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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베트남이 되려면

글 | 이장훈 국제문제애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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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난 4월 27일 경기 파주시 판문점 도보다리 위에서 대화하고 있다. 당시 김정은 위원장이 문 대통령에게 베트남식 개혁을 추진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고 알려졌다. photo 뉴시스
베트남 수도 하노이에서 동북쪽으로 60㎞ 떨어진 박장성 랑장현 탄탄리에는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던 북한군의 전사자 위령탑과 14구의 시신이 묻힌 묘지가 있었다. 이곳에 북한군 묘지가 있다는 사실은 2000년 3월 백남순 전 북한 외무상이 방문하면서 처음으로 확인됐다. 북한의 베트남전쟁 참전은 1965년 5월 최고인민회의 제3기 4차 회의와 1966년 10월 노동당 대표자회의에서 공식 결정됐다. 북한은 1966년부터 1970년까지 전투기 조종사와 정비사 200여명, 심리전 요원 100여명, 땅굴 전문요원(공병부대)을 파병했다. 북한군 조종사들은 미군 전투기와 공중전까지 벌였으며 심리전 요원들은 한국군 장병들을 회유하는 방송을 했다. 공병부대는 북베트남(베트남이 통일되기 이전의 명칭·월맹으로도 불림) 당 중앙위원회와 국방부가 들어갈 갱도도 건설했다. 북한은 또 북베트남에 무기 10만정, 대포, 차량, 군복 100만벌, 현금(5000만달러) 등을 무상으로 지원했다.
   
   
   베트남전 참전 세 번째 수교국
   
   북한은 베트남전쟁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관심을 보여왔다. 당시 노동신문은 6면이 발행됐는데, 매일 한 면이 베트남전쟁에 대한 소식들로 채워졌다. 그 이유는 북한이 미국과 싸우는 공산주의 진영의 대표 격인 북베트남을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김일성 주석은 “베트남전쟁은 독립과 자주권을 수호하기 위한 투쟁만이 아니라 전체 사회주의 진영의 안정과 아시아와 세계평화를 지키기 위한 투쟁”이라고 강조했다. 북한군의 유해는 2002년 9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지시에 따라 북한으로 옮겨져 ‘조선인민군 영웅 열사묘’에 묻혔다.
   
   북한은 베트남과는 과거부터 긴밀한 협력 관계를 맺어온 혈맹(血盟)이었다. 북한은 1950년 1월 31일 베트남과 수교했다. 베트남은 옛 소련, 중국에 이어 북한과 세 번째 국교를 수립한 국가이다. 호찌민(胡志明·1890~1969) 주석은 1957년 7월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김일성도 1958년 11월과 1964년 10월 등 베트남을 두 차례나 방문했다. 북한과 베트남은 이처럼 공산주의 형제국으로서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하지만 1979년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에 대한 북한의 비판, 1992년 한국과 베트남의 수교 등으로 북한과 베트남의 관계가 소원해지기도 했다.
   
   북한과 베트남은 2002년 5월 쩐 득 르엉 국가주석의 평양 방문으로 다시 관계를 회복했다. 당시 쩐 득 르엉 주석의 북한 방문은 베트남 국가원수로는 45년 만이었다. 이후 양측은 우호 협력 관계를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 특히 베트남의 사실상 최고권력자인 농 득 마인 공산당 서기장이 2007년 10월 16일 평양을 공식 방문했는데 당시 김정일은 순안공항에 나가 직접 영접하기도 했다. 김정일의 당시 공항 영접은 장쩌민·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김대중 전 대통령에 이어 5번째였다.
   
