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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학년도 수능 한국사 15번은 무효다.(2)- 잘못된 지문 전제...반드시 무효 처리되어야

도(度)를 넘은 역사 왜곡, 언제까지 거짓을 가르칠 것인가?

글 | 김병헌 동국대학교 동국역사문화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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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적을 기다리는 조선 쌀
 
이 건물은 옛 익옥 수리 조합 사무소로 일제에 의한 수탈의 역사를 보여줍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일제는 자국의 식량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식민지 조선에서 경지 정리와 개간, 벼 품종 개량, 대규모 수리 조합 창설 등을 추진하는 [산미 증식 계획]을 실시하였습니다. 익옥 수리 조합도 이 수탈 정책에 적극 참여하였습니다. -2018 수능 한국사 15번 지문-

이번 2018학년도 수능 한국사 15번 지문에는 위와 같이 ‘수탈’이라는 용어를 쓰고 이어서 산미증식계획을 ‘수탈 정책’이라 하였다. 이 문제가 정당하기 위해서는 학생들에게 먼저 현행 고등학교 교과서에 ‘수탈’이나 ‘수탈 정책’이라는 내용을 수록하여 가르쳤어야 한다. 교과서에 수록하지도 않은 내용을 중요한 수학능력시험에 출제하여 학생들을 평가하는 것은 신의(信義) 원칙을 심각하게 위반한 처사다.
 
수출이라 함은 국가 간 정당한 거래에 의한 무역인 반면, 수탈은 대가 없이 강제로 빼앗아 갔다는 의미가 된다. 만약 수탈이 올바른 표현이라면 그러한 정황을 증명할 수 있는 분명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 아무런 근거도 제시할 수 없다면 설령 교과서에 수록되었다 하더라도 이는 서술 오류이며 역사 왜곡이다. 이번 글에서는 1920년대 신문 기사와 현행 8종 검정 한국사 교과서의 서술을 통해 1920년대 대일 미곡 무역이 ‘수탈’이 아닌 ‘수출’임을 밝히고자 한다.
 
수탈인지 수출인지를 구분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수탈은 피탈국(被奪國) 이해 당사자의 저항이, 수출은 수입국(輸入國) 이해 당사자의 저항이 필연적이다. 때문에 1920년대 신문에 보도된 산미증식 및 미곡(米穀)과 관련하여 조선과 일본이 어떻게 대응했는지 또는, 어떻게 저항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이를 판단하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만약 일본이 우리의 쌀을 강제로 빼앗아 갔다면 빼앗기지 않으려는 우리 국민의 극렬한 저항이 있었을 것이다. 생명이나 다름없는 쌀을 빼앗기면서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내 줄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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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일 수출 두절과 신미(新米) 고베 수출
이 그래프는 1913년부터 시작하여 1934년 산미 증식 계획이 중단되기까지의 대일 미곡 수출량을 정리한 그래프다. 1914년부터 꾸준히 증가하던 수출량은 1920년 급격하게 줄어들면서 신문 보도에는 ‘물가폭락의 원인’이라는 기사와 함께 최만섭씨의 이야기를 소개하였다. 제목은 ‘미곡수출 두절’이다. 요즘 신문에 기사의 신뢰성을 높이기 위해 관련자 또는 전문가의 언급을 한두 줄 싣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면 된다.
 
