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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탄생 100년]
‘박정희의 길’ 무대에 올린 소설가 복거일

“박정희와 이병철의 만남이 대한민국의 운명을 바꿨다”

글 | 정장열 주간조선 부장대우

photo 한준호 영상미디어 차장대우
지난 11월 3일 대구 봉산문화회관에서 연극 ‘박정희의 길’이 초연됐다. 소설가 복거일(71)씨가 지난 7월 박정희 대통령 탄생 100주년을 맞아 발표한 같은 이름의 희곡이 무대에 올려졌다. 직접 연출까지 맡았던 복씨는 11월 6일 서울의 한 커피숍에서 만나 연극을 무대에 올리기까지 겪었던 고생담부터 털어놓았다.
   
   “시국이 이래서인지 박정희 대통령에 관한 모든 게 잘 안 된다. 연극을 하려면 사람이 모여야 하는데 무대감독이고 배우고 찾기가 힘들었다. 다들 ‘박정희에 대한 연극’이라고 하면 ‘알겠다’고만 하고 연락이 끊겼다. 오죽했으면 박정희 역을 맡을 배우를 공연 이틀 전 리허설 때에야 구했겠나. 연극계에서도 박정희에 관해 뭔가를 하면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고 생각들 하는 것 같다.”
   
   1987년 소설 ‘비명을 찾아서’로 등단한 복씨는 그동안 소설 쓰기 못지않게 이승만·박정희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해 깊이 천착해온 인물이다. 두 사람을 깊이 들여다보면서 대표적인 우파 지식인이 됐고 보수주의에 관한 많은 글들을 써왔다. 200자 원고지 1만자 분량을 목표로 한 ‘소설 이승만’을 연재 중인 그는 6년 전 간암 선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얼굴이 밝고 편해 보였다.
   
   - 연극에서는 방대한 분량의 희곡을 다 다루지 못했을 것 같은데 뭘 집중적으로 보여줬나. “희곡을 10분의 1로 축약해 무대에 올렸다. 박 대통령이 일본과 관계 개선을 하고 포항제철을 짓는 과정에 집중했다. 지금 우리는 일본에 대해 너무 모른다. 우리가 경제부흥을 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요인이 이웃에 일본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 핵심 포인트를 박정희가 안 것이다.”
   
   그는 박정희의 의지와 일본의 도움이 없었으면 포철은 탄생하지 않았다는 점을 재차 강조했다. “포스코 역사관에 가면 포철 건설 당시 반대 여론을 보여주는 자료들이 많은데 동아일보 사설을 본 적이 있다. ‘우리는 제철을 할 힘이 없기 때문에 자원낭비를 하지 말고 다른 데 돈을 써야 한다’는 것이 요지였다. 당시 그 사설을 쓴 분이랑 함께 견학간 자리였는데 그분이 ‘일생일대의 부끄러움이 저 사설’이라고 얘기하더라. 당시 언론뿐 아니라 여야 정치인, 경제학자, 국제기구 모두가 포철 건설에 반대했다. 국제기구 관계자들은 제철소 지을 돈을 빌려달라고 하면 항상 브라질, 인도, 터키 세 나라를 꼽으며 거절했다. 우리보다 자원이 많은 신생국가들이지만 제철소를 시도해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박정희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 희곡 ‘박정희의 길’을 보면 가나야마 마사히데 전 주한 일본대사가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데 그가 포철을 짓는 과정에 기여했나. “일본에 포철 건설 자금을 도와달라고 요청하던 박정희가 사정이 여의치 않자 가나야마 대사를 부른 적이 있었다. 그때 박정희는 포철 건설 계획이 담긴 친서를 사토 에이사쿠 총리에게 전달해달라면서 ‘사토 총리의 도움을 얻지 못하면 서울로 귀임할 필요가 없다’고까지 했다. 상대국 대사를 마치 자기 사람처럼 쓴 것이다. 우리 경제 관리들이 ‘김 대사’라고 부를 만큼 친한파였던 가나야마 대사가 그때 사토 총리를 설득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당시 사토 총리도 박정희의 계속되는 요구에 짜증을 내는 상태였는데 가나야마 대사가 ‘박정희는 고집이 세서 결국 한다. 어차피 할 건데 일본이 도와줬다는 소리를 들어야 할 것 아니냐’며 설득했다. 가나야마 대사는 ‘못 하나 못 만드는 나라가 무슨 제철소냐’며 반대하던 일본 재계 관계자들도 ‘70년 전 우리가 독일에 똑같은 소리를 들었다’는 논리로 설득했다.”
   
