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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미스터리의 주인공 ‘선화공주’

⊙ 2009년 미륵사지 西塔 해체 과정에서 금제사리봉안기 발견… 미륵사 건립자는 선화공주가 아니라 사택왕후로 밝혀져
⊙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는 미실의 딸?
⊙ 무왕, 즉위 후 대귀족 沙宅氏의 딸과 결혼하면서 선화공주 버려야 했지만, 말년에 선화공주 위해 미륵사 건립

글 | 엄광용 소설가

 
 
무용 ‘선화공주 시집가다’의 한 장면. 선화공주 설화는 오늘날 드라마나 무용 등으로 다양하게 재생산되고 있다. 사진=조선DB
  ‘사실(事實)이냐 허구(虛構)냐’를 놓고 역사가들 사이에서 가장 많은 논란이 있는 것 중 하나가 ‘선화공주(善花公主) 미스터리’다. 《삼국유사》에 설화 형식으로 기록된 이 스토리의 무대는 신라의 서라벌(지금의 경주)과 백제의 용화산(龍華山) 일대(지금의 전북 익산)다. 특히 미륵사지와 왕궁평성의 터는 선화공주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익산의 대표적인 유적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신화나 설화는 오랜 기간 여러 사람에 의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역사라는 ‘씨줄(사실)’과 이야기라는 ‘날줄(허구)’로 엮여 탄탄한 구성과 함축미를 구사하고 있다. 역사성을 가진 진정한 의미의 토대와 상상력의 발현으로 이룩된 상징의 탑은 견고하여,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 설화 내지는 전설로 남아 그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그렇게 전해져 오던 선화공주 이야기도 《삼국유사》를 쓴 일연(一然)에 의해 한 번 더 각색이 되어 오늘날의 설화로 정착되었을 것이다. 《삼국유사》로 전해지는 설화 중에서 선화공주 이야기는 당대에 풍미한 대표적인 사랑 이야기다. 거기에다 익산의 미륵사지와 왕궁평성의 터는 선화공주의 설화를 탄탄하게 뒷받침해 주는 것으로 여겨져 온 역사 유적이다.
 
  그런데 2009년 1월 미륵사지 서탑(西塔) 해체 과정에서 나온 금제사리봉안기의 기록 때문에 이러한 인식에 금이 가게 되었다. 서탑 심주석 밑에서 나온 금제사리봉안기 기록에는 미륵사 창건을 주도한 인물이 좌평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 사택왕후(沙宅王后)로 되어 있어, 기존의 선화공주 설화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 것이다.  

  누가 미륵사 창건자인가
 
 
익산 미륵사지 서탑 해체 공사 중 발견된 금제사리봉안기에는 미륵사 건립자가 선화공주가 아닌
사택왕후로 되어 있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석탑인 익산 미륵사지 서탑은 2800여 개의 석재를 짜 맞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총 9층 석탑인데, 그중 4층 이상은 비스듬히 갈라지면서 떨어져 나가 본래 모습을 찾기 어렵다. 일제(日帝)강점기 때인 1915년에 조선총독부가 시멘트로 땜질해 보수했는데, 문화재위원회가 구조안전진단을 한 결과 무너질 위험성이 있어 1999년 해체·수리를 결정하게 되었다. 이 해체 과정에 전문위원으로 참여한 박경식 단국대 교수(석조미술 전공)는 “4층 이상은 무너질 수밖에 없는 엉성한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에 무너졌다”고 진단했다.
 
  미륵사지 서탑의 해체가 완료된 것은 그로부터 10년 후인 2009년 1월 14일이었다. 마침내 심주석 밑의 사리공에서 639년(백제 무왕 40년)에 탑을 세웠다는 기록이 새겨진 금제사리봉안기와 금동사리외호, 금제사리내호, 각종 구슬과 공양품을 담은 청동합 6점이 수습되었다.
 
  금제사리봉안기에는 앞뒷면으로 각각 11줄씩 193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좌평 사택적덕의 딸인 백제 왕후가 재물을 시주해 사찰을 창건하고 사리를 봉안해 왕실의 안녕을 기원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선화공주 설화’에 마치 서탑의 그것처럼 금이 가는 순간이었다.
 
  금제사리봉안기 중 논란이 된 부분은 바로 미륵사 창건을 주도한 사람이 《삼국유사》에 나오는 선화공주가 아니라 사택왕후라는 것이었다. 당시 동국대 김상현 교수(불교사상사 전공)는 그 논란이 되는 부분의 문장을 다음과 같이 번역했다.
 
