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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최고의 스포츠 스타는 女마라토너 정성옥

북한의 스포츠

⊙ 북한, 이긴 경기만 녹화방송으로 보도
‌⊙ 2010년 월드컵에서 브라질과 善戰했던 북한팀, “수비만 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공격도 하라” 김정일 ‘지도’ 따르다가 포르투갈에 참패 소문
‌⊙ 1999년 세비야 육상선수권대회 마라톤 우승자 정성옥, “결승지점에서 장군님이 어서 오라고 불러주는 모습이 떠올라 끝까지 힘을 냈다”

글 | 장원재 ‘사단법인 배우고 나누는 무지개’ 대표

▲ 1999년 세비야 세계육상선수권대회 여자 마라톤에서 우승한 후 귀국 퍼레이드를 하는 정성옥.
  2018 팔렘방 아시안게임이 끝났다. 국내에서의 열기와 인기가 예전 대회만 못했다. 아시안게임뿐 아니라 2016 리우올림픽도 마찬가지였다. 전문가들은 당분간, 적어도 10년 이상 이러한 분위기가 이어질 것으로 본다. 국제대회에 대중적 관심이 떨어진 것은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한국 스포츠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과도기적 흐름이라는 진단이다. 엘리트 스포츠가 생활체육으로 바뀌는 것이 변화의 핵심이다. 국가가 주도하여 소수(少數)의 엘리트를 키우고, 국제대회의 성적을 국위(國威) 선양과 국민 사기를 드높이는 수단으로 활용하던 시대가 저물어 간다는 뜻이다. 대신 취미와 건강관리의 연장선상에서 스포츠를 즐기는 인구가 급증했다. 시설도 늘었고 종목도 다양하다. 우리 사회의 성격이 근본적인 차원에서 진화했다는 방증이다.
 
  그렇다면 북한은 어떨까? 북한 주민들은 올림픽·아시안게임이 열린다는 사실을 알까? 스포츠 경기에 열광하는 팬들이 있을까? 중계는 해줄까? 북한 주민들이 생각하는 최고의 스포츠 스타는 누구일까? 북한 당국은 스포츠를 어떤 관점에서 육성하고 지원할까?
 
  북한 주민들도 올림픽·아시안게임이 열린다는 사실은 안다. 보도 시간에 이러저러한 국제대회에 북한 선수단이 참가했다는 뉴스를 전하기 때문이다. 이번 경우도 메달 획득 소식은 전했다. 단, 영상은 내보내지 않았다. 중계권 구입을 하지 못해서라는 이야기가 있다. 여자 농구(은), 카누(금, 동), 조정 등은 남북 단일팀이 출전했는데 이에 대한 보도는 하지 않았다. 금년 7월 대전에서 열린 코리아오픈 탁구 단일팀의 혼합복식 우승 소식은 자세히 전했기에, 비(非)보도의 배경이 궁금하다.
 
 
  생방송 중계 없어
 
2010년 6월 15일 남아공 월드컵에서 북한은 세계 최강 브라질에 맞서 善戰했다. 이 경기는 이례적으로 북한에서도 생방송했다. 사진=조선DB
  북한 스포츠 중계의 특징은 생방송 중계가 없다는 것이다. 원칙적으로, 북한은 자기들이 진 경기는 중계하지 않는다. 이긴 경기만을 녹화해서 방영할 뿐이다. ‘수령님의 지도를 받아 불굴의 정신으로 싸움에 나선 전사(戰士)’들이 패배했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북한식 체제선전의 출발점은 ‘수령은 완벽하며 오류가 없는 존재이기에 이를 모든 인민이 100%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수령이 하라는 대로만 하면 무조건 이긴다. 그런데 졌다. 수령의 지도에 문제가 있었든지 선수들이 수령의 지도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든지 둘 중 하나다. 문제는 어느 쪽이든 인정할 수가 없다는 점이다. 북한 주민들도 모든 경기에서 이기기만 할 수는 없다는 것은 다 알고 있다. 하지만 ‘지는 경기’를 TV를 통해 생방송으로 생생하게 전달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물론 예외도 있다. 1966년 이후 북한이 44년 만에 본선에 나선 2010년 월드컵이 그것이다. 북한은 역사상 최초로 생중계를 했다. 6월 15일 첫 경기에서 북한은 세계 최강 브라질을 맞아 나름 선전(善戰)했다. 결과는 1대2 패배. 54분까지 0대0이었고 끈질긴 수비로 버티며 간간이 역습에 나서며 브라질을 위협했다. 89분 지윤남의 득점도 기술적 완성도가 높았다. 명예로운 패배였다.
 
