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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심장 주치의 “김정일은 김일성의 죽음을 유도, 방치했다”

[최초 공개] 김일성 사망 전 김정일에 의해 해임당한 심장 주치의(醫) 김용서는 누구인가

⊙ 김일성은 사망 직전인 94년 6월 訪北한 카터와 대동강 선상(船上)회담 중 심장 이상으로 배에서 내렸다
⊙ 김일성, 카터와 선상회담서 일선 복귀 시사… 김일성의 권력 재등장 우려한 김정일
⊙ 주치의 김용서 “사망 이전에도 두 번의 심장 이상으로 내가 인공호흡을 한 일이 있다”
⊙ 93년 12월 당 전원회의서 김일성이 경제정책 실패 강력 비판하며 김정일과 거리 두기 시작
⊙ 93년 말 김정일이 김용서 해임 후 이듬해 7월 김일성 사망
⊙ 김용서 “내가 곁에 있었으면 주석님은 사망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대성통곡
⊙ 김정일은 독일제 심장 기계 운용팀을 김일성 사망 당시 묘향산에 따라가지 못하게 했다

글 | 김성동 조선 pub기자 2016-01-05 09:41

  북한 김일성(金日成)은 1994년 7월 8일, 당시 김영삼(金泳三) 대통령과의 남북정상회담을 보름여 앞두고 사망했다.
 
  김일성의 죽음에는 사망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늘 ‘의혹’이라는 말이 따라다닌다. 그 의혹의 중심에 아들 김정일(金正日)의 이름이 항상 따라다니는 것도 마찬가지다. 당시 사실상 북한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김정일이 아버지 김일성의 권력 전면 재(再)등장을 두려워해 모살(謀殺)했다는 것이다.
 
  이런 분석은 김일성 사망 시점이 300만명의 아사자(餓死者)를 낸 소위 ‘고난의 행군’ 시기로 접어들기 직전이라는 북한의 어려운 경제상황과 93년 NPT(핵확산금지조약) 탈퇴 등으로 북한이 자초한 세계적 고립 등 북한이 처한 엄혹한 대내외적 환경을 타개하기 위해 김일성이 다시 권력 전면에 재등장하려고 했던 일련의 움직임들을 토대로 한다.
 
  북한의 핵개발과 관련해 당시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북한 핵 시설 폭격을 준비했던 94년에 ‘북핵 위기’ 해소를 위해 북한을 방문한 전 미국 대통령 카터를 만나 회담을 한 것도 김일성이었고, 김영삼 대통령과의 남북정상회담 파트너로 예정됐던 이도 김일성이었기 때문이다.
 
  김정일은 1974년 2월 13일 개최된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당 중앙위 정치위원이 된다. 김일성의 후계자가 된 것이다. 김정일은 1980년 10월 개최된 조선노동당 제6차 대회에서 당 중앙위 정치국 상무위원, 당 중앙위 비서, 당 중앙군사위원이 됨으로써 김일성의 후계자로 확정되지만, 대부분의 북한 전문가는 김정일이 후계자로 추대된 1974년부터 사실상 실권을 행사해 왔다고 보고 있다.
 
  이런 상황을 근거로 북한 관련 정보 소식통들이나 전문가들은 김일성 사망의 배경으로 김일성 사망 때까지 20여 년간 사실상 북한을 통치해 오던 김정일이 아버지의 재등장이 가시화하자 자신의 권력을 놓지 않기 위해 아버지의 죽음에 깊숙이 관여했다는 주장을 제기해 왔던 것이다.
 
 
  김용서는 9년 동안 독일 유학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시신이 안치된 금수산태양궁전.
  김일성 사망을 둘러싼 북한 전문가들이나 정보 소식통들의 이런 분석은 이제 정설화(定說化)해도 무방할 것 같다. 기자는 최근 고위직에 있다가 탈북(脫北)한 복수의 비(非)노출 탈북자들로부터 김일성 사망과 관련해 구체적인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들이 전한 김일성 심장 주치의의 증언에 따르면, 김정일이 아버지 김일성의 죽음을 유도, 방치했다는 것이다.
 
  기자가 만난 이들 비노출 탈북자들은 북한을 떠나오기 전 김일성의 심장병 주치의와 공적(公的) 또는 사적(私的)으로 밀접한 인연을 맺었던 인물들이다. 지금까지 김일성 심장병 주치의의 이름이 공개된 적은 없지만 이들 복수의 탈북자들은 똑같이 그 주치의의 이름을 ‘김용서’라고 정확히 거론했다.
 
