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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중국의 민족 개념과 민족주의, 메이지시대 일본이 만든 ‘民族’, 韓·中으로 수출되다

⊙ 가토 히로유키, 스위스의 블룬츨리의 《일반국가법학》을 번역하면서 ‘民族’이란 단어 발명
⊙ 오늘날 일본에서 ‘民族’은 ‘人種’이라는 의미로 사용 …, ‘국민’은 군국주의 시대에 많이 쓰이다가 敗戰 후 ‘국적을 가진 시민’이란 의미로만 사용
⊙ 중국에서는 량치차오가 ‘民族’이란 단어 수입… 孫文이 ‘중화민족’이라는 개념 발명

朴商厚
1968년 출생. 한국외대 중국어과 졸업.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동아시아학과 석사. MBC 베이징특파원, 전국부장, 문화부장, 국제부장, 시사제작국 부국장 역임

글 | 박상후 前 MBC 시사제작국 부국장

▲ '民族’이라는 단어를 고안해 낸 일본의 법학자 가토 히로유키.
  민족(民族)이란 단어는 일본에서 가장 먼저 사용됐다. 문화(文化)·경제(經濟)·종교(宗教)·철학(哲學) 등의 단어처럼 일본이 서양의 개념을 번역해 한국과 중국에 전파한 ‘와세이캉고(和製漢語)’, 즉 일본이 만든 한자어 가운데 하나다.
 
  1872년 일본의 법학자 가토 히로유키(加藤弘之)가 스위스의 정치가이며 법학자인 블룬츨리(Johann Kaspar Bluntschli)의 저서 《일반국가법학(Allgemeines Staatsrechts)》을 번역하면서 여기에 나오는 Staat(state), Volk, Nation을 각각 국가(國家)·국민(國民)·민족(民族)으로 번역한 것이 일본에서 민족이란 단어가 등장한 최초의 기록이다.
 
  이어 이와쿠라 사절단(岩倉使節團)의 《미구회람실기(美歐回覽實記)》(1877)의 “지구에는 종종(種種)의 국가, 종종(種種)의 민족・거주・풍속・생리가 달랐다”라는 구절에서 민족이 나오지만 정착단계는 아니었다. 민족과 함께 인종(人種)・종속(種屬)・민종(民種)・족종(族種)이란 다양한 조어(造語)가 나왔으니 이때만 해도 개념이 정립된 것은 아니었다.
 
  ‘민족’이란 어휘가 ‘nation’의 번역어로 점차 굳혀져 가는 데는 미야자키 무류(宮崎夢柳)가 《불란서혁명기 자유의 개가》(1882)를 저술하면서 프랑스어의 ‘L'Assemblee nationale’을 ‘민족회의’로 번역한 것이 한몫을 했다.
 
  민족은 자유민권운동과 관련된 여러 발표문에 등장했고, 결정적으로 1888년 창간된 잡지 《일본인(日本人)》과 신문 《일본(日本)》을 중심으로 등장한 정교사(政敎社)의 동인(同人)과 그 주변의 인사들이 확산시켰다. 잡지 《일본인》을 창간하면서 국수보존(國粹保存)을 주장한 시가 시게타카(志賀重昻)가 ‘야마토민족(大和民族)’이란 단어를 여러 번 사용했다.
 
  일본에서 민족이란 단어가 본격적으로 보급돼 국수주의와 군국주의를 뒷받침하는 개념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00년대부터였다.
 
 
  중국과 한국으로 유입된 ‘民族’
 
‘民族’이란 단어를 중국으로 수입한 량치차오.
  민족이란 단어의 개념 변천과는 별개로 민족이란 단어 자체를 중국어에 편입시킨 이는 량치차오(梁啓超)였다. 일본에 유학하면서 일본의 학자나 사상가들이 내재화시킨 서구(西歐)의 선진 개념들을 부지런히 중국에 이식(移植)했던 량치차오는 1902년 〈민족경쟁의 대세를 논함(論民族競爭之大勢)〉을 발표한다.
 
