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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향민 아들에서 재수 대통령까지...문재인의 인생 10개 장면

글 | 김민희 주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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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버이날인 지난 5월 8일, 문재인 대통령의 딸 다혜씨가 아들을 데리고 마지막 유세현장인 광화문광장에 깜짝 등장했다. photo 이덕훈 조선일보 기자
1. 문 대통령의 뿌리, 실향민
   
   문재인 대통령의 부모는 이북 출신이다. 아버지 문용형씨(1978년 작고)와 어머니 강한옥(90)씨는 여러 대에 걸쳐 함경남도 흥남에서 살았다. 아버지 집안은 경제적으로 가난했지만 어머니는 넉넉한 부농 집안에서 곱게 자랐다. 어머니 강씨는 그 시절 중학교를 졸업했고 책을 좋아했다고 한다. 문씨 집성촌에서 친척들과 모여 살던 아버지는 1950년 12월 흥남철수 때 고향을 떠났다. 빈손이었다. 젖먹이였던 누나 재월씨를 둘러업고 ‘곧 다시 오겠지’ 하는 생각에서였다.
   
   어려서 수재라는 말을 듣고 자란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명문고로 꼽히는 함흥농고를 나왔다. 졸업 후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고 북한 치하에서 흥남시청 농업계장을, 유엔군 진주 기간에는 농업과장을 지냈다.
   
   자서전 ‘운명’에 따르면 부친은 1950년 12월 흥남에서 미군 선박을 타고 경남 거제도에 내려와 임시로 마련된 피란민 수용소에서 생활했다. 문 대통령은 거제도 피란살이 중에 태어났다. 시골집 방 한 칸에 세 들어 살 때였다. 하필 주인집 아주머니도 함께 임신을 했는데, 같은 집에서 애를 낳으면 안 된다는 속설 때문에 다른 집에 가서 문 대통령을 낳았다. 큰집에도 아들이 없어 가문의 첫아들로 태어난 그는 집안의 축복을 받았다.
   
   가난했지만 부모님의 교육에 대한 열망은 남달랐다. 아버지는 포로수용소에서 노무 일을, 어머니는 달걀 행상을 하면서 돈을 모아 문 대통령이 초등학교 입학 무렵 부산 영도로 이사왔다. 장사 체질이 아닌 아버지의 부산 생활은 힘들었다. 조용한 성품에 술도 마실 줄 모르는 아버지는 양말 도매업을 했으나 수완이 부족해 외상 미수금만 쌓였다. 집안 생계는 어머니가 꾸리다시피했다. 호구지책으로 구호물자를 시장 좌판에서 팔기도 하고, 작은 구멍가게를 운영하는가 하면, 연탄배달도 했다. 문 대통령은 학교 마치고 돌아와 연탄배달을 도왔다.
   
   아버지 문씨는 1978년 심장마비로 갑자기 사망했다. 59세. 북한에 있는 부모의 생사조차 알지 못하고, 문재인이 유신반대 시위로 유치장에 들락거리면서 학교에서 제적까지 당한 시기였다. 어머니 강씨는 2004년 7월 이산가족 상봉행사 때 북한에 두고 온 여동생과 극적 재회를 했다. 6남매의 장녀였던 어머니에게 마지막 남은 혈육이었다.
   
   

   2. 피란민촌의 지독한 가난
   
   문재인 대통령은 1953년 1월 24일 경남 거제시 거제면에서 출생했다. 여동생 재성(62)·재실(55)씨, 남동생 재익(58)씨도 거제 피란민촌에서 태어났다. 피란민촌에서의 생활은 배고팠다. 문 대통령은 초등학교 1~2학년 때 배급날이 되면 줄을 서서 양동이에 배급을 받아왔다. 수녀님들은 꼬마 문재인이 기특해 과일이나 사탕을 손에 쥐여주기도 했다. 수녀복을 입은 수녀님의 모습이 천사로 비쳤다고 한다.
   
   그런 인연 때문인지 문 대통령 집안은 천주교 신자가 됐다. 어머니 강씨가 먼저 성당을 다녔고 문 대통령도 초등학교 3학년 때 영세를 받았다. 부산 영도에 있는 신선성당에서였다. 이 성당과의 인연은 오래고 깊다. 문 대통령은 나중에 이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어머니 강씨는 지금도 이 성당에 다닌다. 문 대통령은 어머니가 주신 묵주반지를 20년 넘게 끼고 있다. 가장 아끼는 애장품으로 이 묵주반지를 꼽기도 했다.
   
