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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 이슈 |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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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 다큐멘터리]
국내 최대 ‘마약 사건’은 어떻게 적발됐나

‘악마의 백색가루’ 필로폰 밀거래 ‘삼각 커넥션’의 세계(대만-일본-한국)

⊙ 필로폰 유통 위해 대만 최대 폭력 조직 ‘죽련방’ 한국 침투
⊙ 대만은 1980년대부터 일본-한국에 이은 마약 커넥션의 主무대
⊙ ‘나사 제조기’에 숨겨진 ‘악마의 백색가루’ 112kg
⊙ 필로폰 ‘환각섹스’ 경험자의 고백: “그 순간만큼은 죽어도 여한이 없다”
⊙ 국정원을 비롯한 우리 수사 당국, 필로폰 ‘삼각고리’ 일망타진!

※ 이 글은 실제 사건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글의 전개 과정상 일부 픽션을 가미했음을 일러 둔다.

글 | 조성호 월간조선 기자

▲ 2018년 10월 15일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대 마약수사계는 나사 제조기 속에 숨긴 필로폰 90㎏ 분량의 필로폰을 압수했다. 300만명이 동시에 투약할 수 있는 양으로 시세로 약 3000억원에 달한다. 마약 사건 사상 최대 규모의 양이자 액수다. 사진=뉴시스
대만 타이베이의 한 고급 음식점에서 발레파킹 아르바이트를 하던 장진룽(張金龍·25·가명). 만성 신부전증으로 몸져 누운 홀아버지를 모시고 살아온 그에게 삶은 늘 고달프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본 손님들은 거의 다 외제차를 끌고 다니는 부유층이다. ‘나도 언제쯤 저들처럼 남부럽지 않게 살까?’ 25살 청년의 오랜 꿈이다.
 
  장진룽은 자신의 ‘운명’을 바꾸게 될 한 사람과 만난다. 그의 이름은 천쥔훙(陳俊宏·27·가명)으로 장진룽이 일하는 음식점의 단골이다. 천쥔훙은 평소 외제차 브랜드인 F사의 최고급 모델을 끌고 다녔다. 천쥔훙은 이 음식점을 방문할 때면 으레 장진룽에게 발레파킹을 부탁했다. 그가 자기 차 다루듯 정성스럽게 주차를 해 줄 뿐 아니라, 예의 바르고 성실했기 때문이다. 때론 장진룽에게 팁도 줬는데, 팁치곤 적지 않은 돈을 쥐여줬다.
 
 
  악마의 속삭임
 
  장진룽도 시원시원하고 호탕한 성격의 천쥔훙을 잘 따랐다. 그러면서도 ‘나이도 젊은 이 사람의 직업은 뭘까’ 하고 속으로 늘 궁금해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천쥔훙은 장진룽에게 솔깃한 제안 하나를 했다.
 
“진룽씨. 당신처럼 일을 성실하게 하면서 싹싹한 사람은 내 처음 봤단 말이야. 그래서 말인데…. 날 좀 도와줄 수 있겠어? 당신이라면 무리 없이 해낼 것 같아서 그래. 보상은 두둑하게 할게.”
 
  천쥔훙이 장씨에게 제안한 내용은 비교적 간단했다. 우선 한국으로 가 태국에서 도착하는 ‘화물’을 받아 현지 담당자에게 전달해 주면 그에 상응하는 수고비를 주겠다는 것이었다. 금액은 대략 20만 달러(한화로 약 2억2000만원). 장진룽은 보지도, 만져 보지도 못한 엄청난 금액에 눈이 번쩍 뜨였다. 게다가 비행기 삯은 물론 체류비 등 일체 부대비용까지 천쥔훙이 대는 조건이었다. 조금 석연치 않은 구석도 있어 그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길래….”
 
  천쥔훙은 망설임 없이 “아미타민”이라고 귀엣말로 속삭였다. ‘아미타민’은 필로폰을 뜻하는 용어로, 주로 대만에서 많이 쓰인다. 장진룽은 꺼림칙했지만 ‘편찮은 아버지를 위해 눈을 질끈 감자. 일만 성사되면 나도, 아버지도 조금은 편해질 게 아닌가’라고 자위했다. ‘악마의 속삭임’에 걸려든 것이다.
 
