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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IS 진격을 가로막는 여성 전사들

英 BBC 방송에 교전지역 동영상을 제공한 옴라니 씨의 전쟁일기 세계최초 공개 [2편]

조선pub은 옴라니 씨가 겪은 시리아 내전의 실상을 그의 일기를 통해서 세계 최초로 공개한다. 옴라니 씨는 본 전쟁일기를 외신에 투고한 바 없고 조선pub을 통해 최초로 공개하고 싶다는 말도 전해왔다.

공개되지 않은 옴라니 씨의 시리아 전쟁일기(IS 對 쿠르드족 민병대)와 사진 그리고 동영상을 입수했다.
입수한 영상은 옴라니 씨가 BBC를 통해 최초로 공개한 25분짜리 시리아 전쟁동영상에 이은 두 번째 동영상이다. 그의 일기와 사진을 통해서 반인륜적 행동을 일삼는 IS는 물론, IS에 대적해 싸우는 쿠르드族 민병대원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이번 전쟁일기와 사진 그리고 동영상을 입수함으로서 그동안 외신을 통해서만 전해듣던 내용을 직접 조선pub의 독자에게 전하게 되었다.

글 | 김동연 월간조선 기자/ 자동차 칼럼니스트   글 | 옴라니 프리랜서 영상 제작자(쿠르드족 이란인)
필자의 다른 기사 2015-03-12 11:11

저자의 고백

나는 고백한다. 전쟁의 온상인 시리아의 코바니에서 첫날밤을 보낸 뒤로 일기를 정기적으로 적는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아마도 매일 적지 못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나는 전쟁터에 머무는 동안 생사의 기로에서 일기를 적을 여유란 없었다. 이 때문에 나는 전쟁의 현장에서 일기보다는 가져간 카메라를 손에 쥐었고, 동영상을 찍었다.
 
일기를 쓰는 대신 나는 다큐멘터리 제작자로서 일기보다 더 생생한 현장을 내 인생에 남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지금부터 적은 내용은 당시 내가 적은 일기와 나의 경험 그리고 생생한 동영상을 토대로 작성한 것이다. 내가 찍었던 동영상 속에는 당시 내가 느꼈던 감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위 저자의 고백을 토대로 기자는 전쟁일기의 시점을 과거형으로 통일해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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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드족 민병대원(YPG) 소총을 둘러 메고 폐허가 된 도시를 걷고 있다. 대원의 좌측어깨에는 쿠르드족 민병대원을 상징하는 노란 바탕에 붉은 별이 새겨진 표식을 부착하고 있다. /사진 옴라니 제공
 
1편에 이어서...
 
생사의 기로에서 나는 살기위해 여태껏 배운 것 모두를 쥐어짜냈다.
 
내 발에 부딪힌 AK-47 소총이 시야에 들어오자, 차츰 방안에 있는 다른 남자들도 보이기 시작했다. 그곳은 남자 민병대원들이 기거하는 방이었던 것이다. 그 사람들이 바로 앞으로 전쟁터에서 함께할 친구들이었다. 그들과 함께 코바니에서 첫날밤을 보냈다. 잠을 청하는 귓가에 IS가 쏘아대는 곡사포 소리가 끊이지 않았지만, 피곤함에 잠이 들었다.
 
당시 나는 전쟁터에서 생존을 위해 여태껏 살아오면서 배웠던 모든 기술을 쥐어짜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학교와 삶 속에서 배웠던 그 지식이 나의 목숨을 하루하루 연명하게 해준 자산이었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뒤, 아침에 눈을 떠면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너무나도 그 얼굴이 보고 싶은 나머지 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그 사람은 내가 전쟁터에서 지내는 동안 우리 민병대원들에게 숙박 장소로 자신의 집을 내주었던 사람이다. 나의 동료들은 그 집에서 한동안 지냈다. IS의 곡사포로 부서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들에게 집을 내주었던 그 집주인과 그의 가족들은 추위에 떨다 죽고 말았다. 한마디로 동사(凍死)했다. 그 집에는 현지 텔레비전 방송사 관계자들과 함께 임시적으로 기자처럼 소식을 외부로 전하는 현지인들, 그리고 쿠르드족 민병대원들이 한데모여 지냈다. 그 집은 쿠르드족의 민주당사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당시 거기서 함께 모여 있던 현지 및 중동의 미디어는 Hawar 뉴스, Firat 뉴스, Azadiwilat 신문, Gondoum 신문, Ronahi TV, 그리고 sterk TV 이다. 내가 합류했을 때 이들은 교대로 전쟁의 소식을 확인하여 외부로 전파했었다.
 
