인터뷰를 마친 선생의 숨김없는 자기고백은 오랜 여운을 남겼다. 라스트 인터뷰를 작정했지만 마음을 바꿔먹었다. 100세 때 다시 한 번 인터뷰를 하기로.

서울 성북구 안암동 카페 봄에서 이루어진 이번 인터뷰에는 클래식 마니아 김혁수 한국야쿠르트 상임고문과 소프라노 채미영 그리고 바이올리니스트 박은주도 참석해 ‘그리운 금강산’을 열창했다.

글 | 장광팔 만담가   정리 | 박미정 여성조선 기자   사진제공 | 안규림

장광팔 인터뷰에 앞서 선생님께서 작곡하신 국민 가곡 ‘그리운 금강산’을 소프라노 채미영과 바이올리니스트 박은주의 연주로 감상하셨습니다.

최영섭 55년을 거의 매일 듣는 제가 만든 곡인데, 아흔이 되는 새해 벽두에 내 일생을 회고하는 자리에서 게다가 이렇게 바로 옆에서 라이브로 들으니 감정은 복받치는데, 70여 년 동안 작품만 쓰면서 여러 일을 겪어 눈물이 다 메말랐습니다. (그러나 그의 눈가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장광팔 눈가가 촉촉해지셨는데, 근황은 어떠신지요?

최영섭 제가 지난해 가을 그동안 작곡한 가곡 665곡을 일곱 권으로 출판했는데, 3216쪽이에요. 제7권은 600쪽이나 될 정도로 두꺼운데, 인쇄소에 넘기고 나서 또 너덧 곡을 만들었으니 670곡은 작곡한 셈입니다. 이 모든 곡은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있겠느냐 하는 심정으로 똑같이 정성을 들였습니다.

가곡집 제7권 메인 타이틀이 <그리운 금강산 개정판>입니다. “누구의 주제련가”에서 음은 똑같은데 리듬을 조금씩 여유롭게 썼어요. 또 2절 끝난 다음에 단 4도 화음 한마디가 나오고 ‘아~’를 하나 더 넣었습니다. 멜로디도 ‘레미~’밖에 안 되는데, 이렇게 부르니 훨씬 감동이 밀려오더군요.
 

북한에서 금지곡 된 ‘그리운 금강산’

장광팔 이번 평창 올림픽 기간에 북한의 삼지연관현악단이 서울과 강릉에서 공연을 하는데, 1985년 9월 남북예술단 교환 공연 때 ‘그리운 금강산’ 가사 때문에 여러 가지 얽힌 일이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최영섭 그때 에피소드가 많아요. 그런데 사실 문제가 된 가사는 이미 1972년에 고쳤던 거예요.
“더럽힌 지 몇몇 해”를 “못 가본 지 몇몇 해”로, “우리 다 맺힌 원한”을 “우리 다 맺힌 슬픔”으로, “짓밟힌 자리”는 “예대로인가”로 손본 거예요. 나라가 반쪽이 된 건 우리 쪽도 슬픔이고, 북한 쪽도 슬픔이니까요.

경위는 이래요. 1972년 남북적십자회담이 열리기 직전, 당국에서 남북이 평화통일을 위해 나가는 마당에 가사가 너무 격렬하니 몇 군데만 고치면 좋겠다는 의견을 주셨어요. 그래서 제가 지금은 작고하셨지만 당시 작사가 한상억 시인에게 그 얘길 했더니, 그 자리에서 고치시더라고요. 고치니까 한결 부드러워졌죠. 또 하나 짚고 넘어가자면, “누구의 주재런가”가 인쇄 과정에서 오타가 나서 “누구의 주제련가”로 바뀌었는데, 지금까지 “예대로인가”예요.(웃음)

장광팔 1985년 평양 공연에선 고친 가사가 아닌 원 가사대로 불렀다죠?

최영섭 그때 이화여대 음악대학 소프라노 이규도 교수가 평양에서 그 곡을 부르게 돼 있었죠. 고친 가사로 열심히 연습을 했는데, 막상 가서는 원래 가사대로 노래를 불러버렸어요.