  〈우리 백제 왕후께서는 좌평 사택적덕의 따님으로 지극히 오랜 세월[曠劫]에 선인(善因)을 심어 금생에 뛰어난 과보(果報)를 받아 만민(萬民)을 어루만져 기르시고 불교[三寶]의 동량(棟梁)이 되셨기에 능히 정재(淨財)를 희사하여 가람(伽藍)을 세우시고, 기해년(己亥年) 정월 29일에 사리(舍利)를 받들어 맞이했다.〉
 
  금제사리봉안기의 어디에도 ‘선화공주’에 대한 기록은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삼국유사》 기록에는 ‘백제의 사택왕후’는 빠지고 ‘신라의 선화공주’가 미륵사를 창건한 시주자로 나온다. 이 두 기록의 상반되는 내용을 두고 역사학자들 간에 이론(異論)이 많았다.
 
  우선 기록의 연대로 볼 때 금제사리봉안기는 639년이고, 《삼국유사》는 1281년이다. 금제사리봉안기는 미륵사를 창건한 당대의 기록이고, 《삼국유사》는 고려시대에 와서 사료와 이야기를 수집해 일연이 새롭게 편집한 책이다. 기록 연대만으로 볼 때 금제사리봉안기가 사실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미륵사 창건 설화에서 선화공주를 제외시킬 수 없는 것은, 역사를 사실로 한 신화 내지 설화의 힘이 그만큼 강하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 일반인들뿐만 아니라 역사학자들까지도 금제사리봉안기의 사택왕후 기록이 나왔음에도 선화공주를 완전히 배제시키지 못하는 이유는, 설화 속에 녹아 있는 역사적 사실을 함부로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한쪽이 무너져 내린 미륵사지 서탑처럼, 신화와 설화가 사라지면 사료가 부족한 우리나라의 고대 역사를 해석하는 데 퍼즐 하나 잃는 결과를 낳게 될 우려가 있는 것이다.   
  
  선화공주와 서동
 
  《삼국유사》 기이 제2 ‘무왕’조 기사에 나오는 ‘선화공주 설화’는 다음과 같다.
 
  〈백제 제30대 무왕(武王)의 원래 이름은 ‘장(璋)’이었다. 그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났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는 ‘남지’라는 연못가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그 연못의 용과 사랑을 나누어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이렇게 태어난 장은 어린 시절 ‘서동’ 또는 ‘맛동’이라 불렸다. 그는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나고 이해심이 많았다. 어려운 살림에 항상 마를 캐다 팔아 홀어머니를 봉양하며 살아, 사람들이 ‘서동’이란 이름을 붙여주었다고 한다.
 
  청년이 되었을 때 서동은 신라 진평왕(眞平王)의 셋째 딸인 선화공주가 매우 예쁘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는 상상 속에서 선화공주를 사랑하다가 보고 싶은 마음에 신라 땅으로 숨어들었다.
 
  서동은 머리를 깎고 신라의 궁궐이 있는 서라벌로 가서 아이들에게 마를 나누어 주었다. 그러자 아이들은 호감을 가지고 그를 따랐다.
 
  이처럼 서동은 서라벌의 아이들과 친해지자 한 편의 동요를 지어 아이들이 따라 부르도록 했다.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짝지어두고
  서동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네.’
 
  이러한 동요는 곧 서라벌 거리에서 거리로 아이들의 입을 통해 번져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궁궐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동요의 내용을 사실로 믿은 신하들은 선화공주의 잘못된 행동을 진평왕에게 고하고, 그 죄를 물어 멀리 귀양을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주를 사랑했지만 진평왕도 신하들의 한결같은 주장에 마음이 약해졌다.
 
  결국 선화공주는 어이없는 누명을 쓰고 멀리 귀양을 가게 되었다. 어머니인 왕비는 눈물을 흘리며 귀양 가는 딸에게 황금 한 말을 노자로 주었다.
 
  선화공주가 귀양길에 올랐을 때, 서동이 도중에 나타나 말고삐를 잡으며 험한 길을 모시고 가겠다고 자청했다. 사연을 모르는 선화공주는 어쩐지 그가 믿음직스러워 그 청을 들어주었다. (중략)  
  
  미륵사 건립 설화
 
금제사리봉안기가 발견된 익산 미륵사지 서탑. 사진=연합뉴스
  어느 날 무왕은 왕비와 함께 사자사로 행차했다. 용화산 아래 큰 연못가에 이르렀을 때 미륵부처가 물 위로 나타났다. 왕과 왕비는 수레를 멈추고 미륵부처를 향해 절을 올렸다.
 
  왕비가 문득 무엇인가를 깨닫고 무왕에게 말했다.
 
  “이곳에 큰 절을 세우는 것이 제 소원입니다.”
 
  무왕은 왕비의 소원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러고 나서 지명법사에게 가서 연못 메우는 일에 대하여 의논했다.
 
