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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통신]이산가족의 비극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소련에 끌려간 86세 아버지와 60대 아들 45년 만의 상봉

글 | 권석하 재영칼럼니스트·‘유럽문화탐사’ 저자 2019-01-04 09:03

▲ 일러스트 허인회
가족이란 말을 들으면 무조건 가슴이 따뜻해진다. 그만큼 가족은 서로에게 중요하고 소중하다. 그런 가족 사이를 갈라놓는 일만큼은 무슨 이유로든 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우리 한반도에는 아직도 1000만명의 이산가족이 존재한다. 그 이산가족 중 누군가가 꿈에서라도 그리던 가족의 얼굴을 보지 못한 한을 안고 세상을 뜨는 비극이 매일매일 일어난다. 2018년 남북 화해무드가 조성되어 곧 평화가 눈앞에 오는 듯 법석을 떨었지만 8월의 마지막 이산가족 행사가 있고는 다음 만남에 대한 논의도 전혀 없는 듯하다. 더 늦기 전에 그들의 한을 풀어줄 길이 없는지 답답하다. 자신들의 잘못은 하나도 없이 이산가족이 된 그들의 상봉을 협상 대상으로 삼는 북한의 작태에 분노가 치민다. 한 민족이라는 말을 수시로 입에 올리기에 더욱 그렇다.
   
   필자는 평생 잊지 못할 가족 상봉의 감동적인 장면을 본 적이 있다. 45년간 생사도 모르고 헤어졌던 86세의 아버지와 66세 큰아들의 상봉 장면이었다. 1990년이었으니 지금으로부터 거의 30년 전 일이다. 필자가 1988년부터 모스크바 첫 한국 무역 상사원으로 주재하다가 독립해서 무역업을 하고 있을 때였다. 소련이 88서울올림픽에 788명의 대 선수단을 참가시켜 한·소 수교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던 때이기도 했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사태로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과 1984년 로스앤젤레스올림픽이 반쪽 개최된 이후 8년 만에 처음으로 정치에 물들지 않은 완전체 올림픽이 열린 후여서 한·소 수교가 코앞에 닥쳤다는 기대감이 높아질 무렵이었다. 당시 소련은 한국인에 대한 비자를 완화해주어 소련 방문객도 갑자기 늘어나고 있었다. 필자가 소련 출장을 한창 다니던 1980년대에는 정말 모스크바에서 한국인을 보는 일이 거의 없었는데 이미 당시는 모스크바 5성급 호텔 로비에서 한국말 듣는 일이 더 이상 놀랄 일이 아니게 되었다. 한국에서의 술자리에서도 소련을 다녀오지 못하면 대화에 끼지 못할 정도로 소련이 핫이슈가 됐었다. 정치권 인사 등 한국의 주요 인사들도 별로 할 일도 없이 괜히 소련에 오는 일이 잦았다. 각 매체의 기자들도 정말 벌떼처럼 몰려왔다. 사업이 제대로 자리 잡히기도 전에 오며 가며 들르는 지인과 손님들 때문에 필자도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었다.
 
   그 무렵 아침에 출근을 하니 영국 런던에서 팩스가 하나 들어와 있었다. 가깝게 지내던 런던 교민 한 분의 도움 요청이었다. 자신은 얼굴도 기억 못 하는 아버지가 소련에 살아계시다니 연락을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정말 팩스를 떨어뜨릴 만큼 놀라운 부탁이었다. 사연인즉슨 한 살 때 아버지가 반탁(反託)운동을 하다가 소련군에 잡혀가 45년 동안 생사여부조차 몰랐다는 것이었다. 부탁하는 당사자는 물론이거니와 부탁을 받은 필자마저도 손이 떨릴 정도로 흥분할 내용이었다.
   
   
   반탁운동하다 체포돼 소련으로
   
   그 교민 분은 아버지 사연과 사진이 나온 동아일보 모스크바 특파원의 기사를 같이 보내왔다. 사진에는 단정한 차림새의 노인 다섯 분이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기사 내용을 읽기 전 사진만 봐도 가슴이 뭉클해질 만큼 세월의 먼지가 묻어 있는 사진이었다. 이분들은 당시 60대 후반부터 80대 초반까지의 노인들이었다. 사연은 대개 비슷했다. 1945년 광복이 되고 독립정부 수립에 들떠 있던 한반도를 남북으로 갈라 미·소(美蘇)가 신탁통치를 한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모두들 분기탱천해 반탁운동을 하다가 잡혀왔다는 것이다. 1945년 12월 말경 북한에서 체포구금되어 철원 협성병원 감옥에 6개월간 갇혀 있다가 평양 감옥으로 이감되어 다시 6개월을 재판도 없이 지냈다고 한다. 결국 1946년 12월 6일 석탄차에 실려 소련 블라디보스토크의 정식 감옥으로 이감되었다고 한다. 일행 중 한 명이 “재판도 없이 어떻게 이렇게 감옥에 가두느냐”고 항의하자 “모스크바 궐석재판에서 이미 판결이 내려졌다”는 답이 돌아왔고, 항의한 사람은 그 죄로 독방에까지 갇혔다.
   
