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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회 박정희 대통령 탄생 100주년 시민강좌 | “박정희는 왜 개헌을 했나?”

“박정희에게 민주주의는 하느님이 아니라 국민 위한 도구”

⊙ “산업혁명 성공을 위한 국력 총동원 필요성이 헌법개정으로 나타나” (이동호)
⊙ “언론, 검찰, 법원, 국회, 귀족노조 5개의 수구반동 세력에게 장악된 대한민국” (조갑제)
⊙ “국가 생존을 위해 제퍼슨의 ‘모범적 민주주의’ 방식으로 통치할 수는 없어” (이춘근)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글 | 이상흔, 최우석, 박희석, 김정현 월간조선 기자

▲ 지난 4월 4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제6회 ‘박정희 대통령 탄생 100주년 기념 시민강좌’가 4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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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조선》과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이 공동으로 진행 중인 ‘박정희 대통령 탄생 100주년 기념 시민강좌’가 6회째를 맞았다. 작년 11월 첫 행사를 시작한 이래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구속되고, 대선(大選) 정국이 진행되는 등 굵직한 시국변화가 있었지만, 시민강좌의 열기는 식지 않았다. 지난 4월 4일 열린 제6회 행사에는 400여 명의 시민이 참석했다. 이번 강연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이 장기 집권 기반을 마련한 삼선개헌(三選改憲, 1969)과 유신헌법(維新憲法, 1972) 문제를 다루었다.
 
  3선개헌과 유신 체제는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대중의 평가에서 찬반이 극명하게 갈리는 대목이기도 하다. 제6회 강연에서는 ‘박정희는 왜 개헌(改憲)을 했나?’라는 주제로 이동호 캠페인전략연구원장이 주제발표를 했고, 이어서 조갑제 조갑제닷컴대표와 이춘근 한국해양전략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이 토론을 이어갔다. 아래 강연 내용을 요약 소개한다.
 
  본 행사의 전체 동영상은 《월간조선》 홈페이지(monthly.chosun.com)를 통해 볼 수 있다. 다음 강연은 대선 하루 전날인 5월 8일(월) 같은 장소에서 열릴 예정이다.
 
 

  나는 대학 학생운동을 하던 시절에 박정희 대통령을 적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이룩한 산업혁명은 실패하고 나라를 패망의 나락으로 이끌 것이며, 국내 자본을 외국 자본에 종속시키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우리가 물건을 만들면 만들수록 수출을 하면 할수록 경제는 일본과 미국에 예속되고, 민중은 점점 죽음의 길로 빠질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이 생각은 바뀌어야 했다. 내가 다시 본 대한민국은 제3세계에서 유일하게 산업혁명을 성공적으로 일구었고, 제3세계 국가들이 존경해 마지 않고 본보기로 삼는 나라가 되었다. 나는 이런 나라를 저주했던 나 자신이 매우 실망스러웠다. 그래서 조국 근대화를 앞장서 이룩한 박정희 대통령의 영정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나는 죄인이다’라며 울 수밖에 없었다. 이 기회를 빌려 다시 한번 대한민국을 이끌어 준 박 대통령과 그 시대를 함께했던 선배 여러분께 깊은 존경의 말씀을 드린다.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의 근원은 ‘민주주의를 짓밟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조국근대화론과 대중경제론》을 쓴 김일영 전 성균관대 교수는 “민주주의와 경제를 병행해서 발전시킨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한 번도 이루어진 사실이 없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의 논지에 따르면 민주주의 발전을 통해 경제도 발전시킨다는 것은 철부지들의 소박한 낙관론이라는 것이다. 김일영 교수에 따르면 민주주의와 경제를 동시에 발전시킨 모델이라고 주장하는 영국의 경우도 참정권의 보편적 확대를 뜻하는 민주주의의 확대는 1918년 노동자가 선거권을 얻었고, 부녀자를 포함한 일반국민 전체에 참정권이 확대된 것은 1928년이었다. 당시 영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1990년 미국 달러 기준으로 환산하면 5115달러였다. 이때에야 영국에서는 오늘날과 같은 의미에서의 제도와 절차를 갖춘 ‘보통민주주의(mass democracy)’가 확립되었다. 다시 말하면 민주주의 발전과 경제발전이 동시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경제가 발전하고 민주주의의 발전이 최종 완성되었다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이다.
 