  지명법사는 곧 신통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무너뜨려 큰 연못을 메워 평평한 땅으로 만들어놓았다. 이곳에 세 개의 미륵불상을 모시고, 각각 불상마다 회전·탑·낭무를 세웠다. 그리고 이 절을 ‘미륵사(彌勒寺)’라고 했다.
 
  미륵사를 세울 때 진평왕은 신라에서 절을 잘 짓기로 유명한 기술자를 보내주었다고 한다.〉
  
  선화공주 어머니는 미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선화공주 설화’를 상세하게 실은 것은 그 안에서 역사의 미스터리를 찾아보기 위해서다. 이 기사에서 가장 궁금한 것은 선화공주의 존재에 관한 것이다. 먼저 ‘과연 선화공주는 진평왕과 왕후 마야부인(摩耶婦人) 사이에서 태어난 딸일까’ 하는 문제를 보자. 삼국시대 정사를 다룬 《삼국사기》에는 진평왕의 맏딸 덕만(德曼)과 둘째 딸 천명(天明)만 나올 뿐, 셋째 딸 선화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삼국유사》에는 선화가 진평왕의 셋째 공주라고 나온다.
 
  《삼국사기》에 선화가 나오지 않는 것은, 정실인 왕후 마야부인의 소생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마야부인은 선화공주를 궁궐에서 내보낼 때 황금 한 말을 노자로 주었다고 한다. 즉 선화가 자기 소생의 딸이 아니므로 ‘서동요’의 내용을 핑계로 궁궐에서 퇴출(退出)했다 할 수 있다.
 
  진평왕은 정실 외에 여러 여자를 두었다. 《화랑세기》에 보면 진평왕은 미실과의 사이에서 보화(寶華)를 낳았고, 또한 진흥왕(眞興王)과 미실 사이에서 태어난 난야(蘭若)에게서 우야(雨若)를 얻었다는 기록이 있다. 즉 진평왕은 정실인 마야부인 이외에 미실과 난야 등의 여자와 관계를 맺어 공주를 얻은 것이다. 따라서 선화 역시 진평왕이 마야부인이 아닌 다른 여자와 관계를 해서 낳은 딸일 가능성이 크다. 《삼국유사》에서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가 매우 아름답다고 한 것을 보면, 신라 당대의 절세미인인 미실의 딸일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서동요’를 지어 퍼뜨린 덕분에 서동(薯童), 즉 장은 서라벌 궁궐에서 쫓겨난 선화공주를 데리고 국경을 넘어 고향인 금마저(金馬渚·익산)로 갔다. 그때까지도 모친이 말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장은 자신이 ‘귀한 신분’이란 말만 들었을 뿐 백제 법왕(法王)의 아들이라는 것은 알지 못했다.
 
  장이 태어날 때만 해도 법왕 선(宣)은 왕손이긴 했지만 자신이 왕위를 계승하리라곤 생각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아버지 계(季)는 성왕(聖王)의 둘째 아들로, 성왕이 죽고 나서 장자 위덕왕(威德王)이 왕위를 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위덕왕에게는 아좌태자(阿佐太子)가 있었다. 장자(長子) 계승의 원칙대로라면 성왕의 둘째 아들 자식이므로 왕위와는 이미 거리가 먼 처지였다.
 
  위덕왕이 죽을 때 아좌태자는 일본에 가 있었다. 이때를 틈타 위덕왕의 동생인 계가 조카 아좌태자를 대신해 왕위에 올라 혜왕(惠王)이 되었다. 삼촌이 조카의 왕위를 가로챈 일종의 정권 탈취였다. 혜왕은 재위 1년 만에 죽었고, 그 아들 선이 왕위를 이어 법왕이 되었다. 법왕 역시 불과 5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법왕에게는 오래전 금마저에 갔다가 사통해서 장이란 아들이 있었다. 그리하여 졸지에 마를 캐던 시골뜨기 서동이 왕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미륵사지 서탑에서 나온 금제사리봉안기 기록대로라면, 장이 왕위에 오를 때 선화공주는 같이 백제의 궁궐로 가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백제 대신들 입장에서 볼 때 장의 어머니는 천출(賤出)이고, 선화는 신라의 공주라서 꺼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좌평 사택적덕은 위덕왕 이후 왕권(王權)이 추락하자 신권(臣權)을 강화해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는 무왕이 된 장으로 하여금 자신의 딸을 왕후로 삼도록 강권했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 백제에서 사택씨(沙宅氏)는 사탁씨(沙矺氏)로도 불렸으며, 중국식 단일 성으로 표기할 때는 사씨(沙氏)로 썼다. 《수서(隋書)》 백제조에는 백제의 유력한 8대 성씨가 나와 있는데, 사씨를 가장 먼저 기록했을 정도다. 사택씨의 부상(浮上)은 사비천도(泗沘遷都)와 연관성이 있었다. 사택씨 가문은 성왕의 사비천도를 도왔으며, 나아가 그들의 활동 근거지가 사비 지역이었기 때문에 당대 최고의 귀족가문으로 등장하였다.
  
