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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연의 라운드하우스

[단독] IS와의 교전지역, 시리아 코바니에서 전쟁일기!

英 BBC 방송에 교전지역 동영상을 제공한 옴라니 씨의 전쟁일기 세계최초 공개 [1편]

조선pub은 옴라니 씨가 겪은 시리아 내전의 실상을 그의 일기를 통해서 세계 최초로 공개한다. 옴라니 씨는 본 전쟁일기를 외신에 투고한 바 없고 조선pub을 통해 최초로 공개하고 싶다는 말도 전해왔다.

공개되지 않은 옴라니 씨의 시리아 전쟁일기(IS 對 쿠르드족 민병대)와 사진 그리고 동영상을 입수했다.
입수한 영상은 옴라니 씨가 BBC를 통해 최초로 공개한 25분짜리 시리아 전쟁동영상에 이은 두 번째 동영상이다. 그의 일기와 사진을 통해서 반인륜적 행동을 일삼는 IS는 물론, IS에 대적해 싸우는 쿠르드族 민병대원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이번 전쟁일기와 사진 그리고 동영상을 입수함으로서 그동안 외신을 통해서만 전해듣던 내용을 직접 조선pub의 독자에게 전하게 되었다.

글 | 김동연 월간조선 기자/ 자동차 칼럼니스트
필자의 다른 기사 2015-03-02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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옴라니 씨가 BBC에 제공한 동영상 속에서 옴라니 씨는 쿠르드족 여자민병대원의 총사령관(Commander of YPJ)에게 질문을 하고 있다. (사진 우측)/동영상 캡처

 
저자 약력
이름: 잔야르 옴라니(Zanyar Omrani)
국적: 이란 (쿠르드족)
나이: 26세
직업: 프리랜서 다큐멘터리 필름 제작자
학력: 이란 야즈드 대학(Yazd Univ.) 사회학 학사
언어: 쿠르드어, 페르시아어, 영어 구사
특이사항:
BBC를 비롯한 외신에 시리아 내전상황을 동영상으로 찍어 보냈으며, 그의 영상을 통해 시리아 내전 상황이 해외로 전파되었다.
BBC는 옴라니 씨가 보낸 25분짜리 영상을 편집 없이 날 것, 그대로 공개했다.
이 동영상에 이은 두 번째 동영상을 입수했으며 이는 총 40분짜리의 고화질 동영상이다.
 
 
시리아 내전에서 작성한 전쟁일기의 단독입수 과정
 
지난 2014년 10월 무렵, IS는 시리아의 전략적 요충지인 코바니(Kobani)를 점령했다. 이 요충지를 다시 되찾기 위해 쿠르드족 민병대와 미군은 해당지역을 공격했다. 당시 미군은 지상군을 투입하지 않았고 실제 지상의 전투는 쿠르드족 민병대가 도맡아서 했다.
 
참고로 쿠르드족이 IS를 척결하고나면 자신들의 독립을 위해 중동의 여러 국가들을 상대로 싸울 것을 알고 있는 서방세력(미국과 터키 등)은 이들에게 개인화기(소총)와 식량만을 지원할 뿐, 탱크 같은 장비는 제공하지 않고 있다. 제공할 경우 IS 척결이후 이런 장비가 미군과 터키를 공격하는 데에 활용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미국은 공중폭격을 지원한 것이다.
 
쿠르드족 민병대(YPG)는 민간인들로 구성된 조직으로 정규군이 아니다. 민간인들로 구성된 비정규군으로서 시가지에서 게릴라식 전술을 구사한다. 이들은 IS를 척결하고 중동지역에 퍼져있는 쿠르드족들과 함께 자신들만의 국가를 건립하겠다는 궁극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 목적이 각 중동지역에 떨어져 있던 쿠르드족들을 결집시켰고 민병대를 만들어 IS와 싸우고 있다.
   
이들은 작년 10월부터 코바니를 다시 탈환하려고 했다. 하지만 IS는 막강한 지상군 무기인 탱크와 곡사포 등을 사용해 방어했다. 하루에도 수십 차례씩 IS와 쿠르드족 민병대 간의 총격전이 여기저기서 벌어졌고, IS가 쏘아대는 곡사포 탄이 여기저기서 터져댔다.
 
그 현장에 카메라를 든 한 명의 남자가 있었다. 그는 유명한 외신기자도 아니었고, 쿠르드족 이란인, 다큐멘터리 필름 제작자 잔야르 옴라니 (Zanyar Omrani) 씨였다. 현재 전 세계로 퍼진 시리아 내전의 영상이 바로 옴라니 씨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영국의 BBC는 옴라니 씨의 시리아 내전 영상을 입수해 편집 없이 25분짜리 영상을 그대로 공개했다. 이를 통해서 시리아 내전의 생생한 현장이 세상에 공개되었다.
 