쌀값이 4~5일 이래로 백미 중등미 한 섬에 오십이삼 원 하던 것이 별안간 폭락이 되어 사십칠팔 원이 되고 이에 따라서 작은 상점의 소매가격도 그와 같이 떨어졌습니다. 쌀값이 그같이 떨어진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무슨 이유인지 일본으로 해마다 수십만 섬씩 수출되던 미곡이 금년에는 수출되지 아니하는 것이 중대한 원인이라 하겠습니다. 쌀값이 떨어졌다고 일반 월급 생활하는 사람은 좋아할지 모르나 쌀값이 떨어지는 데에서 다른 물가가 떨어지지 아니하면 일반의 생활은 더욱 곤란할 줄로 믿습니다. 조선 사람이 의지하는 것은 오직 쌀 뿐이라 이 쌀 한 가지를 팔아가지고 모든 것을 사는 터이니까 매우 곤란할 줄로 아옵니다. –중략– 조선 사람이 바라는 것은 미곡뿐인데, 미곡이 이렇게 떨어지면 조선 사람의 생활이 어찌 될는지 매우 위험하겠습니다. 물론 금후라도 다시 일본으로 수출만 하게 되면 다시 오를 줄 아옵니다. 연 전에 한 번에 별안간 삼원씩 사원씩 폭등하던 것도 전혀 일본 수출이 폭증한 까닭이었습니다. -동아일보 1920. 4. 17.- (현대어로 순화함)

이 글에서는 쌀값 폭락의 원인이 일본으로의 수출 중단과 직접 관련이 있으며, 다시 쌀값이 오를 수 있는 길도 일본으로의 수출밖에 없음을 말하고 있다. 이 글 어디에도 쌀을 빼앗겼다는 이야기나 그러한 느낌이 들게 하는 내용이 없다.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수출 상황임이 분명하다. 이렇게 어려웠던 수출 상황은 1921년 수확기에 진상품(進上品)으로 이름난 여주 이천의 자채미(紫彩米)가 일본에서 좋은 평을 받고 팔렸다는 반가운 기사와 함께 점차 호전(好轉)된다. 
 
경기도 여주 이천에서 산출하는 잣채쌀은 자고로 일찍 익는 종자로 유명하야 해마다 유월 유두 때가 되면 의레히 진상하는 쌀이 나는 터인 바 금년에도 금월 초생에 이천에서 산출한 햅쌀이 인천 시장에서 매매가 되었다 함은 이미 보도한 바이어니와 그동안 미곡검사소에서 검사를 마치고 지나간 17일에는 일본으로 수출이 되어 오사카[大阪]‧고베[神戶]의 시장에서 한 섬에 35원금으로 매매가 되었는데 일본 시장에서도 이와 같이 일찍 되는 종자는 매우 드물다고 크게 환영을 받았다더라. –동아일보 1921. 8. 26-

그동안 막혔던 수출길이 햅쌀 출하(出荷)와 함께 일본에서 좋은 값을 받게 되었다는 기쁨이 묻어나는 보도다. 이처럼 1920년대 동아일보 기사에는 거의 매일 미곡 관련 기사가 보도된다. 이 외에도 경성시장, 인천시장, 공설시장 등의 물가 시세가 보도되어 신문만 보면 세상 돌아가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는 그런 시기였다.
 
뿐만 아니라, 대일 미곡 무역과 직결 되는 기미(期米:정기적으로 거래되는 쌀, 선물 거래) 시세는 조선의 인천 기미시장 뿐만 아니라 일본의 고오베, 오사카, 도쿄 등지의 시세도 함께 보도되어 미곡상들에게는 필수의 정보였던 시기다. 기미는 당시 주식과 함께 2대 투기 상품으로서 일확천금을 노리고 투기에 뛰어들었다가 패가망신하는 부잣집 자제들의 모습도 심심찮게 보도되었다. 시장 기능이 충분히 작동되었을 뿐만 아니라, 중요한 대일 미곡 무역이 모두 시장 기능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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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미(期米) 시세표 - 1927. 9. 14. 동아일보

그런가 하면, 1925년 기사에는 우리 쌀이 일본 기미시장에서 차별 받는다는 내용과 함께 그에 대한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는 미곡상의 이야기가 실리기도 한다. 
 