   문 대통령이 다닌 남항초등학교는 피란민촌에 있었다. 피란민이 몰려들어 한 학년 학생 수가 1000여명에 달했고 변변한 건물이 없어 판자와 함석지붕으로 지은 가교사(假校舍)에서 배우던 시절이었다. 1959년 9월 사라호 태풍 때에는 가교사들이 태풍에 날아가버리는 바람에 땅바닥에서 수업을 하기도 했다. 늘 도시락을 싸가지 못했고,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실시한 학교 급식에서는 도시락을 싸온 아이들의 도시락 뚜껑을 빌려 급식을 받아먹었다.
   
   문 대통령이 겪은 가난은 그의 삶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스스로 ‘가난이 나에게 준 선물’로 첫째 자립심과 독립심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됐고, 둘째 ‘돈이라는 게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반면 상처도 있었다. 자신감이 없어서 학창 시절 내내 먼저 손을 들어 발표한 적이 없었고 선생님이 시키면 마지못해 발표했다. 초등학교 시절 그는 눈에 띄지 않는 아이였다. 키도 작고 몸도 약했다. 내성적이어서 선생님의 관심을 받지도 못했다. 성적도 별로여서 성적표에 ‘수’는 드물었고 대부분 ‘우’나 ‘미’에 ‘양’도 있었다고 한다.
   
   
▲ 경희대 재학 시절(맨위 왼쪽이 문 대통령).

   3. 문제아 문재인
   
   초등학교 6학년 때 중학교 입시공부를 하면서 자신이 공부를 꽤 잘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당시 중학교는 입시가 있었는데, 부산 최고의 명문학교로 꼽히던 경남중학교에 합격했다. 경남중학교에서 그는 ‘사회적 불평등’을 처음 느꼈다. 경남중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피란민촌의 초등학생과 차원이 달랐다. 노는 문화가 달랐고 부유한 집안이 많았다. 식모까지 둔 부잣집 도련님도 있었다.
   
   경남중학교를 졸업하고 경남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중·고교 시절 그는 지독하게 책을 읽었다. 중학교 때에는 학교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했다. 중2 때에는 학교 도서관이 문 닫는 시간까지 책을 읽다가 의자 정리까지 도와주고 집에 돌아온 적이 많다. 책은 잡식성이었다. ‘사상계’ 같은 시사잡지는 물론 성인 소설도 읽었고 신문도 비교적 일찍 접해 사회의식에 일찌감치 눈떴다.
   
   독서 습관은 그의 아버지의 힘이 크다. 아버지는 장사를 떠나 한 달 반 만에 돌아오시면서 그가 읽을 만한 책을 사왔다고 한다. 늘 책에 굶주렸고 지금도 책을 좋아한다. 스스로 “활자중독처럼 느껴진다”며 “쉴 때에도 손 닿는 곳에 책이 없으면 허전한 느낌이 든다”고 했다.
   
   중·고교 시절 그는 모범생과는 거리가 멀었다. 유기정학을 네 번이나 당했다. 두 번은 커닝에 연루되어서, 두 번은 술을 마시다 들켜서였다. 유급할 처지에 놓인 친구가 답지를 보여달라는 청을 뿌리치지 못해 보여주다가 적발됐다. 중·고등학교 때 그의 별명은 ‘문제아’였다. 처음엔 이름 때문에 생긴 별명이었는데, 진짜 문제아가 됐다.
   
   
▲ 문 대통령(왼쪽)과 김 여사(왼쪽에서 두 번째)는 경희대 법대 축제에서 파트너로 처음 만났다. 문 대통령은 김 여사가 축제에서 맥주를 시원하게 따 마시는 모습을 보고 배짱이 마음에 들었다 한다.