시리아는 전쟁으로 인해 외부인의 출입이 쉽지 않다. 특히 IS가 외신기자들을 잔인하게 참수하면서 외신기자들이 들어가길 꺼리는 곳이다. 이 때문에 외신기자들의 참수 이후, 시리아 내전 상황은 대부분 잔야르 옴라니 씨처럼 현지정황을 잘 아는 시리아의 주변국 중동사람들이나 시리아 현지인들을 통해서만 외부로 전해지고 있다.
 
지난 1월 말, 쿠르드족 민병대가 전장의 선봉에서 지상군 역할을 해준 덕분에 마침내 코바니를 IS로부터 다시 빼앗을 수 있었다. 기자가 옴라니 씨에게 연락을 취한 시점도 쿠르드족 민병대가 코바니를 IS로부터 되찾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월 27일이었다. 기자가 보낸 연락에 그는 한동안 답이 없었다. 그로부터 약 20여일이 지나 한국의 명절, 설을 앞둔 시점에서야 옴라니 씨로부터 답이 왔다.
 
그는 기자에게 마이크로소프트 워드 파일 21장 분량의 전쟁일기를 보내왔다. 옴라니 씨는 이것을 여행기록 혹은 여행일기(itinerary)이라고 불렀지만, 그 내용으로 볼 때, 전쟁일기에 더 가까웠다. 이 전쟁일기는 그가 처음 시리아의 코바니로 향하기 전 상황부터 시리아의 내전상황까지를 담고 있다.
 
 
특히 이 일기를 통해서 전 세계적으로 지탄받고 있는 IS의 특징(전술과 무기 등)은 물론 IS를 퇴치하는데 앞장서고 있는 쿠르드족 민병대의 생생한 일상이 묘사되어 있다. 또 시리아 내전의 배경과 상황이 세세하게 그려져 있다. 이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시리아 내전에 대한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가 보내온 전쟁일기는 전쟁이라는 상황 하에 작성한 것이라 두서없이 적힌 부분이 많다. 모든 내용을 최대한 시간순으로 재구성하여 한국어로 번역했다. 내용이 방대하여, 1편과 2편으로 나눴다. 본 전쟁일기에 포함된 사진도 단독으로 공개하는 시리아 내전의 사진이다.
 
참고로 본 일기는 쿠르드족인 옴라니 씨가 작성하였기에 모든 관점은 쿠르드족의 이익과 독립을 위한 주관적인 관점에서 작성된 것이다. 이 때문에 쿠르드족의 독립에 반하는 세력(터키 및 서방세력)은 다소 부정적인 시각으로 묘사된 점을 감안하기 바란다. 현재 IS의 격퇴를 위해 쿠르드족은 서방세력과 일시적인 유대관계를 취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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옴라니 씨가 시리아 코바니로 이동한 경로를 푸른색 선으로 표시했다. (사진의 우측부터 좌측으로, 아르빌-> 시르나크-> 바트만-> 다야르바키르-> 우르파-> 소룩-> 코바니)

 
코바니로 가겠다는 결심
 
처음 내가 시리아의 코바니(Kobani)로 떠난다고 했을 때, 나의 가족들과 친구들은 반대했다. 이 때문에 나는 거짓말과 말도 안 되는 그럴싸한 이야기를 꾸며내 그들을 안심시켜야만 했다. 하지만 나의 결심이 위험한 것임을 잘 아는 나의 친한 친구 중 한명은 버스터미널로 향하던 나에게 화를 냈다.
 
내가 가겠다고 한 시리아의 코바니는 피로 물든 죽음의 도시이자,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을 하는 곳이었다. 당시 이런 비참한 시리아의 뉴스가 연일 이어졌다. 그러나 나는 그 비참한 도시에서 전쟁이 끝날 것이라는 한줄기 희망의 빛을 보았고, 그 희망을 찾겠다는 결심으로 발을 내딛었다.
 
나와 함께 코바니로 떠나기로 한 동반자는 '마디예' (Mahdiyeh) 라는 여자이며 나와 그녀는 약 7년 전부터 알고 지낸 친구사이다. 그녀는 밝고 친근한 성격에 붙임성이 좋아 주변에서도 칭찬이 자자한 사람이다.
 
당초 우리는 시리아에 있는 난민 수용소 (refugee camp)로 향하려고 했다. 이러한 난민 수용소에는 나와 마디예 외에도 수많은 외신기자들이 모이는 곳이다. 개중에는 ‘자원봉사’라는 이름으로 온 사람들도 더러 있다. 이들 중 일부는 그저 남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기위해, 또 자신의 선행을 광고하기위해 수용소를 배회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나의 지인들 중에도 이런 난민 수용소에 자원봉사를 하러 간다며 너스레를 떠는 이들도 많았다.
 