이런 통신을 하기 위해서 전력(力)은 필연적이었다. 우리는 발전기를 사용해 전기를 만들어냈다. 그 집에서 사용했던 발전기의 소리가 너무 커서 귀가 아플 정도였다. 이 발전기는 집 밖에 아무런 보호 없이 노출된 채로 있었기에 언제든지 IS가 공격하는 화력에 부서질 가능성이 농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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옴라니 씨처럼 시리아에서 기자 역할을 하는 한 청년의 뒷모습. 그는 시리아 현지인으로 시리아의 모 대학에서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했다. /사진 옴라니 제공
 
IS의 포로처럼 나도 감방에 갇힐 뻔 했다.
 
코바니에 도착한 뒤로 줄곧 나는 마디예와 떨어져 있어야 했다. 그녀와 나는 그곳에서 흩어져 각자의 할 일을 맡아서 해야 했다. 하지만 종종 마주칠 때마다 마디예는 나에게 웃어보였다. 그 미소 안에는 함께 코바니로 오기위해서 보냈던 시간의 친근함이 담겨 있었다. 그 미소는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 미소는 함께 고난을 겪었다는 전우애이자 동질감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때로는 서로에 대해 짜증과 불만이 우리 사이를 위태롭게 하기도 했다. 전쟁 상황에서 신경이 예민해진 탓일 것이다.
 
코바니에서 만난 모두가 처음부터 반가웠던 것은 아니다. 내가 파하드(Farhad)를 처음 만났을 때 우리는 크게 언쟁을 벌였다. 파하드는 본래 직업과는 달리 기자라는 직업을 병행하고 있었다. 그곳의 환경이 그를 기자로 만든 셈이다. (외신기자가 없어 외부로 정보를 전달하는 사람이 태부족이다.) 그는 페르시아어와 영어를 하지 못했다. 그는 쿠르드어만 구사할 수 있었고, 쿠르드어를 하지 못하는 마디예는 파하드와 대화할 때면 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파하드는 쿠르드족의 민주당원이다. 그는 처음 나에게 다가와 "누가 당신들을 이곳에서 돌아다니게 했냐"며, 다짜고짜 따져댔다. 그는 자신이 민주당원으로서 다른 쿠르드족 민병대원들에게 우리를 가둬둘 것을 지시했다는 것이다.
 
내가 만약 코바니 안에서 죄수처럼 갇혀있을 것이었다면, 무엇하러 고생하여 코바니로 건너왔을까. 그럴 바에는 차라리 터키에 남아있는 것이 나았을 것이다. 그에 말대로 내가 감금되어있었다면, 나는 IS의 포로들처럼 감방에 갇힌 채로 시간을 보냈어야 했을 것이다.
 
그와 실랑이를 벌이는 가운데, 쿠르드족 민주당의 정보전파담당자인 둔야(Dunya)가 끼어들었다. 그는 나와 파하드간의 긴장감을 누그러트렸고 분위기를 전환시켰다. 지금 아마도 파하드는 나와 마디예가 떠나고 난 뒤 우리를 보고 싶어 할 것이다. 미운정도 정이 아니던가.
 
파하드는 거기서 많이 야위어갔다. 아마도 전쟁 중 여러 가지 사안들이 그의 신경을 날카롭게 했을 것이고 그런 스트레스는 고스란히 그의 안색을 변화시켰다. 그는 급격하게 늙어가는 듯 했다. 그가 그 내전의 현장에 발을 들여놓기 전 사진을 나에게 보여준 적이 있는데,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불과 내전에 합류하기 50여일 전에 찍은 사진 속 그의 모습은 너무 젊었기 때문이다.
 
실랑이를 벌였던 시간도 잠시, 파하드와 우리는 차츰 친해졌다. 전쟁이라는 상황이 사람과 사람사이를 응집시키는 듯 했다. 그는 우리에게 코바니의 구석구석을 구경시켜주겠다며 앞장섰다. 그를 뒤따라 부서진 건물의 잔해들이 뒤덮인 도로로 걸어 나갔다. 부서진 건물들은 커튼 같은 천으로 덮여있었다. 이렇게 건물을 천으로 덮어놓은 이유는 혹시라도 숨어있는 IS 조직원들이 건물 잔해 속에 매복해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건물을 천으로 덮어 IS 조직원들이 쿠르드족 민병대원을 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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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를 향해 총을 쏘고 있는 민병대원, 소총은 M16 이다. /사진 옴라니 제공


초고속인터넷망은 IS가 장악하고 있어
 
이 코바니의 시가지를 걸어 다니는 데에도 정해진 규칙이 있었다. 이 규칙은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민병대원들은 물론 비전투요원인 나와 같은 외부인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사실 이런 규칙 때문에 전투를 위해 시내로 나온 민병대원이라고 할지라도 마음대로 도시를 배회하거나 여기저기 돌아다닐 수 없었다. 이 때문에 특정지역에 가려면 돌아서 가야했고, 상당시간을 걸어서 이동해야 했다. 이런 방식으로 나는 도시 안의 네 군데 주요거점을 다녀왔다.
 