일본취인소의 선미(鮮米) 격차 또는 별건(別建) 등은 당업자간에 매우 두통의 문제로 대책을 강구할 필요가 있는 바 그 대책으로 차제에 일시적 고식(姑息) 수단을 취함은 도리어 화근을 맨들 염려가 있으니 즉 실제상 효과가 있는 대책은 오직 조선내 미곡상이 일치단결함에 있을 뿐이오 현재에 취인소 각 시장이 임의로 취인상(取引上) 사정에 의(依)치 않고 공정시세를 정하야 이를 표준으로 일본의 쌀 상인과도 거래하기로 하고 혹은 도지마[堂島] 취인소는 수도미(受渡米)의 7할까지는 선미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별건을 창(唱)하야 부당한 격차를 생기게 하는 대책으로 품질을 개량하는 동시에 대외적으로 향상 개선을 도모할 필요가 있을 것이며 현금(現今) 일본 식량은 실로 선미의 풍흉출회 여하에 좌우되는 상태이나 조선내의 시세는 항상 시세가 변동됨을 고려할 바이니 사탕, 인도의 고무 등은 항상 상인의 단결력에 좌우됨을 생각하면 선미가 일본 시장에서 너무 냉대를 받는 것은 조선내 당업자로 간과할 수 없는 문제이다. 조선미 石 2원의 시세차는 곳 수이출고 4백만섬이라 할진대 8백만 원의 이해가 생기므로 충분히 단결하여 차 대책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동아일보 1925. 1. 27. 모실업가談-
 
별건(別建)이란 일본 미곡상들과 함께 거래하는 것이 아니라 별도의 시장을 마련하여 거래하도록 한 차별적 제도였다. 이에 대해 이 실업가는 조선 미곡상들이 합심 단결하여 영구적 방법을 찾아 이들의 차별 대우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자고 호소한 것이다. 그 방법으로는 품질을 개량하고 국내 공정 시세를 정하여 일본 미곡상들을 적절하게 상대하자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기미시장에서의 차별 대우는 일본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종종 일어나 조선 미곡상들의 반발을 사기도 하였다.

조선의 백미는 아무리 풍작이 된다 할지라도 이것을 외국으로 수출케 하기에는 극히 어렵고 다만 2~3백만 섬 씩이라도 수출될 여지가 있는 곳은 오직 일본뿐이니 일본도 근래에는 산미증식의 정책을 취하야 점차로 자급자족의 계획을 실현하려 하니 일본을 유일의 시장으로 하는 조선미의 수출도 그 장래가 대단히 위태하게 보인다. 그러면 백미 하나를 의지하여 가지고 먹고 입고 쓰며 활동하는 것을 얻으려하는 우리의 생업이 십분 안전하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동아일보 1924. 10. 6. 사설 ‘農業 專業의 위험’-

한편, 대일 쌀 수출량이 꾸준히 증가하는 상황에서 농업 편중의 조선 경제에 대한 위험성을 경고하는 자각의 목소리도 흘러나오기 시작한 것도 이 때쯤이다. 오로지 농업에만 의지하고 일본이 유일한 판로(販路)인 현실에서 일본의 자급자족이 해결되는 날에는 매우 위험하다는 경고였던 것이다. 이 경고는 훗날 일본의 쌀 생산량 증가로 조선미의 수출 길이 막히면서 비참한 현실로 드러나게 된다.
 
2. 조선 쌀 이입 통제와 산미증식계획 중단 
 
1921년 3백만 섬 초반 대에서 시작한 대일 미곡 수출은 해마다 증가하여 1928년이 되면 7백만 섬을 넘어서는 엄청난 증가세를 보인다. 하지만, 수출이 증가하면 국내 경제와 국민, 특히 헐벗은 농민들의 삶이 나아질 것으로 기대했던 조선은 오히려 그 반대 현상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에서 산미증식계획으로 쌀 생산량이 증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도 쌀 생산량이 증가하여 쌀값이 나날이 떨어지는 현상이 발행하였던 것이다. 생산량 증가와 조선 미의 이입(移入) 증가로 일본 내지미의 가격이 폭락하자 일본정부는 자국 농민 보호를 위해 조선 쌀에 대한 이입 억제책을 시행하게 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일본에서는 자국 내 미곡가의 안정을 위해 위해 정부에서 미곡을 수매하여 쌀의 수급을 조절하는 미곡법(米穀法)을 시행하였다. 1921년 정부 주도의 수급 조절책인 미곡법이 시행되면서부터 일본에서는 조선에도 이 법을 적용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조선의 여건상 시기상조라는 일부의 반대에 의해 산미증식계획이 중단되기 바로 전해인 1933년 미곡통제법이 제정되기까지는 시행되지 못하였다. 하지만, 일본은 미곡법이 아닌 다른 여러 억제책을 동원하여 조선 쌀의 일본 이입을 억제하였다.
 