나는 체질적으로 그런 사람들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목적지를 난민 수용소에서 내전(內戰)의 현장인 코바니로 바꾼 것이다. 나의 이러한 결심을 마디예에게도 말했고, 그녀를 설득한 끝에 우리 둘은 코바니를 목적지로 정한 것이다. 나의 이런 제안이 그녀가 천성적으로 가지고 있던 아집(我執)의 어딘가에 불을 질렀다. 이로 하여금 그녀가 코바니로 향한다는 것은 곧 현명하고 논리적인 선택으로 자리 잡았다. 물론 코바니로 향하기로 한 이상, 나와 그녀가 함께 하지 못할 가능성도 농후했다. 둘의 열정이 불타오르자, 그 무엇도 우리의 코바니행 여정을 막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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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모 안이 바로 중동지역에서 쿠르드족이 밀집해서 거주하고 있는 곳이다.  네모 안 지도의 중앙에 이라크의 아르빌이 있다. 아르빌은 쿠르드족 거주지역에서 수도 역할을 하고 있다. 아르빌에서 옴라니 씨는 터키를 거쳐 시리아로 향했다. (쿠르드족은 지도에서 보다시피 이란, 이라크, 시리아, 터키에 걸친 지역에 주로 거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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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 코바니에서 고기를 손질하는 쿠르드족 여자 민병대원들(YPJ), 대부분의 식량은 터키로부터 지원받거나, 일부는 자급자족하고 있다. / 사진 옴라니 씨 제공
 
다야르바키르로 가는 길
 
2014년 10월 23일, 오후 8시 이라크의 아르빌(Erbil/Irbil )에서 출발한 버스는 터키의 다야르바키르(Dayarbakir)를 향해 달렸다. 버스에 오르자 좌석마다 장착된 텔레비전이 나를 반겼다. 나는 이 텔레비전을 보면서 한동안 내가 시리아로 향한다는 사실조차 망각하게 만들었고,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드라마와 노래를 들으며 기쁨을 만끽했다. 졸음이 몰려와 잠을 청하려는 순간 나는 그 망각에서 깨어났고 질문하나가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내가 나중에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는 있을까?” 그 질문이 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이런 생각 때문이었을까. 나는 이브라힘 칼릴이라는 검문소(check point)에 도착할 때까지 한숨도 자지 못했다. 나와 달리 내 옆에 있던 마다예는 텔레비전을 끄고 숙면하고 있었다.
이 이브라힘 칼릴이라는 검문소에서 우리의 짐과 몸은 엑스레이(X-ray) 검사를 통과해야했다. 버스에 타고 있던 모든 승객의 몸을 검사한 검문소 직원은 탑승자 전원의 손가락 지문도 찍게 했다. 이런 검사는 총 3시간이 지나서야 끝이 났다. 다시 버스를 타고 출발했지만, 검문소를 지날 때마다 이런 검문은 하루가 멀다 하고 반복되었다.
 
도시규모가 작았던 시르나크(Sirnak)와 바트만(Batman)의 검문소는 검문소의 크기도 작았다. 이런 작은 규모의 검문소에는 엑스레이(X-ray) 검사장비가 없어 검문소 직원이 일일이 승객들의 몸을 더듬어 손으로 검사하기도 했다.
 
계속해서 달리던 버스는 어느덧 터키의 다야르바키르 도시에 도착했다. 처음 에르빌을 출발한지 10시간을 넘긴 뒤였다. 나와 마디예가 도착한 다야르바키르는 처량했다. 왜냐하면, 다야르바키르를 포함한 많은 터키의 도시에서 내가 오기 2주전 폭동이 일어났었기 때문이다. 그 폭동으로 시위에 참가했던 사람 30명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 터키 정부가 IS로부터 코바니를 되찾기 위한 美연합세력인 쿠르드족을 지지하겠다고 하자, 시민들이 반대시위를 벌인 것이다. 이런 분위기 탓에 터키 시내에는 시위진압용 장갑차가 곳곳에서 목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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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진 건물 어딘가에 숨어 있을지 모르는 IS 조직원을 피해 달리는 쿠르드족 민병대원 /사진 옴라니 씨 제공 

 
다야르바키르에서 마주한 쿠르드족의 문화
 
나는 일단 다야르바키르에서 통신 문제부터 해결해야했다. 그래서 전화기의 심(SIM)카드를 구하러 상점에 들렀다. 가격이 터무니없이 비쌌다. 요구한 액수는 이란에서 자동차를 한 대 살 수 있을 정도의 돈이었다. 나중에서야 터키의 리라의 화폐단위가 이란과 달라 비싼 것처럼 느꼈던 것이다.
 