   4. 유신반대 시위 주도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하고 싶었으나 담임교사와 부모님이 반대했다. 법대, 상대에 갈 수 있는 성적이라는 이유였다. 서울대 상대를 지망했으나 대학입시에서 실패하고 종로학원에서 재수생활을 했다. 서울대 진학 실패에는 한 교사와의 갈등이 얽혀 있다. 고1 때 결석계를 가져오지 않은 학우를 심하게 체벌하는 교사를 보면서 ‘저 선생님 과목은 공부하지 않겠다’고 결심해 그 과목은 꼴찌 수준이었다 한다. 서울대 입시에는 그 과목이 필수였다.
   
   재수생활 동안 누나 재월씨의 공이 컸다. 공부를 꽤 하던 재월씨는 여상을 나와 바로 취업해 동생들의 학비를 대줬다. 부족한 생활비는 문 대통령이 입주 가정교사를 하면서 메웠다. 재수 끝에 또 서울대 입학에 실패, 1972년 후기였던 경희대 법대에 전액장학생으로 입학했다.
   
   대학에서 그는 운동권의 선두에 섰다. 1975년 유신반대 시위를 이끌었다. 선언문을 작성하고 연단 위에 올라가 선언문도 직접 읽었다. 이 일로 징역 8월,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았다. 대학에서도 제적당했다. 석방 직후에는 강제징집 영장을 받았다. 특전사령부 예하 제1공수 특전여단 제3대대에 배치돼 공수병이자 폭파병이 됐다. 특전사령관으로부터 폭파과정 최우수 표창을, 자대에서는 전두환 여단장으로부터 화생방 최우수 표창을 받았다. 학창 시절 상이라곤 개근상밖에 못 받았는데, 군대에서는 상복이 많아 스스로 ‘군대 체질’이라고 표현했다.
   
   3학년 재학 중에 사법시험에 응시, 1차를 한 번에 합격했고 1980년에 2차에 합격했다. 2차 합격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49일을 지낸 다음 날 짐을 싸들고 전남 해남의 대흥사로 가서 고시공부에 매진한 결과였다. 전역 후 1980년에 복학하고도 반독재민주화요구 시위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구속됐고 유치장에서 사시 최종합격 소식을 전해들었다. 지금의 아내가 된 김정숙 여사를 통해서였다.
   
   
▲ 특전사 시절의 문 대통령.

   5. 7년 연애와 면회의 역사
   
   김정숙 여사와는 7년 연애 끝에 1981년에 결혼했다. 김 여사는 같은 대학 2년 후배의 성악과 학생이었다. 둘은 문대통령이 대학 3학년 때 법대 축제의 파트너로 처음 만났다. 주선한 친구 오빠가 문재인을 일컬어, 영화배우 알랭 드롱을 닮았다는 말에 혹해 나가게 됐다는 후문이다.
   
   이후 만남을 이어오지 못하다가 1975년 비상시국총회를 계기로 인연이 깊어졌다. 문재인이 페퍼포그(Pepper Fog)를 맞아 실신했을 때 김 여사가 눈을 닦아주면서 눈을 떴다고 한다. 김 여사는 문 대통령과의 연애 시절을 ‘면회의 역사’로 회상한다. 1차 구치소, 군대 3년, 고시공부, 2차 구치소, 사법연수원 등으로 면회를 이어왔다. 그가 구치소에 있을 때에는 문 대통령의 모교인 경남고의 전국야구대회 우승 소식이 실린 신문을 안고, 군대에 있을 때에는 안개꽃을 한아름 들고 면회를 와서 먹을 것을 기대했던 내무반 동료들을 실소하게 한 일화는 유명하다.
   
   결혼 후에는 문 대통령의 검약정신이 갈등의 요소가 되기도 했다. 문 대통령은 늘 “생활을 키우면 안 된다”는 의식이 강했다. 돈 잘 버는 직업으로 알려진 변호사를 하면서도 마찬가지였다. 지금도 서대문구 홍은동 비탈길에 있는 30평대(100㎡) 집에서 살고, 가사도우미 없이 아내가 집안일을 다 한다. 김 여사가 없을 때에는 문 대통령이 햇반을 데워 먹으며 일정을 소화한다. 부산 거주 시절에 “대한민국의 모든 집에서 에어컨을 쓸 때까지 안 사겠다”며 에어컨을 못 사게 해 김 여사가 모아놓은 돈으로 몰래 주문했다가 문 대통령이 끝까지 반대해 취소한 적도 있다.
   
