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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추징금에 저당 잡힌 대우맨들

글 | 이동훈 주간조선 기자

▲ 지난해 대우 창립 49주년 기념식에 모여 사가를 제창하는 대우세계경영연구회 회원들. photo 대우세계경영연구회
지난 1월 21일 이상훈 전 ㈜대우 부사장이 별세했다. 향년 66세. 고인(故人)은 대우그룹이 해체될 당시 전무였다. 빈소가 마련된 서울 반포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에 대우맨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혈액암으로 사망한 고인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모인 대우맨들은 눈물을 떨구었다. 서울고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고인의 첫 직장은 한국은행이었다. 하지만 그는 안정된 한국은행을 박차고 나와 1977년 대우에 입사했다.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로 복잡한 무역거래를 단순명쾌하게, 유창한 영어로 브리핑하는 것이 그의 주특기였다. 그런 까닭에 그는 1980년대 줄곧 국제금융 허브였던 영국 런던과 일본 도쿄의 해외지사에서 근무했다. 44세에 상무로 승진했고 이내 전무로 고속승진했다.
   
   하지만 잘나가던 그의 말년은 순탄치 않았다. 1999년 8월 대우그룹이 워크아웃에 들어가면서 사실상 공중분해되면서다. 대우그룹의 국제금융담당으로 회사의 분식회계 등에 관한 책임을 지고 약 1년간의 서울구치소 수감생활과 함께 막대한 추징금이 부과됐다. 당시 전무에 불과했던 그에게 부과된 추징금은 무려 23조359억원. 그룹 총수였던 김우중 회장이 선고받은 17조9253억원의 추징금보다 무려 5조원이나 많았다.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 되는 일이지만, 모든 것이 환율이 부린 요술이었다. 추징금 선고를 받을 당시 급등한 환율을 반영해 원화로 나온 것이다. 외환위기로 한순간에 무너진 대우처럼 그 역시 환율에 당한 셈이다.
   
   국제금융에 관한 해박한 지식으로 1999년 대우의 워크아웃 직후에도 고(故) 오호근 기업구조조정위원장(대우구조조정추진협의회 의장)과 함께 외채협상 등 뒤처리를 맡아온 그였다. 결국 막대한 액수의 추징금은 1999년 대우사태 당시 47세로 한창 일할 나이의 그를 평생 옭아매는 족쇄가 됐다. 이후 프라임그룹에서 잠깐 일을 했다가, 이화여대·서강대·아주대 국제대학원에서 강연을 하고 벌어들인 수입의 절반은 족족 국고로 들어갔다. 결국 그는 지난해 10월 급성백혈병 판정을 받았다. 원래 심혈관계통이 안 좋아 스탠트시술도 수차례 받았지만, 막대한 추징금에 대한 부담이 그의 병을 악화시켰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결국 그는 항암치료를 받던 와중인 지난 1월 세상을 떴다. 한 전직 대우맨은 “한국은행에 계속 있었다면 적어도 한은총재나 경제부총리는 지냈을 양반”이라며 “민간기업인 대우에 들어가 말년이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한탄했다.
   
   고인과 같이 대우사태 당시 대우그룹의 경영진에 있었던 대우맨들은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다. 장병주 전 ㈜대우 사장은 약 3조원, 강병호 전 대우자동차 사장은 약 2조원의 추징금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그 아래 부사장과 이사부장(이사대우에 해당)에 불과했던 이동원 전 ㈜대우 부사장과 성기동 전 ㈜대우 이사부장은 무려 21조2494억원의 추징금을 선고받았다. 그 외에도 옛 대우그룹 계열사 임직원 31명이 각종 민형사 소송을 당해 재산을 압류당했고 그중 4명은 이미 고인이 되었다. 사실 개개인을 상대로 부과한 최대 20조원대의 추징금은 개인이 죽었다 깨나도 갚을 수 없는 금액이다.
   