  미국의 정치학자 로버트 달은 대부분의 서양 선진국에서 민주주의의 고도화는 국민소득이 4000달러에서 7000달러 사이에 있을 때 일어났다고 분석했다. 김일영과 로버트 달의 분석은 동시에 한 지점을 바라보고 있다. 산업혁명이 일어나 경제가 발전한 나라에서 민주주의의 고도화가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한국에서 민주주의의 고도화가 실제로 이루어진 1987년 민주화의 대진전도 당시 한국의 국민소득이 5000달러 정도였다. 산업혁명을 통해 자신의 재산을 가진 중산층이 대규모로 증가하고, 이들에 의해 민주화의 진전이 이루어졌다고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대부분의 산업혁명은 서구에서는 절대왕정하에서 일어났다. 산업혁명이 민주주의 나라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권력이 고도로 집중된 나라에서 산업혁명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박정희는 산업혁명의 성공을 위해 국력을 조직화하여 총동원할 필요가 있었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헌법개정으로 나타났다고 할 것이다. 박정희의 산업혁명은 성공했다. 그리고 국민소득은 늘어났고 늘어난 소득만큼 중산층도 급격히 증가했다. 그 중산층이 중심이 되어 1987년 민주주의의 고도화를 이루어 내었다.
 
  결국 박정희가 중심이 되어 이룬 한국의 산업화가 오늘의 민주화를 이룩한 것이다. 흔히 민주주의를 민주화 투사들이 이룩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오늘의 연구에 따르면 이는 허구에 가까운 신화다. 민주주의는 민주화 투쟁으로 이룩되는 것이 아니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산업화가 민주주의를 이룩하는 기초를 만들었다는 것이 현재의 역사적 경험이고, 이는 사실로 인정되고 있다.
 
 
  김대중의 대중경제론 등장과 박정희
 
  이영훈 교수는 후발 기업이나 국가가 선발 기업이나 국가를 추격하기 위해서는 선발자들이 겪었던 여러 단계들을 생략하거나 아예 다른 경로를 개척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는 후발 국가인 한국이 산업혁명을 이루기 위해 선택한 ‘발전국가’를 ‘한국적 국가혁신 체제’로 정의했다. 이러한 한국적 국가혁신 체제는 국내의 정치적 경쟁자의 격렬한 저항에 직면해야 했다. 정치적 경쟁자는 모든 분야에서 저항했다. 특히 김대중은 박정희 정부가 추진하던 경부고속도로 건설, 향토예비군제 등을 앞장서서 반대했으며, 야당의 경제통으로서 정부의 경제적 실정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김대중은 1971년 7대 대통령선거에서 ‘대중경제론’을 들고 나왔다. 김대중은 ▲예비군 완전 폐지 ▲영구집권의 총통 체제 구상의 분쇄 ▲대중경제 실현과 농업혁명 추진 ▲부유세 신설 등을 약속했다. 박정희의 산업혁명을 위한 국가혁신 체제와 김대중의 대중경제론은 타협이 불가한 근본주의적인 대립이었다. 김대중의 대중경제론은 6·25 때 소년 빨치산으로 활동한 박현채가 집필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를 알면 대중경제론이 왜 마오쩌둥의 신민주주의론과 반제반봉건 혁명론과 맥락이 같은지 충분히 이해된다.
 
  박정희는 공산주의를 잘 아는 사람이다. 박정희는 그의 남로당 활동 때문에 죽음 일보 직전까지 같다. 그런 그가 김대중의 대중경제론을 대했을 때 어떤 표정이었을까?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는 대중경제론이 남한혁명론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많다. 박정희가 북한과 남북협상 시 남측 협상대표에게 내린 지침은 공산주의자의 전술을 명확히 알고 있는 사람만이 내릴 수 있는 지침이었다.
 