파하드를 포함하여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점차 친해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본래는 기자가 아니었지만, 외신이 코바니로 진입하지 못하자 모두 기자가 되어버렸다. 거기서 누군가는 전화로, 누군가는 노트북 컴퓨터로, 누군가는 태블릿 PC를 통해서 시리아 밖으로 소식을 전달했다.
 
코바니는 비교적 비옥한 땅에 위치하고 있으며 쿠르드족의 밀집거주지역과 가까운 곳이다. 이곳은 터키의 접경지역이기도 하다. 이 지역에는 고속인터넷통신망이 구축되어 있다. 그러나 현재 이 고속인터넷망의 통제권이 IS 측으로 넘어가는 바람에 쿠르드족 민병대원들이 사용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다행스럽게도 나를 포함해 코바니에서 함께 생활하는 많은 사람들은 국경을 넘어오기 전 터키에서 구입한 휴대전화를 가지고 있었다. 해당 전화의 심카드(SIM card)로 하여금 터키의 통신망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터키의 통신망을 이용할 수 있는 이유는 코바니가 터키와 가까운 지역이기 때문이다. 이 터키의 통신망을 토대로 시리아의 소식을 해외로 보낼 수 있을 뿐 아니라 터키정부도 우리가 보내주는 정보를 잘 활용할 수 있었다. 하나, 이 터키의 통신망은 코바니의 동부전선에 가까워질수록 사용이 어려웠다. 해당 지역은 IS의 관할구역과도 가까워 IS의 전파방해는 물론 터키의 통신 유효범위를 이탈하는 등의 문제가 겹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어렵고 참혹한 전쟁의 현장에 모인 시리아의 남자와 여자들은 이 내전에 일부가 되어 버렸다. 그럼에도 그 누구하나 이런 현실을 불평하지 않았다. 또 자신이 이런 고난을 이겨내고 있다고 해서 오만해 하지도 않고, 타인에게 우리의 실상을 과장하지도 않았다. 이들은 담대한 심장으로 IS를 맞서 싸우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우리보다 먼저 약 2개월의 시간을 코바니에서 보낸 사람들이다.
 
만약 누군가가 이들처럼 2개월이라는 시간을 시리아에서 고통스럽게 보냈다면, 전 세계의 모든 소식과는 담을 쌓았을 것이며, 자신의 그런 고생을 보상받고자 유럽의 한나라에 망명신청을 하고 시리아를 벗어났을 것이다. 또 자신이 고통 받은 2개월의 경험을 조금이라도 더 과장하여 더 많은 보상을 받아내려 했을 것이다. (시리아인들은 내전으로 말미암아 난민지위를 가지고 타국에 망명 신청이 가능하다.)
 
진정으로 전쟁에 임하는 자세는 이들에게서 배워야 한다. 나는 그들의 숭고한 정신에 감동했다. 개중에는 외국에서 살던 쿠르드족 시리아인들도 있었다. 이들은 IS에 맞서 싸우고자 코바니로 달려왔다. 코바니에서 사망한 쿠르드족들 중 3명은 스웨덴 국적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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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 코바니의 모습 /사진 옴라니 제공
 
기차로 철수한 코바니의 시민들
 
코바니에서 있는 동안 사람들이 모여 있던 그 방에는 여러 명이 있었는데, 그들은 종종 방을 떠나기도 했다. 처음에는 이들이 나와 함께 생활하는 것이 불편해 나가는 것으로 생각했다. 하나, 그들은 IS의 병력이 이동함에 따라서 자신들이 기거할 장소를 옮겨 다닌 것이었다. 개중에는 아예 터키의 이스탄불이나 자신의 고향으로 가버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터키에 있는 대학을 나온 이들로 전공은 주로 커뮤니케이션과, 신문방송학과, 영상영화과이었으며, 개중에는 아직 대학에 재학중인 대학생 신분의 사람들도 있었다.
 
이 사람들 중 헬멧이나 방탄조끼를 착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들은 이런 헬멧과 방탄조끼를 착용하지 않음으로서 자신들이 현장에서 IS에 맞서 싸우는 민병대원들과 구분된다고 여기고 있었다. 물론 이것은 다소 현명하지 못한 방법이다. 오히려 내가 건너온 국경너머의 터키 소룩 (시리아 코바니에서 약 15Km 밖의 도시) 에서조차 대부분의 사람들은 방탄조끼를 입고 다녔는데, 어찌 전쟁의 심장부에 있는 이들은 비무장으로 다닌단 말인가. 다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물론 나도 그곳에 머무는 대부분의 시간을 방탄조끼와 헬멧 없는 비무장상태로 지냈다. 
 
전쟁이 발생한 코바니 지역에는 약 370여개의 마을이 있었고, 여기에는 약 30만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2011년, 코바니에 대한 IS의 직간접적인 공격이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IS는 해당 코바니로 들어가는 수도와 전기를 차단했고, 이런 상황을 이기지 못한 시민들 중 약 90%가 국경을 넘어 가까운 터키의 소룩으로 탈출했다. 당시 이런 철수는 개인 자동차로는 수행될 수 없었다. 대신 이런 탈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시리아의 코바니에서부터 터키까지 연결되어 있던 철로였다. 이 철로 위 기차가 난민이 되어버린 시리아인들을 터키로 옮긴 것이다.
 
