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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왕의 남자 왕치산 외교 사령관으로

글 | 최유식 조선일보 중국전문기자

▲ 지난 3월 17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국가부주석으로 선출된 왕치산이 취임 선서를 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지난 3월 17일 중국 수도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국회 격) 5차 전체회의.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과 함께 당선된 왕치산(王岐山) 국가부주석이 헌법 선서대 앞에 섰다. 왼손은 헌법 위에 올려놓고 오른손 주먹은 어깨 위로 들고 선서를 마친 왕 부주석은 오른손 주먹으로 선서대를 강하게 내리쳤다. 선서대를 내리치는 소리가 회의장 내에 크게 들릴 정도였다. 이어 주석단 자리로 돌아가면서는 상기된 표정으로 시 주석과 악수를 나눴다. 홍콩 빈과일보는 “왕치산이 강한 모습으로 돌아왔다”고 썼다.
   
   이날 전인대 대의원들의 이목은 왕 부주석에 집중됐다. 그가 투표용지를 넣기 위해 투표함으로 걸어갈 때, 찬성 2969표에 반대 1표로 당선이 확정됐을 때 회의장이 떠나갈 듯 박수 소리가 터졌다. 시 주석보다도 박수 소리가 더 컸다고 현장 기자들은 전했다. 지난 5년간 당 중앙기율검사위 서기로 지위 고하를 가리지 않고 ‘호랑이’(고위 간부)부터 ‘파리’(하급 간부)까지 150만명의 부패 간부를 척결한 그의 인기를 실감케 하는 장면이었다. 득표수도 전원 찬성표를 받은 시 주석에 이어 두 번째였다. 5년 전 국가부주석에 선출된 리위안차오는 반대표가 80표, 기권표가 37표였다.
   
   
   상무위원 은퇴 5개월 만에 국가부주석으로
   
   시진핑 집권 2기 5년의 중국 최고지도부 인선을 결정한 작년 10월 19차 당대회 당시 중국 국내외의 가장 큰 관심사는 왕치산 당시 상무위원이 차기 최고지도부에 합류할 것인지 여부였다. 중국공산당 최고지도부의 일원인 상무위원은 칠상팔하(七上八下)의 정년 원칙이 적용된다. 당대회가 열리는 시점에 만 68세를 넘은 사람은 은퇴하고, 67세까지는 유임한다는 원칙이다. 1948년생으로 69세가 된 왕치산은 은퇴가 불가피했다. 그러나 왕치산이 중국공산당 내에서 가장 유능한 인사인 데다, 시 주석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반부패 개혁을 주도해왔다는 점에서 시 주석이 관례를 깨고 유임을 택할 것이라는 관측이 무성했다. 결과적으로 시 주석은 당내 규칙에 따라 왕치산을 은퇴시켰다. 대신 그로부터 5개월 만에 평당원으로 돌아간 왕치산을 국가부주석에 발탁해 다시 한 번 그와 함께 일을 하게 했다. 중국은 이번 전인대에서 헌법을 개정해 국가주석과 국가부주석의 임기 제한을 폐지해 왕치산은 시 주석 집권기 동안 계속 그 자리를 지킬 수 있는 기회도 얻었다.
   
   왕치산은 시 주석보다 5살 연상이지만 그와 비슷한 경력과 배경을 갖고 있다. 문화대혁명 때인 1969년 고등학교를 마친 그는 산시(陝西)성 옌안 지역으로 하방(농촌으로 내려가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것)됐다. 시 주석도 같은 시기에 옌안으로 하방돼 7년을 살았다. 정치적으로는 태자당(太子黨·혁명 원로나 고관의 자제 등으로 구성된 세력)으로 분류된다. 장인이 혁명 원로인 야오이린(姚依林) 전 부총리로, 그의 둘째 딸인 야오밍산(姚明珊)과 결혼했다. 시 주석의 아버지는 시중쉰(習仲勛) 전 부총리이다.
   
