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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주역들이 말하는 ‘나와 4·19’

“영원한 미완의 혁명, 그러나 언제나 진행중인 혁명”

⊙ 대구의 학생 시위, 마산 시민의 1, 2차 시위가 4·19의 도화선 역할
⊙ 전국의 고등학생이 시위의 불씨를 계속 살려 나가
⊙ 세계 혁명사에 유례가 없을 정도로 정의롭고 깨끗한 혁명
⊙ “建國 대통령을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것엔 찬성하지 않아”

글 | 이상흔 조선pub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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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 4월 19일 비상계엄령이 선포된 가운데 트럭에 올라서 시위를 벌이는 시민과 학생들.
  자유당(自由黨) 정권을 무너뜨린 4·19는 한때 ‘학생 의거(義擧)’로 불렸다. 그러다가 김영삼(金泳三) 대통령 때 들어와 ‘4·19혁명(革命)’으로 바꾸고, 서울 수유리의 4·19 묘지를 국립묘지로 승격시켰다. 4·19에 참여했던 이들은 “당시 학생들의 요구는‘선거를 다시 하라’는 것이었다”며 “정권 타도는 생각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4월 19일 민심이 크게 한번 폭발하자 자유당 정권은 그로부터 1주일 만에 막을 내렸다.
 
  우리 헌법 전문(前文)엔 ‘4·19 민주이념을 계승한다’고 명시돼 있다. 4·19가 가진 위상과 의미를 이보다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4·19는 불의와 부정에 맞선 저항이었다. 저항의 목적이 순수했고, 과정이 정의로웠기 때문에 그 어떤 권위주의 정권도 4·19의 이념을 부정하지 못했다.
 
1960년 4월 19일 교문을 박차고 나오고 있는 서울대 문리대생들.
  우리 헌정사에서 이처럼 중요한 4·19를 일으킨 주동층(主動層)은 바로 학생이었다. 4·19에 참여한 당시 학생들을 흔히 ‘4·19세대’라고 부른다. 현재 이들 대부분이 70대에 접어들었고, 현역에서는 은퇴했다. 50년이 지난 지금 역사의 현장에 섰던 4·19세대는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4·19 50주년을 맞아 몇몇 ‘4·19 주역’들로부터 4·19가 가지는 역사의 의미에 대해 들어 보았다. 인터뷰에 응한 이들은 “4·19가 비록 학생들에 의해 발단이 되었다고 해도 당시 대부분의 학생이 시위에 참여했고, 시민이 응원한 의거였기 때문에 혹시 일부 학생이 4·19의 주역인 것처럼 오해하지는 말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마산 시위를 이어받아 서울에서 시위의 불을 댕긴 것은 고려대였다. 고려대 학생회 간부들이 4월 18일 신입생 환영회에 맞춰 조직적인 시위를 벌인 것이 곧바로 4·19로 이어진 것이다. 4·19 과정에서 고려대의 역할이 결정적이었기 때문에 당시의 상황을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본다.
 
4월 18일 저녁 발생한 정치 깡패의 ‘고대생 피습사건’을 다룬 1960년 4월 19일자 조선일보 보도.
 
  4·19에 불을 댕긴 고려대
 
이세기 한중친선협회 회장.
  4·19 당시에는 지금 대학의 총학생회 같은 조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학도호국단이 학생회의 역할을 대신했다. 군대식 편제로 된 학도호국단은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설치되었으며 문교부 장관이 단장을 맡았다.
 
  당시 고려대는 5개 단과대의 학도호국단 학생운영위원장이 협의체 형식으로 학생회를 운영하고 있었다. 정경대의 이세기(李世基), 법대의 강우정(康宇淨), 문리대의 윤용섭(尹湧燮), 상대의 이기택(李基澤), 농대의 김낙준(金洛駿)씨가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고려대 학생회는 이 5개 단과대가 2개월씩 돌아가면서 학생회를 대표하는 구조였다. 3~4월에는 정경대가 학생회를 대표할 차례였다. 당시 정경대 운영위원장이었던 이세기 전 국회의원(현 한중친선협회회장)은 “졸업하는 선배들과 신입생 환영회 준비 때문에 5개 단과대 학생회 간부들이 개학 전에 자주 모여 협의를 하고 있었다”며 “이 과정에서 구체적인 시위 논의를 하게 됐다”고 말했다.
 
