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퀸타나 일병·선더스 병장의 귀향 뒤에는… 美 DPAA가 있다

글 | 이장훈 국제문제애널리스트

▲ 미 국방부 산하 전쟁포로 및 실종자 확인국(DPAA) 소속 장병들이 지난 4월 13일 인도 뉴델리에서 2차 대전 미군 유해 송환식을 하고 있다. photo 미 국방부
X-183.
   
   암호 같은 이 번호는 1950년 7월 27일 경남 하동에서 전사한 미군 병사의 유해에 붙여진 ‘이름’이다. 신원을 알 수 없었던 X-183은 1951년 마산 유엔군 묘지에 가매장됐다.
   
   당시 미군은 X-183의 신원을 알아내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결국 X-183은 1955년 하와이주 호놀룰루의 태평양 국립묘지(일명 펀치 볼)에 안장됐다.
   
   이후 국방부 산하 전쟁포로 및 실종자 확인국(DPAA·Defense POW/MIA Accounting Agency)은 2014년 12월 X-183의 신원 확인 작업을 시작했다. X-183이 발견된 장소에서 미군 병사들이 북한 인민군과 전투를 벌였다는 문서가 나왔고, 또 신원을 알 수 있는 미군 병사의 유해도 수습됐기 때문이었다. DPAA는 2년간의 작업 끝에 지난 5월 12일 X-183에 대한 유전자 감식을 통해 신원을 확인했다. X-183은 육군 제25사단 제29연대 제3대대 K중대 소속 마누엘 퀸타나 일병이었다.
   
   당시 29연대 3대대(대대장 헤럴드 모트 중령)는 하동읍 쇠고개에서 북한 인민군의 매복 작전에 걸려 패배했다. 하동 쇠고개는 하동군 적량면에서 하동읍으로 들어오는 진입로이다. 고갯길 바로 밑에는 경전선 철도의 하동역이 위치해 있다. 이곳에서 한국군 100여명과 모트 중령 등 미군 313명이 전사했다. 퀸타나 일병은 당시 실종된 것으로 처리됐다. 한국전쟁 종전 이후에도 퀸타나 일병의 소재는 알 수 없었다. 퀸타나 일병은 네바다주 새포드 출신으로 고교를 졸업하자마자 19세의 나이로 입대했다. 퀸타나 일병은 8명의 형제자매 중 막내였다. 그의 모친은 생전에 막내아들이 반드시 고향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다. 그의 누나인 매리 모레노(88)도 딸인 이사벨라 맥거프(50)에게 동생 얘기를 자주 해왔다. 맥거프는 삼촌의 신원 확인을 위해 모친과 자신의 유전자를 DPAA에 기꺼이 제공했다. 육군 당국은 지난 5월 19일, 67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퀸타나 일병의 장례식을 성대하게 거행했다. 네바다주 보울더시의 전몰자 묘지에 묻힌 그의 묘비명은 더 이상 X-183이 아니었다.
   
   한국전쟁에서 실종된 에드워드 선더스 육군 병장의 유해도 DPAA의 노력 덕분에 66년 만에 가족의 품으로 돌아와 지난 6월 7일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메릴랜드주 볼티모어 출신으로 제2사단 제9보병연대 제3대대 K중대 소속인 선더스 병장은 28세이던 1951년 2월 강원도 횡성에서 포로로 잡혀 6개월 뒤인 8월 곡산 포로수용소에서 사망했다.
   
   횡성전투는 1·4후퇴 직후 서울 탈환의 고비가 된 중요한 싸움이었다. 국군과 유엔군에 밀려 한강 이남을 빼앗긴 중공군은 1951년 2월 12일 주력부대를 대거 투입해 남한강 상류지역의 전략적 요충지인 횡성을 공격했다. 당시 이곳을 지키던 국군 8사단 8000여명이 숨지거나 실종됐고, 이를 지원하던 미군 2사단도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국군과 미군의 협력 덕분에 중공군을 패퇴시켰다. DPAA는 선더스 병장과 가족들의 DNA를 대조해 신원을 확인했다.
   
