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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비행사와 자전거 왕, 비행기 하면 안창남, 자전거 하면 엄복동

광희문통의 황금정길, 남대문에서 광화문까지의 길, 교동(校洞)길, 창덕궁 앞길, 동물원길, 창의문(彰義門)길 거의 어느 길 아니 보이는 곳이 없었고 어느 큰 집이나 어느 작은 집이나 아니 보이는 집이 없었습니다

⊙ ‘제일 먼저 눈에 뜨이는 것은 남대문… 독립문은 몹시도 쓸쓸해 보였다’(안창남)
⊙ ‘꿩을 쫓는 매의 형세로 달려서 선두에 서기를 시작하더니…’(엄복동)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 대한민국 최초의 민간 비행사 안창남과 자전거 왕 엄복동(오른쪽).
  안창남(安昌南·1901~1930)과 엄복동(嚴福童·1892~1952)은 근대의 얼굴이다. 안창남은 대한민국 최초의 민간 비행사였고, 엄복동은 수많은 자전거 대회에서 일본인을 물리친 철각의 영웅이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의 영웅 손기정(孫基禎·1912~2002)이 등장하기 전까지, 안창남과 엄복동은 식민지 한국인의 긍지를 세운 거인이었다. 또한 두 영웅이 몬 비행기와 자전거는 근대를 앞당긴 신문물의 상징이기도 했다.
 
  중추원 의관의 아들인 안창남은 17세 때 미국인 비행사(아트 스미스)가 한반도 상공에서 펼친 곡예비행에 반해 비행사를 꿈꾸며 1919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도쿄의 비행기 제작소에서 비행기 제작기술을 익힌 뒤 1920년 오쿠리 비행학교에 입학, 석 달 만에 3등 비행사가 된다. 1922년 11월 6일 일본제국 비행협회가 주최한 도쿄~오사카 간 왕복 우편비행대회에서 최우수상을 타면서 비행사의 꿈을 이뤘다.
 

  안창남이 1923년 《개벽》 1월호에 발표한 〈공중에서 본 경성과 인천〉은 벅찬 감격의 글이다. ‘한강의 물줄기는 땅에서 보던 것보다 몇 갑절 푸르게 보이고, 빛 고운 남색의 비단 허리띠를 내던져 놓은 것 같다’고 한 표현은 당대 어느 문인보다 문학적이고 사실적이다. 경복궁 안 대궐을 ‘우거진 잡초를 덮어쓴 집같이 한산하고 쓸쓸하다’고 한 표현은 식민지 현실을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마치 카메라로 찍듯 1920년대 서울 도심의 오밀조밀한 모습을 완벽하게 재현하고 있다.
 
  은륜(銀輪)의 왕 엄복동은 식민지 자전거 대회에서 일본 선수들을 물리친 불세출의 영웅이었다.
 
  그가 유년시절을 보냈던 서울 관철동엔 중국인 피혁상들이 많았다. 피혁을 주로 자전거로 실어 날랐는데 자전거포 점원을 하며 자전거 기술을 익혔다고 전해진다. 22세 때인 1913년 ‘전(全)조선 자전거대회’에서 우승하면서 유명세를 탔다. 일제의 방해와 회유에도 우승을 놓치지 않았다.
 
  《월간조선》이 소개하는 3개의 기사는 《조선일보》 1923년 5월 7일 자와 8일 자 석간 3면에 게재됐다. 7일 자 기사 〈자전거계의 비장(飛將)… 20회 경주의 월계관은 엄복동 군〉은 ‘꿩을 쫓는 매의 형세’로 달려 일본인 선수를 앞지른다는 내용이다. 마치 현장의 아나운서가 생중계하듯 사실적으로 대회를 스케치하고 있다.
 
  이튿날 5월 8일 자 〈자전거경기회 최종의 결승전에 1등은 일본 사람이, 엄복동은 3등으로〉라는 제하의 기사는 엄복동이 억울하게 3등을 차지하자 성난 군중이 소란을 피워 체포됐다는 내용이 중심이다.
 