심 카드를 구매한 뒤, 돌아오는 길에 다야르바키르의 거리에서 길을 잃었다. 길을 헤매다 마주한 하나의 예술문화센터 앞에 우리는 걸음을 멈춰 세웠다. 센터의 이름은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센터였다. 이곳은 쿠르드족의 노동당(PKK)이 운영하는 예술문화센터였다. 이런 이유에서 문화센터 벽면에는 압둘라 오칼란(Abdullah Ocalan, 쿠르드족 노동당의 창립자)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이런 쿠르드족의 예술문화센터가 다야르바키르의 거리에 자리 잡은 이유는 다야르바키르 시장(市長)이 바로 쿠르드족 출신이기 때문이다.
 
안에 들어서자 터키 거리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쿠르드족의 문화가 느껴졌다. 예술문화센터의 중앙에 자리 잡은 분수대와 그 주변을 둘러 싼 도자기들이 우리를 맞이했다. 그 안에는 쿠르드족의 음악, 그림, 연극을 가르치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었다.
 
예술문화센터에 있던 관계자가 말하길, 센터는 매일같이 터키 경찰들의 공격과 약탈이 이어진다고 했다. 침입한 경찰들은 벽에 걸려있던 그림들을 약탈해갔다고 하소연했다. 관계자가 설명을 하는 동안 나의 귓가에는 쿠르드족의 민족노래, 뎅그베즈(Dengbaj)가 들려왔다. 이는 마치 시를 읊조리는 듯 해보이는 쿠르드족 고유의 노래이다. 터키에서 다시 쿠르드족의 음악을 듣게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 노랫말에는 그동안 쿠르드족들이 겪은 어려운 방랑자생활과 항상 도망치던 쿠르드족의 삶을 담고 있었다. 그리고 노래에는 과거 오스만제국과 현재 터키를 향해 게릴라 전투를 벌였던 쿠르드족의 의지도 담겨있었다.  
 
거기서 만난 30살의 베심 국(Beshim Gouk)이라는 여자는 티그리스 대학의 재학생이다. 그녀의 그림은 대부분 쿠르드족의 전통과 가부장적 가정을 그리고 있었다.
 
예술문화센터 안에 있던 아메드 일마즈(Ahmad Yilmaz)라는 남자는 최근 센터가 쿠르드족의 역사를 남기는 데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면서 과거에는 센터의 이름이 ‘메소포타미아 예술문화센터’였다고 전했다.
 
해당 센터가 쿠르드족의 독립을 부추긴다는 이유로 터키정부로부터 많은 압박을 받아왔다. 본래 최초의 쿠르드족 예술문화센터는 1991년, 이스탄불에서 문을 열었다. 하나, 정치적인 이유로 터키 경찰들로부터 공격을 받고 1996년에는 다야르바키르로 이관했다.
 
이관 후에도 상황은 순탄치 않았다. 예술문화센터의 모든 직원이 체포된 경우도 있었다. 이런 이유에서 몇 년간 문을 닫기도 수차례, 2003년이 되어서야 지금의 모습을 갖추고 다시 문을 열었다. 하나. 터키 사법부는 예술문화센터에 벌금을 내는 조건으로 개장을 허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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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 코바니, 전쟁으로 폐허가 된 시가지의 모습/사진: 옴라니 씨 제공
 
코바니로 들어가는 두가지 방법
 
다야르바키르에서 코바니로 들어가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먼저 코바니의 출입을 관장하는 담당자를 찾아야 했다. 지인을 통해 수소문한 끝에 담당자와 통화를 했다. 그에게 우리가 코바니로 가야하는 이유를 상세히 설명했으나, 돌아온 대답은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우리에게 "대통령의 허락을 득하고 오더라도 코바니에는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을 했다. 지속되는 설득 끝에 그는 "일단 코바니의 (내전)상황이 좀 잠잠해지면, 다시 고려해보겠으니 이틀 뒤에 다시 전화를 달라"는 말을 남긴 채 끊었다.
 
우리는 다야르바키르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로 그렇게 이틀을 보내야했다. 그저 그 관계자의 긍정적인 대답을 기대할 뿐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나는 그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고, 마침내 그는 우리가 기다리던 대답을 해주었다. 어찌된 영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사람은 우리가 코바니로 들어가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 터키인 조력자의 전화번호를 주었다. 그와 통화를 했고, 그 사람을 만나려면 코바니와 인접한 도시, 소룩(Sorouch)으로 가야했다. 이 남자는 다행히도 친절했으며, 우리에게 "어떻게든 우리는 이 (IS를 향한) 싸움에서 함께 승리할 겁니다!"라며 기운을 북돋아주었다.
 