  이에 미루어 볼 때 김대중의 대중경제론에 대해서도 그 배경을 능히 짐작했을 것이다. 박정희의 선택을 대중경제론을 주장하는 사람과 세력에게 권력을 넘겨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결심했을 것이다. 만일 대중경제론자들이 국가권력을 획득한다면 이제까지 그가 이룩한 국가혁신 체제와 그에 따른 산업혁명은 물거품으로 돌아갈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박정희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대중경제론은 적지 않은 성공을 거두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3선에 성공했지만 고전했다. 박정희는 야당의 강력한 도전에 직면하여 선택을 강요받고 있었다.
 
 
  중화학공업의 육성을 위한 국가혁신 체제의 필요성
 
제7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한 박정희 후보가 1971년 4월 25일 장충단 유세에서 ‘나의 지지를 호소하는 마지막 정치연설’임을 역설하고 있다.
  1971년 10월 한국경제는 수출 10억 달러의 고지를 넘었다. 그렇지만 향후 전망은 불투명했다. 조립·가공무역을 중심으로 하는 수출이 한계에 도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한계에 도달한 조립·가공무역 중심에서 중화학공업 중심으로 전환을 계획하고 있었다. 중화학공업을 중심으로 수출의 주력을 교체하는 것은 단순히 경제적 요구를 넘어 국가방위라는 요구에 직면한 해결책이기도 했다. 이즈음 북한은 무장게릴라를 내려보내 청와대를 기습하거나 울진·삼척 지역을 짓밟는 등의 호전적 대남공세를 펼쳤으며, 미국에 대해서도 푸에블로호 나포나 EC-121기 격추 등 대결적 자세를 보였다. 이 같은 북한의 공세에 대해 미국이 적극적으로 대응하기는커녕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고, 더 나아가 중국과 화해하고 주한미군까지 일방적으로 철수시키려 하자 박정희의 안보적 위기감은 극도로 고조되었다.
 
  박정희는 1972년 1월 연두 기자회견에서 ‘자주국방’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자주국방을 위해서는 중화학공업을 육성하는 것이 가장 핵심 되는 과제였다. 박정희는 1971년 3선 대통령에 취임할 즈음 이전 10년의 경제개발 경험을 바탕으로 전혀 새로운 차원의 경제건설과 자주국방, 농촌의 근대화 등 구체적인 청사진을 준비하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1975년 7월까지였다. 한국의 산업혁명은 박정희의 경험과 지도력으로 추동되고 있는 현실과 야당의 대중경제론 등장으로 만일 정권이 넘어가면 분명히 자신이 이룩한 성과와 업적뿐만 아니라 한국경제가 후퇴할 것이 분명했다.
 
  박정희의 선택은 중화학공업으로 전환을 위한 국가혁신 체제를 위해 유신을 감행한 것이다. 이는 결국 안보적 위기와 경제적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다. 1972년 10월에 단행된 제7차 개헌(유신헌법)에서 박정희는 한국적 민주주의의 토착화를 내세우고 있다. 그는 국가혁신 체제를 위해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하고, 대통령이 국회의 반대에도 산업혁명을 지속할 수 있게 국회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였다.
 
  박정희의 개헌은 안보위기 극복과 중화학공업의 육성 등을 위한 국가혁신 체제였다. 이영훈은 중화학공업 육성을 포함한 제3차 경제개발계획은 정상적인 민주제 방식으로는 달성되기 어려웠다고 분석했다. 김일영 교수는 “대중경제론과 박정희의 조국근대화론 가운데 무엇이 옳았는가는 이미 역사적 경험으로 판명이 났다”고 말했다. 인간과 사회의 문제는 실험할 수 없다. 결국 인간과 사회의 문제에 대한 해답은 역사적 사례를 검토하여 판단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인도, 중국, 북한의 경험이 말하는 바는 어느 노선이 옳았는가를 말해 주는 가장 강력한 증거다. 박정희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모든 증거는 말하고 있다.
 