그런데 소프라노라 워낙 피치가 높은 소리로 부르니까, 가사 내용을 모르고 북한사람들이 박수를 쳤어요. 당시 우리나라 뉴스에도 하춘화 씨가 부른 우리 민요와 ‘그리운 금강산’만 박수를 받았다고 보도했죠. 하지만 이런 음악이나 연극, 영화에 관심이 깊었던 사람이 바로 김정일 위원장입니다. 그 사람은 자기가 “더럽힌 지 몇몇 해”로 들은 것 같아서 일본 조총련을 통해서 악보를 구해보니 고치기 전 악보였던 모양이에요. 그 후 금강산 관광이 시작된 1998년 9월 21일 평양방송에서 금강산 관광을 오는 사람은 북한 땅에서 다음 세 곡을 노래하면 안 된다는 보도가 나왔어요. 대한민국의 ‘애국가’와 ‘그리운 금강산’ 그리고 군가 ‘전우야 잘 가라’였어요. 이 세 곡이 지금까지 금지곡이 됐지요. 이규도 씨는 여자 분인데도 평양에서 원 가사대로 불렀는데, 저는 남자인데도 겁이 나서 그해 11월 18일 첫 배로 금강산에 가기로 한 걸 연기해서 2년 후인 2000년에 갔습니다. 막상 가보니 신변보장도 잘돼 있고, 아무 일 없이 다녀온 걸 괜히 늦췄다는 후회도 들었습니다.
 

손가락이 짧아 피아노를 버리고
작곡가가 된 사연

장광팔 ‘그리운 금강산’을 비롯한 가곡 외에 기악곡에도 관심이 많으시지요?

최영섭 제가 이제 90세 나이로 접어들었으니깐, 이제 남은 세월은 가곡 외에 기악곡을 중심으로 한 나머지 곡을 고치면서 보내려 합니다. 이래저래 4~5년쯤 걸릴 거라 생각됩니다만, 그때쯤이면 하느님께서 지구에 그만 있고 올라와보라고, 그렇게 말씀시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장광팔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으니 다음에 뵙겠다고 전하십시오.(웃음) 작곡가가 된 계기가 특별하다고 들었습니다.

최영섭 경복중학교 3년 때부터 작곡 공부를 했어요. 지금도 쇼팽곡이나 베토벤 곡을 곧잘 칩니다만, 그전에는 원래 피아노를 했어요. 그런데 해방되던 해 늦가을에 저를 가르치시던, 훗날 숙명여대 음악대학 피아노과 주임교수로 퇴임을 하신 구연서 교수님께서 한번은 레슨을 끝내고 부르시는 거예요. 이분이 뭔가 얘기를 하고 싶은가 본데, 얘기를 안 하세요. “선생님 무슨 하실 말씀 있으신 것 같은데 말씀해주세요.” 그랬더니 “그러면 내가 얘기하지.” 뜸을 들이시다 피아노 위에 손을 내보래요. “자네 손가락이 긴가 짧은가?” “제가 보더라도 좀 짧습니다.” “맞아. 지금껏 얘기를 안 했는데 조금 짧네. 현재까진 괜찮아. 모차르트, 베토벤, 쇼팽 초기 작품 정도는 말이야. 그런데 앞으로 쇼팽의 후기 작품, 프란츠 리스트, 드뷔시, 러시아 차이콥스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등 이런 곡을 연주하려면 이 손가락 길이론 힘들어. 지금까지 공부한 걸 버리라는 게 아니고, 이미 몸에 배 있으니 그걸 바탕으로 이제부터 작곡을 해보게”라고. 그날 저는 주체할 수 없도록 눈물을 흘렸죠. 지금까지 열심히 한 걸 다 버리고 이제 작곡을 공부해야 한다니….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작곡으로 돌리길 잘했어요. 그래서 2년 동안 열심히 작곡법, 화성악을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부했어요. 임동혁 이화여대 작곡과 주임교수님한테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레슨을 받았습니다. 1주일 숙제를 다 해가면 음악노트 한 권이에요. 정말 새벽 3시 이전에 자본 적이 없어요. 숙제한 걸 레슨 날 갖다 바칩니다. 한 권이 20~30쪽 되지 않습니까. 한두 쪽 보시면서 “음, 음 내가 얘기한 걸 잘 이해한 것 같아요.” “음, 음.” 그러다 “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제가 보니까 틀렸어요, 깜박해서. 그러면 나머지는 보지도 않고 노트를 북북 찢어버려요. 그리고 큰소리로 “다시는 우리 집에 오지 말아요. 나는 학생 같은 사람을 가르칠 시간이 없어요.” 저는 그냥 무릎 꿇고 울었어요. 선생님이 저더러 신발 신고 밖으로 나가래요. 그러면 사모님께서 금세 뒤따라 나와선 “최 군, 저 양반은 우리 가족한테도 그러니 아무 생각 말고 10분 내지 20분만 가만히 있어봐요. 그럼 바깥양반이 들어와서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레슨을 다시 시작할 거예요”라고. 아니나 다를까 “어 최 군, 왔구나, 왔어. 레슨 어디부터지?” 조금 전 일은 벌써 다 잊어버리셨어요. “저… 선생님이 아까 다 찢어버리셨어요.” “아 그랬었지. 앞으로 다신 연습문제 내줄 때 음 하나라도 틀리면 안 돼요. 그땐 나하고 이별이야.” 그 이후로 새벽 4시 이전에 자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2년을 하니까 임동혁 교수님이 “이제 작곡 좀 해도 돼요.” 그러시는 거예요. 얼마나 기분이 좋던지, 시집을 여러 권 사주시면서 “마음에 있는 걸로 곡을 붙여봐요.” 그해부터 작곡을 하기 시작했는데, 경복중학교 5학년 때였죠.

