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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의 비밀아지트였던 길상사...대원각은 박헌영 비자금으로 만들었다?

⊙ 박헌영의 동복이부(同腹異父) 누이 조봉희가 대원각 원래 주인 … ‘기생 간첩’ 김소산은 박헌영 조카
⊙ “김소산이 김영한에게 관리 맡겼는데 1955년에 자야의 손으로 넘어갔다”
(박헌영 아들 원경 스님 주장)
⊙ 1970년대 서울 3대 요정 중 하나 …, 김영한이 법정 스님에게 희사해 1997년 길상사 건립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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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원각은 1970년대 서울 3대 요정 중 하나였다. 사진은 길상사의 본전인 극락전.
서울 성북동 길상사(吉祥寺). 입구에는 ‘대학입학수능입시 100일 기도’라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일주문 안으로 들어서니 ‘기와불사 접수처’가 보인다. 법정(法頂・1932~2010) 스님의 무소유(無所有) 정신에 공감한 공덕주(功德主)의 보시로 세워진 절이지만 이런 점에서는 다른 절과 비슷했다.
 
  길상사는 1970년대 서울 3대 요정(料亭·삼청각, 청운각, 대원각) 중 하나인 대원각 자리다. 대원각 주인 김영한(金英韓·1916~1999)씨가 1995년 법정 스님에게 보시, 1997년 길상사로 거듭났다. 당시 1000억원에 달하는 재산을 내놓은 결단도 놀라웠지만 김영한씨가 월북(越北)시인 백석(白石·1912~1996)의 애인이었다는 것도 화제가 됐다.
 
  길상사가 있던 대원각은 박헌영의 비자금으로 세워졌다는 주장이 있다. 유명한 ‘기생 간첩’ 김소산도 이 대원각의 기생이었다고 한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은 박헌영(朴憲永·1900~1956)의 아들 원경(박헌영과 그의 신변을 돌보아 주던 정순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스님이다.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원경 스님이 주장해 온 바를 재구성해 보기로 하자.
 
 
  박헌영의 누이
 
남로당 당수 박헌영.
  이야기는 남로당 당수 박헌영의 집안 내력으로부터 시작된다. 박헌영은 1900년 5월 1일 충남 예산군 신양면에서 미곡상 박현주의 서자(庶子)로 태어났다. 박헌영의 어머니는 충남 서산 출신의 이학규였다. 이학규는 예산군 광시면 서초정리에서 국밥집을 하는 과부였다.
 
  서초정리에는 금광이 있었다. 이학규는 광부들에게 밥과 술을 팔고 하숙을 쳤다. 이학규가 서초정리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은 서초정리의 금광을 발견한 사람이 그녀의 전 남편이기 때문이었다. 이학규의 남편은 조씨 성을 가진 양반집 둘째 아들이었다. 이학규와 조씨 사이에는 조봉희라는 딸이 있었다.
 
  조씨가 폐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조봉희는 일찌감치 서울에 있는 할아버지에게 보내졌다. 조씨가 죽은 후 한동안 금광은 이학규가 경영했다. 여자의 몸으로 억센 광부들을 다루면서 금광을 했다니, 상당히 대찬 성격이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박현주를 알게 됐고 두 사람 사이에는 아이가 생겼다. 이 아이가 박헌영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조씨 집안이 이학규를 내쫓았다. 이학규는 땅을 사서 집을 짓고 국밥집을 했다. 박현주의 본부인이 죽은 후 이학규는 박현주와 살림을 합쳤다. 박헌영의 나이 다섯 살 때였다.
 
  어머니가 쫓겨나는 것을 본 조봉희는 열다섯 나이에 중이 되겠다고 집을 나갔다. 절에서 조봉희는 권번(券番)을 하는 한 여인을 만났다. 그의 손에 이끌려 조봉희는 기생이 됐다. 어느 정도 신학문을 공부했고 미모와 재능이 있던 조봉희는 주목받는 기생으로 성장했다.
 

 
  ‘기생 간첩’ 김소산은 박헌영의 조카
 
1973년 윤정희 주연의 영화 〈기생 김소산〉.
  조봉희의 머리를 올려 준 사람이 전북의 만석꾼 김병순이다. 김병순과 조봉희 사이에서 아들과 딸이 태어났다. 아들은 김제술, 딸은 김소산이었다. 조봉희가 박헌영의 동복이부(同腹異父) 누나이니, 이들은 박헌영의 조카가 되는 셈이다. 김제술은 후일 도쿄제국대학을 나왔다.
 
  김제술은 막후에서 박헌영의 최측근 참모 역할을 했다. 박헌영이 월북한 후 해주에 있던 그와 남한에 있는 남로당 조직 사이에서 연락을 맡았다고 한다. 남로당 조직이 와해된 후에는 한산이라는 법명으로 승려 노릇을 하면서 박헌영의 아들 박병삼(원경 스님)을 돌보다가 1968년 사라진다.
 