 

  1972년 10월 17일의 유신 선포를 일부에서는 5·16에 이은 ‘제2의 쿠데타’라고 한다. 헌정질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헌법을 제정했으니까 맞는 이야기다.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을 한 가장 큰 원인 제공자는 김대중씨라고 할 수 있다. 김대중은 1968년 1·21 사태로 서울 시내에서 시가전이 벌어진 후 만들어진 예비군을 폐지하겠다고 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얼마나 화가 났겠는가. 박정희는 선거의 위험성과 어린 민주주의의 취약성을 실감했다. 그것이 유신개헌으로 가는 동기가 되었다.
 
  박정희는 1971년 4월 선거에서 김대중에 90만 표 차이로 이겼다. 박정희는 이 결과에 무척 실망했다. 한편으로는 국민에게 섭섭했을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김대중 같은 선동가가 나오면 이상한 사람이 정권을 잡을 수도 있겠다는 사실을 실감했을 것이다. 이 점은 당시 김종필 공화당 총재나 박정희의 비서관들이 증언하는 바다. 이때부터 박정희는 자신이 목숨을 걸고라도 이런 식의 민주주의와 선거는 더 이상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대한민국의 현실과 역사발전 단계에 맞는 국가 제도를 새로 짜야겠다고 결심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주제 발표를 한 이동호 원장과 나와의 접점은 바로 ‘김대중’이라고 할 수 있다. 김대중은 걸출한 대중 정치인이다. 대중 정치인은 본질적으로 대중영합주의자며 선동가다. 그렇게 해야 표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선동에 넘어갈 수 있다는 결정적 취약점을 가진 제도다. 이는 고대부터 지금까지도 계속되는 문제다. 유권자가 선동에 속아 넘어가면 민주주의는 전체주의화할 수도 있고, 히틀러를 뽑을 수도 있고, 김대중을 뽑을 수도 있고, 이승만을 뽑을 수도 있다. 민주주의는 여러 가지 가변성이 너무 큰 제도다.
 
  박정희는 민주주의의 본질적인 한계와 선거의 위험성을 절실하게 느꼈다. 이와 더불어 당시의 격변하는 국제정세는 박정희로 하여금 자주국방의 의지를 다지게 했다. 자주국방에 성공하려면 중화학공업의 기반을 갖추어야 했다. 중화학공업이 성공하려면 국가제도가 능률적이어야 한다. 박정희가 한 유명한 말 중에 ‘국력의 조직화를 통한 능률의 극대화’다. 이를 위해서 한국 실정에 맞는 민주 체제를 만들겠다고 한 것이 유신개혁의 동기였다고 생각한다.
 
  유신 7년은 한국 주변에서 닥친 위기를 극복하는 힘을 주었다. 망망대해에서 아무리 큰 비바람이 몰아쳐도 배는 나아간다. 그러나 전제조건이 있다. 바로 엔진이 꺼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1970년대는 국제적으로 질풍노도의 시대였다. 1973년 제4차 중동전쟁으로 인한 1차 석유파동으로 석유 수입 값이 4배로 뛰었다. 1979년 2차 오일쇼크에서는 기름값이 두 배로 뛰었다. 결국 1970년대 초 2달러 하던 기름값이 1979년에 38달러가 되었다.
 
  이때 한국은 중화학공업을 벌려 놓은 상태였다. 박정희는 중화학공업 정책을 포기해야 하느냐 마느냐 하는 기로에서 중화학공업 정책을 계속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당시로서는 아주 무리한 선택이었지만, 결국은 성공했다. 바로 유신으로 정치권력이 안정되었기 때문이다. 언론과 국회에 휘둘려서 쓸데없는 데 투자하는 것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국력의 조직화와 능률의 극대화가 결국 중화학공업 건설의 성공으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 구속은 10·26의 연장선에서 이해해야
 