   1973년 시안에 있는 시베이대학 역사학과를 졸업하고 산시성박물관에서 일했던 그는 1982년 장인의 배려로 당 중앙서기처 농촌정책연구실 연구원으로 임명되면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개혁·개방 초기였던 1988년에는 중국농업신탁투자공사 사장으로 중용됐고 이후 인민은행 부행장, 중국건설은행 행장, 중국국제금융공사 이사회 의장 등을 거치며 경제 관료로 경력을 쌓았다.
   
   
   베이징 사스 수습한 ‘소방수’
   
   왕치산은 일반적인 중국 관료들과 달리 강직한 성품에 말도 에둘러 하는 법 없이 직설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난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뛰어나 ‘소방수’ ‘특급 구원투수’ 등의 별명을 얻었다.
   
   그가 ‘소방수’로서 유명해진 시기는 아시아 금융위기 때인 1997년이었다. ‘세계의 공장’으로 불리던 남부 광둥성의 금융기관들이 위기에 시달리자 중국 정부는 건설은행 행장이던 그를 광둥성 부성장으로 내려보내 수습토록 했다. 왕치산은 서방 채권은행들과 직접 만나 담판을 지어 금융위기를 극복해냈다. 2003년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가 창궐해 중국 수도 베이징이 대혼란에 빠졌을 때에도, 중국 중앙정부는 남부 하이난(海南)성 서기로 내려간 지 5개월밖에 되지 않은 왕치산을 ‘구원투수’로 불러들였다. 당시 베이징은 극도의 혼란 속에 빠져 있었다. 시(市) 당국이 사스 발생 현황을 계속 숨긴 탓에 시민들이 당국을 불신하게 돼 사스 확산을 막기 위한 어떤 대책을 내놓아도 시민들의 협조를 얻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왕치산이 내놓은 해법은 정확한 보고와 정보 공개였다. 그는 취임하자마자 각급 기관에 “보고를 할 때 1은 1이고 2는 2다. 전쟁터에서 농담은 없다”며 정확한 보고를 지시했다. 왕치산은 이때 ‘군령여산(軍令如山) 시장’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정확한 보고와 정보 공개가 계속되자 시민들의 신뢰는 빠른 속도로 회복됐고, 사스도 진정됐다.
   
   후진타오 전 주석 집권 후반기인 2008년 국무원(정부) 부총리가 된 왕치산은 외교 분야에 발을 들여놓았다. 미·중 전략·경제 대화의 중국 측 대표를 맡아 전 세계를 경제위기로 몰아넣은 글로벌 금융위기에 대응했다. 그를 상대했던 미국 재무장관들은 왕치산을 높이 평가했다. 헨리 폴슨 전 미국 재무장관은 “결단력 있고 호기심이 강한 인물로 철학 토론을 즐기고 짓궂은 농담을 잘하는 역사학자 출신”이라며 “미국을 잘 이해하고 있으며, 미·중 두 나라가 경제적으로 서로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안다”고 했다. 티모시 가이트너 전 재무장관도 “문제를 푸는 능력이 뛰어난 인물”이라며 “대단한 해결사에 특급 소방수”라고 했다.
   
   왕치산은 미국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를 즐겨 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4년 전인대 때는 공식 자리에서 한국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와 싸이의 ‘강남스타일’을 언급하기도 했다.
   
   
   시 주석 집권 2기 개혁도 설계
   
   시 주석이 2013년 집권 1기를 시작하면서 그를 상무위원 겸 중앙기율검사위 서기에 앉힌 것은 그의 이런 능력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은 지도층과 관료사회의 부패가 공산당의 집권 기반을 위협할 정도였다. 기율검사위 서기로 취임한 왕치산은 기율위 위원들에게 프랑스 역사학자 알렉시스 토크빌이 쓴 ‘앙시앵 레짐과 대혁명’을 읽어보라고 권했다. 부패가 어떻게 나라를 망치는지 보라는 뜻이었다.
   
   
   지난 5년간 왕치산은 시 주석 집권
   
   1기의 강도 높은 반부패 드라이브를 주도했다. 저우융캉 전 상무위원과 보시라이 전 충칭시 서기(정치국원), 시 주석의 후계자 후보군이었던 쑨정차이 전 충칭시 서기, 장쩌민 전 주석의 군부 인맥인 궈보슝·쉬차이허우 전 중앙군사위 부주석 등이 줄줄이 왕치산이 휘두른 칼에 날아갔다. 정치국원 이상은 사법적으로 처벌하지 않는다는 중국 정계의 불문율을 깨고 정·군의 최고위층까지 손을 댔다.
   