  이 글에서 그는 서유럽에서 봉건제(封建制)가 분권화(分權化)하면서 민족주의가 발흥하게 된 경위와 그 전개 과정을 자세히 서술한다. 량치차오는 독일과 이탈리아의 민족국가 형성과 헝가리의 오스트리아로부터의 분리 등을 열거하면서 중국도 민족주의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今日欲救中国,无他术焉,亦先建设一民族主义之国家而已)
 
  량치차오는 이듬해에 가토 히로유키가 이미 소개한 블룬츨리의 이론을 《정치학 대가 블룬츨리의 학설(政治學大家伯倫知理之學說)》이란 중국어 저술을 통해 그대로 수용한다.
 
  민족이란 단어는 구한말 조선에도 수용되는데 주로 신문을 통해서였다. 최초로 등장한 것은 1900년 1월 12일 자 《황성신문(皇城新聞)》이었다. 여기에는 민족(民族) 앞에 동방(東方)이란 수식어가 붙어 백인과 대비되는 황인종(人種·race)이란 의미로 쓰였다. 그러다 가토 히로유키와 량치차오가 주장한 ‘nation’의 개념으로도 《대한매일신보》에 실린다. 이후에는 일본이나 중국과 대별되는 ‘nation’의 의미로 삼한민족(三韓民族), 대한민족(大韓民族), 동국민족(東國民族), 조선족(朝鮮族) 등 민족의 다양한 표현이 등장하게 된다.
 
  1907년 《대한매일신문》과 《황성신문》에는 ‘민족의 혼’이란 단어도 등장한다. 여기에는 국운이 크게 쇠하면서 을지문덕과 양만춘 같은 고구려시대 영웅 이야기가 비장하게 들리는 시대배경도 있었다.
 
  이후 민족이란 단어는 구한말(舊韓末)과 식민지 시대에는 일본을 포함한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피(被)억압인의 역사서술 단위의 주어가 되고, 주의(主義·ism)란 접미어까지 붙으면서 남북 분단으로 더욱 맹위를 떨치게 된다.
 
 
  ‘상상력의 괴물’이 된 민족과 민족주의
 
  ‘민족’과 ‘민족주의’는 일본에서 처음 만들어진 ‘와세이캉고(和制漢語)’지만 정작 일본에서는 좀처럼 쓰이지 않는 단어다. 현재 일본사람은 일본인이라고 할 뿐 일본민족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섬나라로 오랫동안 다른 국가의 간섭을 받지 않았던 역사를 가지고 있고 기본적으로 단일 혈통이기 때문이다. 현재 일본에서 ‘민족’이라고 하면 ‘인종(race)’을 의미하며, 따라서 ‘민족학’은 ‘문화인류학’의 뉘앙스를 가진다. ‘민족’이란 어휘는 아이누 같은 소수(少數)민족에만 붙인다. 따라서 ‘아이누민족연구’는 홋카이도와 사할린 등에 분포하는 아이누족에 대한 문화인류학적 연구와 동의어로 통한다.
 
  현재 일본에서 민족이란 어휘는 소수민족을 비하하는 ‘도진(土人·토인)’과 같은 의미여서 일상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또 이 단어는 군국주의가 극에 달하던 지난 세기 나치독일처럼 일본인의 인종적 우월성을 강조하는 데 쓰였기 때문에 어휘 자체에 일본인들은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
 
  군국주의 시절 가장 대표적으로 ‘민족’을 강조하는 표현은 메이지시대 후반 사상가·언론인이었던 도쿠토미 소호(德富蘇峰)가 사용한 ‘우리 야마토 민족(我等大和民族)’이었다. 일본인의 우월성과 다른 민족에 대한 배타적인 뉘앙스가 담긴 용어다. 시가 시게타카(志賀重昻)도 ‘야마토민족(大和民族)’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바 있는데 도쿠토미 소호는 한술 더 떠 ‘우리(我等)’란 접두사를 붙인 점이 주목된다.
 