   - 박정희의 고집을 얘기했는데 최근에는 박정희의 어떤 면을 깊이 들여다보고 있나. 박정희는 교사·군인·혁명가·정치인 등 여러 삶을 산 사람 아닌가. “박정희는 국가를 어떻게 경영하겠다는 완성된 생각을 갖고 혁명을 일으킨 사람이 아니었다. 5·16군사정변 일으킬 때는 군부를 개혁하겠다, 권력을 잡자는 생각밖에 없었다. 5·16은 일종의 반란인데 가족과 부하들의 목숨을 건 일을 벌이면서 다른 생각은 할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다른 생각을 했다면 그건 잡념일 뿐이다. 하지만 그는 권력을 잡은 후 훌륭한 치적을 남겼다. 아마 그것은 박정희의 머릿속에 입력된 새로운 지식 덕분이었을 것이다. 결국 예전 생각을 바꿔나갔다는 것인데 그게 어떻게 이뤄졌는지가 흥미롭다. 거기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다.”
   
   - 국가 지도자로서 박정희의 리더십이 어떻게 형성됐느냐는 문제인가. “그렇다. 리더십이 만들어지는 과정이다. 나는 리더의 생각은 진화한다고 본다. 대통령이 되기 전과 후는 완전히 달라지기 마련이다. 물론 자질이 중요하다. 자기 생각을 과감하게 버리고 자기를 떠받들던 기존 사람들에게서 벗어나 더 큰 인물들을 모아 자기 지식을, 정치적 기반을 넓히는 과정이다. 박정희는 거기에 뛰어났다.”
   
   - 박정희가 자신의 생각을 버리는 첫 번째 계기가 있었나. “나는 5·16 직후 이병철과의 만남이었다고 본다. 두 사람의 만남이 박정희의, 대한민국의 운명을 바꿨다. 아마 박정희가 이병철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대한민국은 바깥과는 담을 쌓은 계획경제 국가가 됐을지도 모른다.”
   
   - 왜 그렇게 생각하나. “박정희의 기본 사상은 1930년대 일본 군부 젊은 장교들을 사로잡았던 황도파(皇道派) 사상이었다. 이들은 사실 공산주의에 가깝다. 재벌을 극도로 싫어하고 소련이 하던 계획경제를 모범으로 여겼다. 이들은 실제 만주국에서 계획경제를 실험했다. 그런데 이들의 자본주의에 대한 혐오감을 바꾼 사람이 만주국의 경제를 실무적으로 운영하던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였다. 기시가 황도파 장교들을 바꿨듯이 이병철이 박정희를 바꿨다.”
   
   - 두 사람의 만남에서 어떤 얘기가 있었길래 그런가. “5·16 직후 박정희가 첫 번째로 한 일이 부정축재자라며 재벌 11명을 가둔 것이었다. 그 후 박정희가 이병철을 독대했는데 그때 이병철이 재벌과 시장을 싫어하던 박정희의 생각을 바꿔놓았다. 당시 이병철은 ‘똑같이 경쟁해서 나랏돈 안 쓰고 빌린 돈 갚고 일자리 만든 성공한 사람들은 가두고 실수든 불운이든 망한 사람들은 좋은 사람이라고 칭찬하면 되겠느냐’고 설득했다. 이병철은 박정희에게 기업이 일자리를 만들고 국가에 세금을 내는 존재라는 점을 일깨웠다. 기업이 뭔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던 사람에게 기업이 자원을 활용해 물건을 만들고 그걸 소비자에게 팔아 이윤을 얻는 과정에서 경제가 발전한다고 강조했다. 당시 박정희는 ‘재벌들이 왜 다 부패했느냐’고 물었는데 이병철은 ‘잘못된 세법 때문’이라고 답했다. 이윤을 내는 대로 다 거둬들이는 전시 체제의 세법을 그대로 유지하다 보니 기업들이 살아남기 위해 세금을 안 내려 한다고 답했다. 박정희는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이병철의 말에 수긍했고 재벌들을 풀어줬다. 그후 기업과 시장친화적으로 돌아섰다.”
   
