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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평도의 김영철 트라우마...“그 사람이 폭격 안 한다고 했나요?”

글 | 배용진 주간조선 기자

▲ 지난 2월 28일 인천 옹진군 대연평도에서 주민들이 인천행 배에 오르고 있다. photo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지난 2월 28일 오전 인천 옹진군 대연평도의 옹진농협 연평지점 앞. 70대쯤으로 보이는 여성 두 명이 2인승 4륜 오토바이에 오르고 있었다. 그들에게 “이번 김영철 북한 통일전선부장 방한을 어떻게 봤냐”고 물었다.
   
   “안 좋게 봤지 뭐. 좋게 볼 수가 있겠어. 그때 폭격(포격)해서 우리 다 대피하고 고생하고 했는데.” 둘 중 연장자로 보이는, 벙거지모자를 푹 눌러쓴 여성 주민이 찌푸린 표정으로 말했다. 그는 아침에 마트에 장보러 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귀가 잘 들리지 않는 그와 한참 동안 손짓 발짓을 동원하며 얘기하던 중, 옆에서 기자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일행이 불쑥 되물었다.
   
   “그 사람, 김영길(김영철을 지칭)이가 와서 잘 했나요? 얘기가 잘 됐나요? 폭격 안 한다고 하고 갔나요?” 크게 뜬 눈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았다. 처음의 벙거지모자를 쓴 주민이 다시 거들었다. “폭격만 안 하면 돼, 우리는. 항상 불안 속에 살아요. ‘꽝’ 했다 하면 불안해….”
   
   북한의 김영철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이 2박3일의 방한 일정을 마치고 돌아가던 지난 2월 27일, 대연평도를 찾았다. 김영철은 2010년 3월 발생한 천안함 폭침과 11월 발생한 연평도 포격 도발의 배후로 지목됐었다. 당시 그는 북한 정찰총국의 수장이었다. 이후 2013년에는 김정은과 함께 연평도 포격부대를 시찰해 격려하는 사진이 북한에 의해 공개되기도 했다. 김영철은 지난 2월 25일 방한해 평창 동계올림픽 폐막식에 참석하고 우리 정부 당국자들과 잇따라 회동한 뒤 27일 오전 북한으로 돌아갔다.
   
   2010년 11월 23일 발생한 연평도 포격 도발은 이번 김영철 방한을 둘러싼 논란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았다. 군장병 46명이 숨진 천안함 폭침에 비해 적은 인원(군인 2명, 민간인 2명)이 숨져 주목도가 상대적으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시 기승을 부리는 ‘천안함 괴담’과 함께 천안함 폭침의 진짜 주범이 김영철이냐는 논란이 제기되는 것과 달리 연평도 포격 도발은 김영철이 확실한 주범이다. 연평도 포격은 당시 서해지역을 관장하던 김격식 4군단장(대장)과 대남공작을 총괄하던 김영철이 주도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백령도와 함께 북한 최전방 접경지대인 연평도는 당시 포격 도발로 ‘휴전 이후 북한으로부터 직접 포격을 받은 유일한 지역’으로 기록됐다.
   
   지난 2월 25일 막을 내린 평창 동계올림픽을 기점으로 대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지만, 한·미 연합훈련이 시작되는 봄철이면 으레 그렇듯 한반도는 다시 긴장 국면으로 돌아설 수 있다. 포격 도발의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연평도 주민들에게 김영철의 방한은 순수한 평화의 메시지로 읽히기 힘들다. 북한과의 평화 무드가 언제 비수가 돼 날아올지 모른다는 불안과 우려를 떨치기 쉽지 않다.
   
   
   쓸쓸한 희생자 추모비
   
   지난 2월 27일 오후 연평도 동구리 북쪽의 민간인 추모비. 추모비 앞 돌판 아래 시든 꽃 대여섯 송이가 은박지에 싸인 채 나뒹굴고 있었다. 이따금 찾아오는 조문객들이 놓은 국화였다. 섬에 몰아치는 북풍에 날린 모습이었다.
   