장광팔 그때 600곡 넘게 작곡해야겠다고 목표를 세우셨다지요?

최영섭 작곡을 시작하면서 슈베르트가 ‘가곡의 왕’이라 하는데, 나도 동양의 슈베르트처럼 600곡은 넘어야지 결심하고 얼마 전 665곡집을 완간, 출판하게 됐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사실 슈베르트 곡 중 실제 악보로 남아 있는 것은 100곡도 안 돼요. 500곡 정도가 분실된 거죠. 그런데 저는 일곱 권 안에 665곡이 활자 악보로 살아 있습니다. 중학교 5학년 때 결심한 걸 이제야 겨우 71년 만에 달성했구나 하고 세월을 되짚어보게 됩니다.

장광팔 경복중학교 졸업하던 해에 작곡 발표회를 가지신 걸로 아는데요.

최영섭 11곡을 발표했어요. 피아노 모음곡 1곡, 환상곡 1곡, 가곡 8곡, 바이올린 곡 1곡이었어요. 그때가 6·25 전인데 어린 나이에 어떻게 작곡 발표할 생각을 했나, 지금 생각해도 당돌했던 것 같습니다.
 

어릴 적 듣던 경기 뱃노래, 음악과의 숙명적인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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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광팔 어린 시절로 돌아가보실까요? 고향이 강화도이시죠. 평소 어머니 말씀을 자주 하시던데, 특히 어머니와의 추억이 많으신 것 같아요.

최영섭 아, 어느 누군들 안 그렇겠습니까만, 세상에 어머니처럼 귀한 존재가 어디 있겠습니까. 벌써 돌아가신 지 20여 년 되는데, 음악밖에 몰라서 부모님께 외아들로서 효도 한 번 못했어요.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땐 이미 늦었죠. 그래서 요 20년 동안 아침저녁으로 어머니와 아버지의 영혼을 위해 기도를 드립니다. ‘제가 불효자였습니다 용서해주세요.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편안히 쉬세요.’ 저와 누님, 13살 아래인 누이동생, 이렇게 강화에서 어렵게 살았습니다. 어머닌 안되겠다 싶었는지 길상국민학교 2학년 때 누나와 나를 데리고 서울 쪽으로 올라왔어요. 초지에서 서너 사람이 겨우 탈 조그만 배를 어머니와 외삼촌이 노를 저으면서 바다를 건너 김포로 가는 거예요. 김포에서 걸어서 무작정 서울로 갈 작정이었어요. 강화인조를 머리에 이고 다니시면서 판 돈을 근근이 모아서 방 하나 얻으면 공부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셨던 거죠. 그런데 김포에 내려서 한참 걸어 도착한 데가 인천이에요. 그 근처에서 적당한 방 하나를 구해 눌러앉았어요. 인천광역시 동구 화평동 20번지입니다. 그래서 그곳 인천 창녕국민학교에 다니게 된 거예요.