1929년 11월 16일자 기사에 의하면, 일본 정부에서 조선미의 이입인가(移入認可)를 제한하는 조치를 취하게 되자, 조선총독부 마쓰무라[松村] 식산국장은 이를 화급히 저지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는 먼저 이입인가 제한에 반대하는 전보를 본국으로 보내고 곧바로 동경으로 건너갔다. 반대의 뜻을 더욱 분명히 하기 위해서였다.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저지한 데는 일본에서 조선 쌀 이입을 제한하게 되면 산미증식으로 생산한 미곡의 판로가 막힌 조선인의 극심한 반발이 예상되고, 그로 인하여 앞으로의 산미증식정책과 조선 통치 상에도 좋지 못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조선미의 일본 수출이 얼마나 중요한 현안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다.
 
1930년 1월 21일자 기사에는 일본이 시행하고자 하는 ‘조선미 이입 통제안’에 대한 반대 주장을 피력하면서 조선미가 일본 농민에게 타격을 주는 이유를 진단하고 있다.
 
현재 일본의 미곡 조사회에서 문제가 되어 있는 소위 “조선미 이입 통제안”에 대하여 간단히 그 내용의 개략을 말해보자. 일본을 주체로 보니까 이입 통제안이지 조선을 주체로 보면 이출 통제안이다. 고로 이입 통제안이라 하나 이출 통제안이라 하나 결국 같은 말이다. 그런데 일본서 현재 조선미에 대한 문제가 중대시 되는 이유는 (1) 조선미의 이입 수량이 연년이 격증할 뿐만 아니라 (2) 거액의 조선미가 신곡기로부터 3~4개월간에 일시에 일본으로 유입하는 관계로 일본 내 미곡시장에서의 미가를 폭락시키어서 그러지 않아도 10여 년간을 두고 계속 불경기로 크게 곤궁한 처지에 빠져 헤매는 일본 농민에게 이중의 타격을 준다는데 있다. -동아일보 1930. 1. 21. 기획연재-

소작인이 대부분인 80% 내외의 조선 농민들은 한 해 쌀 생산량의 약 7~80%를 지주에게 착취당하고 겨우 남은 쌀로 다음 추수 때까지 살아야 한다. 소작인에게는 늘 공포의 대상인 지주는 종자 값, 농기구 이용료, 물 값, 청채(淸債:빚 청산) 등 각종 명목으로 소작인을 착취하였으니 이 둘 사이의 관계가 바로 수탈이고 피탈이다. 조선의 소작인을 착취와 수탈의 대상으로 삼은 장본인은 바로 대단위 토지를 겸병(兼倂)하는 지주였으며 그 중에는 일본인 지주의 비율이 조선인을 앞지르고 있었다.
 