  바로 아래 〈전조선 자전거 경기… 엄복동 군이 승첩〉 기사는 4월 29일과 30일 경남 마산에서 열렸던 대회에서 우승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성격이 완전히 다른 내용의 기사를 아래위로 배치, 엄복동의 우승을 두드러지게 했다. 두 대회의 개최 시점도 달랐지만 마치 같은 시기 서울과 마산에서 자전거 대회가 열린 것처럼 만들었다.
 
  원문을 살리되 현대 표준어에 맞게 고쳤다.
 

  공중에서 본 경성과 인천
  안창남
 
안창남의 〈공중에서 본 경성과 인천〉이 실린 1923년 《개벽》 1월호 표지.
  경성의 하늘! 경성의 하늘!
 
  내가 어떻게 몹시 그리워했는지 모르는 경성의 하늘! 이 하늘에 내 몸을 내리울 때 내 몸은 그저 심한 감격에 떨릴 뿐이었습니다.
 
  경성이 아무리 작은 시가(市街)라 합시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도시라 합시다. 그러나 내 고국의 서울이 아닙니까. 우리의 도시가 아닙니까.
 
  장차 크게 넓게 할 수 있는 우리의 도시, 또 그리할 사람이 움직이고 자라고 있는 이 경성 그 하늘에 비행기가 나르기는 결코 1, 2차가 아니었을 것이나 그 비행은 우리에 대한 어떤 의미로의 모욕, 아니면 어떤 자는 일종의 위협의 의미까지를 띤 것이었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 잘하나 못하나 우리끼리가 기뻐하고 우리끼리가 반가워하는 중에 우리끼리의 한 몸으로 내가 날을 수 있게 된 것을 나는 더할 수 없이 유쾌히 생각하였습니다. 참으로 일본서 비행할 때마다 기두(機頭)를 서천(西天)으로 향하고 보이지도 않는 이 경성을 바라보고 오고 싶은 마음에 가슴을 뛰노이면서 몇 번이나 눈물을 지웠는지 알지 못합니다.
 
  아아, 내 경성의 하늘! 어느 때고 내 몸을 따뜻이 안아줄 내 경성의 하늘! 그립고 그립던 경성의 하늘에 내 몸을 날리울 때의 기쁨과 감격은 일생을 두고 잊히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리고 아울러 이번 인천의 방문을 무사히 마치게까지 많이 주선해 주시고 성원해 주신 여러분의 후하신 정을 영구히 잊지 못하겠습니다.
 
  경성 방문의 일(日), 12월 10일은 의외에 일기가 차서 이번에 불완전한(방한의 준비도 없는) 비행기로는 도저히 비행할 수 없는 일이었으나 그래도 날아본다고 남대문 위를 넘어 광화문 위까지는 왔으나 북악산에서 날이 질리는 바람에 비행기가 남으로 남으로 흐르면서 기계는 얼어 ‘프로펠러’가 돌지를 아니하게 되어 기체는 중심을 잃고 좌우로 기우뚱 기우뚱 흔들리면서 그냥 낙하될 듯한 위험한 형세임으로 어찌하는 수 없이 급히 경성 시가의 서반(西半)만 1회(廻)하고 곧 여의도로 돌아왔습니다.
 
  제2일, 13일은 전날 밤에 늦게야 여관에 돌아와 피곤이 자다가 이날 일기가 적이 눅어졌다는 말을 듣고 곧 일어나 이날 오후에 경성 방문과 인천 방문을 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오후 3시에 여의도를 떠날 예정이었으나 기계고장으로 1시간 이상이나 늦어서 경성을 향하고 비행장을 이륙하기는 4시10분이었습니다.
 