 
  죽련방의 실체
 
2007년 10월 4일 64세로 사망한 죽련방의 보스 천치리. 당시 대만 언론은 그의 장례식을 ‘세기의 장례식’이라며 참석한 사람만 30만명이 넘는 것으로 집계했다.
  천쥔훙은 대만의 폭력조직 죽련방(竹聯幇)의 일원이었다. 여기서 죽련방에 대해 잠시 알아보자.
 
  죽련방이 결성된 시점과 관련해서는 크게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1949년에 결성됐다는 설이다. 당시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은 국공(國共)내전에서 마오쩌둥(毛澤東)에 패배해 대만으로 밀려났다. 그때 중국 대륙에서 넘어온 외성인(外省人) 출신의 청년들 위주로 결성됐다는 설이다. 또 하나는 1955년 대만의 중화(中和)와 영화(永和) 두 지방에 살던 중학생들에 의해 조직되었다는 설이다. 원래 이 두 지역은 중국 대륙에서 건너온 국민당 군병(軍兵)들이 정착한 곳으로 당시에는 상당히 빈곤한 지역이었다. 결성 시점에 있어 6년의 시간 차만 존재할 뿐, 젊은 청년들이 죽련방을 결성했다는 게 중론이다. 장제스와 국민당 정권은 죽련방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죽련방이 ‘대륙 수복’과 ‘양안(兩岸) 통일’을 내세우며 국민당과 유사한 노선을 걸었던 점도 국민당이 이들과 손잡게 되는 이유 중 하나였다.
 
  1960년대 죽련방은 몸집을 키워 나가기 시작했다. 한번은 죽련방 조직원이 또 다른 폭력 조직인 사해방(四海幇)으로부터 피습당하는 일이 있었다. 죽련방 조직원들은 자신들에 비해 조직원 숫자도 많고 강성했던 사해방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했다. 이로 인해 대만 사회는 한때 양 조직 간의 싸움으로 몸살을 앓았다. 경찰은 죽련방보다 몸집이 큰 사해방 조직원들을 집중적으로 잡아들였다. 그 바람에 사해방은 세(勢)가 크게 위축됐다. 그 공백을 치고 들어선 이가 죽련방의 ‘거두’ 천치리(陳啓禮)다.
 
 
  1980년대부터 활발해진 ‘대만 루트’
 
  1966년경 죽련방은 자립방(自立幇), 천지방(天地幇) 등 10여 개의 조직들과 연맹을 결성, 대만 전체 조직폭력 세계를 평정한다. 1968년 4월에는 양밍산(阳明山)에서 대회를 소집하고 옛 청나라의 ‘팔기제(八旗制·누르하치가 만주를 통일하는 과정에서 활용한 군사조직)’를 본떠 조직을 일신했다. 이때를 기점으로 죽련방은 세력을 더욱 강화했고 대만 전 지역 및 해외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해 ‘천하제일방(天下第一幇)’이라는 호칭을 듣게 된다.
 
  2007년 10월, 죽련방의 총당주(보스)였던 천치리의 장례식 때는 국내외 조폭 1만여 명과 정·재계 인사들이 운집했다. 그만큼 그의 위세는 대단했다. 지금도 죽련방은 국제 마약 밀거래는 물론, 보이스피싱, 매춘, 도박 등 검은 세계와 관련한 이권(利權)에 대해선 거의 모두 손을 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덧붙이자면 대만은 1980년대부터 일본과 한국에 이은 마약 커넥션의 주무대로 등장했다. 1983년 1월 부산지검 공창희(孔昌喜) 검사는 마약 밀매단을 일망타진했다. 이들은 밀수, 밀조, 밀매를 전문적으로 하고 있었는데, 당시 검찰은 14명을 구속하고 17명을 지명수배했다. 이들은 대만에서 450kg 상당의 필로폰 원료인 에페드린을 들여와 223kg을 밀조, 국내외에 내다판 혐의를 받았다. 이들은 또 1982년 9월 한국 화물선 편으로 선원을 대만의 지룽시(基隆市)에 보내 중국인으로부터 원료 75kg을 국내로 밀반입한 혐의도 받았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대만이 필로폰 유통의 새 루트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도 대만은 필로폰 중개지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흉계
 
  다시 장진룽과 천쥔훙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사실 천쥔훙은 오랫동안 장진룽의 뒷조사를 해 왔었다. 그의 아버지가 지병(持病)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천쥔훙은 죽련방 조직원이 필로폰 운반에 직접 나설 경우 자칫 일을 그르칠 수 있다고 판단, 수사선상에 걸리지 않고 일을 해낼 사람을 물색하고 있었다. 성실하게 아르바이트만 하며 홀아버지를 봉양해 온 장진룽은 그런 점에 있어 적임자였다.
 