그 남자의 그 희망찬 외침도 잠시, 다야르바키르에서 우리를 만난 쿠르드족 민병대의 참모총장(Chief of Staff)은 우리의 여정을 중단할 것을 지시했다. 한창 들떴던 우리의 기대에 찬물을 끼얹은 셈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고, 결국 그는 우리에게 코바니로 갈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을 일러주었다.
 
그가 제시한 첫 번째 방법은 피시카푸어(PishKhapour) 이라는 마을을 경유하여 코바니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 지역을 통과하기 위해서 이라크내 쿠르드족 정부(KRG)로부터 공식적인 승인을 받아야 했다. 이 승인을 득해야만 시리아내 쿠르드족의 거주지인 카미실리(Qamishli)까지 갈 수 있다. 하나, 이 지역을 경유해 시리아 내부로 들어가더라도 코바니까지 다시 이동을 해야 하는 단점이 있다. 이동 중에는 IS를 마주할 가능성도 높다.  
 
민병대 참모총장이 제시한 두 번째 방법은 터키 안에 쿠르드족이 거주하는 지역의 도움을 받아 시리아 안으로 들어가는 방법이다. 아무래도 여러 조력자의 도움으로 들어가는 것이 현명한 선택 같았다. 또 이 방법이 곧장 코바니로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에 나와 마디예는 이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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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쿠르드족 민병대원의 미소, 여자 민병대원은 YPJ (쿠르드어의 약어) 라고 칭한다. (남자대원은 YPG)/사진 옴라니 씨 제공


우르파(Urfa)에서 다시 소룩(Sorouch)으로
 
참모총장의 두 번째 방법에 따라, 터키의 다야르바키르에서 다시 우르파(Urfa)라는 도시로 가야했고 우르파에 도달했다. 우르파는 다양한 인종이 모여 있는 도시다. 현재 우르파에는 터키인은 물론, 쿠르드족, 아랍인 그리고 시리아 난민들이 머무는 거점이 되어버렸다. 시리아에서 밀입국한 사람 중에는 다수의 여성들도 있는데, 이들은 아무런 목적도 없이 우르파에 온 사람들이다. 이들은 이곳에서 몸을 팔고 있다.
 
우르파에서 나는 팔레스타인계 미국인 남녀를 만났다. 그들도 우리처럼 코바니를 향하고 있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들어갈 방법이 없다는 말을 했다. 이에 나와 마디예는 불안했다. ‘과연 우리가 코바니까지 갈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머리를 맴돌았다.
 
일단 우리는 우르파에서 머물며 코바니로 들어갈 궁리를 하기로 했다. 이에 우르파의 오래된 호텔에서 며칠 밤을 보내기로 하고 호텔로 들어갔다. 호텔은 이름만 호텔일 뿐 인터넷도 되지 않았고, 수도꼭지의 물은 나오지도 않았다. 하지만 너무 피곤한 나머지 나는 일단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그리곤 ‘내일은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생각을 하고 잠을 청했다.
 
다음날 새벽 6시, 마디예는 나를 깨웠다. 소룩에서 우리를 코바니로 인도할 사람, 터키인 조력자가 9시 정각에 소룩에서 만나기로 한 탓이다. 이 사람은 앞서 나와 통화했던 그 남자였다. 우르파에서 소룩까지는 약 5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이 때문에 나와 마디예는 버스를 타기 위해 터미널로 향했다. 거기서 소룩이라는 목적지가 적힌 하얀 밴(van)을 보았고 운전기사에게 소룩으로 향하는지를 물었다. 그러자 운전기사는 대뜸 “왜요. 시리아 코바니로 가시려고요?”라고 되물었다. 우리는 보안상 우리의 목적지를 말할 수 없어, 일단 “아뇨”라고 대답하고는 다른 차를 찾아보았다.
 
터미널에서 다른 차를 찾는 동안 한 시리아인 여행자를 만났다. 그와 대화를 나누면서 그가 시리아의 수도인 다마스쿠스(Damascus)에서 온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시리아를 지키겠다는 애국심 하나로 IS와 싸우고자 코바니로 향한다고 말했다. 그와 함께 소룩으로 차를 타고 갔다. 이미 많은 시간을 지체한 나와 마디예는 소룩에서 만나기로 한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도착이 지연된다고 알렸다.
 
소룩으로 들어가는 소룩의 검문소에서 우리는 불안해졌다. 행여 우리가 코바니로 향한다는 사실을 알고 우리를 제지하지 않을까 두려웠다.  그러나 다행히 우리는 소룩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신경을 많이 쓴 탓인지 정신이 없었고 소룩이라는 도시의 첫인상이 어땠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참고로 터키의 소룩에서 시리아의 코바니까지는 약 15킬로미터 밖에 떨어지지 않은 국경과 인접한 도시다. 소룩에서 앞서 통화로 만남을 약속했던 터키인 조력자를 만났다.
 