  비행장에서 1100미돌(米突·미터-편집자주) 이상을 높직이 뜨니까 벌써 경성은 들여다보였습니다. 뒤미처 제일 먼저 눈에 뜨이는 것은 남대문이었습니다. 아무 때 보아도 남대문은 서울의 출입구 같아서 반가운 정이 솟아나지마는 비행기 위에는 아물아물한 시가 중에 제일 먼저 또렷하게 보이는 것이 동대문과 남대문이라, 남대문이 눈에 보일 때 나는 오래간만에 돌아오는 아들을 대문 열어놓고 기다리는 어머니를 바라보는 것같이 “오오 경성아!” 하고 소리치고 싶게까지 반가웠습니다.
 
  비행기 위에서 기쁨에 뛰노는 가슴을 진정하려 애쓰면서 나는 먼저 용산 정거장과 남대문 정거장의 사이를 비스듬히 지나 만리재(峴)를 넘어 공덕리와 마포 방면을 한 발 휘휘 돌았습니다.
 
안창남의 〈공중에서 본 경성과 인천〉 첫 장.
  한강의 물줄기는 땅에서 보던 몇 갑절이나 푸르게 보여 위에서 널따랗게 내려다보기에는 그야말로 빛 고운 남색의 비단 허리띠를 내던져 놓은 것 같고 그 갓으로(가장자리로-편집자주) 서강안(西江岸) 공덕리에 이르기까지에 군데군데 놓여 있는 초가집은 겨울에 말린(枯) 잔디같이 보여서(미안한 말씀이나 사실대로 숨기지 말고 쓰라면) 마치 때 마른 무덤(墳塚)이 도둑도둑 놓여 있는 것같이 보였습니다. 우리의 주택이 분총같이 보인다는 것은 말하기에도 자미(滋味)롭지 못한 일이나 몹시 급한 속력으로 지나가면서 흘깃 내려다보기에는 언뜻 그렇게 보일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공덕리 위를 지날 때에는 멀리 독립문 밖 무학현(峴) 너머 홍제원 시내(溪)의 모래밭까지 보이는데 그곳은 내가 보통학교에 다닐 때에 운동연습으로 또는 원족회(遠足會)로 자주 갔던 곳이라 마음에 그윽이 반가웠었습니다.
 