   블라디보스토크의 감옥으로 오니 미결수로 있던 때보다 좋아진 것이 그래도 있었다. 최소한 일주일에 한 번은 목욕을 할 수 있었던 것과 비록 부실하긴 했지만 하루 세끼 식사는 거르지 않고 먹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감옥으로 옮겨지기 전 거의 1년간은 목욕은 한두 번밖에 못 했고 하루 한 개의 주먹밥으로 연명했다고 한다. 이들은 블라디보스토크 감옥에서 5년간 수형생활을 한 뒤 시베리아로 강제노동을 갔다. 어딘지도 모르는 끝도 없는 삼림지역에서 7년을 벌목하면서 지냈다. 노인들은 사시사철 얇은 옷 하나만 입고 벌목을 하던 시베리아의 겨울 추위와 파리만큼 큰 여름 모기를 기억하며 치를 떨었다. 노인들은 1957년과 1958년 사이 모두 순차적으로 석방되었다. 그리고는 서로 연락을 나눈 끝에 스탈린의 강제이주 조치로 극동에서 건너온 동포들이 많이 사는 카자흐스탄(당시는 카자흐 자치공화국) 잠블시로 같이 이주했다. 시베리아의 추위에 지친 노인들이 동포들이 많이 사는 따뜻한 곳을 찾아간 것이다. 이들은 공동으로 파농사를 지으면서 그때까지 그곳에서 살고 있었다.
   
   이들은 수형기간 12년 동안 가족 면회는커녕 자신들의 안부조차 가족들에게 전할 길이 없었다. 석방 뒤에도 출국이나 외국 방문은 생각도 못 했다. 가족들은 당연히 이들의 생사 여부를 몰랐다. 일부 가족들은 스탈린이 무조건 죄수들을 처형한다는 소문에 돌아가셨으리라 짐작하고 생일에 제사를 지낸 경우도 있었다. 물론 본인들도 카자흐스탄 중에서도 당시 수도 알마타에서 500㎞나 떨어진 잠블에 있었으니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가족들이야 생사를 모르니 그냥 슬프기만 했겠지만 자신이 살아 있음을 가족들에게 전하지 못하고 살아온 고립무원 당사자들의 답답하고 분통한 심정은 당해보지 않으면 정말 도저히 상상도 가지 않을 일이다. 수형생활을 할 때는 석방되면 가족 곁으로 돌아갈 길이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막상 석방되고 보니 국적도 여권도 없는 상태여서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이들은 기사에서 형기도 모르는 창살 없는 감옥에서의 수형생활이 하루하루 목숨 유지에 바빴던 시베리아 벌목 때보다 더 절망적이고 힘들었다고 털어놓았다.
   
   
   ‘25시 인생’의 주인공들
   
   이들 중에서도 필자가 가족 상봉을 도와준 현태묵 옹은 41세의 나이에 부인과 8남매를 고국에 두고 끌려왔다. 당시 막내딸은 이름도 미처 지어주지 못한 돌도 안 된 나이였다. 현 옹은 인터뷰 당시 86세였으니 무려 45년간 질고의 생활을 해온 셈이었다. 첫 12년은 수형생활이라 그렇다 쳐도 나머지 33년은 문자 그대로 창살 없는 감옥이었다. 그나마 현 옹은 자식을 둔 현지 고려인 부인을 맞아 만년에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고 있었다. 나머지 5명(전용일 88세, 송병남 78세, 김효진 68세, 황익걸 71세, 황의각 66세) 중 전용일 옹을 제외한 나머지 분들은 모두 소련 국적을 취득했다. 전 옹만 끝까지 소련말을 배우지 않고 소련 국적도 따지 않은 채 무국적자로 살아왔다. 자신의 온 일생을 모두 앗아간 소련이란 나라의 국적을 어떤 이유로든 딸 수가 없었고 말도 배우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이들의 서린 한을 누가 제대로 알기나 하겠는가?
   