시리아 코바니의 동부전선을 지키는 쿠르드족 민병대원 동무, 주디(Judi)에 따르면 시리아인의 탈출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이 철로를 터키정부는 껄끄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는 한순간에 수십만 명의 시리아 망명자들을 터키정부가 떠안아야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터키는 암암리에 이 통로를 차단하고 싶어 한다고 그는 걱정 어린 말을 전했다. 
 
이렇게 터키로 도망친 사람들이 있는 반면, 이 지독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꿋꿋히 참고 견디는 이들이 있다. 코바니에 살던 사람들 중 일부는 전쟁의 온상인 코바니 안에서 끝까지 살고 있다. 이들은 부서진 자신의 집을 다시 복구하는 한편, 내부와 외부의 도색을 다시 하여 깨끗한 상태로 유지하려고 애쓰고 있다. 그러면서 이들은 IS에 맞서 싸우는 쿠르드족 민병대원을 돕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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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을 다친 쿠르드족 민병대원의 모습, 다치지 않은 손에는 AK-47 소총을 들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사진 옴라니 제공
 
“우리는 끝까지 코바니에 남겠다.”
 
코바니의 중심지에서 약 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임시거처를 마련해두고 기거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이 머무는 곳은 터키와 인접한 국경지대로 그곳에 임시로 텐트를 지어놓은 것이다. 이들은 시시각각 변하는 전쟁 상황을 그곳에서 망원경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이들은 언제든지 자신들이 살던 집이 안정을 되찾으면 다시 돌아올 심산으로 그곳에 있는 것이다. 이런 모습이 안쓰러워 나는 그 코바니 주민들에게 이렇게 고통스러운 환경 속에서 머무는 이유를 물어보았다. 그러자 돌아온 대답은 “내가 여기 사는 이유는 우리는 끝까지 저 더러운 IS를 우리의 집에서 몰아낼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 믿음이 나를 이곳에 머물게 한다. 나는 그 확실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지금 내가 텐트에서 살아도 견딜 수 있는 이유다.” 
 
이 사람들 중에는 어린아이들도 있었다. 이들은 내가 촬영하는 카메라를 보자, 카메라를 향해 외쳤다. “우리는 끝가지 코바니에 남겠다!” 이에 내가 그 이유를 묻자, 그 아이가 말했다. “나는 이곳에서 우리를 위해 싸우는 쿠르드족 동무들을 위해 우리의 피와 영혼을 바칠 것이다.”
 
이 마을 사람들이 살고 있는 텐트촌에는 식수용 우물과 일반용수로 쓰는 우물이 있었다. 이 우물의 물은 전기발전기를 통해서 위로 퍼 올릴 수 있었다. 전기 공급이 원활하지 않아 하루 중 불과 몇 시간 동안만 물을 사용할 수 있다. 더 안타까운 점은 그 우물의 위생상태가 좋지 않았고 그 물을 통해서 전염병이 퍼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또 그 주변에 많이 있던 파리들도 그런 가능성을 더 부추기는 듯 했다. 물론 이 파리들이 증가한다는 것은 그만큼 IS 조직원의 시체가 늘어났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해서 때로는 긍정적인 메시지로 작용하기도 한다.
 
당시 이 주민들이 기거하는 곳을 지키는 동부전선 책임자에게 IS와의 전투상황을 물어보았다. “현재로서는 우리를 위협하는 존재는 없습니다.”라는 답이 돌아왔고 그는 당분간은 우리는 안전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이에 나는 그 이유가 궁금하여 질문해보았다.
 
- 코바니에서도 주요지역의 약 30~40%는 아직까지 IS의 손아귀에 잡혀있다. 그런 마당에 우리가 안전하다고 말하는 근거가 무엇인가?”
 
“IS의 병참선은 바로 이곳이다. 터키를 통해 그들을 지원하는 대부분의 물자가 여기를 통과하는데 우리가 관할하는 이상 지원물자는 들어가지 못한다. 물론 IS는 아직 두 개의 요충지인 미시티누르(Mishtenur Hill)언덕과 복지부의 지원루트 및 복지부 청사를 장악하고 있지만 상황이 이전만큼 좋지는 않다.”
 