  원경 스님은 김제술의 실종과 그해 있었던 제주도 앞바다에서 북한 무장간첩선이 격침된 사건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측한다. 그렇다면 김제술은 6·25 후에도 승려로 위장하고 암약한 간첩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한편 김소산은 어머니의 피를 따라 기생이 됐다.
 
  대원각과 국일관에서 활동하면서 관계·법조계·재계 인사들과 접촉하다 1949년 특별수사본부에 체포됐다. 6·25 후 인민군 장교로 모습을 나타냈다가 9·28 서울수복 후 체포돼 1·4후퇴 직전 처형됐다. 그녀의 이야기는 1973년 윤정희·최무룡 주연 영화 〈기생 김소산〉으로 만들어졌다.
 
  김병순에게는 본처와의 사이에 김해균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김제술·김소산과는 이복(異腹) 형제다. 김해균은 도쿄제국대학을 나와 보성전문 강사를 지냈다. 그는 박헌영의 재정적 후원자가 됐다. 해방 후 박헌영이 조선공산당을 재건한 서울 혜화동의 한옥집이 바로 김해균이 제공해 준 집이었다.
 
 
  각계 인사들에게 향응 베풀어
 
박헌영의 아들 원경 스님.
  원경 스님은 《박헌영 트라우마》(2013년, 손석춘 지음)라는 책에서 “조봉희는 대원각의 주인이었다. 조봉희 여사가 권번의 수양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겁니다”라고 증언했다. 그는 해방 후에 김소산이 운영하던 대원각을 박헌영에게 내주었지만 박헌영이 ‘신변 안전에도 좋지 않고 또 내가 이런 큰 집에 사는 것도 이율배반적’이라면서 마다했다고 증언했다.
 
  그런데 원경 스님은 2010년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는 “당시 모 인사가 항일독립운동에 써 달라며 박헌영에게 거액을 기부했고, 박헌영은 이 돈으로 대원각을 지었다”고 했다. “박헌영이 자기 사람(조봉희)를 가짜 명의로 내세워 대원각을 지은 뒤 자야를 비자금 세탁창구로 이용했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원경 스님의 두 증언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대원각이 원래 조봉희가 수양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인지, 박헌영이 비자금으로 마련한 것인지 상충된다. 어쩌면 조봉희가 물려받은 요정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박헌영의 비자금이 들어갔을 수도 있다.
 
  대원각은 어떤 용도로 쓰였을까? 오재호의 《실록소설 표적》을 보면 김소산이 돈암동의 요정에서 사상검사(공안검사)와 법조인, 대공경찰, 재계인사들에게 향응을 베풀었다는 얘기가 나온다. 이곳을 찾는 정치인, 공무원, 경찰, 법조인, 경제인 등에게서 나오는 고급정보들이 남로당에게 들어갔을 것이다.
 
  원경 스님도 대원각에 갔던 기억이 있다. 1950년 봄 김삼룡·이주하가 잇달아 체포되면서 남로당 조직이 와해됐을 때의 일을 원경 스님은 이렇게 회고했다.
 
  〈그때 한산 스님이 어떤 큰 기와집에 나를 보내서 어떤 누나를 찾아오라고 했어요. 그래서 그곳에 갔더니 예쁜 누나들이 많았는데 그중에서도 참으로 예쁜 누나가 ‘네가 이곳에 웬일이냐고 반기는 거예요. 한산 스님이 일러준 대로 귓속말로 이야기를 전하니 급히 나를 데리고 한산 스님을 만난 후에 며칠 있다가 떠났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때 그곳이 무슨 요정이 아닌가 해요. 그렇게 살다가 나를 데리고 지리산 화엄사로 갔어요. 그때 그 누나가 김소산이었어요.〉
 
  (《이정 박헌영 전집 제8권》)
 
 
  백석과 자야
 
대원각의 등기부 등본. 가운데 점선 부분에 조봉희, 오른쪽 아래에 김영한의 이름이 보인다.
  원경 스님의 주장에 의하면 대원각의 주인은 조봉희의 수양어머니-조봉희-김소산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널리 알려진 것처럼 대원각의 마지막 주인은 김영한씨다.
 
  김영한씨는 쇠락한 양반가의 딸로 16살 때 하규일의 밑에서 진향(眞香)이라는 이름을 받아 기생이 됐다. 1938년 시인 백석과 서울 청진동에서 동거를 시작했지만, 백석 부모의 반대로 28일 만에 헤어져야 했다. 백석은 진향에게 자야(子夜)라는 이름을 지어 줬다.
 