지금도 또렷이 떠오르는 광경은 전학 가기 전 길상국민학교 뒤 성곽 안에 자리 잡은 전등사 안으로 들어가 동무들은 빨간 보리수를 따서 호주머니에 잔뜩 넣어 내려오곤 했는데, 나는 연평바다가 다 보이는 꼭대기에 올라가 바람결에 실려 오는 뱃노래를 들으면 가슴이 뛰었어요. 경기 뱃노래였는데, 그때는 ‘이게 무슨 소리야?’ 저쪽에서 요만한 배가 어느 정도 크게 보일 때까지 점점 뱃노래는 또렷이 들려오는데, 난 거기에 미쳐서 숨이 멎어 움직일 수가 없었어요. 그때부터 평생 음악을 하게끔 숙명적으로 정해진 모양이에요.

강화는 종교적으로 감리교가 강합니다. 감리교 유치부에서 으레 크리스마스 때 제가 뽑혀서 노래하면서 유희를 했어요. “그 어리신 예수 누울 곳이 없어” 하면서 노래를 불렀는데, 한번은 제 순서를 2시간 가까이 기다리다 잠이 들었어요. 내 차례가 됐는데도 잠이 들어서 노랠 못 했어요. 잠깐 졸다 깨어났더니 어쩌자고 90년이란 세월이 흘러갔나 몰라요.

제기차기, 구슬치기, 팽이치기 등 노는 데만 열중해서 공부를 안 하니까 전교 꼴찌를 했어요. 그때 외삼촌이 나를 끌고 교장실로 데리고 가는 거예요. “공부 안 하는 장난꾸러기인데, 교장선생님 얘 회초리 좀 쳐주세요.” 교장이 일본 분이었는데, “이런 학부형도 계시나” 하며 종아리를 걷으라 하고 회초리로 딱 한 대 때리셨어요. 당시 아픈 것보다 깨달음처럼 정신이 번쩍 나더라고요. 그때부터 전교 일등을 했어요.
 

인천중학교 밴드부 시절, 훗날 관현악 편곡의 자양분

장광팔 당시는 중학교가 6년제였는데, 인천중학교에 입학하셨죠?

최영섭 서울 경복중학교에 가서 음악 공부를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이화고녀에 다니던 누님이 기차 통학은 시간낭비고 인천중학교도 좋으니 거기 가는 게 좋겠다고 해서 인천중학교로 간 거예요. 그런데 일생일대 행운이었던 건 밴드부에서 어떤 악기든지 내가 만져볼 수 있는 거예요. 방과 후 5시가 되면 밴드부 강당 뒤 악기대로 달려갑니다. 플루트, 클라리넷, 오보에도 해보고, 트롬본, 트럼펫도 불어보고 다 해봤어. 피아노 배우다가 해방되던 늦가을에 작곡 공부를 하기 시작했는데, 훗날 관현악곡을 2600곡이나 편곡했습니다. 그 한 곡 한 곡 편곡할 때마다 ‘내가 인천중학교 때 밴드부에서 여러 악기를 만져본 것이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하는 감사한 생각을 가졌습니다.

장광팔 인천중학교에서 평소 가고 싶던 경복중학교로 편입해서 피아노 공부를 하시다 작곡으로 바꾸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외국어는 언제 그렇게 공부하셨어요?

최영섭 제가 인천중학교 3학년 해방되기 전날인 8월 14일까지 공부한 영어·독일어 실력으로 평생을 불편하지 않게 살았어요. 좋은 문장은 무조건 외웠어요. 중학교 3학년 때 독일 시인 쉴러의 ‘환희의 부침’을 외웠는데, 지금도 암송해요. (독일어로 암송을 해 보이신다.)