  김일성 주치의들은 김일성 일가와 북한 최고위직 간부들만 이용할 수 있는 봉화진료소 옆에 마련한 주택에서 산다고 한다. 전승기념관으로 들어가는 길 건너편 아파트에 모여 산다는 것이다. 그들이 이용하는 차량은 김일성 일가와 최고위층만 이용할 수 있는 벤츠600이다. 김일성 일가에 대한 진료는 봉화진료소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김일성 숙소 등에서 이루어지는데 그때 이용하는 차량이 벤츠600이라는 것이다. 이런 신분의 김일성 주치의와 교류할 수 있는 인물이라면 탈북 전 북한에서의 지위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김용서는 어떤 인물인가. 이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작달막한 키의 김용서는 평북 의주 출신으로 평양에 있는 군의대학을 졸업했다. 친척도 별로 없고 집안이 평범했기 때문에 성분 토대가 좋았다. 성적이 우수했던 김용서는 훗날 두 번에 걸쳐 독일로 유학을 가게 되는데 한 번은 5년, 두 번째는 4년 등 도합 9년 동안 독일 유학을 했다고 한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김용서는 봉화진료소 소속으로 김일성의 주치의가 된다. 김용서의 전문 분야는 순환기 내과다. 순환기 내과는 주지하다시피 심장과 관련한 질병과 밀접한 분야다. 김일성의 심장 전문 주치의가 된 것이다. 오랜 시간 김일성 주치의로 있으면서 김용서는 김일성의 심혈관 질환에 관련한 1인자가 된다. 김일성 한 명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그는 그 분야 최고 전문의로도 명성을 얻는다. 90년대 초반에는 동독 최고위층 가족의 심장 수술에 성공해 《로동신문》에 그의 이름이 실리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김용서는 주치의 해임 후 컴퓨터센터 근무 자원
 
  김용서는 김일성을 위해 심혈관과 관련한 연구에도 매진했다고 한다. 심혈관에 관한 연구와 논문 작성을 위해 중앙당 산하 기관이었던 조선 컴퓨터센터에 도움을 요청하는 일도 있었다. 이 컴퓨터센터는 북한의 IT 전략 담당 기관으로 컴퓨터 관련 기술 개발 및 교류 외에 의료와 관련한 컴퓨터 기기를 개발하는 일도 했다.
 
  선진국에서 슈퍼컴퓨터를 이용한 각종 심장 질환의 치료 기술 개발이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인체에서 발생하는 각종 질환을 치료하는 데 컴퓨터 기술이 유용하게 쓰이게 된 지는 이미 오래다.
 
  김용서는 조선 컴퓨터센터에서 일하는 사람 중에서 자신이 쓸 논문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을 찾기도 했다. 그는 논문을 쓰기 위해서 의학 분야뿐만 아니라 다른 학문 분야까지 두루 섭렵했다. 김일성이 앓고 있는 심장 질환 치료에 도움이 된다면 분야를 가리지 않고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열과 성을 다해 김일성의 건강을 돌보던 김용서는 1993년 말에 갑자기 김일성 주치의에서 해임됐다. 나중에 다시 자세히 언급하지만 김용서가 해임당한 시기는 북한이 제3차 7개년 경제계획을 결산하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6기 21차 전원회의가 열린 직후다. 이 회의에서 김일성은 북한의 경제정책 실패와 관련해 김정일을 강력 비판하면서 자신의 권력 전면 복귀를 시사하는 발언을 한다.
 
  김용서의 해임 사유는 김일성의 진료기록 분실이었다. 주치의에서 해임당한 직후 김용서는 지인에게 “주석님의 진료기록을 내가 잃어버렸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정말 황당하기 짝이 없다”고 하소연했다고 한다. 경계가 삼엄한 봉화진료소에서 진료기록을 분실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당시 북한에서 김일성 주치의를 해임하라고 지시할 수 있는 사람은 김정일뿐이다. 김용서를 해임할 당시 봉화진료소 소장은 리낙빈이었다. 김정일이 리낙빈에게 지시해 김용서를 해임한 것이다.
 
  공교롭게도 김용서를 해임한 이듬해 김일성은 사망했고, 리낙빈도 김일성이 사망한 그해 12월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과연 김일성 사망 전 주치의 김용서의 해임은 공교로웠던 것일까.
 