  문제는 다음 경기였다. 김정일이 브라질전(戰)을 시청하다 “수비만 하지 말고 다음부터는 적극적으로 공격도 하라”고 ‘지도’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소문의 진위를 확인할 길은 없다. 다만, 북한이 수비 일변도의 축구를 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이 경기마저 패하면 16강 탈락이기에, 초반부터 승부를 걸어야 했다는 것도 진실이다. 6월 21일 대(對) 포르투갈 전은 세계적인 화제를 모았던 경기다. 1966년 8강전에서 북한은 포르투갈에 3대0으로 앞서다 3대5로 역전패(逆轉敗)했다. 세계 축구계의 신화(神話)로 남은 일전이다. 44년 만의 복수전. 그때는 에우제비오, 2010년에는 호날두라는 슈퍼스타가 포르투갈을 이끌었다. 결과는 후반전에만 6골을 내준 북한의 0대7 참패. 이 경기를 북한에서 TV로 지켜본 탈북자에 따르면, 북한 중계진은 0대5 이후 거의 멘트를 하지 못했다고 한다.
 
 
  최고의 스타 정성옥
 
  북한에는 프로 스포츠나 취미와 이어진 스포츠 산업이 존재하지 않는다. 스포츠는 기본적으로 체제선전의 도구다. 선수 선발과 양성도 처음부터 끝까지 국가가 주도한다. 수준은 상당한 편이다. 1972년 뮌헨올림픽에서 올림픽 사상 첫 금메달을 획득한 이래, 국제대회에서 꾸준히 성적을 낸다. 탁구의 이분희, 유도의 계순희, 체조의 배길수 등은 한국에서도 인지도가 있다. 그렇다면 탈북자들이 기억하는 ‘최고의 스타’는 누구일까? 딱 한 사람이다. 정성옥이다.
 
  1999년 제7회 세비야 세계육상선수권대회 여자 마라톤 우승자 정성옥은 다양한 요소가 겹치면서 북한의 한 시대를 대표하는 아이콘이 되었다. 일단 출전 자체가 숱한 우여곡절을 넘어선 드라마다. 당시 정성옥은 국가대표이기는 했지만 후보선수였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20위가 주요 대회 최고 성적이었다. 에이스 김창옥을 위한 페이스메이커가 1999년 세계대회에 나선 그녀의 임무였다. 김창옥은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120m를 남기고 막판 스퍼트로 일본 선수를 제치며 은메달을 획득한 선수다.
 
  여기까지는 팩트다. 이 대목부터는 당시 북한 체육계에 떠돌았다는 ‘소문’을 옮긴다. 1999년 북한팀의 작전은 정성옥에게 김창옥을 위해 희생하라는 정도가 아니었다. 1999년이라면 ‘고난의 행군’ 직후다. 출전권은 있었지만, 북한은 선수들을 스페인까지 파견할 돈이 없었다. 입상 가능성도 전무(全無)했다. 북한 선수뿐 아니라, 아시아 여자 마라토너 가운데 아무도 상위 랭커가 없었던 시절이다.
 
  불참으로 분위기가 굳어지는 상황에서, 김창옥이 출전비를 모두 부담하겠다고 나섰다. 어떻게 자금을 마련했는지는 모른다. 코치와 임원, 동료 선수의 항공료, 체재비를 모두 내겠다는 이야기였다. 북한에서는 외국에 다녀오는 것은 어떤 경우라도, 중동에 노무자나 러시아에 벌목공으로 가는 경우라도 많은 사람의 꿈이며 로망이다. 김창옥 덕분에 선수단 전체가 소원을 풀었다는 분위기였다.
 
  북한 육상계 내부에 정성옥에 대한 ‘소문’도 돌았다. 남자 대표선수 김중원과 정성옥이 연인 사이라는 것은 비밀도 아니었다. 《동아일보》 주성하 기자는 한 칼럼에서 ‘정성옥이 임신을 했는데, 세비야 대회 몇 개월 전 중절수술을 했다. 김중원은 중국의 성(省)급 마라톤에서 우승한 뒤 상금 일부를 떼서 정성옥에게 개엿과 개소주를 만들어 먹였다’고 썼다. 김중원은 1998년 9월 베이징 마라톤 우승자다. 정성옥은 여자부 3위였다. 주성하 기자가 말한 내용은 아마 그 무렵의 이야기일 것이다. 그래서 정성옥은 완주도 쉽지 않다는 것이 합리적인 예상이었다.
 