  장진룽이 ‘필로폰’ 운반에 가담키로 결정하자마자 천쥔훙은 부하들을 시켜 장진룽의 아버지를 한 종합병원에 입원시켰다. 장진룽의 아버지가 입원한 병실은 죽련방 조직원 두 명이 번갈아 가며 지켰다. 이는 두 사람의 계약 조건엔 없는 내용이었다. 장진룽은 천쥔훙이 베푸는 호의(好意)가 고마웠다.
 
  하지만 그것이 흉계(凶計)가 담긴 의도적인 행동이라는 걸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천쥔훙은 장진룽과 그의 아버지와의 접촉을 차단했다. 천쥔훙에게 장진룽은 한 배를 탄, 그러면서도 독 안의 든 쥐에 불과했다. 천쥔훙은 180도 돌변해 반협박조의 말을 스스럼없이 꺼냈다.
 
  “진룽, 이번 일(필로폰 운반)만 잘하면 넌 평생 우리 조직을 도우면서 편하게 살게 될 거야. 실패하면 너는 물론 네 아버지도 어떻게 될지 몰라. 네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네 인생이 바뀌는 거라고.”
 
  장진룽은 서서히 늪에 빠지는 자신을 발견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살려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이 ‘악마의 거래’를 어떻게든 성공시켜야만 했다. 장진룽은 눈을 질끈 감고 천쥔훙에게 이렇게 말했다.
 
  “시키시는 일, 반드시 완수하겠습니다.”
 
 
  생살여탈권이 죽련방의 손에
 
  장진룽이 한국으로 가기 전 천쥔훙은 그에게 한국에서 할 일들에 대해 지시를 내렸다. 대강 이런 요지였다.
 
  “7월경 태국에서 필로폰 112kg 정도가 부산항이란 곳으로 들어올 거야. 물론 물건(필로폰)은 나사 제조기에 위장된 채 들어오지. 너는 그걸 받기만 하면 돼.”
 
  나사 제조기란 말에 장진룽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평생 그런 장비를 본 적이 없었을뿐더러, 대략적으로나마 들여오는 필로폰의 양이 많다는 걸 직감했기 때문이다. 천쥔훙은 휴대폰 하나를 장진룽 앞에 던졌다. 천쥔훙은 “한국에 들어가면 ○○○-○○○○이란 번호로 너한테 전화가 갈 거야. 그놈하고 접선한 뒤 일을 처리하면 돼”라고 했다. 그러면서 한마디 덧붙였다. “중간에 새거나 딴짓 하면 그날로 네 아버지는… 알지?”
 
  같은 해 3월 말 장진룽은 한국에 입국했다. 비행기 안에서 장진룽은 상념에 빠졌다. 자신의 생사여탈권이 조직폭력배들의 손에 있다니…. 믿을 수 없지만, 엎질러진 물이었다. 세 시간여의 비행 끝에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한 장진룽은 천쥔훙이 시킨 대로 조심스레 휴대폰 전원을 켰다. 천쥔훙은 “그놈이 한국어에 유창하니 그가 하라는 대로만 하면 된다”며 이미 지시를 해 둔 터였다. 도착한 지 1시간쯤 흐른 뒤 전화벨이 울려 조심스레 수화기를 귀에 갖다댔다.
 
  “왔냐?”
 
  대뜸 반말로 말하는 게 거슬리긴 했지만 “네”라고 공손히 답했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사내의 목소리는 거칠었고, 무례하기 그지없었다.
 
 
  신고식
 
  키가 2미터쯤 돼 보이는 우락부락한 근육질 몸을 가진 사내가 눈앞에 나타났다. 죽련방 조직원 우원슝(吳文雄·27·가명)이란 자였다. 우원슝은 장진룽의 기를 죽이려는 듯 엄포를 놓기 시작했다. 요지는 ‘두목과 자기 말을 안 들으면 자칫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두목은 천쥔훙을 말하는 것 같았다. 대만에서 자동차 정비 일을 오래해 기계 다루는 솜씨가 있다고 자랑도 했다.
 