  “2월 28일 일어난 대구 경북고 학생들의 시위 이후 ‘고등학생도 저렇게 나라를 위해 나서는데 대학생인 우리가 가만있어서야 되겠느냐’는 분위기가 형성되었습니다. 특히 우리 고려대의 건학 이념이 자유·정의·진리였고, 고려대 출신으로 우파학생 운동을 이끌면서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펼친 이철승(李哲承) 선배의 저항의 전통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라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우리 고대생이 먼저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먼저 시위를 하지 못하면 다른 대학도 할 수 없을 것이고, 우리가 침묵하는 것은 역사에 죄를 짓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전 의원은 “구체적인 시위 일정은 4월 16일 신입생환영회에 맞추기로 하고 준비에 들어갔다”며 “이 과정에서 다른 대학 학생회 간부들과 시위에 대해 논의는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당시는 학교에 정보경찰도 많았고, 학생회 간부들도 자유당 지지와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 나뉘어 있었기 때문에 시위 계획을 함께 논의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또한 당시의 학생회는 어찌되었든 정부 산하의 단체인 학도호국단이 중심이었기 때문에 정치적 성향도 잘 모르는 타 대학 간부들에게 우리의 계획을 함부로 이야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보도한 1960년 4월 26일자 조선일보 석간 1면.
  이 전 의원은 “하지만 시위 계획이 아래로 전달되는 과정에서 정보 당국이 눈치를 챘고, 이 사실을 학교에 알리는 바람에 4월 16일 열기로 한 신입생 환영회가 취소되었다”고 말했다.
 
  “학교에서 신입생 환영회를 무작정 연기한다고 방을 붙였는데, 이미 계획이 탄로났기 때문에 우리 학생간부들은 서두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 늦으면 시위를 모의했던 간부들이 모두 체포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토요일과 일요일 급히 협의해서 4월 18일 오후 12시50분에 본관 앞에서 신입생 환영회와 시위를 강행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렇게 날짜를 정해 놓고 4월 18일 등교를 하니까 현승종(玄勝鍾·24대 국무총리) 당시 학생처장이 이미 상황을 알고 학생회 간부 5명을 처장실로 불렀다고 한다.
 
  “처장실에 가 보니 각 대학 학장들이 와 있었고, 처장과 학장들이 우리를 말렸습니다. 하지만 이미 밖에서는 학생들이 모여들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처장실을 박차고 나와서 학생들에게 시위에 참여할 것을 독려했습니다. 점심을 먹고 난 학생들이 막 몰려 나왔습니다. 우리는 신입생 환영회 때 쓰려고 만든 수건을 뿌리기 시작했습니다.”
 
  ‘기성세대는 각성하라!’가 시위구호
4·19혁명에 불을 댕긴 1960년 4월 18일 고대생들의 국회 앞 시위. 사진 앞쪽이 학생들에게 농성을 풀고 학교로 돌아가라고 설득하는 유진오 고대총장이다.
  이 수건은 이날 시위를 위해 만든 것으로 접어서 머리에 두르면 ‘고대’라는 두 글자가 보일 수 있게 제작되었다. 400~500명의 학생이 모이자 이세기 정경대 운영위원장이 고대신문 박찬세(朴贊世) 편집국장이 쓴 선언서를 읽어 내려갔다.
 
  ‘친애하는 고대학생 제군(諸君)!’이라고 시작하는 이 선언서 맨 하단에는 학생들의 요구 사항이 적혀 있었다. 이 요구 사항 구호는 이기택 상대 운영위원장(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이 읽어 내려갔다.
 
  “기성세대는 각성하라. 마산사건의 책임자를 즉시 처단하라. 우리는 행동성 없는 지식인을 배격한다. 경찰의 학원출입을 엄금하라. 오늘의 평화적 시위를 방해치 마라!”
 
  이세기 전 의원은 “시위 구호의 맨 처음에 ‘기성세대는 각성하라’고 한 것은 그만큼 당시 학생들은 자유당뿐만 아니라, 민주당 정치인들에게도 환멸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의 설명.
 
  “1시경부터 교문을 통해 학생들이 몰려나갔는데, 경찰도 충분히 준비를 못했는지 학교 앞의 1차 저지선은 비교적 쉽게 뚫렸습니다. 하지만 신설동과 종로4가 등지에서는 경찰과 심한 격투가 벌어졌습니다. 신설동에서는 부근에 있던 대광고 학생들이 나와 경찰 뒤쪽에서 응원 시위를 해서 우리를 도와주었습니다. 어쨌든 오후 2시30분경 서울시 중구 태평로에 있는 국회의사당(현 서울시의회)까지 진출할 수 있었고 거기서 농성을 시작했습니다.”
 