  청조와 러시아를 이긴 일본이 군국주의로 치달으면서 민족의 개념은 막말(幕末) 이래의 국체론(國體論)과 만세일계(萬世一系)를 주장하는 천황제가 결합한다. 러일전쟁이 끝난 1905년 블룬츨리의 《일반국가법학》을 소개하면서 ‘민족’이란 단어를 소개한 가토 히로유키는 “천황이 일본민족의 족부(族父)인 동시에 군주라는 점이 유럽국가의 다민족(多民族) 군주국가와 다른 점”이라고 주장했다.
 
  같은 해 우키타 가즈타미(浮田和民)는 “작금의 제국주의는 민족팽창과 생존경쟁의 자연적 결과이며 세계에는 반(半) 정도만 개화된 야만인과 독립할 가치가 없는 국가도 있다”고 주장하면서 군국주의와 결합된 일본의 민족주의를 정당화했다.
 
  1926년 일본 내무성 위생국은 우생학적(優生學的) 관점의 한센병 환자 절멸 방침과 관련해 ‘민족정화(民族淨化)’ 즉 ‘ethnic cleansing’이라는 극단적인 용어까지 사용했다.
 
  민족이란 단어는 18세기 후반 유럽의 국민국가 형성과 함께 등장해 19세기 열강(列强)들의 패권(覇權)경쟁 와중에서 가공할 마력(魔力)을, 20세에는 전쟁과 대량학살에 깊이 관련돼 억압과 해방이라는 이중의 이미지를 가지게 되는데 이는 일본도 예외가 아니었던 것이다.
 
  현재 일본에서 좀처럼 쓰이지 않는 민족이란 단어는 과거 근대의 상상력이 낳은 매력적이면서도 가장 위험했던 괴물이었던 셈이다.
 
 
  ‘구니타미’에서 ‘고쿠민’으로
 
현대적 의미로 ‘國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후쿠자와 유키치.
  서구의 ‘Nation’은 일본에서 민족으로도, 국민(國民)으로도 번역됐다. 일본에서 근대적 의미의 ‘국민’이라는 단어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吉)의 《문명론의 개략(文明論之概略)》(1875)에서 처음 등장한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이 책에서 ‘국민’에 괄호를 열고 ‘네이션(Nation)’을 병기했다.
 
  일본은 근대국가로 발돋움하면서 ‘국민’이란 개념을 도입한 것이다.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전 에도(江戶)시대만 해도 일본인은 스스로 일본인이라는 정체성(正體性)을 인식하지 못했다. 일본에서 ‘국민(國民)’이란 어휘는 후쿠자와 유키치 이전에도 존재하기는 했었다. 지금은 사어(死語)가 돼 일본인들도 잘 모르지만 에도시대 ‘國民’은 현재와 같은 ‘고쿠민’이 아닌 ‘구니타미’로 읽었다.
 
  메이지유신 이전 일본인들은 일부 무사계급을 제외하고는 거주이전의 자유가 없어 기본적으로 평생을 좁은 공동체 지역에서 살아야 했다. 일본에서 번(藩) 이전의 옛날 지역 단위가 ‘구니(國)’였다. 이와쿠니(岩國), 시코쿠(四國) 같은 지명이 바로 ‘구니(國)’의 흔적이다. 메이지 이전 일본인들은 ‘구니’라는 ‘영지의 백성(領民)’으로서의 ‘구니타미(國民)’라는 정체성만 가졌을 뿐이었다.
 
  폐번치현(閉藩置縣) 이전 지방분권형 막부에 의한 관리에 익숙했던 일본인은 국가(國家)라는 것도 메이지유신으로 처음 경험했다. 당연히 서구적 근대국가의 국민이란 발상은 처음에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메이지정부는 모두가 천황 아래에서 평등한 신민(臣民)이라는 ‘일군만민(一君萬民)’의 사상을 침투시켜 일본 특유의 국민국가를 이룬다.
 