유신헌법이 공포된 1972년 12월 27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제8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취임 선서를 하고 있다.
  유신은 박정희가 ‘혁명가’라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혁명가는 기본질서뿐 아니라 기존의 가치관을 부정하는 사람이다. 기존 한국의 가치관 속에서 민주주의는 하느님과 동격이었다. 하지만 박정희에게 민주주의는 하느님이 아니라, 국가발전과 국민행복을 위한 도구였다. 박정희는 서구에서나 적용될 수 있는 민주주의를 후발 한국에 그대로 적용하면 안 되고, 이를 한국적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만 그는 민주주의의 기본정신인 자유와 창의성은 유지 발전시켜야 한다는 아주 균형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이승만·박정희야말로 김대중·김영삼보다 더 민주주의적 인물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대목이다. 민주주의적 잣대로 정확하게 평가하면 이승만·박정희가 김영삼·김대중보다 훨씬 더 민주주의자다. 민주주의는 세 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는데 국가안전과 자유, 그리고 복지다. 이 세 가지를 보장하는 것이 민주주의다. 이 가운데 양김(兩金)은 자유만 강조했고, 이승만과 박정희는 민주주의를 종합적인 차원에서 파악했다.
 
  박정희는 결국 유신개헌 때문에 10·26 사태를 맞았다. 그는 유신을 선포할 때 “민족의 재단에 나를 바쳤다”는 예언적인 이야기를 했다. 박정희의 죽음에 대해 ‘한국의 봉건적 잔재와 싸우다가 전사(戰死)한 사람’이라는 역사적 평가를 한 사람이 있는데 정확한 평가다. 10·26은 박정희의 실용적 정치, 주체적 정치, 상무(尙武)적 정신이 김영삼·김대중으로 대표되는 관념적이고 사대주의적인 민주주의론자들과의 대결 과정에서 일어났다. 바로 김재규는 박정희식 민주주의 신념자가 아니라 김대중·김영삼식 민주주의에 포섭되고 세뇌된 결과로 방아쇠를 당기게 됐다고 보기 때문이다.
 
  10·26 사건을 연장해서 들여다보면 이번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과 구속 사태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다. 현재 최순실 사태로 감옥에 가 있는 사람들을 보면 한국 자본주의의 중심인 이재용 삼성 부회장, 반공자유민주주의 수호자였던 박근혜 대통령, 종북 좌익과 싸우는 데 가장 중심 역할을 했던 김기춘 전 비서실장이다. 이들을 감옥에 넣은 사람들은 김영삼·김대중·노무현 노선의 후계자들이다. 이들이 동원한 수단이 바로 언론, 검찰, 법원, 국회, 노조 이 5개 세력이다. 나는 이 5개 세력을 한국사회의 봉건적 기득권 세력, 즉 수구반동 세력이라고 규정한다.
 
  문제는 이 수구반동 세력이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원래 과거 시험 합격자가 권력을 잡아 온 나라다. 이 5개의 수구반동 세력들은 조선조(朝鮮朝)의 정치를 주무른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이조전랑의 후예들이다. 이들이 현재 검찰권, 언론권, 재판권을 장악하면서 한국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한국 정치사에서 이 흐름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한국의 봉건 잔재 세력들은 법을 말하면서 법을 파괴하고, 절대로 구속할 수 없는 박근혜·이재용 두 사람을 법의 이름으로 구속했다. 이것은 가공할 사태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가 아니라 본질은 ‘박근혜 인민재판 사건’ ‘박근혜 인권유린 사건’이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서는 사실과 법리와 안 맞는 부분이 너무 많아 절대로 영장이 발부되면 안 되는데도 영장이 발부됐다. 이런 청구서로 박 대통령을 구속하여 가둘 수 있는 나라라면 5000만 국민 누구든지 기자, 검사, 판사만 짜면 다 잡아넣을 수가 있다. 이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이동호 원장의 발표에 적극적으로 동의한다. 박정희의 개헌을 통한 권력 확보는 국력을 조직화하여 총동원할 필요가 있었던 상황에서 단행된 것이다. 세계 정치사에 민주주의를 하면서 경제발전을 이룩한 신생국가는 없었다. 결과론적 분석이지만 박정희는 독재 체제를 통해 국가경제 발전을 이룩했고 박정희가 성취한 국가경제 발전은 ‘진정한 민주주의의 토양’이 되었다. 박정희가 ‘민주주의는 경제발전의 산물’이라는 이론을 읽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그는 육감으로 이를 알고 있었고 밀어붙였다.
 