   이들의 사연이 알려진 배경에는 한·소 수교가 있었다. 1990년 한·소 수교를 타고 모스크바에 한국 특파원이 주재하기 시작했다. 당시 동아일보 이계홍 특파원이 소련 동포들이 많이 사는 잠블시로 취재를 왔다가 이들의 한 많은 사연을 접하게 된 것이다. 한만 품은 채 아무런 희망 없이 살던 이들은 이 특파원에게 자신들의 애달픈 사연을 고국에 전해달라며 애원했다. 그러면서 “가족을 찾게 해달라”고 읍소로 매달렸다. 당시 기사 제목 ‘25시 인생, 45년’은 이들의 신세를 정말 기막히게 잘 대변했다. 루마니아 소설가 콘스탄틴 비르질 게오르기의 소설 ‘25시’의 주인공 요한 모리츠의 일생과 흡사한 무국적자 노인들의 일생을 잘 표현한 제목이었다.
   
   결국 1990년 10월 9일자 기사를 본 현 옹의 고향 친지들이 가족들에게 연락을 했다. 영국에 사는 막내딸이 부탁을 해와서 필자가 45년 만의 가족상봉을 주선하는 다리 역할을 하게 됐다. 해외에 살다 보면 유학자녀 보호자 역할 등 수많은 개인적인 부탁을 받아보지만 당시의 가족상봉 주선보다 더 보람된 일은 별로 없었다. 팩스를 받자마자 바로 잠블 주소로 전보를 쳤다. ‘가족들이 당신의 생존을 이제 알아서 이렇게 연락을 한다’ ‘자식들이 가장 빠른 방법으로 소련을 방문하려고 준비하고 있다’는 간단한 내용이었다. 영국 런던의 딸에게 소식이 잘 전달되었다고 전해주기 위해 잠블에서의 회답을 기다리는 하루가 정말 여삼추 같았다. 나중에 들은 얘기이지만 크지 않은 잠블시에 필자의 전보가 도착한 날, 잠블시의 절반이 축제 분위기였다고 한다. 동네 이웃들도 좋아서 난리였다는데 도저히 있을 것 같지 않던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날 당사자 현 옹을 비롯한 노인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물론 현 옹에게 가장 먼저 연락이 갔지만 다른 노인들도 머지않아 가족들과 연락이 닿을 것이라는 45년 만의 희망을 갖게 됐으니 그 기쁨을 어찌 표현할 수 있었을까.
   
   지금은 러시아 입국 시 한국 여권은 비자면제 대상이지만 당시는 비자를 받아야 했다. 비자 신청도 반드시 초청장과 호텔 예약증이 첨부되어야 가능했다. 초청장은 정부기관이나 특별허가를 받은 민간기업이어야만 발행이 가능했다. 필자가 소련 친지와 합작한 모스프로스포츠는 초청장 발행 자격을 갖고 있었다. 모스프로스포츠는 소련 정부 기관이 독점하던 운동선수 해외진출 업무를 유일하게 허가받은 민간업체였기 때문에 초청이 가능했다. 비자 발급은 신청 후 빨라야 2주, 보통 3~4주 걸렸다. 필자의 합작회사 공동대표는 전직 외교관이라 3일 만에 비자를 발행받을 수 있었다. 45년도 기다렸는데 1~2주를 왜 못 기다리겠는가마는 필자의 마음이 더 탔다. 해서 하루라도 빨리 현 옹 가족들이 만나는 기쁨을 누리게 해주려고 합작회사 공동대표를 못살게 했다. 필자의 성화에 못 이겨 그는 직접 서류를 들고 당시 소련 외무성 차관실로 쳐들어갔다. 서울의 소련 영사처(당시 소련이 북한 눈치를 보느라 양국이 대사관이 아니라 영사처라는 모호한 이름하에 대사관 업무를 봤다)에서는 비자신청 3일 만에 모스크바에서 승인해주라는 특명이 내려오니 도대체 이들이 누군가 하고 본부로 문의를 했다고 나중에 들었다.
   