   성격이 밝고 활달해 ‘유쾌한 정숙씨’로 불린다. 현장형 내조, 참모형 내조에 강하다. 종종 혼자 광주에 방문해 민심을 확인하고 섬 지역을 돌며 스킨십을 하기도 했다. 지난해 추석부터 매주 한 번꼴로 호남을 방문해 ‘호남특보’라는 별명을 얻었다. 김 여사는 아직도 문 대통령을 ‘재인씨’라고 부른다. 서울 종로에서 태어나 숙명여중·고를 나왔다.
   
   
▲ 아들 준용씨와 딸 다혜씨가 어린 시절에 찍은 가족사진.

   6. 소시민 가족들
   
   문 대통령은 연년생 1남1녀를 두었다. 장남 준용(35)씨는 건국대 시각디자인학과를 졸업해 미국 파슨스디자인스쿨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딸 다혜(34)씨는 부산외고를 나와 대학에서 경영을 전공하고 갤러리에서 큐레이터로 일했다. 다혜씨는 평범한 직장인과 2007년에, 준용씨는 목회자의 딸과 2014년에 결혼했다. 다혜씨에게는 8세 아들이, 준용씨에게는 3세 아들이 있다.
   
   준용씨는 공부를 꽤 잘했는데 고3 때 갑자기 미대로 방향을 틀었다. 유튜브에 올린 파슨스디자인스쿨 졸업작품이 화제가 되어 홍콩, 미국, 이탈리아, 브라질, 스페인, 러시아, 프랑스 등 전시회나 미술관에서 초청을 받았다고 한다. 현재 게임제작 업체인 티노게임즈 이사로 근무 중이다. 지난 대선 때에는 아버지를 적극 도왔으나 이번 선거에서는 2007년 한국고용정보원 입사과정에서 특혜취업 의혹이 다시 불거진 때문인지 선거기간 동안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다혜씨는 미술전공생은 아니지만 예술에 대한 감각이 남다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외고에서는 밴드부 보컬을 했다. ‘고구마’라는 문 대통령의 별명은 다혜씨가 먼저 아빠에게 붙여준 것이라고 한다. 지난 대선 출정식에서 행사장에는 갔으나 단상에 오르지 않았다. “경쟁 상대인 박근혜 후보는 가족이 없는데 우리만 오르면 페어플레이가 아니지 않으냐”는 이유였다.
   
   이번 대선에서는 어버이날인 지난 5월 8일 문 대통령의 마지막 유세현장인 광화문광장에 초등학생 아들을 데리고 깜짝 방문해 화제가 됐다. “아버지가 정치하시는 게 싫었다”며 “참여정부 때 치아가 10개나 빠질 정도로 일을 열심히 하셨는데 국민에게 싫은 소리를 듣는 게 싫었다”고 이유를 밝혔다.
   
   문 대통령은 2남3녀 중 둘째다. 누나 재월씨 외에도 여동생 재성씨와 재실씨, 남동생 재익씨가 있다. 재익씨는 해양대학에 들어가 일찍부터 항해사가 됐고 여동생들도 장학금을 받아가며 공부를 마쳤다. 재익씨가 에스티엑스(STX)에 근무 시절, 회사에서 육지 근무로 배려성 발령을 내자 당시 정무수석이었던 그는 동생에게 전화해 “그런다고 회사에 도움을 줄 일 없으니 다시 배를 타라”고 호통쳤다 한다. 막내이자 미혼인 재실씨가 어머니 강씨를 모시고 산다. 김 여사에 따르면 문 대통령의 머리 좋은 형제들은 꼿꼿한 자존심으로 말 없이 자기 길을 가는 스타일이다. 문 대통령은 직계가족 이외의 친인척 관계에 대해서는 외부에 알리지 않고 있다.
   
   
▲ 노무현 전 대통령과. 두 사람의 끈끈함은 동지 이상이었다.

   7. 노무현과의 만남
   
   문 대통령은 1982년 8월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졸업해 법무부장관상을 받았다. 희망자 전원이 판사나 검사로 임용되던 시절이었지만 유신반대 시위 주도로 구속된 전력이 문제가 돼 좌절됐다. ‘김앤장’을 비롯한 대형로펌 여기저기서 파격적인 조건으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지만 다 뿌리쳤다. “내가 생각하던 변호사상(像)이 아니었다”는 이유였다. 국제전문 변호사나 기업전문 변호사 역시 “뭔가 고급스러워 보여서” 내키지 않았고, 결국 보통 변호사의 길을 걸었다.
   