  박정희는 미국식 민주주의가 1960년대의 한국사회에 적용될 수 없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체득하고 있었고 한국에 적합한 정치 체제를 만들고자 했다. 그러면서도 그에게는 ‘민주주의’라는 말을 포기하지 못하는 샤이(shy)한 면이 있었기에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말을 고안, 애써서 자신의 체제에도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를 조롱조로 비하하는 한국의 지식인이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사상 최악의 독재 체제인 북한이 자기 체제를 묘사하기 위해 민주주의의 3대 용어인 ‘Democracy(민주), Republic(공화), People(인민)’(DPR Korea)을 모두 국호에 붙인 사실에 대해서도 처절한 조롱을 퍼부어야 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나라의 개수만큼 있다’는 것이 1960~1970년대의 세계 정치의 모습이었다. 모든 나라는 민주주의라는 신성한 이름을 좋아했지만 결국은 다 진정한 민주주의 체제는 아니었다. 사실상 다양한 독재 체제였다. 다만 그 독재 체제가 개인의 영달을 위한 것이었는가 혹은 국가발전에 기여하기 위한 힘을 효율적으로 조직하기 위한 것이었는가에 따라 후세 역사가들의 평가를 받는 것이다. 박정희의 독재는 결과론적으로 한국 국민에게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는 데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다.
 
 
  박정희와 유신세대의 화해
 
북한은 1968년 10월 30일부터 3차에 걸쳐 무장공비 120여 명을 동해로 침투시켜 울진·삼척 등에서 양민을 학살했다. 사진은 당시 소탕작전에 투입된 군인들.
  한국의 지식인들은 박정희의 ‘독재 체제’, 좋게 표현하면 ‘국력을 조직화하고 총동원하기 위한 체제’의 구축과 이를 위한 헌법개정이 더욱 시급했던 목적이 경제발전보다 ‘국가생존’이라는 데 있었다는 점을 쉽게 간과한다. 1953년 7월 휴전 이래 전쟁이 발발하지 않은 채 지금까지 64년의 세월이 흐르다 보니 국가안보가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국가안보를 마치 공기나 물처럼 저절로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도 있다.
 
  박정희가 구축한 체제는 ‘발전국가론’이기 전에 ‘안보국가론’이라고 보아야 한다. 박정희는 언제 또 전쟁이 발발할지 모르는 위태로운 상황의 대한민국호를 지키는 일, 나라를 강하게 하는 일에 노심초사했다. 그래서 그는 “일하며 싸우자”고 했고 “싸우며 일하자”고 했다. 박정희는 1961년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뒤 2년여의 군정(軍政)을 마치고, 군복을 벗은 채 민간인이 되어 대통령에 출마했다. 이런 박정희의 모습은 남미의 쿠데타 세력들이 군복을 입은 채 대통령이 되는 것과는 본질이 달랐다.
 
  박정희 집권 18년은 문자 그대로 국내외적으로 격변의 시대였다. 쿠바 미사일 위기, 월남전쟁, 닉슨 독트린, 미・소 데탕트, 미·중외교 재개, 카터의 주한미군 철수 정책, 김일성의 대남 게릴라 전쟁, 월남의 패망 및 공산화는 박정희 정권이 헤쳐 나가야 했던 엄청난 대내외적 파도들이었다. 특히 국제정치의 격변은 상대적으로 힘이 약하기 때문에 국제정세의 변동에 그때그때 순발력 있게 적응해 나가야 하는 한국과 같은 나라에는 존재 그 자체를 위협하는 도전이 아닐 수 없었다.
 
  결과론적으로 보았을 때, 박정희는 이 같은 난관들을 모두 성공적으로 극복했다. 박정희가 권력을 장악한 1961년의 대한민국은 북한보다 못살고, 필리핀과는 상대도 안 되는 나라였다. 박정희가 암살당하던 1979년 10월 26일 한국은 경제적 측면에서 북한을 압도했고 자신의 돈으로 국방예산을 책정할 수 있는 나라가 되어 있었다. 박정희는 김일성과의 경쟁에서 군사 및 경제 어느 면에서 보아도 승리했다.
 