   
   김정일, 베트남 시찰단 파견
   
   당시 김정일은 농 득 마인 서기장에게 “베트남의 도이머이 정책의 성취를 높이 평가한다”면서 “베트남의 귀중한 경험을 거울로 삼기 위해 초청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밝혔다. 김정일은 실제로 베트남을 방문하지는 않았지만 같은 해 10월 26일부터 4박5일 일정으로 김영일 총리를 단장으로 하는 대표단을 베트남에 파견했다. 북한 대표단은 베트남 기획투자부를 방문해 경제 현황과 발전 전략 및 외국 자본 투자 유치 등에 대해 토론을 벌였고, 하이퐁항과 석탄단지 하뚜 및 하노이 농업채소연구소 등을 시찰하며 각 분야의 성과를 직접 확인했다. 북한 대표단은 또 유명한 관광지인 하롱베이도 둘러봤다. 당시 북한은 베트남처럼 경제발전 계획을 추진할 의사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김정일이 핵 개발에 박차를 가하기로 결정하면서 북한에서 베트남은 더 이상 언급되지 않았고 ‘자력갱생’을 강조하는 구호만이 나왔다.
   
   김정은이 아버지가 버렸던 ‘베트남 카드’를 다시 집어들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김정은은 지난 4월 27일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 도중 도보다리 대화에서 문재인 대통령에게 베트남식 개혁을 추진하고 싶다는 뜻을 직접 밝혔다고 한다. 청와대 관리들은 “두 정상이 베트남 이야기를 많이 했다”면서 “김 국무위원장이 베트남식 모델로 가고 싶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김 위원장과 문 대통령 모두 도보다리 대화 내용을 지금까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고 있기 때문에 ‘베트남 모델’ 언급에 대한 진위 여부를 확실하게 알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 대통령이 지난 3월 베트남을 국빈 방문했다는 것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문 대통령이 김 위원장에게 베트남식 개혁을 적극 권유했을 가능성도 있다.
   
   
   김일성종합대서 베트남 경제 연구
   
   아무튼 김정은이 핵무기를 포기하고 베트남식 개혁을 추진한다면 일단 바람직하다고 볼 수는 있다. 김정은이 집권한 이후인 2012년 8월 북한의 헌법상 국가원수인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은 베트남을 방문해 응웬 떤 중 총리와의 회담에서 “베트남 경제의 좋은 모델을 공유하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베트남은 당시 김영남의 방문을 계기로 수해를 입은 북한에 쌀 5000t을 지원했다. 이후에도 리수용 외무상(2014년 8월), 최태복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2016년 6월) 등 북한 고위급 인사들이 베트남을 방문했다. 김정은이 그동안 대내외적으로 베트남 모델을 언급한 적은 없다. 하지만 북한은 베트남의 경제정책을 김일성종합대학 등에서 연구해왔다. 외국 언론들도 북한이 베트남 모델을 추진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해왔다. 독일의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은 “북한이 원하는 개방의 모델은 중국식이 아니라 베트남식”이라면서 “북한은 외국인 투자 유치를 위해 경제특구를 신설하는 중국식 모델이 아니라 외국의 특정 기업을 선정해 자국에 투자하도록 하는 베트남식 개방을 선호한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마커스 놀랜드 미국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 부소장은 “베트남은 경제개혁 문제에서 북한이 참고할 만한 유일한 나라”라고 밝혔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김정은과의 북·미 정상회담에서 북한 비핵화에 대한 반대급부로 미국의 민간자본 투자 허용 등 경제적 보상을 제의할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을 두 차례 만난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북한이 핵을 포기하면 미국은 대북제재를 풀고 민간 자본을 통해 북한의 전력망 확충, 인프라 건설, 농업 발전을 도울 수 있다”고 밝혔다. 김정은으로선 앞으로 권력과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북한 주민들의 반발을 무마할 수 있는 경제발전 계획을 적극 추진할 수밖에 없다. 김정은은 이미 지난 4월 20일 열린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3차 전원회의에서 핵·경제 병진 노선을 접고 앞으로 사회주의 경제 건설에 총력을 기울이겠다고 밝혔다. 김정은이 핵을 포기하고 경제 건설에 적극 나선다면 그 방향은 베트남 모델이 될 가능성이 높다.
   