농민들의 쌀은 지주에게 착취당하고 세금이나 동절준비 등의 급박한 사정에 쓰이다보면 추수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닥이 나 버린다. 농민들이 파는 대로 사들인 미곡상과 호농(豪農)은 이를 저장할 만한 창고가 없을 뿐만 아니라 미곡자금도 부족한 까닭에 중소농이 파는 대로 사고 또 사는 대로 일본으로 이출(移出)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이러한 사정에 의하여 조선미가 신곡기 근방 약 3~4개월 동안 일시에 다량으로 일본으로 수출되어 일본 내지미 가격 폭락의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이에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는 인천을 비롯한 주요 수출항에 미곡 창고를 설치하여 쌀을 보관하게 하고 저리 융자를 제공함으로써 순차적으로 이입되도록 조절하여 일본 쌀값 하락을 막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도 미곡상들의 경제적 능력 부족으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하였다. 비록 저리의 융자이기는 하나 몇 개월 동안이나 창고에 보관해둘 만큼 경제력이 뒷받침해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수출항이나 각 지역에 있었던 일제의 미곡 창고는 지금까지 알려진 바와 달리 수탈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일본이 조선 쌀 이입을 막기 위한 궁여지책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미(米) 이입을 막아 값을 유지하자] 제국농회는 22일 오후 5시 반 사무소에 평의원회를 열고 25~6 양일의 전국평위원회를 경유하야 내월 하순의 총회에 부의할 제안 (1)6년도 예산 약 1할 감 (2)미가유지 (3)농가부담의 경감 (4) 견가유지 (5)농가의 부채정리 등을 결하였는데 미가유지에 대하여도 외미의 수입관세를 증액하야 사실상 수입을 금지하고 만주에서 조선에 수입되는 미의 취체(取締)를 엄중히 하고 조선미의 일본이입에 대하여는 일본미와 같이 당업자 제국농회 등이 제휴하야 월별 평균으로 매출하고 시장에 미의 홍수출현을 막으며 조선의 속(粟) 수입 제한을 하고 미곡법의 개정을 빨리 실현케 하는 등이라 한다. -동아일보 1930. 9. 24-
 
이는 조선 쌀이 일본 쌀값을 지속적으로 위협하자 일본의 직접 이해당자사인 제국농회(帝國農會)는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 조선 쌀의 이입을 막으려 하였음을 볼 수 있는 기사다. 1930년 제국농회는 평의원회(評議員會)를 열어 다섯 가지 핵심 사안에 대한 결의를 하였는데, 그 중 조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2)번의 미가 유지 항목이다. 이들은 조선 미의 수입을 막기 위해 조선 미곡상을 제국농회와 제휴하도록 함으로써 자신들의 통제 아래 두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조선 내에서 쌀 소비량을 늘리기 위한 방법으로 만주미 수입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고 만주속(粟) 수입을 제한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1930년대가 되면서 일본이나 조선 모두 쌀값 문제가 경제 문제에서 사회 문제로 비화하면서 서서히 산미증식안의 중지를 요구하는 기사가 자주 등장하게 된다.
 
조선 농민도 쌀밥을 먹고 싶어 하나 조밥을 먹게 되며 조밥이나마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빈약한 구매력의 소지자이다. 과거 2~3년간 수재와 한재로 흉작의 비참을 당하다가 금년엔 3백여만 섬이 증가되었으나 도리어 미증유의 미가 폭락으로 구매력의 증대는 고사하고 일반 농민은 생사의 기로에서 방황하며 일본 시장은 조선미의 배척을 결의하지 않았는가. 불과 3백여만 섬 증가도 소비하기 불능한 일본 시장을 상대로 한 8백 2십만 섬의 산미증식안의 전도는 이미 운명을 결(缺)한 것이 아니냐. 산미증식안 건립 당시 추정한 섬당 12원대 설에 대하여 오인(吾人)은 이것을 합리적 기준이라고는 아니하나 당국은 이나마도 능히 유지할 역량이 있느냐 하면 그 불가능함이 현실에 의하여 입증되는 바가 아닌가? 미가는 더욱 폭락할 뿐이며 따라서 농민의 생활은 근본적으로 동요된다. 기설(旣設)‧미설(未設) 수리조합 중에는 그 관계 주민, 지주, 농민 등의 반대와 불평이 자자함에도 불구하고 거의 관력의 위압으로 강행하는 것도 없지 아니하다. 실로 조선 농촌을 구제하려면 현재의 미산(米産) 면적을 한정하고 차라리 부업 장려 등으로 농가 수입을 다각화할 필요는 있을망정 무한정 미작을 확장함은 무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오인은 미가문제의 근본대책으로 생산조절을 역설(力說)하는 동시에 산미증식안의 중지를 주장하는 바이다. -동아일보 1930. 10. 25.-