  거기서 경의선 철로의 중간을 끊고 새문 밖 금화산(金華山) 부근의 하늘에서 나 어릴 때의 세월을 보내던 미동(渼洞)보통학교의 불타고 없어진 옛터나마 살피려 하였으나 그 부근에 신건축이 많은 탓인지 얼른 찾을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바로 또렷이 보이는 것은 모화관 뒤 무학재(현 무악재 - 편집자주) 고개와 그 앞에 서 있는 독립문이었습니다. 독립문은 몹시도 쓸쓸해 보였고 무학재 고개에는 흰옷 입은 사람이 꼬물꼬물 올라가고 있는 것까지 보였습니다. 그냥 지나가기가 섭섭하야 비행기의 머리를 조금 틀어 독립문의 위까지 떠 가서 한 발 휘휘 돌았습니다. 독립문 위에 떴을 때 서대문 감옥에서도 자기네 머리 위에 뜬 것으로 보였을 것이지마는 갇혀 있는 형제의 몇 사람이나 거기까지 찾아간 내 뜻과 내 몸을 보아 주었을는지… 붉은 높은 담 밖에서 보기에는 두렵고 흉하기만 한 이 감옥이 공중에서 내려다보기에는 붉은 담에 에워싸인 빛 누런 마당에 햇빛만 혼자 비추고 있는 것이 어떻게 형용할 수 없이 한없이 쓸쓸하여 보일 뿐이었습니다. “어떻게나 지내십니까” 하고 공중에서라도 소리치고 싶었으나 어떻게 하는 수 없이 그냥 돌아섰습니다. 돌아서면서 거기는 평동(平洞), 냉동(冷洞), 감영(監營) 네거리의 일판(一版)이 벌어져 있는데 감영 네거리에 흰옷 입은 한 떼의 사람이 몰켜(몰려-편집자주) 서 있는 것을 보았고 성냥갑(燐寸匣) 같은 전차가 병난 장난감같이 느리게 땅바닥에 배를 대이고 기어가는 것이 흘깃 보이더니 그 전찻길 옆 개와(蓋瓦)지붕에 에워싸인 목판 같은 마당에 울긋불긋 가물가물하는 것은 아마도 경성여자보통학교와 또 그 한집에 있는 내 모교 미동보통학교인가보다 하였습니다. 미동학교는 어저께 저녁에 내가 그 마당에 초대받아 가서 지금 눈에 내려다보이는 저 학생들과 이야기하던 곳이요, 그 옆에 평동은 내 출생지라 알지 못할 친한 정과 반가운 마음이 샘솟듯 하야 이 일판의 상공에서 재조(才操)를 두 번 훌훌 넘었습니다. 여기서 재조 넘은 것도 보이기는 경성 시가 전체에서 모두 보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야 내 출생지인 새문 밖에 거주하시는 여러분과 또 나를 길러준 내 모교에 경의와 정을 표하고 곧 흥화문 야주현(夜珠峴), 당주동을 살같이 지나 경복궁 넷 대궐을 내려다보았습니다. 거무튀튀한 북악산 밑에 입구(口)자처럼 둘러싼 담 안의 넓기나 넓은 넷 대궐은 우거진 잡초에 덥혀 버린 집같이 사람 하나도 보이지 않고 몹시도 한산하고 쓸쓸하여 보였습니다. 거기서 바로 창덕궁을 향하고 안동(安洞) 네거리 별궁 위 동아일보사 부근의 공중을 스쳐 모로 놓인 ㄱ자 형으로 보이는 천도교당과 휘문의숙을 지나 검푸른 수림(樹林) 속에 지붕만 보이는 창덕궁의 위에서 한 발 휘휘 돌아 공중에서 경의를 표하였습니다. 경성 시민 여러분에게 드린 인산의 종이는 바람에 불려서 남으로 불려 갈 생각을 하고 이 북을 오는 동안에 다섯 번인가 여섯 번에 벼려서 내리 털었으나 많이 집어 읽으실 수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창덕궁 방문을 마치고 나는 곧 종묘의 깊은 수림을 옆으로 엿보면서 이어 창경원(동물원)의 수림과 총독부 병원을 옆으로 보고 동소문 밖에 눈 쌓인 원산(遠山)까지 내려다보면서 동대문 위로 지나 청량리 줄버들과 안암동, 우이동 가는 되넘이 고개까지, 왕십리의 거리까지 그 너머 한강 뚝섬인 듯한 것까지 보면서 기체는 동대문에서 광희문으로 지나 다시 꺾이어 황금정통(黃金町通·지금의 을지로-편집자주)으로 곧게 남대문을 향하고 돌진하였습니다. 황금정 가로 위를 지나도 진고개(중구 충무로2가 전 중국대사관 뒤편에서 세종호텔 뒷길에 이르는 고개-편집자주)에서 보기에는 자기 머리 위를 지나간 것으로 보았을 것입니다.
 
  동양척식회사 집을 보았을 때 신문관(新文錧) 위가 여기였을 것을 알았고 이름만 남은 덕수궁과 매일신보 회색 집을 옆으로 보면서 남대문 위를 돌았습니다.
 
  남대문에서 다시 성(城) 자리 위로 새문 밖을 돌아 다시 광화문 앞으로 돌아 종로 네거리의 공중으로 왔습니다. 여기서 얼른 말하면 경성 시가의 한복판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인 까닭이었습니다. 새문길, 동대문길, 남대문길, 전동(典洞)길이 모두 이 복판으로 모여와 있어서 성냥갑 같은 전차 여러 개가 기어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광희문통의 황금정길, 남대문에서 광화문까지의 길, 교동(校洞)길, 창덕궁 앞길, 동물원길, 창의문(彰義門)길 거의 어느 길 아니 보이는 곳이 없었고 어느 큰 집이나 어느 작은 집이나 아니 보이는 집이 없었습니다. 여기서 내려다보이기에는 남촌의 일인촌(日人村)이라고는 진고개길 좌우 옆뿐인 것같이 보였고 경성 전체의 형용(形容)은 얼른 보기에 종로통과 황금정통의 시커먼 개와집 큰 판(版)이 몸이 되고 가새로(가장자리-편집자주) 남북촌으로 쭉쭉 뻗은 가옥의 줄기가 마치 무슨 큰 검의(蛛蜘·거미 모양-편집자주)의 발 달린 것같이 보였습니다. 그런가 하고 북문(창의문) 쪽의 거리를 보면 무슨 짐승의 꼬리같이도 보였습니다.
 