   어머니도 모실 겸 고향인 부산행을 택했다. 그렇게 해서 노무현 변호사를 만나게 됐다. 사법고시 동기이자 훗날 민정수석을 지낸 박정규가 두 사람의 다리를 놓았다. 문재인과 노무현. 둘은 동지 그 이상이었다. 운명적인 관계로 불린다. 훗날 노무현 전 대통령은 “사람을 알기 위해서는 그 친구를 보라고 했습니다. 나는 대통령감이 됩니다. 나는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입니다”라고 말했다 한다.
   
   둘은 이름을 나란히 내걸고 ‘변호사 노무현·문재인 법률사무소’를 운영했다. 노동법률상담을 무료로 해주는 등 눈에 띄는 점이 많았다. 게다가 당시 부산에는 등록된 변호사 수가 100명이 채 되지 않을 정도로 적어 두 사람은 부산 변호사 사회에서 관심의 대상이 됐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1988년 4월, 13대 총선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자 문 대통령 역시 정계의 권유가 끊이지 않았다. 김영삼으로부터 노무현·김광일과 함께 국회의원 영입 제안을 받았지만 3인 중 유일하게 정치 입문을 거절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정계에 입문해 청문회 스타가 된 후에도 문재인은 인권변호사의 길을 걸었다.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 동의대학교 사건 등 굵직한 사건을 맡았다.
   
   2002년 대선 당시 그는 노무현 후보를 돕는 부산선대본부장을 맡았다. 지방선거 참패, 지지율 하락, 당내의 후보교체론 등 어려운 상황이었다. 정몽준 후보와 극적으로 후보단일화가 이루어질 당시 그는 여론조사 방식을 통한 단일화를 적극적으로 피력했다. 노무현 후보가 제16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그는 정치인의 길을 피할 수 없게 됐다.
   
   
▲ 문 대통령이 시민사회수석 당시 어머니 강한옥씨는 이산가족상봉행사에서 막냇동생과 극적으로 상봉했다.

   8. “정치하라고 하지 마십시오”
   
   그는 노무현 정부의 첫 민정수석을 마지못해 수락하면서 두 가지 조건을 걸었다. “민정수석으로 끝내겠습니다.” “정치하라고 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뜻대로 되기는 어려웠다. 2003년 12월, 이듬해 4월에 있을 총선에 출마하라는 권유를 받았다. 거절하자 “영화는 누리고 희생은 하지 않으려 하느냐”는 말까지 들었다. 스스로 “민정수석만으로도 벅찼고, 더 나아가 정치를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고 털어놨다. 결국 건강을 핑계로 사의를 표명했고, 2월 12일 정식으로 사퇴했다. 청와대 들어온 지 거의 1년 만이었다.
   
   이후 자유인의 신분을 만끽했다. 그러나 잠시였다. 2004년 아내와 함께 오른 안나푸르나 여정 중 네팔 카트만두 호텔에서 영자지(英字紙) 신문을 통해 노 대통령의 탄핵소추안 발의 소식을 접하고 바로 귀국했다.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의결되자 노 대통령은 문재인에게 탄핵대리인단을 구성해 법적 대응 전반을 맡아달라고 청했다. 그는 변호사 개업신고를 하고 재판을 준비했고 5월 14일 헌재는 ‘탄핵기각’으로 결정내렸다. 문 대통령은 재판이 끝난 3일 후 청와대에 다시 불려 들어갔다. 이번엔 시민사회수석이었다.
   
   2005년 1월에는 다시 민정수석을 맡아 1년4개월간 지냈고 지방선거를 돕고 와서는 잠시 정무특보를 맡았다. 그리고 노 대통령 임기 마지막 해인 2007년 3월 청와대 마지막 비서실장으로 임명됐다.
   