1930년이면 조선이나 일본 할 것 없이 대풍작을 이룬 해로 조선은 1,918만 섬이라는 유례없는 생산고를 이룬 해다. 하지만, 대풍의 열매는 농민들에게 풍요를 선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통과 비참함을 안겨주었다. 쌀이 넘쳐나며 일본에서도 수입을 막아 쌀값이 폭락한 것이다. 풍작이 되면 생활이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으로 1년간 피땀을 흘려 농사지었으나 그 결과는 참담했다. 대일 쌀 수출량이 급격히 줄어들면서 국내 쌀값이 폭락하여 최소한의 생산비도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풍작흉년(豊作凶年), 풍작공포(豊作恐怖), 풍작저주(豊作咀呪)라는 말이 공공연히 떠도는 것이 바로 당시 조선의 비참한 현실이었다. 쌀값 폭락으로 농민들이 궁폐하기는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쌀 생산량의 증가는 산미증식계획에 있으며, 생산된 쌀을 일본이 수입하지 않는 상황에서 더 이상의 산미증식안은 농민들에게 고통만 안겨준다는 인식이 팽배한 상황에서 이 정책 중단 요구한는 목소리도 점점 높아만 갔다.
 
쌀값 폭락 문제는 조선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일본에서도 풍작으로 인한 쌀값 폭락에다 조선 쌀까지 유입되어 쌀값 폭락을 가중시키자 조선 쌀 이입 반대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지고, 조선에서는 또 일본의 조선 쌀 이입 억제책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었다.  
 
미곡 응급대책의 하나인 외미 수입 방알(防遏)은 극히 양호하나 조선미 이입 조절은 정부가 천구백만원의 저자(低資) 융통에 의한 농업 창고 보관 이외 철저적 시설을 하지 못하얏슴으로 이입 조절의 실적이 불량하야 십이월의 조선미 이입수량은 944,198섬으로 일작년보다 52,589섬 증가하고 농림성의 기대에 반하야 1월에 입하야도 조선미 이입은 증가경향을 시(示)하야 일본미를 압박하고 최근의 미가 저락의 인(因)을 성하고 있음으로 조선미의 이입 월할 평균의 불철저에 대하여 농회(農會) 방면에서는 벌서부터 정부 공격의 성을 거(擧)하고 있다. -동아일보 -1931. 1. 12.-

일본의 제국농회의 이런 조선 쌀 이입 억제를 위한 노력에도 증산된 쌀이 일본 시장으로 꾸역꾸역 밀고 들어가자 조선 쌀 이입의 증가를 이유로 일본 농회(農會) 방면에서 정부를 공격하는 소리가 연초부터 일어난 것이다. 이어 6월 11일에는 ‘매년 미작 제2회 수확 예상에 의하야 당년의 생산과 수요량을 계산하야 양자의 이입량을 제한하되 평년작에 있어서는 조선미는 600만섬, 대만미는 200만 섬을 한도로 하야 그 이입을 허하자.’는 결의를 하게 된다. 이처럼 조선미의 이입을 제한하는 내용을 결의하여 법률안까지 제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동아일보는 사설을 통해 이를 절대로 반대한다는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조선의 입장으로 앉아서는, 그 방법의 여하를 물론하고 어떠한 종류의 이입제한이든지 그것이 털끝만치라도 조선미의 일본 이출을 방해하는 성질의 것이면, 차(此)를 절대로 반대할 수밖에 없다. 물론 현행 미곡법을 처음으로 실시하던 대정10년(1921) 경과는 아주 달라서 그 후 10년을 경과한 금일에 와서는 일본 내의 미가를 압박하는 최대 원인이 조선미의 일본 유입에 있다는 사정쯤은 조선농민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이 사정은 조선이 자진하야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일본이 그 인구문제와 식량문제의 해결에 있어서 자급 자족책을 목표로 조선에다가 조선자체가 필요로 하는 정도 이상의 방대한 산미증식계획을 실시하였기 때문이다. 고로 금일에 와서 조선미의 이입을 제한하여 해당 산미증식계획 실시의 결과로부터 오는 손해의 전부를 다만 조선 농민에게만 전가해야 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쯤은 일본 농민도 차(此)를 이해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2~3년간 에 일본 농민을 대표한 제국농회가 수차에 긍하야 아모 기탄없이 이러한 결의를 하는 것을 본 우리는 그 실현 여부는 고사막론(姑捨莫論)하고라도 그 너무나 감식고토, 아리(我利) 위주의 태도에 다만 놀랠 따름이다. 여하간 조선농민의 입장으로 앉아서는, 법률의 제정 실시에 의한 이입제한에 차를 절대로 반대함은 물론이오 그 소위 경제적 시설에 의한 이입 제한일지라도 창고설치, 저자융통의 주요 목적이 조선농민의 편의를 도모하는데 있지 아니하고, 조선미의 유출 자유를 속박하는데 있는 이상 차에는 절대로 반대를 표명할 수밖에 없다. -1931. 6. 16. 동아일보 사설-