  메이지 정부는 이후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 건설을 위해 서양식 의무교육과, 국민개병제 등을 도입한다.
 
 
  히코쿠민(非國民)
 
  중앙집권체제 천황제의 강력한 국민국가가 국수주의 색채를 띠면서 국가에 반대하는 이들은 국민이 아니라는 ‘히코쿠민(非國民)’이란 낙인이 찍혔다. ‘매국노(賣國奴)’에 해당하는 일본어가 바로 ‘히코쿠민’인데 이 단어는 청일전쟁 후인 1898년 다카야마 조규(高山樗牛)란 소설가가 처음으로 썼다. 이후 1904년 러일전쟁 당시 〈그대여 죽지 말지어다〉란 반전(反戰) 작품을 발표한 요사코 아키고(與謝野晶子)에게 붙여졌다.
 
  ‘히코쿠민’은 전쟁수행이나 나라에 불만을 가진 이들을 지칭하는 멸칭(蔑稱)으로 본격적으로 사용되고 ‘히코쿠민’은 박해의 대상이 된다. 태평양전쟁 당시에는 본토가 공습당할 때 애국반(愛國班)에 편성돼 소화(消火)활동에 협력하지 않으면 ‘히코쿠민’이라고 불렀다.
 
  전쟁이 치열해진 1937년 고노에(近衛)내각이 구성되자 ‘국민정신 총동원’이란 용어가 등장하고 국민은 국가에 동원되는 대상이 된다. 정부에는 국민정신총동원위원회, 민간에는 국민정신 총동원중앙연맹이 만들어져 “사치는 적(敵)이다.” “성전(聖戰)이다. 자기를 죽여 나라를 살리자” 같은 전체주의적인 슬로건을 내놓기도 한다,
 
  전쟁을 독려하는 상황이 되면서 1940년에는 칙령으로 ‘국민복령(國民服令)’도 발표한다. 육군성이 주도하는 전시물자통제령하에서 남성의 의복생활을 간소화한다면서 육군 군복을 그대로 모방한 제복을 강요한다.
 
  이어 1941년에는 ‘국민학교령’에 따라 심상소학교(尋常小學校)를 국민학교 초등과(6년), 고등소학교를 국민학교 고등과(2년)로 개편한다. 〈교육칙어〉의 가르침을 받들어 황국(皇國) 국민의 기초 소양을 연마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할 정도로 국가주의적 색채가 농후했다.
 
  민족 외에 ‘Nation’의 또 다른 번역어로 일본에서 만들어진 국민은 이처럼 시대상에 따라 우여곡절을 겪었다. 메이지 이후 쇼와(昭和) 시대를 거치면서 국가를 위해 동원돼 희생돼야 할 대상으로까지 해석됐던 ‘국민’이란 단어는 현재 일본에서 ‘국적을 가진 시민’이란 가치중립적인 용어로 복권(復權)돼 사용되고 있다. 다만 사회과학과 관련된 글에서 오해를 피하기 위해 ‘네이션’과 병행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 또 국민학교도 현재는 메이지 초기 시절의 용어인 소학교로 회귀해 군국주의 시절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탈피했다.
 
  ‘히코쿠민’이란 용어는 전후에 사실상 금지어가 됐다. ‘사상과 양심의 자유는 침범해서는 안 된다’는 일본헌법 19조에 따라 개인의 사상과 가치관에 대한 법적 제재는 불가능하게 됐고 또 특정인을 ‘히코쿠민’이라고 부르면 모욕이나 명예훼손에 해당된다.
 
 
  族類와 同胞
 
  민족이란 단어는 근대 민족국가 형성 과정에서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한국과 중국에서는 원래 존재하지 않았다.
 