그와의 대화를 통해서 코바니의 상황에 대해서 많이 알 수 있었다. 코바니의 마을 360개정도를 IS가 장악했으며, IS의 공격으로 코바니는 도시의 약 60%가량이 파괴되었다. 하나, 이렇게 파괴되었을지라도 이것은 우리 쿠르드족 민병대의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코바니의 건물들은 그 구조상 안전성이 떨어지며, 작전상 엄폐물로 사용하기에 부적합하여 곡사포와 공중폭격에 취약하다. IS는 약 87개국에서 사람들을 긁어모았다. 개중에는 체첸에서 온 이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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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식 중, 민병대원들이 한 대원의 연주를 감상하고 있다. /사진 옴라니 제공
 
AK-47 소총은 나의 분신
 
따라서 이런 점을 알고 있는 우리 쿠르드족은 도시의 네 개의 코너에 주둔하면서 IS가 장악한 지역을 공격하는 전술을 구사하고 있다. IS는 IS가 자기고 있는 지상화력인 탱크와 곡사포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해서 무용지물인 셈이다. 이러한 중화력 무기들이 도시의 많은 마을을 부수기는 했지만, 시가지 전투에서의 기동성과 그 효용성은 떨어진다. 즉 IS의 코바니를 위협하는 요소가 줄어들었고, IS가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 때, 일단 코바니의 시리아 시민들을 구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대책이다.
 
코바니의 남부와 북부지역은 비교적 고요했다. 그러나 이러한 고요함은 도시에 남겨진 건물이 없이 모두 부서진 탓이다. 건물의 대부분은 지난 2개월간 지속된 총격전에서 쏟아진 총알과 미 연합군의 공중폭격으로 부서져버렸다. 코바니에 있는 상당수의 건물들은 폭격과 총격전으로 심하게 훼손되어 그 외형만 보고는 분간하기가 어렵다. 이 때문에 자신의 집을 찾으려면 자신이 살던 때에 찍어두었던 사진을 가져와 대조해봐야 한다. 그렇게 해서 작은 단서 몇 개를 찾아야만 건물을 구분할 수 있다. 특히 최근에는 IS의 자살폭탄테러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이 때문에 코바니에서는 창문의 유리가 부서지지 않은 경우를 보기란 어렵다. IS의 곡사포와 수류탄 공격으로 건물들은 부서지는데 이때 가장 먼저 부서지는 것은 바로 각 집마다 있는 물탱크이다. 이 물탱크는 상대적으로 취약해 대부분이 부서졌다.
 
종종 시가지를 거닐다보면 낮은 포복으로 이렇게 부서진 가정집으로 기어들어 가야할 때가 있다. 집에 들어가 보면 대부분 가족사진은 남겨둔 채로 떠났다. 아무래도 위기에서 사람들은 가족사진보다는 돈, 귀금속, 그리고 각종 증빙서류들일 것이다.
 
나는 그곳에 머무는 동안 한번은 비참한 광경을 눈앞에서 목격하기도 했다. 쿠르드족의 당원 중 한명이 전쟁의 상황을 보고하고자 시가지로 나갔다. 그가 밖으로 나가자마자 그는 IS가 쏜 포탄의 파편에 맞아 그대로 쓰러졌다. 곧장 그를 주변에 가까운 작은 병원으로 이송했다. 이 암담한 장면은 목격한 뒤로 나는 전쟁의 심각성을 깨닫게 되었다.  
 
코바니에 있는 동안 대부분의 사람들은 항상 긴장하고 있었다. 잠을 잘 때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이런 이유에서 어디에서 잠을 자더라도 모든 사람들은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항상 AK-47 소총을 두었다. 보통은 벽면에 AK소총을 비스듬히 세워두곤 했다. 
 
그날밤 내가 잠을 청한 집의 방에 있던 동료는 나에게 말을 건넸다. 그가 말하길 지금 우리가 자고 있는 이 집은 벌써 아홉 번째 옮긴 집이라고 했다. 옮겼다는 것은 이들이 묵던 집이 IS의 공격으로 부서져 계속 옮겨 다닌 지 아홉 번째라는 말이다. IS의 공격이 한 번 시작되면 총알이 빗발치듯이 쏟아지기 때문에 집이 부서지는 것을 막는 방법은 아무것도 없다. 즉 내가 잠을 자고 있는 이 집이 오밤중에 부서지지 않게 막을 방법은 아무것도 없는 셈이다. 이 때문에 나는 매일 밤, 잠이 들 때마다 생각했다. 집이 부서질지 모르는 그런 상황을 인정하고 차라리 집이 부서지는 와중에도 깊은 잠에서 깨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코바니에서 하루 하루가 지날수록 내 귓가를 괴롭히던 곡사포 탄이 터지는 폭음과 총소리에 나는 익숙해져갔다. 이런 소리들이 일상이 되어버렸다. 나도 살기 위해 AK-47소총을 다루는 방법을 배웠고 익숙해졌다. 처음 소총 방아쇠 부근에 손가락을 올려놓는 것은 거북하고 불편한 행동이었다. 하나, 시간이 지나자 나중에는 방아쇠 위에 손가락을 올려두는 것은 물론,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를 IS의 조직원을 찾아 이리저리 총구를 겨누어댔다.
 