이제 조선에서의 쌀값 하락은 해결의 탈출구를 찾을 수 없었다. 일본은 자국 농민들의 반발을 잠재우기 위해 조선 쌀에 관세(關稅)를 부과하고 이입특허제(移入特許制)라는 특단의 조치를 시행하여 조선 쌀의 이입(移入)을 막고자 하였던 것이다.
 
일본서는 조선미 이입을 제한하기 위하야 조선미에 관세를 과하든지 월별로 법률로 이입을 제한하든지 최고 이입액을 제한하여야 되겠다는 설이 있었으므로 조선 측에서는 그 완화에 노력하는 동시에 농창상창을 설립하여 경제작용으로 대일 이출을 제한하야 왔다. 그러했지마는 최근 일본 농촌의 궁폐(窮弊)가 더욱 심해가매 그 대책의 일종으로 조선미 이입을 단순한 경제문제로만 아니라 사회문제로 생각하게 되어 경제작용 외에 강대한 힘으로 조선미를 압박하자는 설이 농림성을 비롯하여 일본적 여론으로 대두하였으므로 조선 미곡 관계 업자를 비롯하여 재계관계자며 총독부에서까지 여론과 같이 극단의 조선미 이입 제한은 조선의 사활문제라고 하야 13일 오후 3시부터 총독부에 정무총감 식산국장 외 유력한 인사 13명이 모여 대책을 협의한 결과 순 민간 기관으로 ‘조선미옹호기성회’를 조직하고 총독부를 편달하는 한편으로 조선미 옹호에 활동하게 되었다. -동아일보, 1932. 7. 15.-
 
조선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 조선미의 이입 통제 정책은 점점 그 강도를 더해가자 이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였으니 바로 ‘선미옹호기성회(鮮米擁護期成會)’의 활동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어떠한 대응도 쌀값이 계속 하락하는 데는 백약이 무효였다. 설상가상으로 1929년 10월 24일에 뉴욕 증시 폭락으로 시작된 세계 경제공황과 쌀값 하락으로 더 이상의 명분도 탄력도 상실한 산미증식계획은 결국 1934년이 되어 중단하게 된다.
 
이러한 산미증식계획 중단에 대해『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아래와 같이 서술하였다.
제1차 계획은 1921년부터 1925년까지의 5개년 계획이었다. 제2차 계획은 1926년부터 1935년까지의 10개년 계획이었다. 그런데 10개년 계획이 1934년에 중단된 것은 조선미의 대일 수출 증대로 일본 농업이 위기에 부딪쳤기 때문이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산미증식계획의 중단이 ‘조선미의 대일 수출 증대’가 그 원인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정황에 수탈이란 말은 어디에도 끼어들 틈이 없다. 1920년대 대일 미곡 수출을 두고 수탈이라 함은 역사 왜곡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3. 현행 한국사 교과서의 서술
 
다음은 현행 8종 교과서의 서술 문제다. 산미 증식 계획과 관련하여 각 교과서에 사용된 용어를 정리하여 보면 아래와 같다. 
 