  시위대는 3000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3시30분경 고려대 유진오(兪鎭午·신민당 당수 역임) 총장이 등장해 “연행된 학생들은 석방하기로 했다”며 “시위가 더 계속되면 사태가 악화될 수 있으니 속히 학교로 돌아가라”고 설득했다. 고려대 출신의 이철승 의원도 나와서 학생들을 설득했다. 이에 6시30분경 학생들은 스크럼을 짜고 귀교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선두 행렬이 종로4가에 이르렀을 때 한 무리의 깡패들이 학생들을 습격했고, 50명이 길에 쓰러졌다.
 
  이세기 전 의원은 “바로 이 사건이 다음날 19일 조간신문에 크게 보도되면서 서울 시내의 모든 학생이 뛰쳐나오게 됐다”고 말했다.
 
  “동아일보에서는 ‘학생 1명이 죽었다’고 오보(誤報)를 했는데, 그 오보도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되었습니다. 4월 19일 당일 모든 학생과 시민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 것은 신문의 보도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4·19는 이날의 조간신문들이 만든 것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4월 19일 당일 시위에서 경무대로 진출하려던 시위대는 경찰의 집중 사격을 받았다. 이날 전국에서 186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6000명이 부상당했다. 186명 중 대학생이 22명, 고등학생이 36명, 초등학생과 중학생이 19명으로 학생들의 희생이 컸다.
 
  이세기 전 의원은 4·19를‘미완의 혁명’이라고 정의했다.
 
  “혁명이란 혁명세력이 집권해서 혁명 과업을 진행할 때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4·19는 혁명의 주동 세력이 ‘학생’이었기에 현실 정치에 참여하지 않고 모두 학교로 돌아갔습니다. 저는 1960년의 4·19는 정의로운 사회와 민주주의가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제기를 한 것으로 시대적인 역할을 충분히 했다고 봅니다. 다만 4·19 정신이 후배들에게 제대로 이어질 때 4·19가 성공한 혁명으로 승화된다고 봅니다.”
 
  이세기 전 의원은 현재 한중친선협회 회장을 맡고 있으면서 그동안 쌓아온 중국고위층 인맥을 우리의 정치권과 연결시키는 일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그는 “중국과의 일은 외교 관계만으로는 되지 않는 일이 많다”며 “특히 앞으로 남북통일 과정에서 중국 정계의 인맥을 활용할 기회가 올 텐데 그때를 대비해서라도 중국과의 관계를 소홀히 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한광옥 전 민주당 대표의 4·19
 
한광옥 전 민주당 대표(현 통일미래 연구원 이사장).
  한광옥(韓光玉) 전 민주당 대표는 서울대 문리대 영문과 1학년에 재학 중 4·19를 맞았다. 서울대는 4·19시위에서 6명의 사망자가 나왔을 정도로 피해가 컸다. 서울대에서는 정치학회 윤식 회장(전 국회의원)을 중심으로 정치학과 3학년 학생들이 4월 21일 무렵 시위를 벌이려고 준비하던 차에 갑자기 4·19를 맞았다.
 
  한광옥 전 대표는 “나는 당시 1학년이었는데, 우리 문리대가 앞장서서 국회의사당까지 간 다음 경무대로 진출했다”고 말했다.
 
  “경무대 가까이 가자 갑자기 ‘탕탕탕’ 하는 총소리가 들렸습니다. 놀란 우리는 몸을 숙이고 흩어졌습니다. 저는 경무대 부근에 있는 가게 2층에 숨어 있다가 군인들에게 잡혔습니다. 바로 마포 형무소로 이송되었다가 이틀 뒤 석방되었는데, 감옥에 있는 이틀 동안 집에서는 제가 죽은 줄 알고 난리가 났었습니다.”
 
  한 전 대표는 “4·19는 우리 역사에서 화가 난 백성이 정권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최초의 사건”이라며 “국민이 원하지 않는 정권이 절대로 오래갈 수 없다는 것을 역사적 교훈으로 남겼다”고 말했다.
 