   왕치산은 이런 혹독한 반부패 드라이브로 적잖은 적을 만들었고, 작년에는 자신이 부패 의혹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미국으로 도피한 중국의 부동산 재벌 궈원구이(郭文貴)는 왕치산 가족들이 중국 하이난항공의 지분을 부정한 방법으로 취득했고, 미국 내 호화 주택을 여러 채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왕치산의 부인인 야오밍산이 1992년 미국 국적을 취득했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중국 당국은 이런 의혹에 대해 일절 대응을 하지 않고 있다.
   
   왕치산은 반부패 수장의 역할을 넘어 시 주석 집권 2기 당정 개혁 틀을 만드는 데도 관여했다. 시 주석은 작년 19차 당대회와 올해 전인대 헌법 개정 등을 통해 공산당을 헌법상의 집권당으로 명시해 당정일체 원칙을 분명히 하고, 반부패 국가기관인 국가감찰위원회를 신설하는 등 대규모 당정 개혁을 단행했는데, 이런 개혁 방안의 상당수가 최근 1~2년 사이 왕치산이 언급했던 내용들이다. 홍콩 등지의 중화권 언론에서 왕치산이 시 주석의 보조 역할을 넘어 권력 파트너라는 평가가 나오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왕치산이 국가부주석으로 선출된 직후인 지난 3월 18일 홍콩 명보는 중국 권력을 ‘시·왕 체제’라고 표현했다.
   
   
   김정은 환영만찬 참석… 외교 총괄 가능성
   
   왕치산이 국가부주석에 발탁되면서 그가 시진핑 집권 2기에 어떤 역할을 맡을 것인지에 대해 여러 관측이 나오고 있다. 중국 당국은 아직 그가 어떤 직무를 맡게 될지에 대해 공개적으로 밝히지 않고 있다. 중국 국가부주석은 그동안 국가주석을 대신하기 위한 의전용 자리였다. 하지만 왕치산은 이런 의전용 국가부주석에 머무르지 않고, 중국 외교를 관할할 것으로 예상된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의 경험을 살려 시진핑 집권 2기의 중요한 의제 중 하나인 미·중관계를 담당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베이징 외교가 소식통은 “왕치산의 권력 서열은 7명의 상무위원 바로 뒤인 8위이지만, 실제로는 시진핑 정권의 2인자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왕치산은 지난 3월 26일 취임 후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한 김정은 북한 노동당위원장을 환영하는 국빈 만찬 자리에 참석했다. 이전 국가부주석들은 이런 행사에 거의 참석하지 않았다. 왕치산은 이날 왕후닝 중앙서기처 서기(상무위원), 양제츠 당 중앙 외사공작영도소조 주임(정치국원) 등과 자리를 함께했다. 중국 정치평론가 덩위원은 “의전용 역할을 하는 국가부주석은 중국을 비공식 방문한 북한 최고지도자를 환영하는 국빈 만찬에 참석할 필요가 없다”며 “왕치산이 이 자리에 참석했다는 것은 그가 까다로운 외교 문제를 담당하게 될 것임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왕치산은 중국 외교의 사령탑 역할을 하는 당 중앙 외사공작영도소조 부조장을 맡을 가능성이 있다. 이 소조의 조장은 시진핑 주석이다.
   
   이와 관련해 홍콩 언론에서는 중국공산당이 외교 분야 기구들을 대폭 구조조정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외사공작영도소조와 당 중앙 대외연락부를 합쳐서 중국 외교를 총괄하는 당 중앙기구를 만들고, 이 기구를 양제츠 정치국원이 담당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중국 외교 지휘 라인은 왕치산 국가부주석-양제츠 정치국원-왕이 외교부장(국무위원)으로 연결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가 보도했다.
등록일 : 2018-04-13 17:26   |  수정일 : 2018-04-13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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