  버림받은 여인 선화공주
 
  신권이 강했던 사택씨를 위시한 백제의 대신들은 적국인 신라 왕실의 피를 이어받은 선화공주를 왕후로 받아들이는 데 강력히 반대했을 것이다. 이전에 신라 법흥왕(法興王)이 태자 시절 백제에 갔다가 동성왕(東城王)의 딸 보과공주(寶果公主)를 몰래 사랑해 신라로 데려온 일이 있었다. 신라 왕실은 골품제(骨品制)가 있었으므로, 보과공주를 정비(正妃)로 삼지 못하고 소비(小妃)로 삼았다. 이러한 과거 두 나라 왕실 사이에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으므로, 무왕이 아무리 고집을 부려 선화공주를 왕후로 삼으려 해도 백제 대신들은 극구 반대했을 것이다.
 
  종래에는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義慈王)이 무왕과 선화공주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것이 정설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그러나 사택왕후의 등장으로 정설이 바뀔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의자왕은 사택왕후의 아들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무왕은 끝내 고향인 금마저에서 모친과 선화공주를 사비성으로 데려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곳에 당시 동양 최대 규모인 미륵사를 창건하고,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왕궁평성을 지어 제2의 도성으로 활용했을 것이다. 무왕은 왕궁평성에 자주 머물며 모친과 선화공주를 위로한 것으로 추측된다.
 
  좌평 사택적덕의 권세에 밀려 그의 딸 사택왕후와 정략결혼을 한 무왕은, 둘 사이에서 아들 의자를 낳지만 탐탁지 않았을 것이다. 무왕이 재위 33년에 의자를 태자에 책봉한 것을 보면 그런 유추가 가능하다. 재위 기간 내내 무왕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만약 무왕이 아들 의자를 일찌감치 태자로 책봉했다면, 외척 세력인 사택씨의 권력농단을 막아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무왕은 재위 40년 중 말년에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궁궐 근처 강가에 왕흥사(王興寺)를 지어 배를 타고 자주 내왕했다. 《삼국사기》 기록에 보면 재위 35년 이후에는 강기슭의 기암절벽을 바라보며 술을 마시고, 거문고를 타며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아예 정치를 태자인 의자에게 맡긴 채 방탕생활을 했다는 것이다.
 
 
  쌍릉의 주인은 누구?
 
  어쩌면 무왕이 말년을 방탕하게 지낸 것은 선화공주의 죽음과 관련 있을지도 모른다. 선화공주에게 따로 자식이 있었는지 불분명하지만, 아무튼 무왕은 그녀가 죽고 나서 사택왕후의 아들 의자를 태자로 삼았을 가능성이 크다. 미륵사를 창건하던 중 선화공주가 죽자, 이때부터 아들 의자태자를 앞세운 사택왕후는 실권을 거머쥐게 되었을 것이다.
 
  미륵사는 삼원삼탑(三院三塔)의 대사찰이었다. 가운데 중원 앞에 9층목탑을, 그 좌우측 전각 앞에 9층석탑을 세웠다. 서탑의 심주석 밑에 들어간 금제사리봉안기에 사택왕후가 시주자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때마침 그 무렵에 이르러 선화공주가 죽었기 때문일 것이다. 더구나 그때는 아들 의자태자와 함께 사택씨 세력들이 정치를 좌지우지하던 시절이다. 의자왕 때 사택지적(砂宅智積)이 대좌평 자리에 있었다는 기록을 보면, 사택씨의 권세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지금 익산에는 무왕과 선화공주의 능이라고 짐작되는 쌍릉이 있다. 이미 도굴된 바 있는, 이 능은 일제강점기 때인 1917년 일본학자 야쓰이 세이이쓰(谷井濟一)가 조사한 바 있다. 당시 이 능에서 수습한 치아를 국립전주박물관이 조사해 20~40세 여성의 것으로 발표하면서, 무덤 주인공에 대한 호기심이 증폭됐다. 그 여성이 바로 선화공주라는 추측이었다. 그로부터 100년 후인 2018년에 발굴조사가 재개되었다. 이 발굴조사가 완료되면 과연 쌍릉이 무왕과 선화공주의 능인지, 그 주인공이 밝혀질 것으로 보인다.

엄광용
1954년생.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단국대 대학원 사학과 박사과정(한국사 전공) 수료 / 1990년 《한국문학》에 중편소설 당선 문단 데뷔. 창작집 《전우치는 살아 있다》 외 다수. 2015년 장편역사소설 《사라진 금오신화》로 제11회 류주현문학상 수상
출처 | 월간조선 2019년 3월호
등록일 : 2019-03-08 09:38   |  수정일 : 2019-03-08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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