   - 박정희식 경제 모델은 결국 관(官) 주도의 계획경제가 요체 아닌가. 시장이 어떤 공동체보다 낫다고 주장해온 시장주의자로서 이를 어떻게 해석하나. “박정희가 한 일을 주류 경제학에서는 시장 설계, 마켓 디자인(Market Design)이라고 규정한다. 아무것도 없는 후진국으로서는 정부가 주도해 자본과 기술을 들여오면서 시장을 만들어나갈 수밖에 없다. 중요한 건 같은 계획경제였지만 박정희 모델은 소련, 만주국과 달리 폐쇄적 자급자족 경제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오히려 박정희는 수출을 장려하면서 밖으로 나갔다. 틀은 국가가 주도하지만 집행은 시장을 통해서 한다는 원칙도 일관되게 지켰다. 특히 박정희가 경제개발에 나설 때는 종속이론이 판을 치던 때였다. 선진국과 후진국은 교역 조건이 나빠서 수출을 하면 할수록 후진국이 손해본다고 가르쳤다. 문을 닫고 보호무역을 해야 한다는 이론을 모든 신생국이 따랐는데 박정희만 수출 주도로 나갔다.”
   
   그는 1970년대 초 자신의 경험을 돌아보며 대한민국 시장의 탄생을 얘기했다. “내가 1970년대 초 한 기업에서 외자유치를 담당했었다. 외자도입법을 달달 외고 있을 때였다. 당시 변호사들도 이 법을 잘 몰랐다. 시장을 만들겠다는 의지가 이런 특별법을 만든 것이다. 초창기 외자도입법은 외자를 들여와도 될 분야를 일일이 지정해준 포지티브 시스템이었는데 나중에는 안 되는 분야만 정해주는 네거티브 시스템으로 바뀌었다. 이와 함께 우리 기업들의 수출을 장려하기 위해 보조금 제도를 시행했다. 당시 관세가 국내 기업들을 보호해줄 때여서 인센티브가 없었으면 기업들이 해외로 나갈 이유가 없었다. 관세를 상쇄할 만큼의 보조금을 줘서 기업들을 수출로 유인한 것이다. 박정희는 시장과 제도의 틀 안에서 경제발전을 꾀했다.”
   
   - 박정희 말기 한국 경제는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무역적자 등으로 만성적인 위기에 빠졌고 그런 경제적 위기가 부마항쟁의 한 원인이 됐다는 연구들도 있다. 일부 연구자는 ‘박정희 모형은 이미 박정희 시대에 실패했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하는데.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박정희 말기의 경제위기는 석유파동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지금도 기억하지만 2차 석유파동 때 최규하 대통령이 원유를 거의 구걸하러 다니지 않았나. 1차 파동 때 내가 오퍼상을 하고 있었는데 매일매일을 걱정할 만큼 어려웠다. 당시 한국 경제는 막 이륙하려는 비행기와 같아서 추진력이 떨어지면 바로 내려앉는 상황이었다. 또 하나 위기를 가중시킨 건 미군 철수다. 7사단의 철수 결정 이후 박정희는 경제보다 국방에 더 신경을 썼다. 그때는 베트남전 특수도 끝난 때였다. 석유파동과 베트남전 특수 종료, 미군 철수 이런 외부 요인들이 위기를 불러왔다.”
   
▲ 지난 11월 7일 복거일씨가 서울 상암동 박정희기념관에서 박정희 업적 전시물을 둘러보고 있다. photo 한준호 영상미디어 차장대우

   - 대표적 좌파 지식인인 백낙청 교수는 ‘한국식 고도성장 모델과 관련한 박정희의 지적재산권을 인정하는 데 인색할 필요가 없다’면서도 ‘정치적 탄압과 사회적 획일화를 통한 경제성장 방식이 역사의 진정한 발전을 위한 최선의 것이었냐는 문제는 남는다’는 전제를 깔던데. “좌파들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박정희의 공이 있는 것이다. 박정희 모델이 지속가능한 것이었느냐, 최선의 것이었느냐고 비판들을 하는데 포철 하나만 보자. 아까도 얘기했지만 포철은 모두가 반대할 때 박정희 혼자서 만들어낸 것이다. 없던 걸 만들어서 세계적 기업이 됐고, 정부가 만든 기업이 민간으로 환원됐다. 지금 멀쩡하게 잘나가는 원전산업을 문 닫자고 하는 사람들은 지속가능 발전을 운운할 자격이 없다고 본다. 사후 비판은 항상 쉬운 법이다.”
   