 
  김일성 비서 전하철의 마지막 기록
 
  김용서는 주치의에서 해임당한 후 고향 의주로 가라는 지시를 받았다. 하지만 김용서는 평양에 남아서 컴퓨터센터에서 일하기를 원했다. 마침 당시 컴퓨터센터에 내려진 과제 가운데 심혈관 계통에 대한 진단 시스템 연구가 있었다. 그 시스템 연구에는 김용서가 썼던 논문도 참고 자료로 활용되고 있었다. 김용서는 김일성을 위해 그 연구에 참여하겠다고 상부에 건의했다. 김일성 진료기록을 분실했다는 이유로 해임됐기 때문에 김용서의 요청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다행히 컴퓨터센터 측에서 그 연구에 김용서가 필요하다는 건의를 올렸다. 세세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김용서는 우여곡절 끝에 컴퓨터센터로 자리를 옮겨 심혈관에 관한 연구를 계속하게 됐다. 그러나 김용서는 심혈관 계통에 대한 진단 시스템 연구와 결과물을 얻기도 전에 김일성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된다.
 
  그동안 김일성 사망 의혹 주장에는 죽기 전까지 김일성이 건강했는데 갑자기 죽었다는 주장이 많았다. 그 이유로 김일성이 죽기 직전까지 93년 12월의 유엔사무총장 갈리와의 면담, 94년 6월 카터와의 회담 등 외부 인사들과 연이은 만남을 가졌고 현지 지도도 의욕적으로 펼쳐왔다는 점을 들고 있다.
 
  김일성 사망 당시 책임서기(우리의 비서실장격)였던 전하철이 기록한 김일성 사망 전 3일간의 행적을 봐도 김일성이 건강한 몸으로 왕성한 활동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기록은 한편으로 김일성이 죽기 직전 피폐한 경제상황을 알게 되면서 상당히 괴로워했음도 알게 해준다. 북한 노동당 출판사가 97년에 펴낸 《수령님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에 실린 전하철의 기록을 요약,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7월 5일: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아침부터 경제 부문 책임일꾼협의회(묘향산에서 개최)를 지도하시었다. 협의회는 12시가 다 되어서야 끝났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점심식사 시간마저도 잠시 휴식하지 않으시고 오후 1시10분 나를 찾으시어 중유발전소에 놓을 터빈 발전기 한 대 값이 얼마냐고 물으시었다.
 
  그때로부터 30분쯤 지나 대안중기계연합기업소에서 중유발전소에 놓을 터빈발전기를 만들 수 있는가를 알아보시겠다며 기업소기사장과 기술자를 6월화력발전소(선봉에 건설된 북한 최초의 중유발전소)에 보내야겠으니 직승기(헬리콥터)를 빨리 보내라고 말씀하셨다.
 
  수령님께서는 기사장이 오늘 도착하지 못할 것이라 하면서 그들이 내일 아침 일찍 떠나 협의회에 참가하도록 하여야 한다고 하셨다. 밤 9시6분이였다.
 
 
  7월 6일:
 
  회의 참석자는 전날보다 훨씬 많았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 수령님께서는 심중하신 안색으로 회의장을 둘러보시며 경제사업을 잘하려면 일꾼들의 책임성과 역할을 높여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수령님께서는 자력갱생, 간고분투의 혁명정신으로 돌파구를 열어제끼고 걸린 문제를 푸는 데서 앞장서야 할 일꾼들이 사무실에 앉아 말공부만 하면서 허송세월하고 있으니 안타깝다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말씀을 끊으시었다. 안색은 퍽이나 어두워지셨고 목소리도 갈라진 음성이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어째서 가슴이 답답한가 하시며 손으로 왼쪽 가슴을 두드리시다가 부관에게 담배를 가져오라고 이르시었다. 담배 한 가치를 다 태우신 그이께서는 “나는 요즘 잘 피우지 않던 담배까지 피우고 있습니다”고 심려 어린 어조로 말씀하셨다. 장내는 숨을 죽인 듯 잠잠하였다.
 
  수령님께서는 오후 2시10분 나에게 “정무원에 가서 내가 준 방향에 따라 부문별로 집행대책을 다시 토론하여야 할 것입니다”고 말씀하셨다.
 
  8시5분 정무원이 안주지구탄광연합기업소에서 석탄 생산을 정상화하기 위한 대책을 세우도록 하라고 교시하시였다. 밤 9시10분 시멘트공장들에 좋은 석탄을 보장해 줄 데 대해 간곡히 교시하시였다.
 