 
  원로 체육기자 조동표가 통역 자청
 
우승 직후 “결승지점에서 장군님이 어서 오라고 불러주는 모습이 떠올라 끝까지 힘을 냈다”고 말한 정성옥은 이후 북한 체제선전에 많이 활용됐다.
  다시 팩트로 돌아가자. 1999년 8월 29일 레이스 당일, 정성옥은 초반부터 선두권으로 치고 나왔다. 내내 선두권을 유지하며 ‘백공오리(105리·마라톤의 북한식 표현)’를 내달렸다. 전 세계 전문가들과 중계팀은 당황했다. 존재조차 몰랐던 선수였기 때문이다. 어떤 까닭인지 정성옥의 유니폼에는 국기도 없었다. 중계진과 해설자가 ‘저 선수가 누구죠? 어느 나라 선수입니까?’를 서로 묻는 가운데 시간이 흘러갔다. 한참이 지나서야 중계진은 ‘북한, 정성옥’이라는 소개를 할 수 있었다. 마침내 2시간26분59초의 기록으로 1위로 골인. 2위인 일본의 이치하시 아리와 레이스 막판까지 접전을 펼치며 불과 3초 차이로 우승을 거머쥔 치열한 승부였다. 이 우승은 남북을 통틀어 아직까지 유일한 세계육상선수권대회 금메달이다. 김창옥은 10위로 골인했다.
 
  중계진보다 더 난리가 난 곳은 조직위원회였다. 우승자 인터뷰를 해야 하는데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육상의 꽃 마라톤 우승자의 인터뷰 없이 기사를 쓸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바로 그 순간, 노신사(老紳士) 한 분이 통역을 자청했다. 한국의 원로 체육기자 조동표(당시 74세, 2012년 작고)였다.
 
  이것도 정성옥 개인에게는 우연이 겹치며 찾아온 행운이었다. 조동표 기자의 현지 취재는 회사 차원의 출장이 아니었다. 언론사 퇴직 후 자비(自費)를 들여 마련한 일정이었다. 전 세계로 타전(打電)된 정성옥의 우승소감 첫마디는 “결승지점에서 장군님이 어서 오라고 불러주는 모습이 떠올라 끝까지 힘을 냈다”였다.
 
  조 기자께서 생전에 신명철 전 《스포츠서울》 편집국장(현 SPOTV 편집위원)에게 밝힌 바에 따르면, “이 말을 듣고 잠깐 고민했지만, 당사자의 말을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것이 통역의 본분이라 생각하고 정성옥의 발언을 그대로 옮겼다”고 한다. 이 통역이 없었다면 이 뒤로 이어진 정성옥의 신데렐라 스토리도 규모와 강도가 훨씬 줄어들었을 것이다.
 
  북한에서는 바로 난리가 났다. 당일 저녁 12시가 다 된 시각에 긴급뉴스를 시작으로 모든 언론이 정성옥의 우승을 대서특필했다. 방송국·신문사로 축하편지와 엽서가 쇄도하고 재방송 요구가 빗발쳤다. 문학작품이 창작되고 기념우표까지 발행되었다. 9월 4일에는 100만명이 운집한 정성옥 환영 평양시민대회가 열렸다.
 
  북한 체육인들은 공적에 따라 체육명수, 공훈체육인, 인민체육인, 노력영웅, 공화국영웅 등의 칭호를 받는다. 정성옥에게는 북한 체육인 최초의 공화국영웅 칭호가 주어졌다. 그 밖에 평양 보통강구역 주택 입주, 벤츠 S550 선물, 우승상금 5만 달러 개인소유 허용,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등이 정성옥이 누린 영예다. 엄격한 신분제 사회인 북한에서 지방 노동자 가족이 평양 귀족사회의 중심으로 단번에 수직 상승을 한 것이다.
 
 
  아버지에게 효도, 연인에게 의리 지켜
 
북한이 발행한 정성옥 기념우표.
  북한 당국과 주민이 열광한 이유가 있다. 정성옥의 우승이 수백만이 굶어 죽은 ‘고난의 행군’을 극복한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사자가 밝힌 것처럼 ‘장군님의 은혜’로 거둔 승리가 아닌가. 북한은 전문 체육인으로 뽑힌 선수들에게 별도의 식단을 제공한다. 1인당 섭취 칼로리를 계산하여 ‘노르마’를 공급한다. 이것은 북한체제의 자존심이다. ‘고난의 행군’ 때는 이런 지원이 불가능했다. 주성하 기자에 따르면, 옥수수 국수를 물에 불린 국수죽이 당시 선수들의 주식이었다고 한다. 체력 소모가 많은 마라톤 선수들에게는 턱없이 부족한 음식이다. 모든 것이 부실한 상태에서 기적적으로 거둔 우승이라는 것을 당국도 알고 주민들도 알았다. 동원이나 조작 없이, 북한의 모든 주민이 자발적으로 감격하는 분위기가 한동안 지속된 배경이다.
 