부상자들과 휴식이 필요한 민병대원들은 안전한 골목을 찾아 쉬었다. 휴식을 취하는 와중에도 총을 손에 쥔 채로 있었다. 이 민병대원들의 총에는 저마다의 표시가 있었다. 일종의 장식과도 같은 이 표시는 세 가지 색을 칠한 것이었다. 쿠르드족을 상징하는 녹색, 노란색, 그리고 붉은색이다. 이들이 휴식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동안 한 남자는 적진을 향해 총질을 하고 있었다. 이 남자의 군복에는 남성 쿠르드족 민병대원을 상징하는 노란색 삼각형이 새겨져 있었고, 여성대원은 녹색의 삼각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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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주민이 떠난 한 집안에서 민병대원들이 전쟁상황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사진 옴라니 제공
 
전쟁 속에서도 장사하는 사람들
 
IS가 장악하고 있는 지점은 도시에서 총 세군데로 폐기장, 병원, 복지부 지역 이다. 최근 IS측의 부상자들의 상태는 악화되고 있다. 이것은 의료물자가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 쿠르드족이 터키로 향하는 국경의 길목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동안 이 IS의 부상자들은 보통 터키의 우르파(Urfa)에 있는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며, 지금도 그곳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코바니의 주요도로와 골목에서 부서진 상점과 집은 쉽게 볼 수 있고, 피가 흥건한 동료를 돕고 있는 민병대원들의 모습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코바니에서 부서진 도시의 모습이 있는 반면, 온전한 상태로 유지되는 곳도 있다. 이들 중에는 식당, 약국, 양복점, 슈퍼마켓, 구멍가게, 그리고 환전소가 있다. 신기하게도 환전소의 창문에는 “환전 가능합니다. 이라크의 쿠르드족 거주지, 터키와 유럽으로 송금이 가능합니다.” 심지어 이 문구와 함께, “고객이 만족할 때까지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겠습니다.”라는 문구도 붙어 있었다. 이 장면을 보자, 나는 불현듯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마음만 먹으면 그곳에서 내가 가진 돈도 환전할 수도 있었다. 나는 순간 질문에 사로잡혔다.
 
‘도대체 이런 전쟁 중에 누가 이런 상점을 운영한단 말인가?’
 
이 질문의 답은 얼마 지나지 않아, 주변에서 볼 수 있었다. 도로에 있던 열쇠집의 문을 한 쿠르드족 민병대원이 들어갔다. 문이 잠긴 상점의 문손잡이에 총을 한두 발 갈기곤 발길질을 하자 손쉽게 들어갈 수 있었다. 그렇다. 전쟁이라는 최악의 상황에서조차 쿠르드족은 해당지역의 상황과 동화되어나가고 있었다. 도로 한 가운데에 널브러진 마네킹이 뒹구는 그 현장에서 한쪽에서는 쿠르드족이 상점을 운영하고 있다니.
 
코바니를 돌아다니다보면 먼발치에서 자동차로 이동 중인 IS의 병력을 볼 수 있다. 물론 쿠르드족 민병대의 공격을 피해 맹속력으로 이동한다. 그들은 주로 도요타의 트럭과 자가용을 사용한다. 이 때문에 시리아의 코바니에서 도요타는 IS의 깃발을 대신하는 상징이 되어버렸다. 나중에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IS는 대량의 도요타 자동차들을 훔쳐온다. 이렇게 도요타 차량을 대량으로 훔쳐온 덕분에 IS의 상징처럼 자리 잡게 된 것이다.
 
미군의 공중폭격은 IS의 장악지역에 수시로 퍼부어졌다. 그럴 때마다, 내 발 밑의 땅은 흔들렸다. 그리곤 하늘 위로 희뿌연 연기가 바닥의 모래바람과 함께 뿜어져 나왔다. 
 
IS를 두려워하지 않는 여성 전사들
 
코바니에 머무는 동안 나는 그곳에서 IS와 맞서 싸우는 이들을 취재하기 위해 돌아다녔다. 특히 여성 민병대원들을 많이 인터뷰해보았는데, 이렇게 전장(戰場)에 여성이 많이 참여하는 경우는 어디에서도 전례 없는 현상이다. 그들은 코바니 도시안 여기저기에 골고루 퍼져있었다. 내가 처음 인터뷰한 여성 민병대원은 압둘라 아시히(Aseeh) 씨 였다. 그녀는 쿠르드족의 민주통합당의 당원이자, 합동참모부의 참모이기도 했다. 이렇게 여성이 주요 보직을 맡고 있는 것은 쿠르드족들의 문화에서는 종종 찾아볼 수 있는 현상이다. 그녀를 포함한 많은 터키의 쿠르드족들 중 여성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내가 코바니에서 만난 쿠르드족 민병대원의 약60%는 터키에 거주하던 쿠르드족들이었다. 즉 이중 포함된 많은 수의 여성 민병대원들도 터키에서 왔다. 그들은 자유를 찾기 위해 기꺼이 시리아로 달려온 사람들이었다. 전장에서 만난 상등병 계급의 에빈다르 부탄 씨도 여성 민병대원이다. 그녀는 매우 용감했으며, 강인한 정신력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내가 그녀에게 여성으로서 신체적으로 남성에 비해 이런 상황에서 힘들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이세상의 모든 것은 의지가 중요한 것이다. 내 의지는 이 고난을 반드시 돌파할 것 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IS를 박살내는 데에는 남녀는 중요치 않고, 남녀 모두 평등하고 동일한 조건에서 임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IS와 싸우는 전장의 최전선에는 많은 수의 여성대원들이 남성대원들과 함께 IS가 더 진격해 내려오는 것을 막고 있다. IS는 도시의 약 3분에 1가량을 이미 점령한 상태다. IS는 이 여성대원들에 가로막혀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의 혁명은 남성과 함께한 여성대원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게릴라 전술을 펼치며 최전선에서 임무를 수행하던 16살의 어린 여성대원 앞에 나는 숙연해졌다. 나는 그녀에게 경의를 표하고자 내 발을 모아 차렷 자세로 경례했다.
 
