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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탄생 100년]
“내가 틀렸고 박정희가 옳았다” 운동권 출신 5인의 평가

글 | 이동훈 주간조선 기자   글 | 김태형 주간조선 기자   글 | 조성호 주간조선 기자

▲ 1971년 제7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해 서울 장충단에서 지지를 호소하는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photo 조선일보
11월 14일은 고(故) 박정희 대통령 탄생 100주년이다. 1917년 11월 14일 경북 구미시 상모동에서 태어난 박정희는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집권한 뒤 18년간 한국을 바꿔놓았다.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쏜 총탄에 쓰러지기까지 그의 18년은 ‘도전과 응전’의 연속이었다.
   
   집권 18년간 그는 무수한 오해와 비난에 시달렸다. 경제개발 종잣돈 마련을 위해 한·일 국교정상화를 단행할 때는 ‘친일파’로 매도당했다. 대일청구권자금을 활용해 경부고속도로와 포항제철을 건설할 때는 ‘몽상가’로 손가락질당했다. 정치 비중을 축소하는 유신(維新)을 단행해 중화학공업을 일으키려 했을 때는 ‘독재자’로 비난받았다. 하지만 그가 비난을 무릅쓰고 이뤄낸 한·일 국교정상화, 경부고속도로, 포항제철, 자동차와 조선, 전자공업 덕분에 한국은 1976년부터 경제력에서 북한을 앞질렀고, 세계 10대 경제국 대열에 진입할 수 있었다.
   
   박정희는 집권 18년의 족적이 워낙 거대하기에 그만큼 그림자도 짙다. 박정희 탄생 100주년을 맞이한 지금도 그를 둘러싼 논쟁은 현재진행형이다. 박정희 덕분에 우리는 지금 1인당 GDP 2만7561달러의 국가에 살게 되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 당초 계획되었던 탄생 100주년 기념우표 발행은 돌연 취소됐다. 서울시내에 기념동상을 세우는 일마저 여의치 않다. 주간조선은 박정희 탄생 100주년을 맞아 한때 그를 비판했던, 70대부터 40대까지 운동권 출신 인사 5인의 솔직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70대 / 김세중 전 연세대 교수
   “한국에 산업혁명을 이식한 사람!”
   
   김세중(71) 전 연세대 교수의 박정희에 대한 평가다. “인류 역사를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면 산업혁명 전후로 나뉘는데, 한국은 박정희 시대 때 산업혁명을 통해 전근대적이고 정태적인 농업사회에서 근대적이고 동태적인 공업사회로 변모했다”는 것이 김세중 교수의 주장이다. 박정희에 대한 그의 평가가 처음부터 후(厚)했던 것은 아니다. 1946년생인 김 교수는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초·중·고를 나왔다. 서울사대부고 3학년 때는 레슬링선수로 활동했는데, 부상을 당해 고교를 중퇴하고 검정고시를 통해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68학번으로 입학했다.
   
   당시는 1969년 3선(選) 개헌, 1971년 대학 내 교련수업 반대 시위로 대학 캠퍼스가 한창 시끄러웠을 때다. 그 역시 3선 개헌 반대시위에 누구보다 앞장섰고, 시위 도중 다리를 다쳐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다. 1971년 박정희 정부가 대학에 교련 과목을 신설해 학생들을 상대로 기초군사훈련을 실시하려 했을 때는 반대시위를 주도했다. 반대시위 직후 남산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대공수사를 전담하는 5국에서 심문을 받기도 했다. 그는 “조사관이 ‘내 아들도 연세대 학생’이라고 이해하는 태도를 보여 심한 고초를 당하지는 않았다”고 했다.
   
   박정희에 대한 그의 생각도 사회 일반의 그것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는 “권위적이고 독선적이며 권력욕에 불타는 이미지가 있었다”고 했다.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던 박정희의 경제정책에 대한 생각도 회의적이었다.
   
   그는 “당시 나라를 팔아먹는다는 ‘매판(買辦)자본’이란 용어가 널리 쓰였다”며 “지금 생각해 보면 우습지만 경제발전 결과 남한이 신(新)식민지로 전락할 것이란 우려가 팽배했다”고 했다. 하지만 40여년이 흐른 지금 박정희에 대한 그의 생각은 180도 바뀌었다. 생각이 바뀐 단초는 1977년 일본 쓰쿠바대학에 정부 장학생 자격으로 유학을 가면서다.
   