  정성옥이 필사적으로 달려야 했던 이유는 따로 있다. 가족의 생명이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고향 황해도 해주에서 화물차 운전기사로 일하던 정성옥의 아버지는 대회 얼마 전 사망 사고를 냈다. 우승을 해서 사면을 받지 않으면 어떤 처벌을 받을지 알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우승 이후, 정성옥 아버지의 ‘대인(對人) 사고’는 ‘없던 일’이 되었다. 효녀 심청의 해피엔딩 스토리다. ‘세계챔피언’의 이미지에 흠집이 나면 곤란하기에 북한은 정성옥의 2000년 올림픽 출전을 막았다. 김정일의 지시였다는 소문이 이때도 돌았다. 그래서 세비야 대회가 정성옥의 마지막 레이스다.
 
  김중원은 정성옥이 유명해졌으니 ‘이제 나 같은 건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이라며 낙담했다고 한다. 하지만 정성옥은 의리를 지켰다. 2001년 3월 김중원과 결혼했다. 2001년 4월, 휠라·하이네켄 등이 후원한 북한 최초의 개방형 국제마라톤대회에서 신랑 김중원은 2시간11분48초의 기록으로 우승한다. 지원용 차량에 탑승해 남편을 응원하며 ‘힘내라요!’라고 소리치던 정성옥의 모습은 다큐멘터리로 제작되어 북한 전역에 방송되었다. 김정일이 직접 결혼음식상을 보낸 결과가 뜨거운 부부애와 우승으로 결실을 맺었다는 것이 그 프로그램의 메시지였다고 한다.
 
  정성옥은 김중원에게만 의리를 지킨 것이 아니다. 2003년 10월 제주도에서 열린 한민족 문화축전 당시 정성옥이 우리 측 관계자에게 조동표 기자를 꼭 만나게 해달라고 청했다. 그리고 제주도를 찾아간 조 기자에게 북한에서부터 미리 준비해 온 선물을 전하며 “1999년 당시 뜨거운 민족애를 느꼈다. 정말 감사했다”고 거듭 인사를 전했다고 한다.
 
 
  정성옥 발굴한 신금단
 
  정성옥 스토리는 다른 지점에서 우리 현대사와 이어진다. 1974년생 정성옥을 1985년 9월에 발탁해 어린 시절부터 체계적으로 훈련시킨 인물이 있다. 신금단이다. 1964년 도쿄(東京)올림픽, 10분간의 부녀상봉으로 유명한 그 신금단이다. 신금단은 1960년대 중반 연이어 세계신기록을 갈아치우며 여자 800m 2분 벽을 최초로 돌파한 기념비적 육상인이다. 연세 드신 탈북자들은 ‘신금단은 중성(中性)’이라는 소문이 돌았다고 기억한다. 1960년대의 사진을 본 전문가들은 중성이 아니라 XO 여성이었을 것이라 추정한다.
 
  신금단은 문제가 없지만, 1972년 뮌헨 올림픽 여자배구 3·4위전에서 한국을 꺾고 동메달을 차지한 북한 선수 가운데는 ‘남자’로 의심할 수밖에 없는 선수가 분명히 있었다. 김정복이다. 지금처럼 검사가 엄격하지 않아 적발되지 않았지만, 당시 경기를 했던 우리 선수들은 지금도 억울한 마음을 감추지 않는다.
 
  이 대회 사격 소구경 라이플 금메달리스트 이호준도 세계 체육계에 커다란 파문을 남겼다. 우승 직후 기자회견에서 “적의 심장을 쏜다고 생각하며 사격했다. 김일성 대원수께서 출발 전에 적과 싸우는 것처럼 사격하라고 했다. 나는 그대로 따랐을 뿐이다”라고 발언했다. 2차 기자회견에서 북한 측이 “인용이 잘못되었다”고 물러서지 않았다면, IOC가 스포츠맨십을 위반한 행동으로 지목하여 국제적인 논란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등록일 : 2018-10-18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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