이 전장에서 이름을 떨치는 여성대원, 나린 에프린 (Narin Efrin) 씨를 인터뷰하고자 그녀를 찾았다. 그녀는 전장의 선두에 앞서길 마다하지 않는 용감한 여성이다. 하나, 파하드는 그녀를 만나는 것을 저지했다. 그녀는 이런 전쟁 속에서 모든 인터뷰를 거부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나에게 “전쟁 상황이 나아지길 바랍니다.”라는 말만 내게 남겼다.
참고로 IS 조직원들이 여성에게 죽음을 당할 경우, 지옥에 떨어져 고난을 받는다고 여기며, 가문의 수치로 여긴다.
 
다른 날에 비해 조용한 오후, 방에 있던 나와 마디예를 파하드가 불렀다. 그는 우리를 여성 민병대원들에게 소개시켜주었다. 키가 크고 단단해 보이는 인상 그리고 예사롭지 않은 눈빛의 여성 한 명이 앞장서서 다른 여성대원 3명을 데리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우리는 그들과 함게 마주 않아 식사를 했다. 바닥에 식탁보를 갈고는 그 위에 오이피클, 설탕에 조린 과일을 올려놓고 함께 먹었다. 그 외에도 빵과 여러 가지 음식들이 식탁보 위를 채웠다. 다행스럽게도 이곳에서는 AK 소총 한 자루보다 마실 수 있는 차와 담배를 더 쉽게 구할 수 있다. 이렇게 우리가 먹는 식재료 등은 여러 루트를 통해서 우리가 있는 곳으로 들어오며, 도요타 자동차에 실려서 오게 된다.
 
해가 저물어가자 갑작스런 추위가 들이닥쳤고, 파하드와 둔야는 감기약을 들고 와서는 나에게 권했다. 방의 한켠에서는 동료 중 한명이 스카이프(Skype)를 통해 엄마와 화상채팅을 하고 있었다. 화상에 모습을 드러낸 그의 어머니는 하얀 스카프를 하고 있었고, 여느 쿠르드족 어머니들처럼 자기 자식을 다정하게 부르고 있었다. 모자(母子)가 화상채팅을 하는 그 애틋한 장면이 너무 아름다워 나는 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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옴라니 씨의 신변을 보호하기위해 동행한 민병대원 /사진 옴라니 제공
 
추워진 날씨 속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계속해서 들리던 총소리와 폭탄이 터지는 소리도 어느 샌가 멈췄다. IS에게 있어서 비는 신의 축복이다. 마른 땅을 축복하는 신의 계시나 신의 외침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IS는 비가 오면 공격을 멈춘다. 고요하던 도시는 한순간에 기관총 소리에 갈라졌다.
 
이념을 넘어 우리는 하나의 인간이다.

코바니에서 생활하는 동안 함께 한 쿠르드족 민병대원들은 서로를 가족처럼 여겼다. 우리는 모두 하나라는 마음으로 똘똘 뭉쳐있었다. 그 누구도 옆에서 함께 싸운 동료의 죽음을 쉽게 넘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민병대원들이 가지고 있는 휴대전화에는 모두들 동료와 함께 찍은 사진이 가득하다. 우리는 전장에서 숨진 동료를 순교자(martyr)라고 불렀고, 이들의 고통을 함께 나눴다. 이런 동료를 떠나보낼 때 나의 마음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IS에 대항에 싸우는 동안 나를 비롯한 많은 쿠르드족 민병대원들은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정치적 구조에 대해 고뇌해보았다. 그리고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정치의 기반을 우리는 “자립형 민주주의 시스템”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다수의 쿠르드족으로 하여금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해냈으며, 이것은 마치 국가라는 울타리가 정부라는 시스템적 구조로 넘어가는 과도기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구조는 하부에서 상부로 운영되는 구조를 띄고 있다.
 