   DPAA는 지난 6월 2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벨기에에서 전사한 리스 개스 미국 육군 일병의 유해를 확인했다. 제3기갑사단 제33기갑연대 E중대 소속 전차병인 개스 일병은 1945년 1월 14일 독일군 탱크의 포격으로 숨졌다. 불에 탄 탱크 속에 남아 있던 그의 유해는 1945년 7월 발견됐지만 신원을 확인할 수 없어 X-5867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DPAA는 2016년 5월부터 그의 유해에 대한 유전자 감식 작업을 벌여 신원을 밝혀냈다. 그의 유해는 무려 72년 만에 고향인 테네시주 그린빌로 돌아오게 됐다.
   
   DPAA 유해 발굴팀은 최근 중국 국경과 접하고 있는 인도의 아루나찰 프라데시에서 2차대전 중 실종된 미군 조종사들의 유해를 찾는 작업을 대대적으로 벌이고 있다. 당시 미국은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는 중국의 국민당 군대를 지원하기 위해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에서 B-24 폭격기로 보급품을 수송했다. 미군 폭격기들은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비행하다가 암벽과 충돌하는 사고를 당해 추락했다.
   
▲ 1950년 7월 27일 경남 하동에서 전사한 마누엘 퀸타나 미국 육군 일병. photo DPAA

   인도에서 숨진 미군은 425명으로 추정되지만 지금까지 발견된 유해는 10%밖에 되지 않는다. DPAA 유해 발굴팀은 지난해 4월 히말라야산맥 지대에서 추락한 B-24 폭격기 잔해를 발견하고 이곳에서 승무원들의 유해를 찾아냈다. 이 폭격기에는 모두 8명이 탑승했었다. 이 유해들은 72년 만에 미국으로 돌아와 현재 유전자 감식 작업을 통해 신원 확인 절차에 들어가 있다. DPAA 유해 발굴팀은 도버해협 인근에 있는 프랑스 불로뉴 지역의 숲에서도 2차대전 때인 1943년 10월 격추된 전투기 P-47D 선더볼트의 조종사 유해를 수색하고 있다. 전투기의 잔해 일부가 발견됐지만 아직까지 유해는 찾지 못하고 있다.
   
   미국은 지금도 2차대전을 비롯해 6·25전쟁(한국전쟁), 베트남전쟁, 이라크전 등 각종 전쟁에 참전했다가 실종(MIA·Missing in Action)됐거나 전사(KIA·Killed in Action)했지만 신원을 알 수 없는 장병들의 유해를 찾고 있다. 유해를 아직도 찾지 못했거나 유해의 신원 확인을 못한 장병들은 2차대전 7만3000여명, 한국전쟁 7747명, 베트남전쟁 1600여명 등이다.
   
   이들의 유해를 찾아내 신원을 알아내는 일을 담당하는 곳이 DPAA이다. DPAA는 2015년 1월 15일 창설됐다. 현재 인원은 500명이고 지난해 예산은 1억1100만달러였다. DPAA의 전신은 태평양사령부 산하에 설치된 합동 전쟁포로·실종자 확인 사령부(JPAC·Joint POW/MIA Accounting Command)였다. 미국은 2차대전과 한국전쟁 기간에 전사자 유해 발굴 신원 확인부대를 잠정 운용했다. 이후 미국은 베트남전을 계기로 1973년 태국에 중앙신원 확인소(CIL)를 설치해 동남아 지역의 유해 발굴과 신원 확인을 전담시켰다. 미국은 1976년 CIL을 하와이로 이전하고 유해 발굴과 신원 확인 대상을 전 세계로 확대했다.
   
   미국은 이어 1992년 합동특수임무부대(JTF)를 창설해 전사자 유해의 탐사임무를 수행하도록 했다. 미국은 2003년 CIL과 JTF를 통합, JPAC를 창설했다. JPAC의 모토는 ‘그들이 모두 귀환할 때까지(Until they are home)’였다. JPAC의 활동에 국민의 관심이 집중되자 미국 정부는 유해 발굴과 신원 확인 작업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DPAA를 만들고 조직을 확대했다. DPAA는 지금도 JPAC의 모토를 그대로 이어받아 ‘국가의 약속을 반드시 이행하겠다(Fulfilling Our Nation’s Promise)’는 의지를 보여왔다. DPAA 웹사이트에는 각종 전쟁에서 전사한 장병들의 유해가 미국으로 송환된 명단(Accounted)과 유해가 돌아오지 않은 명단(Unaccounted)으로 나누어 수록해 놓았다.
   