  “4·19는 3·1독립운동(1919), 6·10만세운동(1926), 광주학생운동(1929) 등에서 보여준 주권수호와 불의에 저항하는 정신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정의를 지키려는 맥이 우리 사회에 흘러 왔기에 4·19가 있었고, 1987년 민주화 운동으로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한 전 대표는 “4·19는 불의에 항거하는 용기를 주었고, 나의 정치인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며 “4·19 이후에도 박정희 군정과 맞서 투쟁을 계속했고 결국 구속되는 바람에 학교를 졸업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한광옥 전 대표는 현재 통일미래연구원 이사장을 맡고 있다. 그는 “4·19를 주도한 학생들이 혁명 1년 후 내세우기 시작한 것이 통일운동이었다”며 “분단 후 잠자고 있던 통일 논의를 일깨운 것은 앞으로 4·19 정신을 어떻게 계승해야 하는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말했다.
 
  야당 정치인의 길을 오래 걸어왔고, 권위주의 정권에 맞서 온 한 전 대표는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어떤 평가를 하고 있을까? 이에 대한 질문을 던지자 한광옥 전 대표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일부에서 이승만 박사를 ‘친일파’라고 몰고 있는데, 이는 지나친 평가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광복 후 신생 독립국을 운영하기 위해 말단 행정직과 기술·기능직 분야에서 어쩔 수 없이 일제에 봉사했던 사람들을 일부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또한 남한 단독정부 수립은 비록 최선의 방법은 아니었지만, 당시에 남북협상의 성공으로 독립정부를 세우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기에 차선(次善)을 선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건국 대통령을 무조건 매도하는 것은 옳지 않은 태도입니다. 건국의 공로와 장기집권의 잘못을 분명히 구분해서 공과(功過)를 평가해야 합니다. 그래서‘단절’이 아니라 ‘이어지는 역사’를 세워나가야 합니다. ”
 
 
  4·19세대의 이승만·박정희 평가
 
김기병 롯데관광개발 회장.
  4ㆍ19에 앞장섰던 학생회 간부 중에 롯데관광개발의 김기병(金基炳) 회장과 경동제약의 유덕희(柳悳熙) 회장은 경제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아직 현역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김기병 회장은 4ㆍ19 당시 한국외국어대 3학년 학도호국단 부위원장으로 학생들을 이끌고 시위에 참여했다. 그는 “만약 4ㆍ19가 없었으면 당시의 반민주적인 국정운영이 언제까지 이어졌을지 아무도 알 수 없다”며 “4ㆍ19는 건국 후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민주주의가 자리를 잡게 한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유덕희 회장은 성균관대 학생운영위원장으로 4ㆍ19에 참여했다. 그는 4ㆍ19 직후 조직된 ‘4ㆍ19 혁명 학생대책 위원회’에서 희생자들을 위한 위령탑 건립 활동 등에 앞장섰으며, 현재도 4ㆍ19 육영사업회 이사장을 맡아 4ㆍ19를 알리는 일을 하고 있다.
 
유덕희 경동제약 회장.
  그는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비록 박정희 대통령의 집권 과정은 잘못됐지만, 집권 후 강력한 리더십으로 경제발전을 이룬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한다”고 말했다.
 
  “특히 장면 총리가 5ㆍ16을 무력으로 충분히 진압할 수 있었는데, 나라를 위해 정권을 양보한 큰 결단을 내린 것은 높이 평가받아야 합니다. 이런 모습이 지도자의 진정한 용기라고 봅니다.”
 
  기자는 이번 취재를 위해 4·19 당시 시위에 앞장섰던 학생회 간부 10여 명과 인터뷰를 했다. 이들 모두에게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물어보았다. 4·19 주역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의 대답은 대체로 비슷했다. 이승만·박정희 대통령의 공과를 구분해서 평가해야지 그들의 전 생애를 한두 마디의 말로 평가절하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4·19 완성 계획했다 누군가 밀고로 무산돼”
 
설송웅 전 열린우리당 국회의원.
  4·19의 직접적 기폭제는 4월 18일 고려대생의 시위였지만, 그 이전부터 꾸준하게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분위기를 이끌어 간 것은 고등학생들이었다. 설송웅 전 열린우리당 국회의원도 고등학생 신분으로 4·19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경우다. 현재 정계를 은퇴한 설 전 의원은 경기도 양평에 거주하고 있다.
 
  그는 4·19 당시 서울 중동고 3학년으로 학도호국단 학생운영위원장(학생회장)을 맡아 학생들을 이끌고 시위에 참여했다. 4·19 이후에는 ‘4월 혁명 순국학생 위령탑 건립 위원회’에 고등학생 신분으로 참여했다. 설 전 의원의 설명이다.
 