  우원슝은 기분 나쁜 미소를 보이며 “한국에 온 기념으로 일단 한잔하자”고 제안했다. 장진룽이 서울에 온 첫날 밤, 둘은 모 호텔에 있는 바(bar)에 갔다. 우원슝은 바 구석에 있는 룸으로 장진룽을 데려갔다. 그 자리에서 그는 “아미타민 해 봤냐?”며 장진룽에게 물었다. 장진룽이 해 본 적이 없다고 하자 우원슝은 키득대며 양주를 가득 담은 잔에 미량의 ‘백색가루’를 넣어 건넸다. 장진룽은 “이걸 하라는 얘긴 없었어요”라며 저항했다. 우원슝은 “기분이 좋아질 거야”라며 그 엄청난 체구로 장진룽의 상체를 제압한 뒤 억지로 들이마시게 했다. 서서히 몽롱해지는 장진룽. ‘이게 술기운 탓인가, 아니면 그 약 때문인가’ 장진룽은 도무지 분간을 할 수 없었다. 이윽고 몸이 붕 뜨며 찰랑찰랑한 바다 위에 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대각선에 앉은 우원슝의 모습이 점차 희미해져 갔다.
 
 
  日軍이 사용한 ‘악마의 백색가루’
 
‘필로폰의 아버지’라고 평가 받는 나가이 나가요시(長井長義).
  이제 죽련방 조직이 그토록 집착하는 ‘백색가루’에 대해 알아볼 차례다. 흔히 필로폰이라고 부르는 이 약물은 학명(學名)으로는 메스암페타민(Meth-Amphetamine)이다. 메스암페타민의 기원은 189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메스암페타민은 단일제제가 아닌 합성물질이다. 메스암페타민을 최초로 합성한 이는 일본 도쿄대 의학부 나가이 나가요시(長井長義·1845~1929) 교수다. 한방에서 천식약으로 사용하던 마황(麻黃)으로부터 에페드린을 추출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 메스암페타민은 천식약으로서의 효과보다 각성제로서의 효과가 훨씬 뛰어나다는 게 밝혀졌다. 이후 세계적인 인기를 얻게 돼 발작성 수면증과 파킨슨병 치료제로도 널리 쓰였다.
 
  1938년 독일 과학자들은 메스암페타민의 각성 작용을 활용해 ‘펠지핀’이란 약품을 개발했다. 펠지핀은 주로 군인들이 사용했다. 그런데 이로 인한 중독자가 생겨났다. 독일 정부는 그 부작용을 막기 위해 1941년에야 규제법을 만들었다.
 
  일본에서도 메스암페타민은 전쟁 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1940년 대일본제약(大日本製藥)이 ‘히로뽕’이란 상품명으로 메스암페타민을 시판했다. 이때부터 ‘히로뽕’이 메스암페타민의 대명사가 됐다. 일본에선 히로뽕을 한때 각성제라고 불렀다. 그 바람에 한국에서 잠 안 오게 하는 약을 각성제라고 착각(?)해 히로뽕과 혼선이 빚어지기도 했다. 한국의 각성제는 합법적으로 제조된 비중독성 약품이다.
 
  태평양 전쟁 중 일본 군부는 히로뽕을 대량 생산, 이른바 돌격정(突擊錠), 묘목정(猫目錠) 등의 애칭으로 군인들에게 투약했다. 돌격정은 가미카제(神風) 특공대원과 적전(敵前) 상륙을 앞둔 병사들에게 지급됐다. 군인들의 두려움을 없애기 위한 목적이었다. 묘목정은 야간작업, 작전, 보초, 통신 종사자, 군수 공장 종사원들에게 공급됐다. 글자 그대로 고양이 눈처럼 두 눈을 부릅뜨고 밤일을 수행할 수 있도록 고안한 것이다.
 