장광팔 경복중학교 졸업할 때 작곡 발표회까지 하시고, 서울대 음대로 진학하셨죠?

최영섭 네. 서울대 음대 작곡과에 들어가니깐 그동안 작곡 레슨을 해주시던 이화여대 임동혁 교수님이 김성태 선생님께 저를 부탁하셨대요. 그래서 나하고 이남수, 홍연택 이렇게 세 사람이 김성태 선생님 제자가 됐어요. 그런데 나는 작곡 발표회도 했고, 이미 화성악, 대위법, 작곡법 다 떼고 선생님한테 관현악법 원리를 배우고 있는데, 자기네들은 도미솔파라도 솔시레 연결법을 그때부터 해야 하니 안되겠다 싶어 지휘로 돌아섰어요. 두 사람 다 세상을 떠났지만 이후 지휘자로서 이름을 날리고 성공했죠. 이남수는 KBS 교향악단 부지휘자로 재직하다가 유럽에 가서 공부하여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지휘과 수석교수가 됐고, 홍연택은 국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를 지냈지요. 모두가 잘된 거예요.
 

“머리 안 돌아가고 손가락 못 놀릴 때까지
오선지에 악상을 그려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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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금강산 개정판>의 수정된 한 소절을 오선지에 그려 넣고 있다.

장광팔 ‘그리운 금강산’은 어떤 계기로 작곡하게 된 건지 궁금합니다.

최영섭 1962년 6·25 전쟁 12주년 기념식에 연주하려고 당시 문교부가 1961년 KBS에 의뢰했어요. 한상억 시인이 노랫말을 쓰고, 제가 곡을 붙인 칸타타 ‘아름다운 내 강산’의 삽입곡, 즉 교향적인 합창 모음곡 중 하나입니다. 물론 ‘그리운 금강산’이 예술의전당 선정 국민 애창가곡 50가곡 중 1위를 차지했지만, 제 소원은 제 생전에 남북 평화통일이 되어 ‘그리운 금강산’을 부를 필요가 없는 그날이 오기만을 염원합니다.  

장광팔 스승이신 김성태 선생님을 무척 존경하셨지요. 2012년 작고하시기 전까지 제가 최영섭 선생님께 세배 가려 하면 “장 선생, 나 김성태 선생님께 세배 가는 길이에요” 하시던 기억이 납니다.

최영섭 선생님께서 103세에 작고하셨는데, 매해 집사람하고 새로 맞춘 한복을 차려입고 정월 초삼일에 세배를 갔어요. 당시에는 제가 음악 재벌이었어요. 지금은 안 그렇지만.(웃음) 선생님은 경평전에도 출전한 축구선수 출신이라 “다리가 튼튼해야 한다”며 맥주병으로 정강이 마사지하는 시범을 보이셨지요. 선생님 100세 기념 연주회를 후배들과 열어드린 일이 엊그제 같습니다. 스페인 작곡가 로드리고라는 사람이 102세에 돌아가셨으니까, 103세에 작고하신 김성태 선생님이 지구상에서 최장수 작곡가였지요.

장광팔 김성태 선생님의 장수 기록을 최영섭 선생님께서 갱신하실 것 같습니다. 그것도 현역 작곡가로, 아직도 하실 일이 많이 남으셨으니까요.

최영섭 선생님 연세까지 살려면 10여 년이 남았는데 어려울 것 같아요. 하여튼 노력은 해야죠.
아까도 말씀드렸습니다만, 기악곡, 칸타타, 오페라, 실내악곡 이런 거 다 정리하고 나서 가곡을 또 쓰려고 해요. 머리가 안 돌아가고 손가락을 못 놀릴 때까지 오선지에다 악상을 그려야 해요. 그러면 앞으로 가곡도 100곡 정도 더 작곡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봐요.
 

가장 사랑하는 곡은 ‘그리운 금강산’이 아닌 ‘목계장터’

장광팔 작곡하신 모든 곡이 다 소중하시겠지만, 그래도 어떤 곡에 가장 마음이 가시나요?