  “4·19에서 고등학생들의 역할이 절대적이었습니다. 4·19의 시발이라고 할 수 있는 2·28 대구 시위도 고등학생들이 벌였고, 이후 이어진 고등학생들의 계속된 시위는 대학생들을 자극했습니다.”
 
  설 전 의원은 “학생이 주도한 4·19는 세계 혁명사에 유례가 없을 정도로 정의롭고 깨끗했다”며 “학생들은 엄청난 일을 이루어 내고 아무런 정치적 요구 없이 모두 학교로 돌아갔다”고 말했다.
 
  “4·19 이후 집권한 민주당 정권이 이러한 학생들의 순수한 민주이념을 잘 대변해서 정치를 잘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하는 바람에 5·16 군사 쿠데타의 빌미를 준 것입니다. 앞으로라도 4·19의 순수한 항거 정신을 이어 가려면 4·19 관련 단체가 지금처럼 정부의 활동비를 받는 정부 산하 기관으로 존재해서는 안 되고 순수한 민간단체로 독립해서 나와야 한다고 봅니다.”
 
  현재 4·19 관련 단체는 4·19혁명희생자유족회, 4·19민주혁명회(부상자 단체), 4·19혁명공로자회 등 3개 공식 단체가 있으며, 정부의 지원을 받아 활동하고 있다.
 
  이상철(李相哲) 한국체육대학 전 총장은 4·19 당시 서울 양정고 학생운영위원장이었다. 이 전 총장은 “4·19가 정권 장악을 위한 목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4·19 정신의 본질은 훼손될 수 없으며, 사회적 자본으로 영원히 남을 수 있다”며 “학교에서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최고 가치로 4·19의 순수한 정신을 교육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4·19에 직접 참여한 이들은 한결같이 “4·19는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학생들의 순수한 힘이 모여 이룩한 고귀한 항거”였다고 말했다. 비록 최근에 정부에서 4·19를 혁명이라고 공식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만, 4·19 당시에도 학생들은 혁명으로서 4·19가 가진 한계성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이재환 원자력문화재단 이사장.
  하지만 이재환(李在奐·전 국회의원) 원자력문화재단 이사장은 “일부 학생회 간부들을 중심으로 4·19를 진정한 혁명으로 승화시키려는 움직임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재환 이사장은 4·19 당시 고려대 학생위원회의 총무부장을 맡아 이세기 전 의원과 함께 4월 18일 고대 시위를 준비했던 핵심 인물 중에 한 명이다. 이재환 이사장의 설명이다.
 
  “이제 50년이 지났으니까 당시 몇몇 간부 학생들이 생각했던 것을 어느 정도 밝혀도 괜찮다고 봅니다. 4월 24일 이승만 대통령이 자유당 총재를 사임하겠다고 했을 때 시위에 참여했던 우리 학생회 간부 몇몇은 ‘현 상황을 잘 이용하면 4·19를 혁명적인 상황으로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날 바로 4·19혁명 학생대책위원회를 조직하기로 결정하고, 각 대학 총장에게 학생들을 5명씩 추천해 달라는 공문을 보냈습니다.”
 
  이재환 이사장은 “이 대통령이 4월 26일 하야하자 우리는 학생대책위원회를 긴급 소집했다”고 말했다.
 
  “대책위는 우선 질서 유지부터 나섰습니다. 계엄사와 협조해서 경찰서를 분담하여 치안활동과 교통정리를 하고, 거리청소도 했습니다. 한편으로는 4·19 희생자 위령제와 순국학생 위령탑 건립을 준비했는데, 저를 포함한 몇몇 간부들이 이 희생자 위령제에 참석한 학생들을 선동해서 대규모 시위를 할 계획을 세웠던 것입니다.”
 
  이 이사장은 “기성 정치인들이 멋대로 4·19 정신을 이용하는 것을 보고 이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송요찬 계엄사령관의 호응을 얻어 교수, 학생, 민주당의 양심 정치인을 규합해 4·19를 새로운 시민혁명으로 완성하자고 결의를 하고 아주 자세한 시나리오를 짰습니다. 이 결의는 저를 포함해 10여 명이 논의를 한 것입니다. 하지만 누군가 밀고를 해서 결국 계획이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이재환 이사장은 “5월 19일 서울운동장에서 계획대로 위령제가 열렸지만, 계엄사에서 시위가 있을 것이란 정보를 입수하고 탱크까지 동원해 운동장을 에워싸는 바람에 시위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고 말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1년 후인 1961년 전국의 학생 간부 108명이 모여서 범민족 청년회의를 만들었습니다. 이는 우리 청년들이 10년 후에 정치세력화할 수 있게 사전에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꿈도 5·16이 나면서 사라졌습니다.”
 