출판사
교과서 서술
채택률
미래엔
반출(2), 수탈(2)
33.2%
비상교육
수출, 유출, 빠져나가다
29.4%
천재교육
수출, 반출, 가져가다(2)
16.0%
금성출판사
반출(3)
7.5%
지학사
반출(2), 가져가다(2)
6.1%
리베르스쿨
반출(2), 수탈(4), 약탈, 수입, 가져갔다
4.1%
동아출판
판매, 유출,
3.6%
교학사
반출, 수탈(2)
0%
 
※ 2014년 기준.( )안 숫자는 노출 횟수  
 
이를 살펴보면 산미 증식 계획이라는 하나의 사안에 대해 그 표현이 너무나 다양하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역시 ‘수탈’이라는 표현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1920년대 대일 미곡 무역은 엄연한 수출로 수탈이라는 표현은 명백한 역사 왜곡이고 오류다.
 
또 대부분의 교과서에 사용된 반출(搬出)이라는 용어도 합당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1920년대 당시 신문 기사에는 거래된 상품이 국내의 도(道)에서 도(道) 사이에 이동될 때 사용된 용어다. ‘타도(他道) 반출’이란 용어가 당시 신문에 자주 등장하는 것은 이러한 뜻이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일부 교과서에 사용된 유출이라는 용어의 사전적 의미는 ‘귀중한 물품이나 정보 따위가 불법적으로 나라나 조직의 밖으로 나가 버림. 또는 그것을 내보냄.’이라고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정의하고 있다. 유출도 합당한 용어가 될 수 없는 이유다.
 
리베르스쿨 교과서는 ‘일제는 부족한 쌀을 우리나라에서 약탈하기 위해 산미 증식 계획을 시행했다.’며 약탈이라는 용어를 썼다. 약탈은 ‘폭력을 써서 남의 것을 억지로 빼앗다.’는 뜻의 단어로 과연 여기에 합당한 용어인지 한 번이라도 생각하고 집필했는지 의심스럽다. 그러면서도 이 교과서는 ‘수입’이라는 단어를 써서 아래와 같이 서술함으로써 은연중에 수출임을 인정하였다. 
 
산미 증식 계획은 1930년대 들어 일본의 쌀값이 하락하자 일본 지주들이 우리나라 쌀의 수입을 반대하여 1934에 중단되었다.<리베르스쿨 한국사, 279>
 
마지막으로 현행 교과서 어디에도 산미증식계획을 ‘수탈정책’이라 한 곳이 없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이번 수능 한국사 15번에서는 ‘수탈 정책’이라는 용어가 마치 일반화된 것처럼 출제하였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수탈이 뭔지 수탈 정책이 뭔지도 모르고 시험을 보았다는 뜻이다. 이는 분명 잘못된 지문을 전제로 한 문제이기 때문에 반드시 무효 처리되어야 한다.▩   
 
등록일 : 2017-12-01 11:01   |  수정일 : 2017-12-11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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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현위원의  ( 2017-12-04 )  답글보이기 찬성 : 3 반대 : 0
피를 토하는 한국역사관련 씨리즈를 보면서, 이나라에 수많은 역사학자나 역사선생들이 있겠건마는 어느 쥐새끼 한마리 나서서 동조하거나 반대하는 것을 못본것 같다. 어찌 된건가? 역사라는 것이 귀에도 걸고 코에도 걸어서 바뀔수가 있는 것이냐? 대중이가 명령한다. "그 똥내나는 아가리라도 벌리거라"
김찬훈  ( 2017-12-03 )  답글보이기 찬성 : 16 반대 : 0
역사를 모르는 내가 봐도 정말 말도 안되게 왜곡 되었군요. 전국민이 봐야할 것 같습니다. 이런 말도 안되는 것으로 수능을 치다니...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이것이 정말 사실이라면 국민 신문고에 게재하시고 정말 면밀한 분석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수능 출제위원들이 결정할 문제가 아닌것 같군요.
      답글보이기  국민신문고  ( 2017-12-04 )  찬성 : 3 반대 : 0
혹시 내로남불 신문고 아닐까? 유유상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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