   물론 유학 가는 길도 녹록지 않았다. 학생시위 전력 탓에 신원조회 결과 ‘불가’ 판정이 나왔다. 마침 미국에서 돌아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특보로 있던 학과 교수가 ‘1급 공무원 2명의 신원보증’을 조건으로 겨우 유학길을 터줬다. 천신만고 끝에 떠난 일본에서 바라본 조국 한국은 정반대였다. 외국에서는 정작 ‘제3세계 경제발전의 우등생’ 평가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내가 한국에만 있었으면 아마 ‘주사파(主思派)’가 되어 있었을 것”이라며 “캐나다 맥길대에 유학 갔을 때는 당시 인도와 파키스탄 학생들이 한국을 부럽게 바라보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말했다.
   
   원로 정치학자인 그는 “쿠데타로 폭력을 동원해 정상적 절차를 거쳐 선출된 민주정부를 전복하고 태어난 박정희 정부는 원죄(原罪)가 있다”고 한다. 유신으로 태어난 4공화국의 경우, 영구집권을 획책하는 등 더욱 이질적인 체제였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그는 좀 더 거시적 차원에서 박정희 시대를 바라볼 것을 주문했다. 5·16의 경우, 장준하가 발행인으로 있던 자유주의 지식인의 본산인 ‘사상계(思想界)’마저 권두언 등을 통해 쿠데타의 불가피성을 피력했다고 한다. 2공화국 당시는 대학과 술집에서 북한 군가인 ‘적기가(赤旗歌)’를 대놓고 부를 정도로 사회혼란이 극심했다.
   
   그는 “자율적 개인의 전통이 없고 빈곤이 팽배한 사회는 민주주의가 어렵다”며 “민주주의를 한다 해도 소수 유력자들에 의한 과두정(寡頭政)으로 흐를 위험이 다분하다”고 평가했다. 2차대전 후 신생독립한 제3세계 대다수에서 민주주의보다는 군사정권이 오히려 보편적이었다. 그는 “‘사상계’는 표지 뒤에 ‘혁명공약’을 게재하는 등 적어도 1961년부터 1963년까지는 우호적인 입장을 유지했다”고 했다.
   
   그는 “박정희로 대표되는 ‘산업화세력’은 김영삼·김대중으로 대표되는 ‘민주화세력’ 못지않게 민주화에도 실질적인 기여를 했다”고 주장했다. 민주주의의 기본 요건인 중산층 형성이 그의 집권기 때 이뤄졌기 때문이다. 그는 “경제발전은 국민성이 부지런하다는 것만으로는 설명이 안 된다”며 “박정희가 한·일회담, 경부고속도로, 포항제철 등 반대를 무릅쓰며 그 장을 깔아줬기에 가능했다”고 했다. 하지만 박정희는 중산층 형성이란 그의 최대 업적에 발목이 잡혔다.
   
   김세중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박정희는 한국을 빈곤에서 해방시키고 중산층을 키운 ‘성공의 역설’ 탓에 중산층의 데모에 시달리다 결국 김재규의 총탄에 쓰러지는 결과를 맞았다.”
   
   
   60대 /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
   “박정희 사망 소식에 쾌재를 불렀다”
   
   김문수(66) 전 경기도지사가 1979년 박정희 서거 직후 품었던 생각이다. 김문수 전 지사는 1970~1980년대 노동운동계의 대부(代父)였다. 노동계를 중심으로 한 반(反)박정희 투쟁의 선봉이었던 그는 1994년 보수여당 정치인으로 변신해 세상을 또 한 번 놀라게 했다. 그의 반박(反朴) 투쟁은 경북고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6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학내에서 박정희의 3선 개헌 반대 시위를 주도하면서다. 그는 “당시 사회 교과서에 이승만 대통령의 3선 개헌을 부정적으로 기술했음에도 박정희가 3선 개헌안을 통과시키자 반감이 일었다”고 했다.
   
   서울대 경영학과에 70학번으로 입학한 그는 학내 서클인 ‘후진국사회연구회’에 가입해 본격적인 학생운동의 길을 걷는다. 이후 청계천 피복노조 노동자들과 판잣집에서 노동법을 공부하며 의식화 교육에 전념했다. 구로공단에 위장취업해 대학에서 제적당하기도 했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두 번째로 제적당한 그는 당국의 수배를 피해 도피생활을 이어가며 공장 대여섯 군데를 전전했다. 그때부터 그는 노동운동계의 실질적 리더로 떠올랐다.
   