   

   버는 족족 국고 환수
   
   막대한 추징금이 붙은 까닭은 이렇다. 외환위기 당시 외국환관리법에 따르면, 해외 현지법인에서 현지 금융기관과 한 금융거래는 한국은행에 일일이 보고를 해야 했다. 당시 수출기업들은 관행적으로 한국은행 보고를 누락하고 해외에서 쓸 자금을 자체적으로 관리해왔다. 수출 1위 대우를 비롯한 국내 많은 기업 대부분은 관행적으로 그렇게 할 때였다. 하지만 외환위기 이후 엄격한 잣대를 적용하자 졸지에 회사자금의 해외도피와 분식회계가 돼버렸다.
   
   하지만 막대한 추징금을 회사(법인)에 부과할 수는 없었다. 회사에 수십조원의 막대한 추징금이 부과될 경우 워크아웃과 향후 기업매각에 차질을 초래할 것이 뻔했다. 결국 이런저런 사정이 고려돼 막대한 추징금이 경영진 개개인에게 청구된 것이다. 당시 경영진은 개인적으로 유용하거나 착복한 금액이 단 한 푼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조원의 추징금이 날벼락과 같이 떨어졌다. ‘화이트칼라’ 범죄에 대한 엄벌 분위기 역시 비현실적인 추징금 부과의 근거가 됐다. 대우그룹의 한 전직 임원은 “수억원이나 수십억원 정도 됐으면 갚아야 한다는 부담이 생겼을 텐데 수조원이 떨어지니까 오히려 홀가분했다”며 “갚지 말라는 얘기구나라는 생각도 얼핏 들었다”고 토로했다.
   
   개개인에게 부과된 수조원의 추징금은 이들을 평생 따라다니는 족쇄가 됐다. 대우그룹 전성기 시절 김우중 회장의 세계경영 방침에 따라 아프리카를 비롯해 동유럽 등 당시 한국 기업으로서는 엄두도 못 내던 최전선을 온몸으로 부딪치며 개척한 역군들이었다. 하지만 막대한 추징금으로 인해 그 노하우는 고스란히 사장(死藏)됐다. 재취업에도 막대한 추징금은 발목을 잡았고, 대우사태 이후에도 강연 등으로 벌어들인 수입의 절반가량은 압류당했다. 자기 이름으로 재산을 두는 것은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별세한 이상훈 전 부사장을 비롯해 장병주 전 사장 등 당시 추징금을 받은 경영진 대부분이 비슷한 상황이다. 대우세계경영연구회 초대 회장으로 있는 장병주 전 ㈜대우 사장은 “내가 받은 추징금이 3조7127억원인데, 매일 100만원씩 갚아나간다고 해도 1만년이 걸린다는 계산이 나온다”며 “이를 거꾸로 돌리면 신석기시대로 돌아간다”고 말했다. 김우중 회장은 노무현 정부 말기인 2007년 12월 31일, 본형인 징역형에 대해서는 사면이 이뤄졌지만 부가형인 추징금에 대해서는 사면이 이뤄지지 않았다. 김우중 회장은 “당시 국민정서상 추징금까지 사면하기는 어려웠지 않았나 싶다”고 말했다.
   
   2014년부터 대우 추징금 공익변론에 나선 이석연 법무법인 서울 대표변호사(전 법제처장)는 “외국환관리법상 신고나 보고 등 절차상 문제가 있었던 점은 인정하지만, 임원 개개인이 개인적으로 착복하거나 횡령한 금액은 한 푼도 없다”며 “문제가 되는 돈은 모두 대우 해외지사로 건너갔고 금액 자체도 실제로는 3조~4조원가량에 불과했는데 법원에서 이를 도박판 판돈 계산하듯이 합산해 실제보다 부풀려졌다”고 지적했다. 이에 추징금에 대한 사면도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석연 변호사는 “대우사태 재판은 사법 역사상 가장 졸속재판이었다”며 “‘대우사태의 사법적 처리과정에 대한 문제점’이란 기록을 남기는 것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등록일 : 2017-03-21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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