그는 우리를 한 복층 건물로 인도했다. 소룩에서 쿠르드족이 운영하는 사무실이다. 일단 거기서 쉬기로 했다. 이 사무실이 위치한 건물은 다층 복합건물로 각 층마다 국적이 다른 정부관계자들이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런 이유에서 건물의 이름은 현지어로 ‘말라 젤’ (Mala Gel)이라고 불렸다. 말라 젤은 ‘국가들이 모인 집 혹은 다국적 건물’ (house of nations)이라는 뜻이다.
 
이 건물의 주된 업무는 각 국가별로 운영하는 층에서 해당 국가의 국민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일종의 난민 수용소였다. 해당 건물의 관계자가 말하길, 터키 정부는 총 20만명의 난민을 보호하겠다고 공표했지만, 실상은 고작 7천명도 되지 않는다며, 건물 운영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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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 코바니에서 민병대원들이 노래를 부르며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다. 담장에 쿠르드족 여자민병대원을 뜻하는 YPJ가 그래피티로 새겨져 있다. /사진 옴라니 씨 제공
 
소룩의 외교부 관계자, 메멧 도이메스(Mehmet Doymaz) 씨는 시리아로부터 들어오는 난민 때문에 겪는 고충을 우리에게 말하기도 했다. 난민들은 IS가 시리아의 도시 하나를 공격하고 점령할 때마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이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난민이 되어 소룩으로 모인다고 했다. 이 때문에 터키 중앙정부에 이런 사실을 알렸지만 별로 달라진 것은 없다고 푸념하듯 토로했다.  
 
15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IS의 공격으로 한순간에 난민으로 전락했다. 그리고 이 많은 사람들이 시리아의 코바니와 인접해 있는 터키의 소룩과 우르파에 모여들었다. 이런 난민의 기본적인 생활을 지원해 주기위해 터키 정부와 40여개의 비정부기관이 지원에 나섰다. 하지만 터키정부는 당초 약속과 달리 오직 6200명 정도의 난민을 적극 지원했을 뿐이다. 이런 터키의 태도는 터키 대통령,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의 연설을 통해서도 어느정도 확인되었다. 그는 한 연설에서, “코바니는 엄연히 다른 국가의 땅이며, 터키의 땅이 아니며, 이는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라고 말했다.
 
IS가 처음 코바니를 공격했을 때, 코바니에 있던 사람들이 터키에 떼로 몰려들었고, 터키 경찰은 당시 이 무리에 포함된 300명의 쿠르드족을 체포했다. 다행히 여론과 쿠르드족들의 설득으로 터키는 시리아에서 넘어온 난민을 모두 수용하기로 결정했다.(IS를 아랍어로는 DAESH 라고도 부름, 원문에는 DAESH라 되어 있으나 이해를 위해 IS로 번역)  
 
국경을 건너려면 죽음도 각오해야한다. 
 
해당 건물에서 나와 마디예 그리고 터키인 조력자는 코바니 입국을 위한 방법을 모색했고, 이 때문에 나와 마디예의 코바니 입국을 관장하는 관계자들이 회의를 했다. 회의 참가자는  터키의 군사전선(frontline)통제 관계자와 쿠드르족 관계자였다. 모든 회의는 터키어로 진행되었기에 나는 터키어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다행히 터키인 조력자 덕분에 회의가 끝나고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파악할 수 있었다. 그는 좋지 못한 결과를 말해주었다. 이는 우리의 코바니 진입이 매우 위험하여 허가 할 수 없다는 터키측 군사관계자의 말을 전했다.
 
이 위험은 이미 예견된 것이었고, 소룩으로 오는 동안 대부분의 관계자들로부터 누누이 들었던 경고였다. 터키인 조력자로부터 이런 부정적인 이야기를 듣고 있던 도중, 중년의 한 여성이 우리가 있던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코바니를 관장하는 주(州)의 의원이었다.
 
일단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녀에게 우리의 여행계획을 설명했다. 그녀도 부정적인 대답만을 남긴 채 사라졌다. 몇 시간이 흘렀을까. 그녀가 다시 우리에게 돌아와서는 “당신들이 지금 진행하는 여행의 결과가 좋지 못하더라도 이를 감수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우리는 늘 그랬듯이 '우리는 모든 위험을 감수하겠다'고 답했다. 그리고 얼마 뒤 건물에 있던 출입국 직원들이 우리의 휴대전화를 시리아 내에서 사용이 가능한 것으로 교환해주었다. 입국이 승인된 것이다.    
 