   한일도루코 노조위원장으로 있던 1979년 10·26사건이 터졌다. 그는 “박정희의 사망과 함께 사회주의 노선이 가속화될 것으로 기대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학생운동 은사 격인 안병직 현 서울대 명예교수는 뜻밖의 이야기를 했다. “도쿄대 교환교수로 갔던 안병직 교수가 일본에서 생각이 바뀌어 왔더라. 그간 나와 안 교수는 ‘자본주의 필망론’을 외쳤다. 하지만 도쿄에서 돌아온 안 교수가 ‘자본주의는 망하지 않는다’고 했다. 노동운동 그만하고 딴 길을 찾으라는 충고도 했다.”
   
   그때 그는 안병직 교수를 ‘변절자’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1980년대 중후반, 그는 교도소에서 복역하며 소련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의 볼셰비키 비판, 페레스트로이카(개혁)에 관한 글을 읽은 뒤, 사회주의 이념에 회의를 품기 시작한다. 출소 후에는 사회주의 종주국 소련의 패망도 지켜보았다. 그는 당시를 회고하며 “완전한 갈등에 빠졌다”고 말했다. 결국 1994년 민주자유당(자유한국당의 전신)에 입당해 미국 국무부 초청으로 한 달간 미국을 방문, ‘자본주의의 본산(本山)’을 경험한 뒤로는 완전한 ‘전향’의 길을 걷는다.
   
   그에게 박정희란 인물이 새롭게 다가온 계기는 경기도지사(2006~2014)로 재임할 때다.
   
   “도지사 시절 경기 북부 지역에 고속도로를 놔 달라고 중앙 정부에 요구했다. 생각해 보니 난 박정희의 고속도로 건설을 반대했었다. 당시 경기도 일자리의 약 25%가 자동차산업과 관련된 것이었다. 나는 자동차산업에도 반대했었다. 내가 50~60대에 비로소 알았던 걸 박정희는 이미 1960~1970년대에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박정희 신도시(울산·구미·창원)는 토목공사 전문가들이 만든 신도시를 능가한다”며 높은 점수를 주었다. 새마을운동에 대해서도 “처음 시작됐을 땐 별것 아니라고 봤지만, 경쟁을 매개로 관민(官民)이 조화를 이뤄 농촌을 잘살게 만든 획기적인 운동”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박정희 지도력의 근원을 일본식 교육에서 찾는다.
   
   그는 “군대라는 조직을 지휘한 경험도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박정희의 ‘권위주의 독재’에도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북한 공산주의와 대치하던 특수 상황, 잦은 선거로 인해 대두될지 모르는 포퓰리즘을 경계해 박정희가 유신(維新)을 단행했다는 의미다.
   
   그는 “5000년간 우리 민족이 겪은 가난, 좌절, 절망을 ‘하면 된다’는 정신으로 신념화해 산업혁명을 이룬 박정희는 위인”이라며 “전향하기 전에는 박정희의 공과를 0:10으로 봤지만 지금은 8:2로 본다”고 했다. “압도적으로 공이 많은 인물”이란 말도 덧붙였다. 인터뷰가 끝났을 때 김문수 전 지사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박정희 동상을 최소 서울 광화문광장과 동대구역광장 두 군데엔 세워야 한다. 그것이 세계사적 위인에 대한 예의다.”
   
   
▲ 1964년 서울 중앙청 앞에 모여든 한·일 국교정상화 반대시위대. photo 조선일보

   50대 / 이동호 여의도연구원 부원장
   “내가 알고 있던 게 사실과 달랐다”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연대사업국장을 지낸 이동호(58) 자유한국당 여의도연구원 부원장의 이야기다. 1979년 경북 경산의 영남신학대에 입학한 이동호 부원장은 민중신학을 공부하며 좌익사상에 눈을 떴다. 1985년 연세대 신학과로 옮겨 공부를 계속하면서 본격적으로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그가 속했던 전대협은 NL(민족해방) 계열 주사파 주도로, 전국 각 대학 총학생회를 중심으로 결성한 학생운동 조직이다.
   