   
   베트남이 도이머이 추진하기까지
   
   베트남은 그동안 도이머이 정책을 통해 동남아 지역에서 ‘가장 잘나가는 국가’로 변신해왔다. 개혁·개방을 의미하는 도이머이는 베트남 말로 ‘바꾼다’는 ‘도이(Doi)’와 ‘새로운’이라는 ‘머이(Moi)’를 합친 말이다 ‘새롭게 한다’ 또는 ‘쇄신(刷新)’을 뜻한다. 물론 베트남 공산정권이 애초부터 도이머이 정책을 추진한 것은 아니다. 1975년 통일 이후 베트남 공산정권은 대규모 숙청을 벌이는 등 철저하게 체제를 강화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남베트남(월남) 출신의 하사관 이상 군인 수백만 명을 집단농장에 강제수용하고 공산주의에 순응하도록 사상개조 교육을 시켰다. 이 과정에서 최대 200만명의 희생자가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이 때문에 배를 타고 베트남을 탈출하는 이른바 ‘보트피플’이 양산됐다. 1976년부터 1992년 말까지 동남아 지역으로 탈출한 베트남 난민의 수는 총 79만명이나 됐다.
   
   이처럼 강압적인 통치 때문에 베트남은 통일 이후 10년간 마이너스 성장률을 보이는 등 극심한 경제난을 겪었다. 특히 베트남 공산정권은 시장경제 체제를 완전히 부정했고 모든 농경지를 국가 소유인 집단농장으로 만들었다. 이 때문에 농촌은 완전히 파괴됐고 쌀 수출국이었던 베트남은 쌀 수입국으로 전락했다. 이 결과 1986년 베트남의 1인당 GDP는 84달러로 805달러였던 북한의 10분의 1 수준밖에 되지 않았다. 베트남 공산정권은 자칫하면 경제난에 따른 민심이반으로 권력을 잃을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결국 베트남 공산당은 1986년 12월 제6차 전당대회에서 도이머이 정책을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회의에서 응웬 반 링 서기장은 인플레가 587.2%라는 사실을 공식 인정하고 공산주의의 기본 골격은 유지하되 시장경제 체제를 추진할 것을 선언했다. 도이머이 정책의 가장 혁명적인 조치는 농업 개혁이다. 베트남 공산당은 토지의 소유권은 국가가 갖되 농민 개개인에게 장기사용권을 부여함으로써 생산력 향상을 유도하는 토지법을 제정했다. 이에 따라 베트남은 다시 쌀 수출국이 됐다. 특히 외국인투자법을 제정해 외국 자본을 대거 유치했다.
   