터키의 국경수비대는 나와 마다예에게 질문을 던졌다.
 
-당신들은 코바니로 왜 가는 것이오?
 
이 질문에 우리는 “코바니에서 관광을 하려고 합니다.”라고 답했으나 당연히 통할 리 없었다. 허락을 득하고 왔음에도 마지막 관문에서 막힌 것이다. 대답을 어설프게 한 탓이었을까.
 
이 때문에 우리는 코바니로 들어가려는 여느 외신기자들처럼 그 국경수비대의 사무실에 머물러야만 했다. 당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군복과 헬멧을 착용하고 “프레스(Press)”라고 적힌 조끼를 입고 국경지역을 배회하며 코바니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관찰하는 것 뿐이었다.
 
결국 우리는 다른 방법을 모색했다. 코바니로 몰래 잠입하는 것이었다. 이론적으로는 얼마든지 가능했지만, 실제로 실천에 옮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방법이었다. 목숨을 걸고 국경수비대들이 지키는 곳을 우리 힘으로 건너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의 이러한 밀입국을 지원해주겠다는 쿠르드족 민병대가 있었다. 이 국경수비대가 있는 터키에서 시리아로 향하는 1킬로미터 정도 남짓한 이 지역에는 다행스럽게도 IS가 출몰한 전례가 없었다.
 
그러나 이 1킬로미터를 건너 밀입국 한다는 것은 마치 낭떠러지 위에서 외줄을 타며 춤을 추는 것만큼 무모한 짓이었다. 쿠르드족 민병대가 처음부터 우리의 밀입국을 돕겠다고 한 것은 아니다. 수차례에 걸친 설득을 거듭한 끝에 그들이 우리의 밀입국을 돕기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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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가 된 코바니의 시가지를 쿠르드족 민병대원들이 트럭을 타고 이동하고 있다. 참고로 트럭은 현대자동차의 포터이다. /사진 옴라니 씨 제공
 
어둠을 뚫고 국경을 향해 달린 하얀 밴
 
그날 밤, 하얀색 밴에 우리는 몸을 실었고 국경에 가까운 마을을 향해 칠흑같은 어둠을 뚫고 약 20분간 내달렸다. 처음 나타난 마을에서 밴은 멈췄고 우리는 내렸다. 해당 마을은 이미 오래전에 주민들에게 대피명령을 내린 마을로 인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터키 정부도 더 이상 해당마을을 관리하고 있지 않았다.
 
이 마을 안에서 일부 쿠르드족들이 생활하고 있었다. 아마도 코바니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돕거나 쿠르드족 민병대의 후방지원을 하는 세력 같았다. 우리는 이들에게 부탁하여 국경을 뚫고 코바니로 들어갈 길을 모색하기로 했다.
 
이들은 서로를 하발 (Haval)이라고 불렀다. 이는 ‘동무’(comarade)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의 이름을 밝히기를 꺼렸다. 그리고 이들은 우리를 데리고 코바니로 들어가 줄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당시 그곳에는 부상당한 사람들이 약 3명 정도 있었는데 이들은 터키군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고 한 남자가 말했다. 그 사람은 이름을 밝히진 않았지만, 의과대학을 졸업한 학생이라고 했다. 그는 부상자들의 치료에 몰두했다.
 
우리는 그곳에서 불안한 시간을 보냈다. 약 2시간이 지나갔다. 그곳에 있는 쿠르드족들에게 코바니로 우리를 좀 데려가 달라고 사정했다. 설득 끝에 한명의 동무가 우리를 전선(war front)에 가까운 다음 마을로 인도해주었다.
 
이 두 번째 마을에서 자신을 무하마드 알리(가명)와 데이지(가명)라고 밝힌 두 명이 하얀 밴에 우리를 태워 국경 앞에 내려주었다. 우리는 너무 정신이 없었던 탓에 우리가 가져온 가방도 차에 두고 내릴 뻔했다. 다행히 알리와 데이지가 우리의 가방을 챙겨주었다. 여러 차례 포옹과 볼 키스를 나눈 뒤 그들은 떠나갔다. 그렇게 우리는 어둠 속에 마을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그렇게 우리는 그토록 바라던 국경 근처에 새벽 2시가 되어서야 도착한 것이다.
 
이미 귓가에는 총소리와 폭음이 먼발치에서 들려왔다. 국경을 지키는 감시타워가 우리를 찾아내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이 때문에 나와 마디예는 일단 부서진 집 뒤에 몸을 숨긴 채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피곤했는지 잠을 자고 말았다. 사람들 목소리에 놀라 일어났을 땐 이미 우리 주변을 40명이 둘러싸고 있었다. 순간 나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이대로 죽는 것인가. 하나, 다행히 이 사람들은 우리와 함께 국경을 넘을 친구들이었다. 개중에는 우리를 국경너머로 인도할 가이드도 있었다. 가이드는 서둘러 우리들에게 중요한 점을 설명해주었다.
 