  4·19가 일어난 지 3년 후인 1963년 박정희 정권은 4·19에 참여한 학생들에 대한 공로자 포상을 했다. 포상의 이름이<건국포장>이라는 것이 특이하다. 이는 4·19가 신생독립국의 민주주의를 바로 세우는 데 공헌을 했다는 의미가 포함된 것이었다.
 
 
  4·19 정신이란?
 
1960년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 하야 후 질서 회복에 나선 학생들.
  이때 포장 수상자로 선정된 인원은 160명가량 된다. 당시 문교부가 각 학교 총장의 추천을 받아 선정했다. 학생회 간부 출신이 많다. 4·19 공로자 포상은 그동안 몇 차례 추가되어 현재까지 238명이 받았다.
 
  국가보훈처(처장 김양)는 올해 4·19 50주년을 맞아 포상 인원을 대폭 늘릴 계획이다. 이에 따라 약 300명 정도가 추가될 것으로 보인다.
 
  4·19 공로자들은 특별한 금전적 혜택을 받아 온 것이 없었지만, 2001년 7월부터 4·19 관련자들도 국가유공자에 포함됨으로써 교육, 의료, 주택 등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연금이나 일시불 형태의 보상금은 없으며, 공로자가 사망 시 국립묘지로 승격된 4·19 묘지에 안장될 수 있다.
 
  한국외국어대 재학 중 4·19에 참여했던 이기후 전 4·19혁명공로자회 회장은 “4·19 공로자로 선정된 사람은 나이가 많아서 주택이나 교육분야의 혜택은 해당 사항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의료혜택은 볼 수가 있다”고 말했다.
 
  “4·19에 참여하면서 무슨 보상을 바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현재 민주화보상법이 1969년 3선개헌 이후의 민주화 운동만을 보상 대상으로 규정해 놓은 것은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광주라는 특정 지역에서 일어났던 5·18이 현재 유공자 4000명이 넘는데, 전국에서 일어났던 4·19가 희생자를 포함한 유공자가 지금까지 500~600명에 불과하다는 것은 형평성에 맞지 않다고 봅니다.”
 
  이기후 전 회장은 또한 “4·19 공로자의 경우 선정 기준이 일관되지 않은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비슷한 활동을 했는데 누구는 포함되고 누구는 포함되지 않은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이태섭 전 과기처 장관.
  이태섭(李台燮) 전 과기처 장관은 서울공대 3학년 때 학교 신문사 소속으로 4·19 현장을 취재하고, 시위에도 참여했다. 특히 1960년 6월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는 학생대표로 참여하여 4·19의 정신과 의거 목적을 설명하기도 했다. 그는 4·19에 대해 누구보다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고 공로도 적지 않지만, 공로자에는 제외됐다. 5공화국 때 장관을 지냈다는 이유 때문이라고 한다.
 
  이에 반해 이세기 전 의원은 5공화국 때 체육부 장관을 지냈지만, 유공자 명단에 포함되어 있다. 1963년 최초 포상 때 명단에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이태섭 전 장관은 “나는 4·19 직후 10년이나 미국 유학생활을 했기 때문에 포상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관심도 없다”며 “하지만 이후 국가에 봉사하는 길을 갔다고 4·19 정신에 위배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인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세기 전 의원은 “4·19를 놓고 포상 운운하는 것 자체가 4·19의 숭고한 정신을 왜곡하는 것”이라며 “전 국민이 불의에 항거한 사건을 놓고 죽거나 다치지도 않은 사람들이 개인적인 보상을 바라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4·19 세대 중에 여당 활동을 한 사람도 헌법이 정한 바에 따라 개인의 정당 선택 권리를 행사한 것입니다. 국회의원 선거에서 국민의 지지로 당선되어 정당한 정치 활동을 한 것을 문제 삼는다면 4·19 세대는 아무런 정당활동도 못하고, 야당도 선택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나 마찬가지죠. 4·19 정신은 몇몇 사람이 마음대로 재단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등록일 : 2018-04-19 09:19   |  수정일 : 2018-04-19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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