   - 시장주의와 함께 자유주의도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라고 줄곧 강조해왔는데 자유주의자로서 박정희의 독재와 인권탄압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정치적인 면에서 보면 박정희의 3선 개헌부터 문제가 있었다고 본다. 당시 박정희는 공화당이라는 정치적 기반이 있었고 김종필이라는 후계자도 있었다. 공화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적 정당이었고 집권 경험도 있었다. 인재들도 많이 모았다. 그런데 박정희는 3선 개헌을 추진하면서 혁명동지들을 탄압하고 공화당이라는 기반을 스스로 무너뜨렸다. 그 결과 현대화, 산업화 추진 세력이 흩어지고 정치적 기반이 좁아졌다. 그 이후에는 주변에 충성 일변도, 권력을 좇는 개인들만 모였다.”
   
   - 오늘 한 신문 칼럼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이 아버지 말기의 나쁜 모습만 본 결과 실패한 대통령이 됐다는 지적을 했는데. “일리가 있는 지적이다. 나중에 보니까 말기 박정희는 김형욱, 차지철 같은 나쁜 자질을 가진 인물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중요한 건 그게 본인의 비극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공화당, 혁명동지 같은 이념적 추진 세력이 없어진 결과 후대 한국 정치에 악영향을 끼쳤다.”
   
   - 악영향이라니? “김영삼, 김대중으로 대표되는 포퓰리스트 세력이 강해져서 한국 정치의 주류가 됐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한국 정치에 좌파가 득세할 터전도 마련됐다.”
   
   - 박정희가 후계자에게 제대로 권력을 이양하고 공화당이라는 정치적 기반을 계속 키웠다면 한국 정치가 달라졌을 것이라고 보나. “한국은 정상적이라면 좌파 세상이 될 수 없는 나라다. 6·25라는 끔찍한 전쟁의 기억이 생생한데 어떻게 북한을 추종하는 좌파들이 설 자리가 있나. 나는 10월 유신이 역사적으로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 3선 개헌의 논리적 결과였을 뿐이다. 3선 개헌 이후부터는 호랑이 등에 올라탔기 때문에 박정희가 권력을 스스로 넘겨주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본다. 끝까지 가버린 박정희 정치의 잘못이 포퓰리스트와 좌파가 득세할 터전을 마련해준 것이다.”
   
   - 일부 우파 지식인들은 10월 유신이 1·21사태와 미·중 화해 등 급변하는 국제 정세와 안보 상황 때문에 불가피한 비상 조치였다고 해석하는데. “박정희를 흠모하는 일부 인사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유신을 정당화하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 유신 때문에 중화학공업이 성공했다는 주장도 있던데 그건 순서가 틀린 것이다. 중화학공업 정책의 상징물인 포철은 유신 훨씬 전에 추진됐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박정희가 3선 개헌을 추진함으로써 애써 쌓아올린 무형적 자산을 없애버렸다는 것이다. 사실 5·16은 군사정변으로 시작됐지만 사후에 혁명으로 바뀌었다. 5·16 이전과 이후 대한민국은 완전히 달라졌다. 이른바 산업화, 현대화라는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그런 변화가 ‘한번 해보자’며 국민들을 일깨웠다. 파독 광부들과 박정희가 서독에서 함께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 중 하나다. 국민과 지도자가 하나가 된 일은 우리 역사에서 흔치 않았다. 그 무형적 자산이 3선 개헌으로 사라진 것이다.”
   