 
  7월 7일:
 
  아침부터 분주히 돌아갔다. 어제 경제 부문 책임일꾼협의회에서 교시하신 집행대책안을 빨리 만들기 위하여 정무원과 위원회, 각 부들과 연계를 가지고 제기된 자료들을 종합하였다. 오후 4시9분쯤 수령님께서 전화로 제시된 과업의 진척사항을 물으셨고 정무원사무국과 국가계획위원회에서 구체적인 분공안을 만들고 있다고 보고했다. 오후 5시25분 수령님께서는 전화로 한 일꾼의 부인이 사망했다는데 무슨 병으로 사망한지를 알아보도록 했으며 10분쯤 후에는 서기실(비서실)의 한 책임일꾼에게 전화를 걸어 무언가 물으셨다.
 
  비바람 치던 8일 새벽 2시 경애하는 김일성 동지의 위대한 심장이 더는 과로의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고동을 멈추었다. 가슴을 치며 수령님을 불렀으나 대답이 없으셨다. 나는 문득 위대한 영도자 김정일 동지께서 계시는 것을 알고 몸매무시를 바로 하고 섰다.〉

 
 
  심장 관련 의료진은 묘향산에 가지 않았다
 
1994년 6월 18일 평양을 방문한 카터 전 대통령 부부가 대동강에서 김일성 부부와 뱃놀이를 즐기고 있다.
  전하철의 기록을 통해서만 보면 당시 만 82세인 김일성이 사망 직전까지는 큰 탈 없이 격정적으로 각종 회의를 주재할 정도로 건강을 유지한 것처럼 보이지만 주치의 김용서의 증언은 다르다. 과거부터 심장 부정맥이 심했다는 것이다. 다음은 복수의 탈북자 증언을 종합한 것이다.
 
  “김일성이가 사망한 후 김용서가 엉엉 통곡하면서 찾아왔다. 자기만 있었으면 김일성이가 죽지 않았을 거라며 한탄을 했다. 김일성이 원래부터 심장 부정맥이 심해서 자기가 주치의 시절에 2번이나 인공호흡으로 깨어나게 한 일도 있었다고 했다. 부정맥이 심장을 멈추게 할 수도 있는데 그래서 독일에 가서 당시 60만 달러인지, 160만 달러인지 그 액수는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그 돈을 들여 심장 질환과 관련된 독일제 최첨단 의료설비를 들여왔다. 그 이후로 그 의료기기를 운용하는 팀이 있었는데 그 팀은 김일성이 움직이는 곳이면 어디든 따라다녔다. 마치 경호원이 항상 따라다니는 것과 마찬가지다.”
 
  ―실제 응급 상황에서 그 의료기기를 사용한 적이 있었다고 했나.
 
  “그렇다. 김일성 사망 직전 카터가 방문했을 때 그런 일이 벌어졌다. 94년 6월 18일에 김일성 부부와 카터 부부가 대동강에서 김일성 전용 배를 타고 회담을 가졌는데 그때 김일성의 건강에 이상이 왔다고 한다. 배 위에서 카터와 면담 중에도 의료진이 대기하면서 수시로 김일성의 맥박 상태 등을 점검한 걸 보면 의료진은 이미 그전부터 김일성의 건강 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거다. 그래서 독일에서 수입한 최첨단 의료설비를 실은 차량도 김일성이 탄 배를 따라 대동강변 도로에서 배와 속도를 맞추며 따라다녔다. 대동강을 따라서 서해갑문까지 다녀오는 길에 대안 중기계공장 지대를 지날 적에 김일성이 심장에 이상을 느껴 배에서 내려 급하게 그 의료 차량으로 가서 응급 처방을 받았다. 이 이야기는 김용서가 직접 한 이야기다.”
 
  실제 《로동신문》 94년 6월 18일자 1면에는 카터와 김일성이 선상에 나란히 앉은 사진과 서해갑문 전망대에서 갑문을 바라보는 기념사진이 실려 있다.
 
  ―그 의료기기를 운용하는 팀이 김일성이 사망한 묘향산에도 따라갔나?
 
  “김용서에 의하면 그 팀이 안 갔기 때문에 김일성이 죽었다는 거다. 그 팀은 김일성이 가는 곳이면 무조건 가게 돼 있는데 김일성과 김정일을 경호하는 호위총국에서 그 의료팀을 뺐다는 것이다. 그 의료팀을 김일성 수행에서 빼라고 호위총국에 지시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김정일뿐이다. 김용서는 그 의료팀만이라도 갔으면 자기가 없었어도 김일성이 죽지는 않았을 거라며 대성통곡했다. 한마디로 김정일이가 자기 아버지를 죽음으로 유도, 방치했다는 얘기다.”
 