  여기가 종로 종각의 위이고 경성의 복판인가 하고 생각한 나는 여기서 재조를 두 번이나 넘고 거듭 제일 어려운 횡전곡승(橫轉曲乘)을 두 차례나 하였습니다. 여기서 넘은 재조는 경성 시내의 대개의 집에서는 자기 각각, 자기 지붕 위에서 재조를 넘은 것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종로 위에서 이렇게 여러분께 경의와 정을 표하고 나서 나는 곧 다시 창덕궁 앞으로 돌아 동대문으로 가다가 중간에서 재조를 두 번 넘고 뒤이어 송곳질(송곳 비비듯 뱅뱅 돌면서 떨어지는 것)이라는 곡승비행(曲乘飛行)을 하였습니다. 이것은 동대문 부근(내외)의 여러분이 자세히 못 보신 이가 계실 듯이 생각된 까닭이었습니다.
 
  이렇게 하였으면 이제 경성 방문 비행의 뜻은 이루었으리라 생각하고 나는 곧 거기서 황금정으로 종로로 광화문으로 창덕궁으로 크게 원을 그리어 빙그르 돌고는 서대문 밖으로 나가서 남대문 밖으로 여의도로 돌아왔습니다. (이하 하략)
 
  (출처=《개벽》 1923년 1월호, p.90~94)
 

  자전거계의 비장(飛將), 노당익장(老當益壯)의 엄복동 군, 전후 출전 백여 합이 일불최절(一不摧折), 일본 유일의 선수도 어찌할 수 없이, 20회 경주의 월계관은 엄복동 군
 
《조선일보》 1923년 5월 7일 자 3면에 게재된 〈자전거계의 비장(飛將)…20회 경주의 월계관은 엄복동 군〉(왼쪽).
《조선일보》 1923년 5월 8일 자 3면에 실린 엄복동 관련 2개의 기사. 일본인이 1등을 했다는 기사는 작게, 일주일 전 경남 마산 대회에서 엄복동이 우승했다는 기사는 크게 썼다.
  해마다 이때가 되면 자전거 운동회를 개최하고 개최할 적마다 1등은 반드시 엄복동 군이 점령한 것은 조선 사람으로 누구나 다 같이 전상(예상-편집자주)하는 바이라. 그런데 저작일부터 장충단 공원에서 경성윤업유지회(京城輪業有志會)의 주최로 자전거 경주대회를 개최하야 14회 경주에 엄복동 군이 3등을 하였다 함은 석지에 보도한 바이어니와, 조선에서 자전거 경주를 할 것 같으면 의례히 엄복동 군이 1등을 하게 되는 고로 작년과 작저년에 일본에서도 몇째 안에 가는 자전거 선수 몇 사람이 일부러 나와서 참가를 하였었으나 마침내 1등은 빼앗지 못하고 돌아갔었는데 금년에는 일본에서도 제일 유명한 선수 10여 명이 며칠 전부터 경성에 들어와서 연습을 하며 자웅을 결단코자 하는 중이므로 경성 시민은 더욱이 엄복동 군에게 정신이 몰리던 중에 제14회 경주에는 겨우 3등을 얻게 되었음으로 일반은 혹 낙망(落望)도 하며, 혹은 고의로 그러한 것이라고도 하더니 오후 5시쯤 돼야 첫날의 마지막으로 일류 선수 여섯 사람을 모아가지고 20바퀴를 도는 경주를 실행하는 데 7~8바퀴를 돌도록 엄복동 군은 4, 5인 후에 있어 앞으로 나갈 줄을 모르는고로 일방은 또다시 낙망이 되게 되더니 10바퀴가 넘으면서부터 비로소 맹렬한 용기를 내며 전일의 수단을 부리며 2바퀴가량을 돌더니 그 후로는 또 떨어져서 3, 4인 후에 있다가 17회를 닥치면서부터 다시 군악소리가 서로 외침을 따라서 군중의 고함소리는 천지를 진동하는 듯하며 엄복동 군은 맹렬한 용기를 내이며 꿩을 쫓는 매의 형세로 달려서 선두에 서기를 시작하더니 선두에 이르러는 더욱이 고함소리가 높음에 따라 맹호같이 소리를 지르고 다른 선수보다 7, 8보를 앞서기 시작하더니 첫날 최후의 승리는 또한 엄 군의 손으로 돌아갔다더라.
 