▲ 1964년 10월 베트남의 호찌민 주석이 하노이를 방문한 북한의 김일성과 대화하고 있다. photo 베트남 공산당

   
   미국과의 수교로 도이머이에 날개
   
   도이머이 정책이 날개를 달게 된 것은 1995년 미국과의 수교 때문이었다. 말 그대로 반미(反美)에서 친미(親美)로 정책을 바꿨다. 언제 전쟁이 날지 모르는 베트남에 투자를 꺼려했던 우리나라를 비롯해 대만·싱가포르·홍콩 등 아시아 국가들은 베트남이 미국과 국교를 정상화하자 앞다투어 진출했다. 베트남은 1998년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가입과 2000년 미국과의 무역협정 체결, 2006년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등 대외개방 조치들을 계속 추진해나갔다. 이후 베트남의 GDP 성장률은 매년 6~7%를 기록하고 있고 전체 1인당 GDP는 2300달러에 달하고 있다. 특히 베트남은 글로벌 기업들의 대규모 투자로 중국에 이어 ‘세계의 공장’이 될 것이란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베트남의 도이머이 정책은 경제특구를 일정 지역에 지정해 자율성을 부여한 중국과 달리 공산당과 정부가 직접 외국 기업과 투자자를 선정해왔다는 점이 특징이다. 그만큼 당과 정부의 힘이 강할 수밖에 없다. 북한은 철저한 노동당 중심 체제인 만큼 김정은으로선 노동당을 앞세워 철권통치를 유지하면서 경제개발 계획을 추진할 가능성이 있다. 할아버지나 아버지에 비해 카리스마가 약한 김정은은 노동당이 주도하는 경제개발을 통해 주민들로부터 지지를 얻으려 할 것이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이 있다. 김정은이 베트남 모델을 선호하는 이유는 중국의 통제에서 벗어나려는 의도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베트남은 중국과는 경제적으론 밀접한 관계이지만 정치·외교적으론 반목해왔다. 베트남은 중국과 전쟁을 벌이기도 했고, 현재는 남중국해 영유권 문제로 대립하고 있다. 특히 베트남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과 밀월관계를 구축하고 있다. 김정은이 그동안 비핵화 협상에서 최대 난제인 주한미군 문제에 대해 과거에 비해 상당히 유연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도 정치·외교적 종속관계를 원하는 중국을 견제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김정은이 베트남 모델을 바탕으로 경제개발을 제대로 추진할 수 있을까. 북한과 베트남의 가장 큰 차이점은 통치체제이다. 북한은 1인 독재체제인 반면 베트남은 집단체제다. 베트남을 통치하는 유일한 세력인 공산당은 헌법상 국가와 사회를 영도하며 정부, 국회의 활동을 지도하는 최고의 권력기관이다. 특히 베트남 공산당은 집단 지도체제의 만장일치에 의한 의사결정 과정을 1930년 창당 이래 지금까지 지켜왔다. 베트남의 최고 통치기구는 공산당 정치국이다. 18명으로 구성된 정치국 위원들은 모든 정책을 논의해 결정한다. 또 권력구조는 공산당 서기장, 국가주석, 총리의 분점 시스템이다. 서기장이 최고 실권자이지만, 국가주석은 군사와 외교를 담당하고 총리는 정치와 경제 전반을 관장한다. 게다가 서기장을 당 중앙위원들이 참여하는 경선으로 선출한다. 베트남 공산당은 북한의 노동당과는 달리 사실상 민주적인 제도를 운영하고 있는 셈이다. 때문에 권력 세습은 있을 수 없다.
   
▲ 2007년 10월 북한을 방문한 농 득 마인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에게 선물을 설명하고 있다. photo KCNA

   
   북한과는 전혀 다른 권력 시스템
   
   베트남 공산당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국부인 호 주석의 유지를 받들어 한 개인의 절대적인 권한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호 주석은 검소와 청렴으로 유명하다. 전쟁 당시 정글에서 몸에 밴 검소한 생활은 주석 자리에 오른 뒤에도 여전했다. 거처는 조그만 오두막이었고 늘 같은 옷에 고무 샌들을 신었다. 평생 독신으로 지낸 그는 30여년간 망명과 투옥으로 가족들과 헤어져 서로 소식조차 모르고 살았다. 주석이 된 뒤 누이를 딱 한 번 만났을 뿐 그 뒤 죽을 때까지 인연을 끊고 지냈다고 한다. 평생에 정적을 숙청한 적이 없었고 자신을 우상화하거나 신격화하는 일도 없었다. 죽을 때는 옷 한 벌과 신발 한 켤레만 남겼다. 베트남 국민들이 권력을 통해 어떤 부귀도 누리지 않았던 호 주석을 ‘호(胡) 아저씨’로 부르면서 친근하게 생각해온 것도 이 때문이었다. 우상화와 3대 세습을 통해 절대적인 권력과 부귀를 누리면서 호의호식하고 있는 김씨 일가와는 전혀 다르다. 오죽하면 호 주석도 생전에 김일성의 우상화 작업에 혀를 내둘렀을까. 아무튼 김정은이 북한판 도이머이 정책을 추진한다면 첫 과제는 전국에 산재한 김일성과 김정일의 동상부터 제거해야 하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등록일 : 2018-05-21 10:01   |  수정일 : 2018-05-21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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