 
  한때 민간인 상용자 수 200만명에 달해
 
경찰이 압수한 필로폰의 원료인 마황건초(麻黃乾草). 사진=부산지방경찰청
  여기까지는 군대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쓰였기 때문에, 민간인들이 이 문제의 약물을 접촉할 기회는 없었다. 하지만 일본이 패전한 뒤 군대가 보유하고 있던 방대한 양의 ‘히로뽕’이 시중에 유통됐다. 패전의 허탈감에 빠진 일본인들에게 히로뽕은 유일한 탈출구였는지도 모른다. 작가, 예능인들이 히로뽕을 탐닉했고 제대 군인 심지어 청소년들도 히로뽕을 접하게 됐다. 수요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자 공급을 늘릴 수밖에 없었다. 군대에서 제조 기술을 배웠던 사람들이 히로뽕 제조에 나섰다. 당시에는 규제가 없을 때였으므로 밀조(密造)가 아니라 공공연히 만들고 팔았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일본 정부는 1951년 ‘각성제취체법(覺醒劑取締法)’을 제정, 단속에 나섰지만, 이미 때를 놓쳤다. 1954년 일본 전역에서 히로뽕 등 각성제 사용과 관련해 체포된 사람이 5만5000명에 달했다. 이해에 일본의 히로뽕 상용자 수는 100만~200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됐다. 이 중 약 20만명이 정신이상을 겪은 것으로 조사됐다. 1956년부터 히로뽕 사범은 격감하기 시작, 검거자 수가 1000명 선을 밑돌았다. 그러나 ‘악마의 백색가루’가 사라진 건 아니었다.
 
  필로폰은 헤로인·모르핀과 달리 투약이나 복용을 하게 되면 중추신경의 기능을 촉진시킨다. 헤로인이나 모르핀은 진정제 작용을 해 인간을 나른하게 만든다. 정신적, 신체적 기능이 급격히 향상된다는 의미다. 신체의 기능이 갑자기 풀가동되니 휴식을 취할 필요가 없게 된다. 그래서 잠이 오지 않고, 그에 따른 피곤함 등이 일거에 사라진다. 순간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이내 힘이 펄펄 솟는다. 과거 한 필로폰 투약자는 “주사를 맞은 순간 찌르르 온몸에 전류가 흐르는 듯 머리카락이 거꾸로 서는 것 같은 기분… 갑자기 주변이 선명하게 보이고 구름 위로 걷는 것 같은 기분…”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실제로 필로폰 주사를 맞으면 일시적으로 힘이 세진다고 한다. 필로폰 중독자를 검거한 경험이 있는 경찰 종사자들에 따르면, 중독자들의 저항의 세기는 엄청나다고 한다. 힘도 힘이지만, 맞아도 고통을 안 느끼는지 집요하게 저항한다고 한다. 체력뿐 아니다. 시력, 청력, 심지어 성적(性的)인 기능까지 월등히 좋아지는 느낌을 받는다.
 
 
  필로폰의 쾌감에 性的 쾌감이 더해지면…
 
  필로폰을 투약한 후 ‘광란의 섹스파티’를 벌였다는 보도는 이제 새삼스러운 게 아니다. ‘환각섹스’는 사람을 완전히 뒤바꿔 놓는다. 1980년대 부산에서 필로폰 투약자들을 검거한 한 형사는 이런 말을 남긴 적이 있다.
 
  “한 여성이 여인숙 방에서 필로폰을 투약한 채 널브러져 있었다. 눈이 반쯤 풀린 그 여성이 나를 보자마자 한 첫마디가 ‘아저씨 나 좀 안아 주세요. 저랑 한 번만 해요’였다. 섬뜩한 광경이었다.”
 
  한 번 경험하면 필로폰이 주는 쾌감에 성적 쾌감이 더해져 엄청난 시너지를 낸다는 것이다. 환각섹스 경험자 A씨(여성)는 한 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말이 있다. 그 순간이 그렇다. 매번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결심하지만… 한 번 맛을 들이면 완전히 중독된다”고 고백했다.
 
  통상 0.02g을 투여하면 다섯 시간쯤 약효가 지속된다고 한다. 그때까지는 세상 부러울 것 없는 ‘수퍼맨’ 그 자체다. 하지만 약효가 떨어질 때쯤 몰려오는 불쾌감, 초조함, 불안함은 이루 형언할 수 없다. 이때부터 필로폰 사용자는 이 물질이 갖고 있는 양가성(兩價性)을 깨닫는다. 필로폰이 순간적으로 기분을 좋게 하고 힘이 나게 해 주지만, 그 효능이 다하면 그때부터는 극심한 우울감과 함께 또다시 그 물질을 갈급하게 된다는 것을. 그 늪을 빠져나오지 못하면 결국 중독자 신세가 된다. 보통 필로폰 만성 중독은 0.01〜0.02g의 필로폰을 두 달 이상 지속적으로 투약할 때 발생한다.
 