나는 주요내용을 마디예에게 통역해주었다. 그렇게 바라던 코바니였지만, 막상 국경을 넘을 순간이 다가오자 공포가 엄습해왔다. 내 눈앞에는 나를 에워싼 40명이 타고온 하얀 색 밴이 보였다. 지금이라도 포기하고 집으로 가겠다면 그 밴을 타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터였다. 
 
 국경에서 마주한 공포,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당시 IS는 모술과 라까에 있던 대부분의 군사전력을 코바니에 결집시켜둔 시점이다. 한마디로 우리가 넘어 들어갈 코바니는 마치 호랑이 굴을 제 발로 들어가는 격이었다. 그러나 이미 우리는 들어가겠다고 결심한 뒤였다.
 
어둠속에서 우리는 가이드의 뒤를 따라 낮은 포복으로 기어나갔다. 느리게 기어가는 동안 얼마를 기었는지 알 수 없었다. 손과 발이 까졌지만, 아무도 아프다는 푸념을 할 수 없었다. 기어가는 도중 우리는 어떤 농작물이 길러지는 밭 위를 기었다. 어둠 속에서 기어가다보니 이것이 무엇을 기르는 밭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채소나 과일을 재배하는 곳이라고 짐작만 할 뿐이었다. 
 
기어가는 동안 마디예는 나보다 뒤쳐져 있었다. 무거운 가방을 둘러맨 채로 기고 있던 마디예가 조금만 더 버텨주기를 바랬다. 그 와중에 한 동무는 그 밭에서 딴 알 수 없는 과일인지 채소인지의 껍질을 벗기고 있었다. 그는 다짜고짜 그 껍질 깐 과일(?)을 뒤따르던 마디예에게 권했다. 정말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서 그 동무의 행동은 이해할 수 없었고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나보다 앞서가던 가이드는 때마침 가시돋힌 철조망을 담요로 덮고 넘어가고 있었다. 철조망을 넘자, 그는 곧바로 나에게 손을 뻗어 어서 넘어오라고 했다. 그 순간, 정적을 가르는 총소리와 알람이 울려 퍼졌다.
 
우리 모두는 가져온 담요를 철조망 여기저기에 덮고 미친 듯이 뛰어넘었다. 그렇게 우리는 그렇게 가고 싶었던 시리아의 코바니에 발을 내딛었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다행히도 총소리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만약 누군가 나의 집 담장을 넘어온다면, 나는 끝까지 총을 쏘았을 것이다. 하나, 총소리는 처음 한발을 끝으로 이어지지 않았고, 우리 모두는 국경을 무사히 넘었다.
 
국경을 넘어선 뒤 나는 아까 알 수 없는 과일을 권했던 동무에게 그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그는 ‘가지’라고 말했다. 그렇다. 우리가 기어온 농장은 가지 농장이었다. 국경 너머에서 기다리던 쿠르드족 민병대원들 몇 명이 우리를 반겼다. 함께 국경을 넘어온 사람들은 낮은포복으로 만신창이가 된 차림새와는 달리 모두들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국경을 넘었지만, 어디선가 경비견들이 짓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로부터 2킬로미터쯤 걸었을까. 우리는 첫 번째 시리아의 코바니 국경수비대 건물에 도착했다. 해당 건물은 쿠르드족 민병대(YPG와 YPJ)의 관할구역이었다. 소총을 메고 있는 여러 명의 젊은 쿠르드족 민병대원들이 우리를 반기며, 담배를 권했다. 그 젊은이들과 만나 대략 30분정도 휴식을 취한 뒤 본격적인 코바니에서의 삶을 시작하기 위해 그들의 뒤를 따라 이동했다.
 
함께 국경을 건너온 40명의 사람들이 여러 대의 차를 나눠 탔다. 우리는 도요타의 승용차에 올라탔고, 차는 어디론가 향했다. 잠시 이동한 뒤 한 건물에 도착했다. 그 건물 안에서 나와 마디예는 처음으로 분리되었다. 마디예는 여자들이 모이는 방으로 들어갔고, 나는 남자들이 모이는 방으로 들어갔다. 방안은 어두웠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벽을 더듬어 들어가는데 발에 무언가 걸렸다. 둔탁한 물체의 어딘가가 부딪힌 것 같았다. 차츰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자 내 발을 친 것은 다름 아닌 AK-47 소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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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 2015-03-02 09:46   |  수정일 : 2015-03-13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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