   결국 기사가 나고 10일이 안 되어 현 옹의 장남 효윤(당시 66세)과 차남 효진(당시 60세) 등 초로의 두 형제가 에어로플로트를 타고 전광석화처럼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모스크바에서 여장도 풀지 않고 세레미티에보국제공항에서 잠블로 가는 지방항공편이 있던 도모제도보공항으로 바로 이동했다. 이상하게도 당시 소련에서는 지방으로 가는 항공편은 항상 한밤중에 모스크바를 출발해 출장 한번 가려면 곤욕을 치르곤 했다. 한시라도 빨리 가기 위해서는 밤중에 출발하는 항공편이 안성맞춤이었다. 야간 항공기가 고맙기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두 형제를 모시고 필자가 잠블로 같이 내려갔다. 이미 잠블공항에는 가족들이 보낸 차가 나와 있었다. 물론 가족 소유는 아니고 잠블 유지였던 고려인 사업가가 빌려준 소련제 볼가 대형차였다. 아파트 바깥에도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모여 있는 듯 웅성거리고 있었다. 아파트 1층에 위치한 집에는 이미 전 가족이 모여서 잔칫상을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 현태묵 옹의 사연이 실린 동아일보 1990년 10월 9일자 신문.

   45년 만에 마주 앉은 삼부자
   
   45년 만에 삼부자가 만나는 장면은 영화나 드라마와는 달리 그렇게 극적이지 않았다. 감싸안고 통곡을 하거나 뺨을 비비지도 않았고 서로 그냥 어색하고 수줍게 수인사만 했다. 그 시대의 어른들처럼 부자간은 서먹서먹하기만 했다. 결국 아버지가 아들들에게 “앉아라! 배고프겠다!” 하면서 어색함을 벗어나려 했다. 흡사 아침에 출근했다 퇴근해서 저녁에 들어온 아들에게 하는 아버지의 자상한 말 같았다. 식사가 시작되어 보드카 한두 잔이 들어가서야 제일 궁금했을 부인에 대한 안부를 아버지가 물었다. “이태 전에 어머님이 평생을 애타게 기다리시다가 이 좋은 일을 못 보고 돌아가셨다”고 거의 울먹이듯 맏아들이 보고할 때는 잠깐 물기가 서리는 듯했다. 그러나 금방 삼부자는 한국의 전형적인 무뚝뚝한 남정네들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한 명 한 명씩 가족의 안부를 전했다. 아버지는 더 궁금한 점을 물으면서 식사가 진행되었다. 현 옹의 기억이 잘못되었는지 기자가 잘못 적었는지 모르나 동아일보 기사에는 현 옹이 다섯 자녀가 있다고 했는데 실제는 8남매였다. 40살의 꽃다운 나이에 졸지에 생과부가 된 김신주 여사는 거의 맨손으로 남하해 한국전쟁을 거치면서도 8남매를 제대로 키웠다. 교사, 경찰, 외교관으로 훌륭하게 키워냈으면서도 결국 평생을 그리던 남편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아버지가 미처 이름도 못 지어주고 끌려간 영국의 막내딸 이름은 큰오빠 효윤씨가 지어주었다. 아버지가 소련으로 끌려가기 전 동네 감옥에 면회를 가보니 아버지가 “남한으로 이미 내려간 친척을 만나보라”고 했다. 당시 연희전문(지금 연세대학교)에 다니던 효윤씨는 아버지의 그 말을 ‘가족들을 데리고 남한으로 내려가라’는 뜻으로 바로 알아들었다. 식사 대화 중 효윤씨가 중간에 그 일을 언급하니 그때서야 현 옹은 처음으로 환하게 웃으며 “그래! 니가 제대로 알아들었구나!” 하면서 기뻐하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현 옹이 잡혀 있는 동안 가족들은 반동분자의 가족으로 몰려 거의 가택연금 상태였다. 감시를 받고 있어서 식량도 제대로 없었다. 동네 사람들이 밤에 감시를 피해 집 앞에 가져다놓은 식량으로 연명했다. 자신들을 괴롭힌 북한 정권과의 평화 분위기가 탐탁지 않아서 그런지, 아직도 자신의 이름을 밝히길 싫어하는 막내딸은 지금도 그때 고향 사람들의 인정을 잊지 못하고 고마워한다.
   
   현 옹이 소련군에 의해 블라디보스토크로 끌려가고 나서 현 옹 가족은 당국에는 친척이 사는 평양으로 간다고 하고 짐차를 빌려 동네를 떠났다. 평양으로 향하는 갈림길에서 짐차를 보낸 후 현 옹의 아내는 막내딸을 업고 전 가족을 끌고 걸어서 해주 해안가까지 갔다가 남으로 내려가는 배를 타고 북한을 탈출했다. 막내딸은 기억을 못 하지만 큰아들 효윤씨는 그때 배를 기다리면서 발각될까봐 떨었던 공포를 잊을 수 없다고 잠블에서 토로하기도 했다.
   