   이 추모비가 세워진 곳은 2010년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 당시 막사를 짓던 인부 두 명이 숨진 현장이다. 당시 60세였던 김치백씨와 59세였던 배복철씨가 희생자였다. 두 사람은 연평도 군부대 관사를 신축하던 도중 북한의 포격에 변을 당했다. 연평면 관계자들에 따르면 두 사람의 시신은 유족에게 인계됐고, 이후 뭍에서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민간인 추모비는 지난해 새로 생긴 연평면 공설묘지 바로 앞에 있다. 추모비 근처에는 사람이 없었다. 이따금 산불감시단만 지나다니는 한적한 곳이었다. 추모비 인근에는 해병 초소가 곳곳에 세워져 있고 근방에 관광지가 없어 애초에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는 지역이다. 추모비는 연평도 포격 도발 1주년인 2011년 11월 23일 국민들의 성금으로 건립됐다. 추모비 받침돌에는 “북한의 야만적인 행위에 대하여 널리 후손에게 알리고 자주국방의 교훈으로 삼고, 희생자의 넋을 기리고자 이 비를 세운다”고 적혀 있었다.
   
   민간인 추모비는 연평면사무소 맞춤형복지팀이 관리한다. 면사무소 직원들이 매년 상·하반기마다 추모비 주변 잡초를 제거하고 나무를 심는 등 유지·보수를 한다. 연평면 맞춤형복지팀 박은경 주무관은 “노인 업무를 복지팀에서 맡다 보니 장례 관련 업무도 복지팀에서 담당한다”며 “연 200만원 정도가 지원된다”고 말했다.
   
   대연평도는 전체 면적의 절반 이상이 군사지역이다. 연평항과 가까운 동남쪽 일부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군 지역이다. 흔히 ‘연평부대’로 불리는 해병 제9518부대가 주둔한다. 2010년 포격 도발 이후 연평도에 주둔하는 군병력은 대대급 규모에서 연대급 규모로 증가된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에는 북한의 도발 시 원점을 타격할 수 있는 신무기도 배치된 것으로 알려졌다.
   
   민간인 추모비에서 북쪽으로 300m쯤 떨어진 곳에 있는 동구리 북쪽 고(故) 서정우 하사 피격지에 가보았다. 누런색 시멘트로 포장된 길 곳곳에는 아직도 포를 맞은 자국이 선명했다. 포 맞은 자국 근처에 설치된 붉은 깃발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서 하사가 피격되던 날 소나무에 박힌 해병 모표도 그대로 보존돼 있었다. 소나무 아래에는 “고 서정우 하사의 불굴의 용기와 해병 혼을 기리고 계승하기 위하여 표지판을 설치한다”는 설명이 적혀 있었다.
   
   근처에서 붉은 모자를 쓴 산불감시단 중년 남성을 만났다. 김영철 방한을 어떻게 보는지 묻자 그는 말을 아꼈다. “(김영철 방한에 대해) 안 좋게 보죠. 근데 내놓고 말은 못 해요. 여기 사람들은 정부 하는 대로 따르지. 좋다, 싫다 그런 건 없어요.”
   
   대연평도는 북한 해안포 진지와 12㎞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항상 포격 위험에 노출돼 있다. 아군의 포격 훈련도 수시로 행해진다. 연평도에는 K-9 자주포를 비롯해 각종 무기가 배치돼 있다. 북한의 포격 도발을 겪은 후 연평도에는 7개의 대피소가 새로 설치됐다. 본래 3곳의 대피소가 있었지만 포격에 민간인들을 수용하기에 부족하다는 지적이 제기되면서 대피소가 증설됐다. 현재는 총 10개의 대피소에 1200명을 수용할 수 있다. 연평 초·중·고등학교 서쪽에 있는 1호 대피소가 가장 규모가 크다. 동시에 6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다. 이날 가 본 1호 대피소에는 굳건한 철문에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 (위부터) 연평면 공설운동장 벽에 포탄이 떨어진 자국이 선명하다. 연평면 남부리 등대공원에 있는 전사자 위령탑. 포격 도발 때 전사한 해병 2명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연평도에서 규모가 가장 큰 1호 대피소. 6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다. photo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전쟁이 뭔지 알고 그러냐”
   
   같은 날 연평면사무소에서 만난 연평면 주민동향 담당자는 “김영철이 왔다고 해서 별다른 동요가 있진 않았다”며 이렇게 말했다. “TV 보면서 다들 ‘나쁜 놈이야’ 하긴 하죠. 하지만 북한은 1인이 모두 결정하는 체제고 김정일이 한 건데, 왔다고 해서 일희일비하진 않아요. 오히려 최근에는 올림픽에 더 관심 있었죠. 주민들 분노를 이용하려는 특이한 동향도 없었고.”
   