   - 대한민국이 농업국가에서 중화학공업을 일으킨 산업국가로 일거에 변모한 바탕에 유신 독재 시스템이 작동했다는 연구도 있다. 공업고등학교 대규모 육성 등 혁명적인 교육 개혁을 통해 군대식, 병영식으로 기능공들을 키워냈다는 주장인데. “교육이 중요했던 건 사실이지만 대한민국의 결정적인 교육 인프라는 사실 일제와 이승만 덕분이다. 양반만 글을 배우던 신분차별 중세국가에 국민교육, 전문교육, 대학교육을 도입한 것이 일제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친일파 숙청을 위한 이른바 ‘반민법’을 제정했지만 친일을 가르친, 어찌 보면 골수 친일파인 교원들은 사면했다. 교육이 중요하니까 과거 잘못을 뉘우치면 다 사면해 활용하자는 취지였다. 이승만은 6·25 전시 중에도 군 교육이 중요하다며 제일 똑똑한 군인들을 뽑아 미국에 보내 포병 교육을 시켰다. 그중 한 명이 박정희다. 대한민국 인재양성의 뿌리는 이승만이다.”
   
   - 이승만이 깔아놓은 교육 인프라, 민주시민 양성 등이 대한민국의 원동력이라면 5·16의 역사적 의미는 뭔가. 박정희의 리더십이 없었더라도 대한민국이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유당 정권은 부정선거로 나라를 무너뜨렸다. 민주당이 정권을 잡았지만 좌우로 나뉘어 맨날 싸우기만 했다. 당시 신문들이 조·석간 4면 체제로 발행됐다고 기억하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데모 얘기뿐이었다. 달구지를 끄는 사람들도 데모를 했고, 대학생들은 전쟁 끝난 지 몇 년 됐다고 판문점에 가서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를 외쳤다. 그런 사회·정치적 혼란이 5·16을 부른 것이다. 5·16 추진 세력들도 권력을 잡을 때 경제 문제는 뒷전이었고 그런 혼란과 불안을 해소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 그동안 천착해온 이승만과 박정희 두 사람의 역사적 임무 교대를 어떻게 해석하나. “박정희 시대를 대표하는 민족중흥이라는 구호가 잘 대변하고 있다고 본다. 대한민국은 사실 이승만의 작품이다. 그가 없었다면 대한민국도 없었다. 그런 대한민국이 위기와 혼란에 빠졌을 때 박정희가 나타나 대한민국을 잡아채 민족중흥의 길로 끌고 간 것이다.”
   
   - 건강은 괜찮나. “배 아래 가끔 둔탁한 통증이 온다. 체력은 달리지만 집중이 잘 돼 글은 잘 써진다. 유일한 재미가 글을 쓰는 것이다.”
   
   그는 6년 전 암 선고를 받으면서 몸속을 들여다본 이후 다시는 검사를 받지 않았다. 항암치료도 받지 않았다. 항암치료를 받기 시작하면 체력이 달려 글을 쓸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는 암 선고 후 한 인터뷰에서 “과학이 내놓은 증거들이 너무 확실하니 종교에 기대지 못하는 나 같은 불운한 사람에게 절망은 가장 확실한 평정을 줄 수 있다” “절망이 가장 스테이블(stable·안정적)한 상태”라고 말했었다. 당시 발언을 상기시키며 그에게 “지금도 절망을 즐기고 있느냐”고 물었다.
   
   “암 선고 받은 후 보통 때는 괜찮았는데 밤에 자려고 누우면 숨이 막힐 때가 있었다. 그러면 일어나서 심호흡을 하곤 했다. 그 증상을 겪으면서 책을 버리기 시작했다. 내가 평생 아끼던 수천 권의 책을 버리면서 인생이랑 작별했다. 지금은 다 내려놨으니까 불안이 덜하다.”
   
   - ‘소설 이승만’이 인생을 건 마지막 작품이라고 했는데 완성까지 얼마나 남았나. “‘소설 이승만’ 연재를 시작하면서 동작동 국립현충원의 이승만 대통령 무덤을 찾았었다. 이 대통령 무덤 앞에서 ‘1년은 내가 책임질 테니까 나머지 2년은 각하가 책임져달라’고 했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2400매밖에 못 썼다. 4분의 1이나 썼나. 내가 소설가인데 마지막 작품이 ‘소설 이승만’이라는 건 행운이다.”
등록일 : 2017-11-13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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