최영섭 모두 ‘그리운 금강산’만 내가 사랑하는 줄 알아요. 안 그래요. 670곡 똑같지요, 똑같아요. 그렇지만 특히 내가 마음속으로 좋아하는 것은 ‘그리운 금강산’이 아닙니다. 신경림 시인이 쓴 ‘목계장터’예요. 강화 길상면에 오일장이 설 때마다 아침에 들리던 농악 소리를 떠올리며 순 한국적인 가곡으로 작곡했어요. 그 곡을 마음속으로 제일 사랑해요. 그다음에 판소리의 영향을 받아 작곡한 ‘낙엽을 밟으며’라는 곡이 있어요. 그 곡도 내가 무척 좋아하죠. 이건 정말 저의 고백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제가 지금 예순 살이나 쉰 살이라면 지금껏 하던 순수 클래식은 다 버리고 국악적인 것만 하고 싶어요. 한창 잘나갈 때 가야금 연주나 사물놀이 등 국악 공연을 보면 팔짱 끼고 웃었어요. “유치하게 저걸 음악이라고….” 그런데 이제는 완전히 거꾸로 됐습니다. 제가 쉰 살만 됐어도 꽹과리부터 다시 시작할 거예요. 밤낮을 안 가리고 꽹과리, 징, 장구, 가야금, 거문고, 피리, 해금, 양금 등 순 우리 국악기를 위한 합주곡을 작곡하고 싶어요. 세월이 안 남은 것 같아 “가곡에나마 국악적 요소가 배어나오게 작곡해보자 했죠” 제가 한 20년 전부터 한국적인 가곡을 부르짖으면서 한 작품이 ‘목계장터’ ‘낙엽을 밟으며’ 등이에요. 정선아리랑 관현악 편곡, 정선아리랑 솔로와 합창, 김옥심, 이은주 선생의 ‘이별가’ 등을 S. P. 레코드를 들으며 음을 채보해봤어요. S. P. 레코드를 몇 백 번 들으니까 바늘이 다 파여서 돌아가지 않더라고요. 판이 돌아가지 않을 때에야 겨우 채보를 끝냈어요. 어저께 채보한 것과 오늘 채보한 게 달라요. 특히 ‘정선아리랑’을 내가 너무 좋아합니다. 그래서 곧잘 정선엘 갑니다. (‘정선아리랑’ 노래 가사 전곡을 암송해 보이신다.)

이렇게 나처럼 가사를 2절까지 다 외는 사람은 아마 없을 거예요. ‘정선아리랑’ 가사만 읊어도 이렇게 눈물이 나네요. 왜 그런가 생각했더니 ‘자네는 한국사람 아냐? 뒤늦게 철이 들었어. 20년 전에 겨우 철이 들었는데, 때는 늦었어’ 하는 자각이 들더라고요.

만약 지구촌에 다시 제가 태어나서 음악을 한다면 완전히 국악만 하겠습니다.

장광팔 선생님이 어렸을 때 들으신 뱃노래, 장터에서 들으신 꽹과리 소리, 이런 소리가 선생님 음악 혼에 밴 것 같습니다.

최영섭 그렇습니다. ‘목계장터’만 하더라도 예닐곱 살 때 들었는데요. 새벽 5시 반에 먼저 타악기, 꽹과리 소리가 “딴따따딴” 들리면 “어우, 오늘 장날이야, 장날” 하며 기뻐서 일어나던 기억이 납니다. 저녁 8시나 9시쯤 해가 완전히 져서 어둑해질 때 꽹과리 소리가 아련히 사라지던 기억을 살려 ‘목계장터’ 맨끝 후주에다 “딴띠따단 띠띠다”를 집어넣었습니다.

장광팔 그 외에 사가나 교가도 많이 작곡하셨죠?

최영섭 고등학교, 중학교 교가를 저만큼 많이 작곡한 사람도 없을 겁니다.(웃음) 사회단체 노래, 삼성그룹 사가도 청탁을 받아서 작곡했고, 한전·신한은행 사가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어요. 가곡은 대중가요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사례가 적어요. 그런데 삼성그룹 사가 작곡을 해서 사례금을 받고 놀래 자빠졌습니다. 삼성 어느 회사에서 어디로 보내는 돈을 잘못 보낸 줄 알고 깜짝 놀랐어요. 사례금은 비밀이에요.(웃음)

장광팔 CF 모델도 하셨지요?