  백석의 시(詩)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 속에 나오는 나타샤는 바로 자야, 김영한씨라고 한다. 이 시에서 백석은 〈나타샤와 나는/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당나귀 타고/산곬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곬로 가 마가리(오두막집의 방언- 기자 주)에 살자〉고 노래한다.
 
  길상사 내에 있는 김영한씨의 사당 앞에 있는 안내판에 의하면 ‘1955년 바위 사이 골짜기 맑은 물이 흐르는 성북동 배밭골을 사들여 대원각이란 한식당’을 만든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원경 스님의 주장은 이렇다.
 
  〈대원각에 김영한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기생 명으로는 자야입니다. 백석 시인하고 28일 동안 동거를 했다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한테 재산권이 가게 된 이유가, 1949년에 김소산이라는 여간첩 사건이 터지면서입니다. … 김소산이 감옥에 갈 때, 당신이 나올 때까지 ‘새끼 기생’이던 자야에게 책임지고 관리를 하라 했어요. 그랬는데 1950년에 전쟁이 났어요. 그래서 피란도 가고 복잡한 전쟁의 와중에 수복 후 자야가 당시 국회부의장이던 이재하(이재학의 잘못-기자 주)의 애첩이 됩니다. 그러고는 이재하와 결탁해서 1955년에 대원각 등기를 자기 앞으로 바꿔 버려요. 그렇게 자야의 손으로 넘어간 거예요.〉 (《박헌영트라우마》).
 
  이러한 이야기는 원경 스님의 주장이다. 아마 원경 스님은 자신을 돌봐주었던 김제술(한산 스님)로부터 들은 얘기일 것이다. 실제로 대원각의 등기부 등본을 보면 조봉희의 이름과 김영한의 이름이 보인다.
 
  원경 스님은 《박헌영트라우마》 등에서 “김영한은 나에게 대원각을 돌려주겠다고 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다가 난데없이 법정 스님에게 대원각을 희사했다는 것이다. 김영한씨도, 법정 스님도 세상을 떠난 지금, 그걸 확인해 줄 사람은 없다.
 
 
  자야의 소원
 
법정 스님. 2008년 4월 길상사 봄 정기법회 때의 모습이다.
  김영한씨가 법정 스님에게 대원각을 희사하게 된 것은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감명을 받아서였다고 한다. 김영한씨는 1987년 법정 스님에게 대원각을 시주하겠으니 절로 만들어 달라고 했다. 법정 스님은 사양했다. 8년여의 설득 끝에 1995년 6월 법정 스님은 김영한씨의 뜻을 받아들여 송광사 말사(末寺) 대법사로 등록했다.
 
  이때 법정 스님은 김영한씨에게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을 주었다. 1997년에는 절 이름을 길상사로 바꾸었다. 법정 스님은 길상사 회주(會主)를 맡았다. 그해 12월 14일 길상사 창건 법회에서 김영한씨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죄 많은 여자입니다만 …. 저는 불교를 잘 모릅니다만 … 저기 보이는 저 팔각정은 여인들이 옷을 갈아입는 곳이었습니다. 저의 소원은 저곳에서 맑고 장엄한 범종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
 
  여인들이 옷을 갈아입던 팔각정이 종루가 된 것처럼, 대원각의 다른 건물들도 탈바꿈했다. 1950~1970년대 한국 정치를 주무르던 정치인들의 호언(豪言)과 여인들의 간드러진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던 건물들은 극락당, 지장전, 설법전 등으로 바뀌었다. 경내의 크고 작은 건물들도 스님들의 숙소나 불자(佛子)들의 기도처가 됐다.
 
  1999년 11월 14일 김영한씨는 83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그는 “1000억 재산이 백석의 시 한 줄만 못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죽기 전에 서울 서초구에 있는 122억원 상당의 건물을 “과학기술 발전에 써 달라”며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 기부했다. 법정 스님은 2010년 3월 11일 세상을 떠났다.
 
대원각을 시주한 김영한씨를 기리는 길상화공덕비와 사당.
  기자가 길상사를 찾던 날, 길상사 한쪽에서는 중학생들이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에 대해 토론을 하고 있었다. 자야와 백석의 애련(哀戀)은 그렇게 시(詩)로 남았다. 하지만 박헌영과 이리저리 얽힌 조봉희, 김제술, 김소산, 김해균 같은 붉은 혁명가들, 그리고 ‘요정정치’시대의 기억들은 역사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제 대원각의 진실을 알고 있는 것은 절 한구석에 있는 165년 된 느티나무뿐일지도 모른다.⊙
등록일 : 2017-09-11 09:35   |  수정일 : 2017-09-11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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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빠는조선일보  ( 2017-10-26 )  답글보이기 찬성 : 0 반대 : 0
아마 방씨일가도 저기서 엄청 쳐먹었을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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