   전대협에서 연대사업국장으로 일한 그가 밝힌 전대협의 활동은 대강 이러했다. “북한의 대남혁명 지도기관인 한민전(한국민족민주전선)이 전대협에 혁명투쟁 방안 등에 관한 지령을 내려보냈다. 전대협은 북한의 지령을 수수한 뒤 그대로 따랐다. 사실상 북한의 대남적화노선을 전적으로 추종한 셈이다.” 이 부원장은 “전대협에 개인적으로 가입한 것은 아니었다”며 “1987년 연세대 조통(조국통일)그룹 소속이었는데, 조통그룹이 연대사업국장을 맡을 차례라 맡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학생운동을 하면서 박정희에 대한 부정적 인식도 자연스레 싹텄다. 그즈음 박정희의 일본식 이름이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란 사실이 알려지면서 ‘박정희는 친일파 앞잡이’란 부정적 인식이 더 강해졌다고 한다.
   
   하지만 대학 졸업 후인 1990년 초, 학원을 경영할 때 ‘이념적 기둥’인 소련이 무너지자 그의 생각은 점차 바뀐다. 1997년 북한 주체사상의 이데올로그인 황장엽 노동당 비서의 망명은 ‘전향’의 결정적 계기가 됐다. 당시 그는 황장엽이 북한 체제를 비판한 글을 정독하며 “그동안 알고 있던 게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고 한다.
   
   그 무렵 박정희에 대한 공부도 다시 시작했다. 대학 때 책에서 본 것에 따르면, 민중이 열심히 일해도 수탈을 당해 부익부 빈익빈이 심화되어야 했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그는 “사회에 나와 바라본 대한민국은 점점 더 활력을 띠고 있었고 망하기는커녕 일자리도 계속 늘고 있었다”며 “그 배경에 ‘박정희의 산업혁명’이 있었다”고 했다.
   
   그는 박정희의 공적으로 한국인에게 숙명과도 같았던 가난을 극복할 수 있다는 신념을 불어넣은 것을 꼽았다. 수출주도형 경제를 통해 잘살 수 있다는 자신감을 일깨웠고, 그 성취를 통해 또 다른 성취도 이뤘다는 것이다. 사회 부문의 대표적 업적으로는 ‘새마을운동’을 꼽았다.
   
   “새마을운동 정신의 핵심인 근면·자조·협동을 보자. 산업도 사유재산도 없는데 근면·자조·협동할 수 있었을까. 박정희는 산업화를 이루고 개개인의 재산을 보장한 뒤 새마을운동을 실시, 국민의식 개혁까지 이뤘다. 민주공화국의 원리를 깨우쳐준 것이다.”
   
   그는 “1987년 6월항쟁으로 민주화를 이룬 것도 국민소득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라며 “중산층을 두껍게 해 민주화의 토대를 만든 것도 결국 박정희의 업적”이라고 했다.
   
   5·16군사정변에 대한 그간의 인식도 바뀌었다. 그는 “5·16은 비록 합법성은 결여돼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발전시켰기에 정당성은 충분하다”고 주장했다. 유신체제에 대해서는 “공부를 못하는 사람이 잘하는 사람 따라가려면 잠을 덜 자는 수밖에 없다”며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당시 모든 자유를 다 허용한 상태에서 선진국을 따라갈 순 없었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유신을 통해 자유를 제한할 수밖에 없었다. 박정희의 고심작이 유신이다. 만약 지금 같은 민주체제였다면 박정희의 경부고속도로 건설 계획이 제대로 추진됐을까. 중화학공업은 제대로 됐을까. 요즘 원전(原電) 하나 가지고도 저 난리 아니냐?” 박정희가 정치발전과 경제성장에 있어 효율성을 추구할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다.
   
   다만 그는 2차 인혁당 사건 연루자 사형, 과도한 학원탄압, 언론통제는 박정희의 분명한 과오라고 지적했다.
   
   “나는 전향 전엔 ‘박정희는 없어져야 할 인물’이라고 판단했다. 지금은 공이 8~9, 과는 1~2 정도로 본다. 지금과 같이 저성장의 늪에 빠져 있는 우리 경제를 박정희 경제모델을 통해 개선해야 한다.”
   