  김용서는 김일성 사망 후 그해 12월에 사망한 봉화진료소 리낙빈 소장의 심장마비사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고 한다.
 
  김정일의 지시를 받아 김용서를 김일성 주치의에서 해임한 리낙빈 봉화진료소 소장은 조선노동당 중앙검사위원장을 오랫동안 했고 당 중앙위 부부장이었던 인물이다. 94년 12월에 사망한 그의 부고는 당 중앙위 명의로 97년 4월 30일자 《로동신문》에 실린다. 사망한 지 거의 3년여 만이다. 김용서의 김일성 주치의 해임에 관련돼 있을 뿐만 아니라 심장 질환 관련 의료팀이 소속한 봉화진료소의 소장으로서 김일성의 죽음에 관한 진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이 결국은 자신도 죽음으로 몰고 갔다는 게 탈북자들의 분석이다.
 
 
  김정일이 결심한 시점은?
 
  그렇다면 김정일은 어떤 사건을 계기로, 언제부터 아버지 김일성을 죽음으로 몰고 갈 생각을 갖게 됐을까.
 
  전직 CIA 요원으로 북한 문제 전문가인 마이클 리는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방북했던 카터와 김일성의 회담에서 오간 대화가 아들 김정일이 아버지 김일성을 제거하기로 결심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고 주장한다.
 
  마이클 리는 “김일성이 카터를 만난 자리에서 이번 남북정상회담에서 성공하면 자신이 다시 권력 전면에 나서서 향후 10년간은 더 나라를 위해서 일할 계획이라고 말한 것을 김정일이 도청했고 그것이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그는 또 “만약 김일성이 남북정상회담에 자신 대신 김정일을 내보냈으면 자신이 죽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으로 김정일이 아버지를 제거할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고 봅니까.
 
  “35년간 일해 온 김일성의 심장 전문의를 해고시켜 버리고 김일성과 관련한 각종 의무기록을 압수한 것이 그 실행의 첫째였다고 봅니다.”
 
  ―새로운 주치의를 임명하면 해결되는 일이 아닌가요.
 
  “그 새로운 주치의라는 사람이 루마니아에서 공부를 하고 막 돌아온 풋내기 의사라는 게 문제였죠. 그가 김일성의 심장 상태를 제대로 알기도 전에 김일성은 사망해 버렸습니다.”
 
  ―근거가 뭡니까.
 
  “전하철 비망록입니다.”
 
  ―김일성 사망과 관련한 전하철의 기록은 북한 노동당 출판사가 97년에 펴낸 《수령님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에 소개돼 있습니다.
 
  “거기에는 김일성이 사망하기 직전까지의 기록만 실려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내가 본 전하철 비망록은 사망 이후의 기록들도 함께 실려 있는 것입니다.”
 
  ―언제, 어느 기관이 입수했습니까.
 
  “그걸 지금 세세하게 밝힐 수는 없습니다. 입수 시기는 최근이라고만 밝히겠습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마이클 리가 주장한 김일성이 카터와의 선상회담에서 다시 북한 통치를 위한 전면에 나서야겠다는 말을 한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정종욱 통일준비위원회 민간부위원장도 금년 1월 초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그런 발언을 유추할 수 있는 언급을 했기 때문이다.
 
  김영삼 정부에서 정종욱 부위원장은 청와대 외교안보 수석이었다. 김일성과 회담을 마친 카터는 곧바로 청와대를 방문해 김영삼 대통령을 만났다. 정종욱 부위원장은 외교안보 수석으로서 그 자리에 배석했고,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카터는 메모를 해온 수첩을 꺼내 ‘김일성이 이렇게 말했다’며 전했다. 그때 기억나는 것은 ‘내가 (김정일에게) 맡겨놓았더니 일이 이렇게 됐다’는 대목이다.…”
 
 
  김정일에 대한 김일성의 질타가 죽음으로
 
만수대 김일성·김정일 동상.
  북한 문제 전문가인 김광인 코리아선진화연대 소장의 생각은 마이클 리의 견해와 약간 다르다. 김 소장은 “김정일의 김일성 제거 계획은 93년 12월부터 본격화했다”고 주장한다.
 