 
  필로폰 맞이할 준비
 
부산항 7부두에 설치된 차량이동식 컨테이너 검색기를 컨테이너 차량이 통과하고 있다. 사진=조선DB
  장진룽은 호텔 방에서 깨어났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면서 가슴이 답답해 왔다. 어제의 일을 생각하니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대만에 두고 온 아버지 생각도 났다. 감상에 잠겨 있는 것도 잠시, 우원슝이 전화를 걸어 왔다.
 
  “빨리 나와라. 오늘부터 일을 시작해야 한다.”
 
  천쥔훙이 두 사람에게 지시한 것은 우선 필로폰을 보관할 장소 등을 물색하는 일이었다. 우원슝은 장진룽이 천쥔훙으로부터 받아 온 현금과 대만에서 송금돼 온 돈으로 원룸과 창고를 임차했다. 서울 영등포구에는 두 사람이 기거할 숙소를, 필로폰을 숨길 용도로 서울 서대문구에 원룸을 한 채 구했다. 천쥔훙의 지시에 따라 나사 제조기를 절단하기 위한 별도의 장소를 마련하기 위해 경기도 화성시에 창고 하나도 빌렸다. 이미 우원슝이 적당한 곳을 알아둔 터라 계약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하루 종일 우원슝을 따라다니느라 지칠 대로 지친 장진룽은 덜컥 가슴이 답답해 옴을 느꼈다. 식은땀이 나고, 무언가 머리를 짓누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 모습을 우원슝이 보고 한마디 했다.
 
  “힘드냐? 하나 더 줄까?”
 
  장진룽은 내면 깊숙한 곳에서 ‘어서 빨리 약을 넣어 달라’고 갈망하고 있단 걸 직감했다. 우원슝도 그걸 눈치채고 있는 듯했다. 장진룽은 식은땀을 흘리며 우원슝에게 “형님은 안 하세요?”라고 물었다. 우원슝이 필로폰을 하는지 안 하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우원슝은 “나는 일만 하는 사람이야. 어제 내가 그걸 준 건 널 시험해 보려고 한 건데… 역시… 효과가 기막히네”라고 했다. 장진룽만 꼼짝없이 당한 꼴이었다. 다행히 이성(理性)의 끈이 살아 있었는지, 하루 정도 더 지나자 잠잠해졌다. 우원슝에 따르면, 극히 적은 양을 주사기를 통한 투여가 아닌 복용을 했기 때문에 극복할 수 있는 거라고 했다.
 
 
  ‘이나가와카이’
 
  태국으로부터 ‘물건’이 넘어올 7월이 다가왔다. 그즈음 우원슝은 휴대폰 메신저로 누군가와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우원슝은 “일본의 거래처”라고 했다. 태국으로부터 들어오는 필로폰을 유통할 판매처인 듯했다. 우원슝은 “이나가와카이라고 들어봤냐?”고 장진룽에게 물었다. 생소한 이름이었다.
 
  이나가와카이(稻川會). 1949년 이나가와 가쿠지(稻川角二·1914~2007)가 시즈오카현(静岡県)의 아타미(熱海)를 근거지로 결성한 일본 3대 야쿠자 집단 중 하나다. 미(美) 군정 시기 아타미를 비롯한 요코하마(横浜) 인근은 도쿄의 외항(外港) 기능을 하고 있었다. 이곳엔 한국 및 중국계 사람들이 많아 현지 일본인들과의 다툼이 잦았다. 이나가와카이는 당시 해당 지역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쓰루오카 마사지로(鶴岡政次郞)와 협력해 한국과 중국계를 몰아내고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이나가와 가쿠지는 젊은 시절 도박업에 몸담고 있어 이나가와카이는 초반엔 카지노로 돈을 끌어모았다. 그러다가 마약, 섹스 산업에까지 손을 대 막대한 수익을 걷어들였고, 이후 조직이 비약적으로 커졌다. 이나가와카이는 야쿠자 조직 중 최초로 해외에 진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이나가와카이의 보스는 한국계인 신병규(일본명 기요다 지로·淸田次郞)다. 신병규가 보스가 된 이후 이나가와카이는 사회공헌 활동도 활발히 벌이고 있다. 2011년 동(東)일본 대지진 당시 100톤에 가까운 라면, 식료품, 음료 등을 이재민들에게 전달해 화제가 되기도 있다.
 