   노 대통령 퇴임 이후 그는 경남 양산 매곡으로 돌아갔다. 주거용으로 준비가 채 되지 않아 한동안 별채의 작은 단칸방에서 겨울에 아궁이에 나무를 때며 살았다. 세면실이나 화장실도 없어서 세수는 계곡에서 하고 볼일도 밖에서 해결했다. 개 세 마리, 고양이 두 마리, 닭 여덟 마리와 함께 손바닥만 한 밭에서 채소도 가꾸었다.
   
   김해 봉하마을에 자리 잡은 노 전 대통령에게도 가끔 들렀다. 노 전 대통령이 누군가의 예방을 받을 때 격식을 갖출 필요가 있으면 배석해줬고, 퇴임 이후 각종 조사로 코너에 몰린 노 전 대통령의 언론 대응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2009년 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은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그는 노 전 대통령 유가족의 부탁으로 장례절차를 책임 진행했고, 장례를 마친 후에는 ‘봉하재단’과 ‘노무현재단’을 만들어 상임이사직을 맡았다. 그는 지금도 노 전 대통령의 유서 원본을 수첩에 갖고 다닌다고 한다.
   
   
▲ 민정수석 사퇴 후 오른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트레킹.

   9. 또다시 정계로
   
   그는 쑥스러움이 많고 낯도 가리는 데다 권력의지도 별로 크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변호사 직업을 좋아했고, 스스로도 변호사를 천직으로 여겼다. 그런 변호사를 떠나 청와대로 들어간 것을 ‘일탈’로 표현한다. 그러나 노무현이 그를 정계로 불러들였고, 노무현의 죽음이 또다시 그를 정치인의 길로 소환했다.
   
   2011년 자서전 ‘운명’을 쓸 때만 해도 대선출마 의지가 확고하지는 않았다. 자서전 운명을 통해 “운명 같은 것이 나를 지금의 자리로 이끌어온 것 같다. 노무현 변호사를 만나고 지금에 이르게 된 것도 마치 정해진 것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2012년 4월 부산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됐고, 같은 해 6월에는 18대 대통령 출마를 선언했다.
   
   출마를 선언하면서 내건 구호는 “사람이 먼저다”였다. 국민참여경선에서 손학규, 김두관, 정세균과 경쟁해 전국 순회경선 13회 전승을 거두며 민주통합당의 제18대 대선후보로 선출됐다. 무소속 안철수 후보와의 협상 끝에 단일화에 성공하면서 지지율이 급상승했고, 진보정의당 심상정 후보도 문재인 지지를 선언하며 후보직을 사퇴하면서 탄력받았다.
   
   선거에서 그는 야권 후보 역대 최대인 득표율 48%(1469만표)를 얻었지만 박근혜 후보에게 100만표 차로 패배했다. 2015년 2월 당대표 선거에서는 박지원 의원에게 3.5%의 근소한 차로 이기면서 새정치민주연합 당대표에 선출됐고, 2016년 1월까지 새로 개편된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지냈다.
   
   
▲ 노 대통령 퇴임 후 그는 경남 양산에서 시골생활을 했다.

   10. ‘재수’ 대통령
   
   18대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되면서 치러진 5·9 조기대선에서 그는 일찌감치 승기를 잡았다. 출마하면서 내건 슬로건은 ‘나라를 나라답게, 든든한 대통령’이었다.
   
   안희정·이재명·최성과 겨룬 당내 경선에서 과반을 얻어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됐다. 이후 그는 내내 40%가 넘는 콘크리트 지지율을 지켰다.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 바른정당 유승민 후보, 정의당 심상정 후보 등 12인과 맞붙은 대선에서 41.1%(1342만3800표)의 지지율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2위를 기록한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24.0%)와 557만여표 차로, 2위와의 표차가 역대 최다였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학입시, 사법고시, 대선 모두 재수했다. 스스로도 “나는 재수 전문”이라고 말한다. 5월 10일 약식취임사를 통해 통합과 공존의 새로운 세상을 열어갈 청사진으로 머릿속이 가득 차 있다고 밝혔다. 그가 지향하는 대통령은 “국민의 눈높이에 맞춘 대통령” “국민과 손을 꼭 잡고 가는 대통령”이다.
   
▲ 18대 대선 TV토론. 48%의 높은 득표율을 얻었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100만표 차로 낙선했다.
등록일 : 2017-05-15 13:40   |  수정일 : 2017-05-15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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