   
▲ 1972년 ‘10월 유신’ 선포 후 대학생들의 유신 반대 시위가 격렬해졌다. 사진은 1973년 10월 2일 서울 서대문 이화여대 입구에서 있었던 시위 모습. photo 조선일보

   50대 / 이강호 한국자유회의 간사
   “박정희는 영웅이다”
   
   한때 운동권 핵심간부였던 이강호(필명·54) 한국자유회의 간사는 박정희를 이렇게 평가했다. 1963년생인 이씨는 부산에서 초·중·고를 나와 서울대에 입학했다. 82학번으로 재학시절 서울대 총학생회 핵심간부를 지내며 한 차례 복역한 적도 있다. 소위 ‘언더’라고 불린 지하서클 내 ‘페이퍼팀’에서 활동하면서 선전선동용 대자보와 유인물을 작성하는 것이 그의 역할이었다.
   
   한때 ‘마르크스레닌주의자’를 자처했다는 그의 박정희에 대한 인식도 운동권의 통념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유신독재’ ‘반민주’ 등 부정적 평가 일색이었다. 다만 PD(민중민주) 계열로서 박정희 집권기를 경제사적 측면에서 사회주의의 전 단계인 부르주아민주주의 단계에서 경제발전을 본격화한 시점으로 인식하는 데 그치는 정도였다.
   
   그랬던 그의 생각이 180도 바뀐 것은 김영삼 정부 때 청와대에서 일하며 대통령 연설문 작성에 간여하면서다. 당시 연설문 작성에 참조하기 위해 들여다본 객관적 지표들이 운동권 시절 대자보와 유인물에 적었던 그것과 전혀 달랐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을 거치면서 그는 과거 운동권 시절 가졌던 생각과 완전히 결별하게 된다. 그는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좌익친북적 주장과 목소리가 갈수록 증폭됐다”며 “특히 노무현 정부 때 이미 사문화된 상태나 다름없던 ‘국가보안법’을 굳이 폐기하려던 386운동권 출신들과 논쟁을 벌이면서 ‘운동권 정권’ ‘전대협 정권’이란 생각을 굳혔고 완전히 결별하게 됐다”고 했다.
   
   그는 “전향이라는 것은 일조일석(一朝一夕) 간에 이뤄지는 게 아니다”라며 “기존에 쓰던 언어를 버리고 새로운 언어를 쓰는 것과 같은데 내 경우는 15년 정도 걸린 것 같다”고 했다. 지금 그는 박정희를 ‘영웅’이라고 부르는 데 주저함이 없다. 심지어 그는 “‘10월 유신(維新·1972)’마저 중화학공업화를 위한 어쩔 수 없는 과정이었다”고 했다. 사실 박정희의 경제적 성과를 긍정하는 사람 중에도 ‘유신’만은 1인 장기독재를 획책했다는 이유로 비판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하지만 그는 “1971년 7대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에 맞서 김대중 당시 신민당 후보가 ‘4대국 한반도 안전보장’과 북한과 협상을 통한 3단계 통일론, 대중(大衆)경제론을 설파했다”며 “역사에 가정은 없다고 하지만 만약 이것이 실현됐다면 오늘날 고도성장이 가능했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지금과 달리 박정희 체제는 상시적 비상체제였다”는 점을 수차례 강조했다. 대외적으로는 미국의 닉슨독트린 선포(1969) 등 안보위협 요인이 상존했고, 대내적으로는 ‘좌익적 저항운동’이 계속되는 등 안팎의 도전에 시달렸다는 것이다. ‘용공조작사건’으로 치부되는 박정희 정권 시절 ‘4대 공안사건(인혁당·통혁당·해방전선·남민전)’ 역시 그는 “실체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대학 1학년에서 2학년으로 올라갈 때 지하서클에서 집중교육을 받았을 때도 ‘이것(4대 공안사건)은 남한 해방운동의 피어린 발자취’라고 배웠다”고 말했다. 그리고 2학년에서 3학년으로 올라가면서 운동권 핵심부로 진입할 때는 선배로부터 “너희들도 열심히 하면 ‘윗동네’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것”이란 말을 들었다고 했다. 그는 “윗동네가 과연 어디였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지금도 ‘사람 중심’과 같이 한때 주사파들이 숙어처럼 쓰던 말이 들릴 때마다 놀란다”며 “남로당 간부 출신 셋째형 박상희를 두고 본인도 한때 남로당에 몸담았던 박정희도 좌익적 움직임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북한과 남한 내 좌익세력의 준동은 박정희를 이해하는 데 빠질 수 없는 변수다. 그는 “‘박정희 목 따러 왔수다’란 말처럼 북한은 실체적 위협이었다”며 “1991년 소련 붕괴로 공산국가들이 무너진 지금과 당시를 똑같이 보면 절대 안 된다”고 강조했다.
   