 
  ‘이나가와카이’의 밀거래 솜씨
 
  우리 정보 당국은 이나가와카이가 마약 밀매에 손을 대고 있다는 사실을 오래 전부터 파악해 오고 있었다. 2007년 11월, 부산지검은 국내에 중국산 필로폰을 들여와 부산 호텔 등지에서 순도를 높이는 방식으로 재가공한 뒤, 일본으로 밀반출을 시도한 ‘이나가와카이’의 중간보스를 구속한 바 있다. 당시 적발된 필로폰은 680g(당시 시가로 22억원어치)이었다. 해외 폭력조직원이 마약 밀매 혐의로 적발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2017년 10월, 국가정보원이 국내에서 필로폰이 밀거래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국정원 요원들과 검찰 수사관, 세관 직원들은 서울 역삼역 인근에서 대만인 서모씨 재일교포 이모씨, 공범 나모씨를 포착했다. 이들은 인근에 주차된 차량에서 필로폰을 거래했다. 서씨는 배낭에 든 필로폰을 이씨에게 건넸다. 이전에도 필로폰을 비슷한 방식으로 사고판 경험이 있어 이들의 거래는 불과 몇 분 사이에 금방 끝났다.
 
  서울중앙지검 강력부(부장 박재억)는 서씨와 이씨 등 네 명을 마약류관리법 위반으로 구속 기소했다. 검찰이 이들로부터 압수한 필로폰의 양은 8.64kg이었는데, 1회 투여량을 0.03g으로 잡았을 때 약 29만명이 동시에 투약할 수 있는 양이었다. 수사 결과, 필로폰을 사들인 이씨 역시 ‘이나가와카이’ 조직원이었다. 이나가와카이가 대만인을 통해 한국을 무대로 필로폰 밀거래를 벌이자, 국정원은 각종 휴민트를 총동원했다. 그 결과, 천쥔훙이 장진룽과 우원슝을 통해 원격으로 조종하는 밀거래가 덜미를 잡히게 된다.
 

 
  사소하지만 치명적인 실수
 
‘악마의 백색가루’ 필로폰(속칭 히로뽕). 사진=뉴시스
  장진룽과 우원슝은 부산항 세관(稅關)을 통해 나사 제조기를 수령하는 데 성공했다. 이들은 세관 당국의 눈을 피하기 위해 ‘입항 전 수입신고제도’를 악용했다. 이 제도는 산업 활성화 차원에서 세관의 물품 검사를 면제해 주는 제도이다. 나사 제조기의 경우 컨테이너에 실려 들여오는데, 그 안에 밀수품 등을 은닉하면 적발이 쉽지 않다. 게다가 나사 제조기 안에 필로폰을 숨긴 터라 당국의 감시망을 연달아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두 사람은 한 가지 실수를 했다. 통관 허가에 따른 서류를 모두 장진룽의 명의로 작성했는데, 서명 과정에서 우원슝이 자신의 실명을 기재한 것이다. 급하게 통관 절차를 진행하려다가 저지른 사소한 실수였다. 우원슝은 ‘역삼역 밀거래’ 당시 간접적으로 연관이 돼 있어 수사당국 감시망에 걸려 있는 상태였다. 세관 당국은 서류 작성자와 서명자가 다르다는 걸 알고 이를 국정원에 알렸다. ‘태국에서 들어온 화물을 대만인이 수령했는데 서류가 의심스럽다’는 보고를 받은 국정원은 마약 밀거래가 의심되는 정황이라고 판단, 수사망을 좁혀 나가기 시작했다.
 
  이를 까맣게 모르는 두 사람은 5톤 트럭에 나사 제조기를 옮겨 싣고 창고가 있는 경기도 화성시로 향했다. 우원슝은 미리 준비해 둔 철판 공작용 기계로 정밀하게 나사 제조기의 한쪽 면을 도려내기 시작했다. 요란한 기계음과 함께 불꽃이 튀며 직사각형 형태로 잘려 나갔다. 이윽고 나사 제조기 내부가 보이기 시작했다. 우원슝을 보조하던 장진룽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TV에서나 봐 왔던 필로폰 주머니를 두 눈으로 직접 본 것이다. 한 덩어리의 크기가 대략 가로 세로 20cm×40cm였으며, 족히 100여 포대는 돼 보였다. 확인 결과 1kg씩 모두 112포대였다. 장진룽은 우원슝에게 “이게 가격으로 얼마나 될까요”라고 신기한 듯 물었다.
 
  “얼마냐고? 상상 그 이상이다. 3억 달러라고 하면 믿겠냐?”
 