  중국인은 《상서(尙書)》, 《후한서(後漢書)》 등에서 만이융적(蛮夷戎狄)과 구별되는 스스로를 ‘아족류(我族類)’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동족(同族)의 의미를 지닌다.
 
  조선시대에도 ‘족류(族類)’란 단어가 사용됐는데 이민족(異民族)과 구분할 때에 한정됐다. 왜인(倭人)이나 류큐인(琉球人)이 우리와 같은 족류가 아니라는 식의 서술이다.
 
  ‘족류’와 달리 쓰인 개념어로는 한국과 중국 공히 ‘동포(同胞)’란 어휘가 있었다. 북송(北宋)시대의 철학자 장재(張載)의 《서명(西銘·천하의 질서, 군과 민의 관계를 간단하게 정리한 도표)》에 ‘민오동포 물오여야(民吾同胞 物吾與也(백성은 나의 동포이고 만물은 나〈군주〉와 함께 있다)’라는 구절에서 보듯 ‘유교질서에서 국왕으로부터 은혜를 입은 백성’, 또는 ‘같은 부모로부터 태어나 피를 나눈 형제자매’의 의미로 쓰였다.
 
  동포는 이후 구한말 국민이란 의미를 지닌 용어로도 개념이 확장되는데 일본에서 유입된 민족이란 단어와 함께 사용된다. ‘2000만이 하나가 되자’는 구한말의 외침과 결합된 민족주의는 1900년대 항일투쟁 과정에서 본격적으로 형성된다. 그리고 해방 후 대한민국이 분단되자 민족주의는 자유민주주의와 3대세습의 전체주의라는 현저한 체제 차이에도 불구하고 같은 민족인 남북이 통일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의 강력한 도구로 이용되고 있다.
 
 
  ‘中華민족’의 등장
 
‘중화민족’을 발명한 쑨원.
  근대국가의 소산으로 개념조차 모호해 허구라고까지 불리는 민족주의를 이데올로기로 이용하는 또 다른 국가는 중국이다. 민족의 개념이 량치차오에 의해 중국으로 전파(傳播)된 이후, 200여 년에 걸친 만주인의 지배를 타도하고 한족(漢族)의 복권을 목표로 신해혁명(辛亥革命)에 성공한 쑨원(孫文)은 중화민국(中華民國)을 선포하면서 ‘오족공화(五族共和, 漢·滿·蒙·回·藏 등 주요 민족의 협력)란 기치를 주창한다. 한족의 통치권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있는 변경 지역을 확보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초 타타르인(韃靼人·만주족)을 몰아내자고 주장했던 쑨원은 오족공화의 중심으로 여겼던 ‘한족(漢族)’ 대신 ‘중화’에 민족을 붙인 ‘중화민족(中華民族)’이란 용어를 전면에 내세운다.
 
  중화민족이란 개념은 이처럼 20세기에 만들어진 것인데, 공산주의 중국이 그대로 계승해 사용하고 있다. 모두 56개 민족이 존재하는 다민족국가를 한족 중심의 논리로 통치하려는 이데올로기의 모순도 그대로 드러난다.
 
  중국은 인종과 언어・종교・풍습이 완전히 이질적인 위구르・티베트 등을 ‘중화민족’이라는 이데올로기로 강제로 통합하고 있다. 소수민족들도 모두 중화민족의 일원이라는 특이한 논리다.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 강국몽(强國夢), 애국주의 같은 중국정부가 내세우는 슬로건들은 모두 국수주의적 색채가 농후하다. 중국은 위구르・티베트 등도 중화민족의 일원으로서 소수민족 문제는 극소수의 분열주의자들이 벌이는 책동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억압과 피억압, 투쟁과 해방이라는 양극단의 기제가 포함된 민족의 개념과 그것이 이데올로기의 형태로 강화된 민족주의는 세계 사학계에서 형해화(形骸化)된 지 오래지만 그 유령은 여전히 한국과 중국을 배회하고 있다.⊙
등록일 : 2018-10-11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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