최영섭 그걸 기억하세요? OB라거 맥주 광고였는데, “내가 감리교 정동교회 찬양대 상임지휘자인데, 어떻게 주류광고 모델을 하겠느냐”고 극구 사양했으나 제 아들이 잔을 들고, 저는 옆에서 바라보는 것으로 타협을 봐서 촬영했어요. 그때도 사례비를 받고 깜짝 놀랐어요. 모델료는 또 비밀!(웃음)
 

“잠깐 졸다 깨어보니 어느덧 아흔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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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전 팝바이올리니스트 박은주 씨의 반주에 맞춰 소프라노 채미영 씨가 ‘그리운 금강산’을 열창하고 있다.

장광팔 가족관계는 어떻게 되시나요?

최영섭 1954년에 결혼해서 조강지처가 1979년에 세상을 떠났어요. 아들만 셋을 두었는데, 한 아이는 과로로 가슴에 묻고, 큰애가 들국화 최성원인데, 음악을 할까 봐 피아노를 잠그고 다녔어요. 그런데 어느 날 음악 소리가 나서 가보니 기타로 연주를 하고 있더라고요.(웃음) 조강지처는 제가 경제적으로 윤택해지기 전에 위암으로 4년 가까이 투병 생활하다가 세상을 떠났는가 하면, 재혼한 사람은 그냥 제 곁을 떠났어요. 그냥… 10여 년 동안 잘살다가 느닷없이 하루아침에 “이제 그만 살기로 마음먹었다”고 해서 농담인 줄 알았는데, 21년이 지났으니까 이젠 뭐 안 오는 거겠지요. 1주일이나 한 달 후면 돌아오겠지. 아, 1년만 기다리면 오겠지. 3년 기다리면 오겠지. 10년 기다리면 오겠지. 15년 기다리면 오겠지. 작년으로서 만 20년, 올해 들어서 21년째 접어들었으니까 법적으로도 어찌할 바 없는 세월이 기다림 속으로 흘러갔고, 이젠 ‘아무쪼록 잘사시오. 잘사십시오.’ 그런 생각뿐이에요.(목이 멘다) 제가 가정생활을 너무 등한시했어요. 돈이 있으니 잘살 줄만 알고 나는 내 작품 쓰는 것밖에 몰랐는데, 상대방은 그게 아니었어요. ‘이게 무슨 부부생활인가?’ 하면서 내 곁을 떠나기로 굳게 마음먹은 거겠지요. 괜한 푸념을 한 듯싶네요.

장광팔 90세이신 선생님의 진솔한 고백에 머리가 숙여집니다. <여성조선> 독자들에게 덕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최영섭 유년부 어린 시절 내 노래 순서 기다리다 잠깐 졸다 깨어나니 아흔이더라고요. 엊그제 더워서 쩔쩔맸는데, 지금은 추워서 쩔쩔매요. 매순간을 영원처럼 가족들을 사랑하며 사세요. 바쁜 일 마치고 사랑해야지 하면 늦습니다. 새해에는 옆 사람을 사랑하는 한 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최영섭 작곡가 프로필
1929년 강화도 길상면에서 출생, 강화도 길상국민학교를 거쳐 인천중학교에서 구연서 선생에게 피아노를 배웠다. 이후 경복중학교에 편입, 임동혁 선생님께 작곡을 배우고 경복중학교 6학년 때 작곡발표회를 가졌다. 서울대 음대 작곡과에 들어가 김성태 선생에게 작곡을 사사하고 오스트리아 빈 음대로 유학해 지휘와 작곡을 공부했다.
아들은 들국화 베이스기타리스트 겸 보컬리스트이고,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 최창권의 동갑네기 5촌 숙부이기도 한 음악가족이다. 지금까지 가곡 670곡을 작곡했고, 관현악 2600곡을 편곡하였으며, 대한민국 방송대상, MBC방송대상, MBC 가곡공로대상을 수상한 데 이어 국가로부터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등록일 : 2018-02-12 08:16   |  수정일 : 2018-02-12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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