  3억 달러. 이 백색가루 100여 포대의 가격이 3억 달러(한화로 3400억원)란다. 기가 막히는 액수였다. 장진룽이 멍하니 서 있자 우원슝은 소리쳤다. “빨리 차에 옮겨 실어!”
 
  우원슝은 휴대폰 메신저로 연락을 취하기 시작했다. 지난번에 말한 이나가와카이 조직원과 접선을 하는 것이었다. 접선 장소는 대전 유성구 모 호텔 앞이었다. 양측은 서로의 이름을 모른다. 다만 메신저(메신저상의 이름도 가명)를 통해 장소를 정하고, 야간에 필로폰을 전달하는 방식이었다. 이런 식으로 장진룽과 우원슝은 이나가와카이 조직원들에게 모두 세 차례에 걸쳐 필로폰 22kg을 전달했다. 이와가나카이 조직원들은 전달 받은 필로폰을 대구의 조직폭력배 두목 윤모씨에게 11억원을 주고 판매했다. 이때 돈은 현장에서 상대가 확인하는 과정을 거쳐 대포통장의 계좌로 입금된다. 제3자 명의의 대포통장 계좌번호를 알려주고 제3자의 이름으로 입금하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결국 계좌에는 이들과는 무관한 제3자의 이름만 남게 된다. 최근엔 암호화폐를 이용한 마약 거래도 눈에 띄게 증가하는 추세이다.
 
 
  덜미를 잡히다
 
  국정원과 경찰은 우원슝의 뒤를 쫓았다. 수사 당국은 우원슝이 잘 나타나는 바와 식당 등을 탐문 수사했고, 그 과정에서 젊은 남성 한 명이 우원슝을 따라다닌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당국이 두 사람에 대한 포위망을 좁혀 나가던 중, 우원슝은 태국의 필로폰 중개자로부터 메신저로 한 통의 연락을 받았다. ‘한국 정부가 눈치를 챈 듯하니 조심하라’는 요지였다. ‘완전범죄’라고 여겼던 우원슝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는 장진룽에게 “당분간 떨어져 있어야 한다. 내가 연락할 때까지는 절대 바깥을 돌아다니지 말라”고 지시했다.
 
  대만에 있던 천쥔훙도 심상치 않은 한국의 동향(動向)을 보고받고 긴장했다. 남은 필로폰 90kg을 제외한 모든 증거를 인멸하라는 지시를 우원슝에게 내렸다. 그리고 기회가 닿으면 장진룽은 귀국시키라고도 했다. 천쥔훙은 한국 사정에 밝은 우원슝이 어떤 식으로든 도피할 수 있을 거라 판단했지만, 장진룽은 달랐다. 만에 하나 장진룽이 검거돼 발설이라도 할 경우, 일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우원슝에게 장진룽을 살해하라고 지시할까 했으나, 그렇게 되면 또 다른 ‘범죄 꼬리표’를 남길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천쥔훙의 바람과는 달리 우원슝이 먼저 검거됐다. 우원슝을 추궁한 끝에 서울 영등포구 숙소에 숨어 있는 장진룽을 찾아냈다. 25살 청년의 꿈은 이렇게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경찰 조사에서 장진룽은 입을 굳게 다문 반면, 우원슝은 범행 일체를 자백했다. 수사는 급물살을 탔다. 경찰은 서울 서대문구 원룸에서 남은 필로폰 전량을 압수했다. 경찰은 달아난 이나가와카이 조직원 2명을 인터폴에 협조해 적색수배 명령을 내리도록 했다. 그리고 필로폰을 구매한 윤모씨와 운반책 우모씨도 검거했다.
 
  이 사건과 관련해 국정원 관계자는 “그간 국내에서 적발된 마약 밀수 범죄는 대부분 개인이나 소규모 그룹이 밀반입해 유통하는 수준에 그쳤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최근 들어 국제 마약조직이 국내에 침투해 대량의 필로폰 유통을 시도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며 “앞으로도 유관국 정보·수사기관과의 긴밀한 공조를 통해 마약 유통경로를 면밀히 추적, 조직원들을 색출하는 등 철저히 차단해 나갈 방침”이라고 밝혔다. 한편 이 사건은 그간 수사기관과 관세 당국이 적발한, 사상 최대 규모의 필로폰 밀수라는 기록을 남겼다.⊙
등록일 : 2019-01-04 10:08   |  수정일 : 2019-01-04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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