   
▲ DPAA 유해발굴 요원들이 라오스에서 미군 전사자 유해를 찾고 있다. photo DPAA

   유해 한 구에 200만달러 지불도
   
   DPAA는 최근 한국전쟁 전사자와 실종자 유해들의 신원을 확인하는 작업에서 상당한 성과를 올리고 있다. 미국은 한국전쟁이 종전되자마자 북한에 전사자 유해의 송환을 요청했다. 북한은 정전협정에 따라 당시 미군을 비롯해 유엔군 병사들의 유해를 넘겨주었다. 북한은 유엔군사령부 소속 병사들이 비무장지대(DMZ)를 넘어 유해를 회수해 가도록 협조하기도 했었다. 그랬던 북한은 1954년 8월 유엔군 전사자 4023구의 유해를 돌려준 뒤 송환을 중단했다.
   
   이후 유해 송환 협상은 1988년 12월에야 재개됐고 1993년 미국과 북한 간에 ‘미군 유해에 관한 합의서’가 만들어졌다. 북한은 협상기간 중인 1991년부터 1994년까지 미군 전사자 유해가 담긴 상자 208개를 미국에 건넸다. 미국 정부는 1996년부터 2005년까지 33차례에 걸쳐 북한으로 들어가 220여구의 미군 전사자 유해들을 찾았다. 당시 미국은 북한에 1500만달러를 주었다. 유해 1구를 위해 200만달러를 지불한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미국은 이후 북한에서 활동 중인 유해 발굴팀의 신변 안전을 우려해 작업을 중단했다. 미국은 2011년 북한과의 합의로 유해 발굴 작업을 재개했지만, 2012년 4월 북한이 장거리 로켓 발사를 강행하자 발굴 작업을 중단했다. 이처럼 미국의 유해 발굴 작업과 송환은 북한의 비협조로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게다가 1992년부터 2011년까지 20년간 신원이 확인된 유해는 61구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작업은 더디게 진행됐다.
   
   이에 따라 미국 정부는 2011년 한국전쟁 전사자 유해의 신원 확인을 신속하게 하기 위해 한국계인 제니 진 박사가 이끄는 ‘K208 프로젝트’ 팀을 출범시켰다. K208 팀은 2012년 유해 28구의 신원을 밝혀낸 데 이어 2013년 26구, 2014년 23구, 2015년 29구, 2016년 69구를 식별했다. 이처럼 신원 확인이 크게 늘어난 것은 유전자 감식 및 분석과 대조 기술이 획기적으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오래된 뼈에서 DNA 추출이 안 됐지만 과학의 발전으로 DNA 추출 확률이 높아졌다. 또 다른 이유는 가족들로부터 채취한 유전자 시료가 축적된 덕분이다. 이 때문에 유해의 DNA와 가족들의 DNA를 대조해 신원 확인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게 됐다. 법의학 인류학자인 진 박사는 “유해의 뼈에서 DNA 정보를 얻었다고 해도 이걸 가족들의 DNA와 대조해 보지 않으면 유용성이 크게 떨어진다”면서 “DPAA는 과거엔 한국전쟁 참전 미군 가족들의 15% 정도밖에 DNA 샘플을 확보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89%의 샘플을 보유하고 있다”고 밝혔다.
   