내가 앞서 인터뷰 했던 압둘라 아시리도 이런 우리의 정치구조에 대해 말한 바 있다. 그녀는 현재 중앙정부가 지자체를 운영하는 시대가 시리아에서는 사라질 것이라고 단언했다. 우리는 이 전쟁을 통해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로 말미암아 하나의 목적(IS의 타도)으로 뭉쳐졌으며, 이로서 그런 가능성을 보았고 이것이 시리아의 미래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 힘에 기반을 둔다면 IS를 반드시 척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결과적으로 나는 이번 코바니에서의 경험을 통해서 한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우리가 시리아 내전에서 보았듯이 전 세계가 코바니로 하여금 하나로 뭉쳐야 한다는 사실이다. 국적을 떠나 하나의 동포애로 뭉쳐져 자신의 힘을 남과 함께 나눈다면 코바니는 안정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코바니를 통해서 모든 인간은 국적을 불문하고 우리 모두는 하나의 시민이며, 모든 도시는 시민들의 단합된 결정으로 움직인다.
 
코바니를 빠져나오기 위해서 나는 국경 근처에서 2일을 머물러야만 했다. 코바니를 벗어나는 것은 코바니 안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쉽지 않았다. 우리 앞에는 우리가 빠져나올 때를 기다려 우리를 향해 총을 쏘려고 준비하고 있는 수많은 군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총구가 우리를 겨냥하고 있다는 사실을 당연한 전제로 세우고 우리는 작전을 세웠다. 작전은 별다른 것 없이 야음을 틈타 코바니로 들어올때보다 더 빨리 철조망을 넘어 뛰는 것이 전부였다.
 
코바니로 들어올 때는 낮은 포복으로 기어왔던 것과는 달리, 나는 철조망을 넘어 미친 듯이 뛰었다. 무거운 가방을 둘러맨 채로 쉴 새 없이 뛰었다. 내 심장은 폭발할 듯이 쿵쾅거렸고, 나는 너무 힘들어 거친 호흡을 토해냈다. 내가 뛰어온 뒤로 얼마 지나자, 마디예와 다른 친구들이 따라왔다.
 
국경에서 죽은 그녀
 
국경을 넘어서 코바니로 들어갈 때 머물렀던 건물로 가서 몸을 숨겼다. 그곳에는 내가 코바니 안으로 갔을 때처럼 또 다른 사람들이 코바니 안으로 들어가려고 그곳에 숨어있었다. 거기서 만난 28살의 오드리예 (Oadriyeh)는 터키의 이스탄불에서 석사를 마치고 온 여자 대학원생이다. 그녀도 내가 코바니에 들어갔을 때와 같은 이유로 그곳에 있었다.
 
다음날 아침, 그녀는 국경수비대의 총에 맞아 죽었다. 그녀가 죽기 전 남긴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 시리아 전쟁은 이곳에 살고 있는 코바니 사람들만의 전쟁이 아니다. 이 전쟁은 인류 모두의 전쟁이며 우리 모두와 연결되어 있다. 내가 이 부조리한 전쟁에 참가하는 이유는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서이자, 내가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서이다. 우리 모두는 함께 손을 잡고 이 악당들(IS)에 맞서야 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런 전쟁의 현실을 간과한다면, 이 악당들이 가진 폭탄과 공격은 내가 살고 있는 고향과 내 이웃을 향할 것이며, 그들의 악한 마음이 더 커져가도록 방치하는 꼴이 될 것이다.”
 
나는 그녀의 사망소식을 가슴에 묻고 터키의 다야르바키르에 도착했다. 내가 호텔을 향하는 동안에도 그녀가 죽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나의 여정은 나의 집 앞에 다다라서야 끝이 났고 내가 그 재앙 속에 있었다는 사실은 꿈같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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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드족 민병대원의 모습 /사진 옴라니 제공

 
저자의 추가 설명:
코바니를 점령하겠다는 IS의 계획은 2014년 9월 16일에 최초로 실행되었으며, 10월 2일 IS는 코바니의 마을 350개를 빼앗았다. 이로서 해당 지역에 거주하던 30만명은 국경을 넘어 터키로 망명했으며 이 중 상당수는 쿠르드족이었다. 지금까지도 쿠르드족과 시리아반정부군 (FSA)은 IS에 대항에 싸우고 있으며, 미군과 아랍의 국가들이 IS가 장악한 지역에 공중폭격을 가하고 있다.
 
옴라니 씨는 기자에게 이 전쟁일기를 전달하고는 자신은 다시 시리아의 전쟁 현장으로 들어가겠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겼다.   
 
 
옴라니 씨의 시리아 코바니에서 전쟁일기 1편 링크
 
 
<본 글의 내용 및 사진의 저작권은 잔야르 옴라니 씨에게 있으며, 조선pub은 옴라니 씨로부터 권한(한국어 번역 및 한국 내 게재)을 넘겨 받아 게재한 것입니다. 따라서 무단 도용 시 법적 처벌을 받을 수 있습니다.>
등록일 : 2015-03-12 11:11   |  수정일 : 2015-03-16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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