  (출처=《조선일보》 1923년 5월 7일 3면)
 

  자전거 경기회 최종의 결승전에, 1등은 일본 사람이, 엄복동은 3등으로
 
  자전거 경주대회는 저작일에도 계속하야 오전 9시부터 시작되야 일본인이 맥주병을 던져서 방해를 하였다는 등, 혹은 일본인 선수에게 무엇을 받았다는 등의 풍설이 유행하나 이것은 신용할 수 없는 바이어 현장에 모이었던 수만 관중은 엄복동 군이 3등에 뒤처짐을 보고 분함을 참지 못하야, 혹은 참고 앉은 방석을 집어던져서 ○○○ ○○○(판독불가-편집자주) 혼돈하였었는데 이에 더하야 경관을 정돈하느라고 비상한 노력을 하고 동시에 현장에서 폭행자로 인정하는 사람 7명을 체포하였다는데 ○○은 아래와 같다더라.
 
  청진동269 손여근(24), 봉익동4 강대수(18), 내자동37 김환용(13), 낙엽정 3정목 12 김대성(16), 도염동 144 신정득(17), 초번정 57 박종근(25), 시흥군 영등포 장십용(15), 고양군 용강면 공○리285 이희복(29).
 
  (출처=《조선일보》 1923년 5월 8일 3면)
 

  전조선 자전거경기, 마산체육회 주최와 구락부 후원, 자전거 경기에는 엄복동 군이 승첩, 마라톤 경기에는 문판개 군이 우승
 
  경남 마산은 원래 운동열이 많은 지방으로 유명하던바, 이번에 도당리 체육회 주최와 마산구락부 후원으로 전조선 자전거경기와 마라톤 대회를 지난 4월 29, 30일 이틀 동안을 연다 함은 이미 보도한 바어니와 마침 그날은 각 지방에서 구름같이 모여든 선수와 장엄하게 꾸미어 놓은 회장의 광경은 실로 관람인의 이목을 놀래이었으며 이틀 동안을 두고 ○○ 바른 회장에서 칠원(漆原)까지 갔다 오는 10여 마일(?) 장거리 마라톤에 승리는 구 마산역에 근무하는 문판개(文板開) 군이 얻었으며, 80회의 자전거 싸움에는 경성 엄복동 군이 영예의 월계관을 얻은 후 우승기와 상품 수여식을 마친 뒤에 밤에는 꽃자동차에 선수를 태우고 웅장한 뿔피리를 부르면서 부내에 순회하였는데 참으로 이번 운동회는 전에 없던 대성황을 이루었었다더라. (마산)
 
  (출처=《조선일보》 1923년 5월 8일 3면)
등록일 : 2017-08-09 10:30   |  수정일 : 2017-08-09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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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환  ( 2017-10-23 )  답글보이기 찬성 : 0 반대 : 0
친절한 답변에 감사함을 느낌니다. 불철주야 지식의 길잡이가 되어 주시기를 바라오며 무궁한 발전과 건승을 기원 합니다. 늘 건강하시고, 복 많이 받으세요,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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