   가장 아이러니한 이유는 북한의 본의(?) 아닌 협조 때문이다. 당시 북한은 미군 유해 208구를 208개의 상자에 넣어 미국으로 보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DPAA가 확인해 보니 한 상자에 여러 유해들이 섞여 있었다. 이 때문에 북한이 보낸 유해를 다시 정리하는 작업이 시작됐다. K208 프로젝트 팀이 만들어진 것도 실제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감식 결과 400명 이상으로 파악됐다. 북한은 한 상자가 한 사람의 유해라고 주장했지만 DNA 검사 결과, 한 상자에 평균 4명의 유해가 들어가 있는 걸로 밝혀졌다. 이 때문에 북한은 400여명의 유해를 미국에 제공한 셈이 됐다. 게다가 유해 상태를 볼 때 북한은 한국전쟁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미 유해를 파서 보관해 두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유해들이 대부분 훼손되지 않았다. 북한은 이런 사실을 감추기 위해 최근 발굴된 유해를 돌려주는 것이라고 거짓말을 했다고 한다.
   
   DPAA는 현재 K208 프로젝트와 함께 ‘JRO’(1996~2005년 미국이 북한에서 확보한 유해 감식)와 ‘펀치 볼’(1954년 호놀룰루의 태평양 국립묘지에 묻힌 전사자 유해 감식) 프로젝트를 동시에 진행하고 있다. 진 박사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60년이 지나서 실종된 병사들을 가장 보고 싶어 했던 부모들은 벌써 사망했고 남아 있는 형제와 자매들도 대부분 고령”이라면서 “가족들이 살아 있을 동안 하루라도 빨리 신원을 확인해 유해를 그들의 품에 안겨 드리는 것이 목표”라고 강조했다.
   
   진 박사의 말처럼 미국은 비용과 시간에 관계없이 세계 어느 곳에라도 찾아가 전쟁에서 사망하거나 실종된 장병들의 유해를 가져오려는 노력을 계속 하고 있다. 미국이 세계 최강의 군대를 보유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심지어 군 최고통수권자도 모든 일을 제쳐두고 나라를 위해 희생한 장병에 대해 깍듯하게 예우한다. 실제로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재임 중 두 차례나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국방장관·합참의장 등 군 수뇌부와 함께 전사한 병사의 유해 귀환식에 참석해 최고의 예를 갖추기도 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도 지난 5월 29일 전몰장병을 기리는 ‘메모리얼 데이’를 맞아 알링턴 국립묘지 추모식에서 나라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 장병들의 희생을 기렸다. 트럼프 대통령은 “나라와 국민을 지키기 위해 세상에서의 마지막 순간에 자신들의 목숨을 바친 용감한 전사들에게 경의를 표시하면서 말로써는 그들의 헌신의 깊이와 사랑의 순도, 용기의 완전성을 가늠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트럼프 정부 인사들의 한국戰 인연
   
   한국전쟁은 트럼프 정부 고위 인사들과도 상당한 인연이 있다. 마이크 펜스 부통령, 허버트 맥매스터 백악관 국가안보담당 보좌관, 조지프 던퍼드 합참의장의 부친들이 모두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이다. 이들도 한국전쟁 전사자와 실종자 유해 발굴과 신원 확인 작업에 지대한 관심을 보여왔다. 하지만 한국은 전쟁 당사자이면서도 국군포로 및 유해 송환에 적극성을 보이지 않고 있다. 통일부에 따르면 1953년 정전협정이 맺어질 때 유엔군사령부가 추정한 북한에 억류된 국군포로는 8만2000여명이었다. 이 가운데 남한으로 송환된 포로는 8343명뿐이었고 나머지 7만3000여명은 자신의 뜻과 관계없이 북한에 남았다. 이들 중 북한을 탈출한 국군포로는 모두 80명에 달한다. 이들의 탈북은 국가의 도움이 없는 자력에 의한 것이었다. 2010년까지는 탈북해온 국군포로들이 꾸준히 있었지만 2011년 이후로는 전무하다. 북한에 남아 있는 국군포로가 560여명인 것으로 추정되지만 대부분 90세 전후의 고령이다. 생존한 국군포로는 물론 사망자들의 유해가 한시바삐 가족과 고향으로 돌아오도록 해야 한다. 이들을 이대로 방치하는 건 국가를 위해 싸운 분들에 대한 예의가 아닐 뿐만 아니라 국가의 존재 이유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당신들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한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의 다짐이 미국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힘인 듯하다.
등록일 : 2017-06-14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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