  ―93년 12월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북한의 제3차 7개년 경제계획을 결산하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6기 21차 전원회의가 93년 12월 8일에 열렸습니다. 그 회의에서 김일성은, 김정일이 주도하면서 이끈 3차 7개년 경제계획의 실패를 공개적으로 비판했습니다. 비판에 그치지 않고 ‘내가 아무리 나이를 먹었어도 다시 바로잡아야겠다’면서 권력 전면에 다시 나서겠다는 의사를 피력한 것입니다. 이때부터 김일성이 김정일과 본격적으로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고 보면 됩니다.”
 
  ―당시 북한의 실권자가 김정일이었다고 해도 주석인 김일성이 북한의 어려운 경제 상황을 그 이전까지 몰랐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데요.
 
  “북한이라는 사회가 어떤 사회입니까. 게다가 실권자로 모든 인사를 좌지우지하는 김정일이 김일성의 눈과 귀를 가리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북한은 제3차 7개년 경제계획을 1987년 4월 개최한 최고인민회의 제8기 2차 회의에서 확정, 발표했다. 87년에 시작해 93년에 끝났다. 이 경제계획을 결산하는 회의가 93년 12월 8일에 열린 것이다. 이 회의는 김일성의 사회로 진행됐고 정무원 총리 강성산이 그 결과를 보고했다.
 
  《로동신문》이 회의 다음날인 12월 9일자에 게재한 보도문은 경제성장 등의 성과를 자랑하면서도 사실상 경제계획의 실패를 자인하고 있다. 보도문은 제3차 경제계획 시기의 대외 경제 상황을 “소련과 동구라파 사회주의의 좌절 등 반사회주의 공세 강화로 사회주의 경제 건설에 커다란 장애와 난관이 조성됐다”고 분석하면서 “우리 경제 건설에 큰 피해로 전반적 경제 발전의 속도와 균형을 조절하지 않을 수 없게 돼 제3차 7개년 계획을 원래 예견한 대로 수행할 수 없게 하였다”고 적고 있다.
 
  ―마이클 리는 카터와의 선상회담에서 김일성이 한 발언 때문에 김정일에 의한 김일성 제거 계획이 본격화했다고 주장하던데요.
 
  “이미 93년 말에 그런 일이 있었는데 김일성이 선상에서 그런 발언을 했든 안 했든 김정일에게 무슨 의미가 있었겠습니까. 우리가 자꾸 김영삼과 김일성이 하기로 했던 남북정상회담을 얘기하는데 김정일의 결심은 그 이전에 섰다고 보는 게 맞습니다. 김일성 주치의인 김용서의 해임이 이루어진 시기가 김일성과 카터와의 회담 이전이라는 사실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김정일이 김일성 제거 결심을 한 시점을 보는 시각에는 차이가 있지만 김일성 죽음과 김일성 주치의의 해임이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은 두 사람 다 일치하는 견해다. 김일성 주치의의 해임 사실이 이번에 탈북자들의 증언을 통해 밝혀짐으로써 결국 김일성 죽음에는 아들 김정일이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의도적인 개입’을 했다는 그동안의 방증은 사실이 된 셈이다.
등록일 : 2016-01-05 09:41   |  수정일 : 2016-02-24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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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영  ( 2016-01-05 )  답글보이기 찬성 : 3 반대 : 1
코모도스는 있는데 막시무스가 없어..
이기남  ( 2016-01-05 )  답글보이기 찬성 : 11 반대 : 6
스탈린의 죽음에 베리야가 관련이 있고, 김일성의 죽음엔 그아들 김정일이
관련이 있구만..독재자의 살아 생전의 권력의 태양같은 절대성에 비하면 그 죽는 과정은 바로 옆의 최측근 충견 세파드에 물려죽는 너무나도 어이없는 말로.
권중수  ( 2016-01-06 )  답글보이기 찬성 : 8 반대 : 4
아들에게 죽을 짓을 한 김일성이고 아버지 아니 아들도 죽일수 있는 김정일이다.
그 아들 정은이를 봐라 고모부도 죽이고 고모도 죽여놓고는 의엿히 지도자인냥 행세하는 그 거들먹걸임을 현재도 보여주지 않는가 백두산 혈통? 태양신? ㅎㅎㅎ 살인마집안이자 귀신마귀고수집안이다
권중수  ( 2016-01-06 )  답글보이기 찬성 : 17 반대 : 10
그래도 문재인의 상전이자 받들어모시는 귀신 중에 최고의 주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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