   이 관계자의 설명에 따르면 포격 도발 당시 희생된 사람 중 연평도 주민이 없었던 것도 섬 주민들의 여론에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희생된 민간인 두 명은 관사 신축을 위해 인천 등 뭍에서 온 외지인이었고, 두 명은 해병대 병사였다. 사건이 발생한 지 7년이 지나 재산피해도 현재는 어느 정도 회복됐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도 사이렌이 울릴 때만은 다르다고 말했다. 최전방 접경지대가 갖는 피할 수 없는 불안감 때문이다.
   
   “주민들은 사이렌 소리에 제일 민감해요. 군이 사격 연습할 때 포 소리가 나도 놀라지 않는데 사이렌은 달라요. 저희가 점검 차원에서 가끔 사이렌을 켤 때가 있는데 미리 울린다고 안내를 드려도 또 놀라시곤 하더라고요.”
   
   주민들의 표정은 면사무소 관계자의 설명보다 더 불안해 보였다. “저 뒤에 산등성이 보이죠? 여기부터 저기까지 다 나무가 없잖아요. 여기 파출소 뒤, 탄약고 뒤, 면사무소 뒤, 저기 해경센터 뒤까지요. 나무 없는 곳은 전부 그때 불난 곳이에요. 집도 한 30채 부서졌고. 그걸 어떻게 잊겠어요.” 연평도에서 민박집을 운영하는 김진화씨가 말했다. 그는 민박집 2층에서 뒤쪽으로 보이는 산등성이를 쭉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목소리를 높였다.
   
   김씨의 말을 따라 연평도 포격 도발 당시 포탄이 떨어진 연평면 공설운동장에 갔다. 연평도 주민 조흥준씨가 운동장 한쪽을 거닐고 있었다. 올해로 85세인 그는 무궁화 무늬가 새겨진 남색 모자를 쓰고 있었다. 모자 왼쪽에는 노란 글씨로 ‘6·25참전유공자’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분하죠. 사람 죽고 (포탄) 맞고. 그때 우리가 인천 연안부두에 있는 찜질방에 갔는데. 1000여명이 수용됐어요. 매일같이 환자 수가 늘어났죠. 나는 6·25때 피란도 다녀봤어요. 그때 중학교 3학년이었으니까. 학생들이 나라 뺏겨선 안 된다고 구월산에 총 들고 나가고 죽고 그랬어요. 그래서 북괴군을 누구보다도 싫어해요.”
   
   조씨의 말은 길게 이어졌다. 연평도에는 조씨처럼 6·25에 참전한 고령자들이 많이 거주한다. 북한과 가까운 데다 본래 연평도가 황해도에 포함돼 있었던 만큼 이북을 고향으로 둔 실향민도 많다.
   
   “김영철이가 온다 할 때부터 (분노)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생각했어요. 야당 주장에 전 국민이 다같이 동참을 한다면 ‘아 지금까지도 분노 속에 있구나’ 하고 감탄을 했겠죠. 월드컵 때 응원한 것처럼. 그런 식이 되지 않으려면 차라리 안 하는 게 낫다 생각해요.”
   
   그의 뒤를 따라 운동장 한쪽 담벽에 갔다. 포탄 자국이 뻥 뚫린 벽에는 구멍 아래 두 손이 그려져 있었다.
   
   “야당에서 진짜 싸우자는 건지 난 그걸 모르겠더라고요. 미국이 북한하고 싸운다면 북한이 미국 때리겠어요? 천상 여기 때리는 것밖에 없어요. 서울도 목표가 될 텐데 그러면 많이 죽겠죠. 6·25 때처럼 그렇게 될 텐데. 난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쳐요. 피란 오다 괴뢰군에 잡힐까봐 밤중에 애엄마가 아이 입을 막고 가다가 애가 죽은 일도 있었어요. 죽어서 애가 소리 못 지른 거야. 지금 정치하는 사람들 그런 거 알기나 하냐 이거야. 피란민들 얼음판에서 얼어죽고 그런 걸 아냐고. 전쟁이 뭔지 알고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올해 들어 남북 간 대화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그간 ‘화약고’ 취급을 받아오던 서해5도도 다시 주목받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 공약으로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조성’ 방안을 밝혔었다.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는 연평도 인근 해역에서 벌어진 두 차례 해전, 포격 도발, 중국 어선의 불법조업 등 갈등 요소가 끊이지 않는 서해 북방한계선(NLL) 해역을 ‘평화수역’으로 정해 남북이 함께 고기잡이를 하고 수산물도 교역하자는 아이디어다. 이를 통해 중·장기적으로 인천과 북측의 개성·해주를 잇는 남북 경협 벨트를 만들자는 공약이다.
   