   
   바둑판 앞에 앉은 부자 뒤에 석양이
   
   이제 필자가 절대 잊을 수 없는 절정의 장면이 등장할 때이다. 점심식사를 겸해서 오랫동안 담소를 해서인지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마침 가을이 한창이라 오후 3시만 되어도 석양이 들기 시작했다. 아버지 현 옹이 아들에게 “우리 옛날에도 바둑 많이 뒀는데 한판 할까?” 하고 바둑판을 꺼냈다. 바둑판이라고 해봐야 나무판자에 그렸고 바둑알은 동네 개울에서 주워온 조약돌 중에서 좀 진하고 옅은 색으로 구분한 초라하기 그지없는 모양이었다.(하긴 당시 소련 교민들이 가지고 놀던 화투를 필자가 아직도 가지고 있는데 두꺼운 종이에 놀라울 정도로 같은 모양으로 인쇄해서 만들었다. 결국 50년을 고국과 교류가 없는 절해고도 같은 소련에 살아도 한국인의 정서는 그냥 살아 있었다는 뜻이다.) 88세의 아버지와 66세의 두 노인 부자는 바둑을 두면서 두런두런 얘기를 시작했다. 방안에는 두 부자와 필자 셋밖에 없었다. 마침 두 부자는 서쪽 창문 아래에 앉아 바둑을 두고 있었다. 불투명한 창문으로 들어오는 석양을 등진, 머리가 하얀 두 부자의 실루엣은 대가가 그린 한 폭의 역사화 같았다. 그제서야 내 눈에는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세월의 장벽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고 보였다. 거기에는 하얀 백발의 노인들이 아니라 45년 전 22살 대학생 청년 아들과 44살의 중년 아버지 모습만이 남아 있었다.
   
   살아가다 보면 수도 없는 감동의 장면을 보지만 이보다 더한 감동의 장면은 본 적이 없다. 문득문득 가족이라는 단어를 접할 때면 바로 이 장면이 눈앞에 펼쳐진다. 특히 남북 이산가족 상봉 뉴스를 접할 때면 세월이 30년이 흘렀음에도 당시 장면이 바로 눈앞에 보인다. 어찌 말로 부자가 살아온 온갖 사연을 풀어낼 수 있었겠는가마는 굳이 말을 다 안 해도 서로의 마음은 통하는 듯했다. 한 가족이 역사의 수레바퀴에 치여 희생이 된 일이야 수도 없이 많겠지만 이런 극적인 비극도 사실 보기 힘들지 모른다.
   
   당시 다른 장면도 있다. 기쁨에 넘치는 현 옹과는 달리 결혼한 고려인 부인 가족들은 현 옹을 잃을까봐 걱정하던 것이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나중에 현 옹이 한국으로 돌아와 정착하고 나서 걱정이 현실로 나타났지만 말이다. 고려인 부인은 몇 번 한국에 와서 장기간 거주하긴 했지만 결국 소련으로 돌아가 부부는 결국 또 다른 이산가족이 되고 말았다. 소련에서 낳은 현 옹의 손녀가 나중에 필자 회사에서 일해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당시 필자의 분류로는 소련에 여섯 종류의 ‘한반도인’이 있었다. ‘한국에서 간 한국인’ ‘북한에서 온 조선인’ ‘남북 어디에도 속하고 싶지 않다면서 고려인이라고 불러달라던 소련 동포 고려인’ ‘중국에서 온 중국 동포 조선족’ ‘일제 징용으로 사할린에 끌려갔다가 한국으로 못 돌아가고 소련 본토로 온 사할린 동포’ ‘해외에서 온 필자 같은 재외 한국 동포’, 그리고 이런 분류에도 못 들다 나중에 나타난 ‘탈북 조선인’, 현 옹 같은 ‘납치 한국인’ 등이었다. 한반도를 내리누르던 역사의 무자비한 수레바퀴에 짓눌린 역사의 희생자들 중에서 가장 행운아는 그래도 필자 같은 한국인이었음을 그때나 지금이나 항상 고마워한다.
   
   현 옹 가족 같은 비극은 아직도 한반도에서 계속되고 있다. 남북 이산가족 상봉 뉴스를 보고 있노라면 문득 30년 전의 장면이 떠올라 가슴이 막힌다. 그나마 현 옹은 소원대로 한국에 돌아와 묻혔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한반도의 1000만 이산가족은 언제 제대로 만나서 70년 묵은 옛날 이야기를 할지. 남북의 화해가 현실로 곧 나타나서 수백만의 현 옹 가족 상봉 같은 일이 이루어지길 빌 뿐이다.
주간조선 2539호
등록일 : 2019-01-04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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