   최악의 여건에서 기대 이상의 경제성장을 이루며 민주화를 위한 물질적 토대를 만들었으니 따지고 보면 ‘반(反)민주’가 아니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는 “박정희의 공과 과를 얼마라고 평가하는 것은 평론가적인 쉬운 접근”이라며 “박정희 시대는 세계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성취의 시대”라고 말했다.
   
   
   40대 / 이종철 바른정당 대변인
   “민주화의 토대를 만든 경제성장을 이룬 인물”
   
   이종철(44) 바른정당 대변인의 박정희에 대한 평가다. 1972년생인 이종철 대변인은 대구에서 초·중·고를 나와 고려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92학번인 그는 대학 입학 후에 학생운동에 뛰어들었고 1995년 고려대 총학생회장에 당선됐다. 1996년 8월 그는 전대협의 후신인 한총련이 주축이 된 ‘범청학련 통일대축전’에 참가했다. 연세대에서 시위를 벌이던 한총련 소속 대학생 5000여명이 연행되고 이 가운데 400명이 넘는 학생들이 구속된 사건이었다. 그는 소위 ‘연세대 사태’라 불리는 이 사건으로 실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수감돼 1998년 3월이 돼서야 사면을 받는다. 그는 운동권 시절 박정희를 이렇게 생각했다.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 출신으로 일제에 복무한 인물로 쿠데타를 통해 민주헌정질서를 무너뜨린 독재자였다.”
   
   박정희를 비판했던 그는 대학 졸업 후 자신의 생각이 잘못됐음을 깨닫게 된다. “주사파로 활동하며 박정희에 대해 가졌던 생각들이 나이를 먹을수록, 참 편향됐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후 좌편향 역사관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대한민국 역사 바로 알기 사업도 진행했다. 박정희에 대한 공과(功過)를 제대로 평가하기만 해도, 그가 얼마나 뛰어난 지도자였는지 알 수 있다.”
   
   그는 현재 좌파진영이 박정희를 왜곡해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일례로 한국국제협력단(KOICA)은 ‘새마을운동’ 관련 공적개발원조(ODA) 사업을 대폭 축소하고 2018년부터는 신규 사업을 추진하지 않는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새마을운동’ 요소가 들어간 사업이 ODA 등 개발협력 사업에 선정되기 어렵게 하는 법 개정에 들어갔다.
   
   이 대변인은 “정부가 앞장서서 ‘새마을’이란 브랜드 자체를 없애버리겠다는 것은 의도적으로 박정희의 정체성을 지우겠다는 것이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박정희가 주도한 새마을운동은 세계가 주목한 농촌 개발 모범 사례다. 새마을운동 기록물은 2013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2016년 몽골·베트남 등 33개 개발도상국은 새마을운동글로벌리그(SGL·Saemaul Undong Global League)라는 국제기구를 만들었다. 여기에 가입한 회원국들은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해 새마을정신을 배우고 있다.
   
   이 대변인은 좌파진영이 박정희의 과(過)만 부각시키는 점을 안타까워했다. 그는 자신이 한때 운동권 간부로 활동했기에 주사파 출신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잘 알고 있다. 그는 좌파진영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그들이 민주화운동을 하며 가졌던 박정희에 대한 생각이 부정적이라는 것은 잘 안다. 물론 박정희가 모든 면이 긍정적인 것은 아니지만, 지도자로서 리더십이 탁월했고, 뛰어난 역량을 가졌다고 생각한다.”
   
   그는 박정희 탄생 100주년의 의미를 이렇게 말했다.
   
   “박정희는 한국을 근대화한 인물이다. 한때 나는 박정희가 민주헌정질서를 무너뜨린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그건 편향된 생각이었다. 탁월한 지도력과 강력한 추진력으로 고도 경제성장을 이룬 그가 있었기에 훗날 민주화의 토대가 가능했다고 본다. 이제는 박정희의 과가 아닌 공에 대해서 재평가할 때다.”
등록일 : 2017-11-13 08:37   |  수정일 : 2017-11-16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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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 2017-11-15 )  답글보이기 찬성 : 1 반대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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