   
▲ 2010년 11월 23일 북한의 연평도 포격으로 폐허가 된 현장을 한 주민이 둘러보고 있다. photo 이진한 조선일보 기자

   해상파시를 설치하면
   
   이 공약 이행의 일환으로 현재 해양수산부는 NLL 근방에 해상파시(波市)를 설치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김영춘 해수부 장관은 지난해 8월 한 강연에서 “남북 간 수산물 교류를 위한 ‘해상파시’ 제안을 받아들여 추진하겠다”고 했다. 남북관계가 개선되면 백령도·연평도 인근 서해 일부 해역을 공동어로 수역으로 설정하고 바지선을 띄워 잡은 수산물을 판매하는 해상파시를 설치하겠다는 것이다. 서해5도 어민들이 잡은 수산물과 북한 어선이 잡은 수산물을 공동으로 판매하는 해상파시를 설치해 남북 수산물 교류를 진행하자는 것이다. 해수부는 올해 남북관계가 대화 국면으로 접어들면 실제 바지선을 띄워 해상파시를 설치하는 방안을 추진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서해5도에 북한 선박의 접근을 허용하는 것은 안보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지적도 나온다. 서해5도는 남북이 수역을 맞대고 있고, 서북쪽으로는 중국도 가까운 안보 접경지대인 ‘화약고’인 만큼 북한 어선의 접근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해상파시를 처음 제안한 단체는 ‘서해5도 생존과 평화를 위한 인천시민대책위원회’다. 이 단체는 연평도 어촌계, 백령도선주협회, 대청도·소청도 어촌계 등 서해5도 어민과 인천평화복지연대 등 시민단체가 함께 구성했다.
   
   현재 연평도 어민들의 여론을 대변하고 구심점 역할을 하는 사람 중 한 명이 박태원 연평면 어촌계장이다. 3년 전부터 어촌계장을 맡아온 박씨는 해상파시 설치 제안에서도 핵심 역할을 했다.
   
   “우리 연평도 어민들은 휴전 이후 60년 동안 안보라는 이름으로다가 어렵게 살아왔고, 이후엔 중국 어선으로부터 수산자원을 침탈당했습니다. 안보라는 이름으로 우린 많은 것들을 희생당했어요. 다른 지역에 있는 배들은 60년 동안 24시간 작업을 했어요. 근데 우리는 일출 시간부터 일몰 전까지밖에 작업을 못 하잖아요. 국가에 손해배상 청구를 했지만 기각당하기도 했죠. 그간 우리가 받은 모든 불합리한 점을 이제 보상받겠다는 겁니다. 수산물 교역 사업은 그래서 당사자인 우리 서해5도가 주역이 되어야 한다는 거죠.”
   
   한동안 연평도 어민들의 골치를 썩인 중국 어선의 불법조업은 지난해 4월 중부지방해양경찰청 서해5도 특별경비단(서특단) 창단 이후 크게 감소했다는 것이 연평도 어민들의 설명이다. 서특단은 창단일부터 중국 어선 6척을 퇴거시키고 1척을 나포하는 등 뛰어난 활약을 벌여 중국 어선의 불법조업을 막았다. 중국 어선은 대연평도에서 2.5㎞ 떨어진 북한 석도와 연평도 북쪽 해역에는 남북 어선이 들어가지 못하는 점을 노리고 수산자원을 싹쓸이해왔다.
   
   연평도는 현재 본격적인 출어가 시작되는 봄철을 앞두고 조업 준비로 분주하다. 통발, 안강망 조업은 사시사철 가능하지만 꽃게는 봄·가을에만 잡을 수 있다. 높은 소득을 올릴 수 있는 닻자망 어업의 경우 수온이 오르는 3월 말부터 조업이 가능하다. 박태원 어촌계장은 “최근 서해5도 인근 해역 어장을 연장해달라고 정부에 요청한 상태”라며 “어장이 연장될 경우 현재보다 어획량이 10~15% 늘어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등록일 : 2018-03-07 08:43   |  수정일 : 2018-03-07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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