  박정희는 이 같은 승리를 얻기 위해 제퍼슨과 같은 ‘모범적 민주주의’ 방식으로 통치할 수는 없었다. 자신이 원하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그는 국력을 효과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들어야 했다. 박정희의 3선 개헌과 유신헌법은 이 같은 맥락에서 보았을 때, 그리고 수십 년이 지나 보다 객관적 관점에서 박정희 시대를 회고할 수 있는 오늘의 시점에서 보았을 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 되었다. 그 결과가 ‘유신세대의 박정희와의 화해’라는 학술적인 면에서는 물론 사회적인 놀라운 현상을 가져오게 한 것이다.
 
 
  박정희를 대체할 인물이 과연 있었는가?
 
  유신시대에 박정희의 독재에 맞서 치열하게 싸운 연세대학교의 김세중 교수와 서울대학의 이영훈 교수는 박정희 시대의 한국 내 정치갈등을 ‘근본주의적 대결상황’이라고 정의 내린다. 근본(주의)적 대결상황은 ‘정권의 교체’ 가 아니라 ‘체제의 교체’를 놓고 싸우는 상황을 의미한다. 그래서 한편은 ‘체제를 수호하는 마음’으로 다른 한쪽은 ‘혁명한다는 마음’으로 대결에 임하게 되는 것이다. 박정희는 자신이 꿈꾸던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근거한 부국강병의 완성이 지속될 수 있는 방법이 별로 없다고 생각했다.
 
  국내정치에서 반대세력의 논리는 정권교체 이상이었고, 박정희가 당면한 국제환경은 미국이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이던 동맹국 타이완을 유엔에서 끄집어내어 내동댕이쳐 버리고 적국이었던 중공(中共)과 손잡고, 비록 썩었지만 자유민주주의를 간판으로 내걸었던 월남을 공산월맹에 미끼로 던져 주는 국제정치 패러다임이 바뀌는 상황이었다.
 
  이처럼 절박한 상황에서 박정희는 자신 외에는 이 같은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인물이 없다고 생각했다. 박정희의 이 같은 관점을 ‘거만하고 자아도취적인 것’으로 비난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 여당 의원이었지만 할 말을 상대적으로 했다고 평가되는 고 이만섭 전 국회의장은 회고록에서 “아마 박 대통령은 좋은 의미에서는 한 4년 국정을 더 맡아 벌려 놓았던 일을 마무리지었으면 하는 집념이 강했다고 할 수 있고, 또 달리 생각하면 나 말고는 이 나라를 이끌 사람이 없다는 독선에 사로잡혀 있었다고도 여겨진다”고 박정희를 평가했다. 그렇다면 박정희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는 인물이 있었느냐? 혹은 누가 박정희를 대신할 수 있었느냐? 라는 질문에 쉽게 답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박정희는 당시 시대가 요구하는 영웅이었고, 또한 시대를 만들어 갔다. 그는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지만 치부를 하지도 않았고 스탈린, 마오쩌둥, 김일성처럼 수백만 명을 죽이지도 않았다. 한반도 전문가인 오버도퍼의 분석에 의하면 박정희 집권 후 한국의 GDP는 10년마다 3배씩 증가해 보통 100년이 소요되어야 할 만한 경제성장을 단 30년 만에 이루어 냈다. 박정희의 목표는 확대 지향적인 것이었다. 또 공세적이었다. 그리고 박정희는 혁명가였다.
 
  박정희는 과거 역사를 ‘모멸의 역사’로 인식했기에 그의 궁극적인 꿈은 세계에 대해 ‘공세적’인 한국을 만드는 것이었다. 박정희는 우리 역사를 비통(悲痛), 애통(哀痛)의 역사로 규정하고 이를 극복한다는 의미에서 민족중흥(民族中興)의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웠다. 박정희가 주도한 수출가공에서부터 중화학공업에 이르는 발전정책은 세계로 나아가는, 세계를 지향하는 확대 지향의 국가전략의 하나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등록일 : 2017-05-15 08:16   |  수정일 : 2017-05-15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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