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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 집권 2기 불안한 황태자 후춘화의 미래는?

글 | 이동훈 주간조선 기자

▲ 제19차 당대회 때 정치국 상무위 진입에 실패한 후춘화 전 광둥성 서기. photo 로이터 photo 로이터
‘저군(儲君)’.
   
   후춘화(胡春華) 전 광둥성 서기에게 지난 5년간 따라붙었던 별명이다. 저군은 왕위를 승계할 왕세자라는 뜻이다. 16세 때 현(縣)장원으로 명문 베이징대에 입학해 수도 졸업생대회에 대표로 참석한 수재, 티베트 근무를 자처하고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 제1서기를 지내며 증명된 당성(黨性), 소수민족자치구인 네이멍구몽골족자치구와 개혁개방 1번지인 광둥성 서기를 지낸 경력. 5년 전인 2012년 18차 당대회에서 쑨정차이(孫政才) 전 충칭시 서기와 함께 ‘60허우(後)’로 25인의 정치국에 입성했을 때만 해도 후춘화의 앞길은 탄탄대로로 보였다.
   
   대(代)를 건너뛰어 지도자를 지정하는 ‘격대지정(隔代指定)’ 관례에 따라 전임 총서기인 후진타오(胡錦濤)가 애지중지한 후춘화는 5년 뒤 19차 당대회 때 정치국 상무위 입성은 떼어놓은 당상이었다. 후춘화가 상무위에 입성해 ‘국가부주석’ 직위를 받을 경우 시진핑 집권 2기의 모든 스포트라이트는 ‘포스트 시진핑’인 그에게 쏠릴 것이 당연했다. 앞서 후진타오, 시진핑이 걸었던 길이었다. 자연히 19차 당대회의 모든 관심은 후춘화가 상무위에 진입해 ‘황태자’ 자리를 굳힐지 여부에 쏠렸다.
   
   하지만 후춘화는 예상을 깨고 19차 당대회에서 7인의 정치국 상무위에 들지 못했다. 비록 정치국원으로는 유임됐지만 정치국 내에서 어떤 직위를 받을지는 불투명하다. 국가부주석이나 국무원 부총리직을 받을 것이 점쳐지지만, 상무위원이 아닌 이상 허울뿐인 직책일 공산이 크다. 앞서 정치국원으로서 국가부주석으로 있던 리위안차오(李源潮)가 그랬다. 한때 시진핑, 리커창, 보시라이와 함께 ‘4대 천왕’으로 불리면서 후진타오의 후계 경쟁을 벌였던 리위안차오는 시진핑 집권 후 허울뿐인 국가부주석을 지내다가 이번 19차 당대회 때는 중앙위원에도 들지 못하면서 사실상 퇴임 수순을 밟았다.
   
   현재 후춘화는 ‘저군’ 자리마저 위협받는 신세가 됐다. 19차 당대회를 통해 정치국에는 새로운 피들이 대거 수혈됐다. 정치국에 새로 발탁된 천민얼(陳敏爾) 충칭시 서기, 리홍중(李鴻忠) 톈진시 서기, 리창(李强) 신임 상하이시 서기, 리시(李希) 신임 광둥성 서기 등 4명이다. 정치국 진입은 상무위 진입을 위한 전 단계다. 특히 이들 4인은 천민얼이 구이저우와 충칭, 리홍중이 후베이와 톈진, 리창이 장쑤와 상하이, 리시가 랴오닝과 광둥 등 각각 2곳 이상의 지방 최고책임자 경력을 확보했다. 모두 2곳 이상의 지방 최고책임자인 성서기 경력을 확보하면서 후춘화와 똑같은 선상에서 경쟁을 벌이게 됐다.
   
   특히 19차 당대회 직후 단행된 인사조정을 통해 각각 후춘화의 후임 광둥성 서기와 한정의 후임 상하이시 서기로 임명된 리시와 리창 ‘량이(兩李)’는 시진핑의 직계다. 두 명 모두 중앙후보위원에 불과했으나 중앙위원을 건너뛰어 곧장 정치국원으로 발탁됐다. 시진핑과 인연이 깊지 않은 후춘화로서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리시 신임 광둥성 서기는 ‘홍도(紅都)’ 옌안(延安)시 서기로 있을 때 시진핑이 하방(下放)당해 토굴에서 기거했던 량자허촌을 성역화한 인물이다. 리창 신임 상하이시 서기는 시진핑이 저장성 서기로 있을 때 비서장으로 데리고 있던 인사다. 특히 후춘화의 후임인 리시가 전임자 색깔 지우기 차원에서 평지풍파를 일으킬 가능성도 배제 못한다. 이런 와중에 후춘화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질 수도 있다. 시진핑 집권 1기 동안 후춘화와 후계 경쟁을 벌인 쑨정차이 전 충칭시 서기는 19차 당대회 직전 개인비리에 휘말려 지난 7월 중도 낙마했다.
   
   쑨정차이와 비교했을 때 후춘화는 시진핑이 내치기에 만만한 존재는 아니다. 집안배경만 제외하면 경력 면에서는 오히려 시진핑보다 화려하다. 후춘화는 1963년 후베이성 우펑(五峰)의 토가족(土家族)자치현에서 태어났다. 후춘화의 본래 성은 왕(王)씨다. 부친은 생산대 창고관리인이었던 왕밍쥔(王明俊)이고 모친은 생산대 부녀대장을 지낸 후창메이(胡長梅)다. 후춘화의 부친은 큰딸이 18세 때 죽자 상심한 아내를 달래기 위해 7남매 중 넷째의 이름을 후춘화로 바꿨다. 모계 성을 따르는 일은 중국에서 종종 있다.
   
▲ 지난 1월 춘절 때 광저우 꽃시장에 등장한 후진타오 전 총서기(왼쪽)와 후춘화 당시 광둥성 서기. photo 웨이신

   소수민족자치현에서 태어난 후춘화는 소학교 때는 4㎞, 중·고등학교 때는 6.5㎞를 걸어 통학했다. 학비를 마련하느라 수력발전소 공사장에서 막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1979년 대입시험에서는 불과 16세 때 우펑현 문과 장원으로 현 역사상 최초로 베이징대 중문과에 입학해 지역 주요 신문을 장식했다. 우수학생으로 공산당원에 선발돼 1983년 베이징에서 열린 수도 졸업생 대회 때는 3명의 학생대표로 선발됐다. 당시 시중쉰, 왕전, 야오이린, 덩리췬, 후치리, 차오스 등 쟁쟁한 당의 최고 원로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격오지인 시짱(西藏)티베트자치구 근무를 자청해 당 기관지인 인민일보, 광명일보에 실리는 전국적인 유명세를 누렸다. 후춘화가 고향에서 4000㎞ 떨어진 티베트로 가는 소식까지 기사화됐을 정도였다.
   
   후춘화의 최대 후원자 격인 후진타오와 리커창(李克强)도 여전히 건재하다. 후춘화가 티베트 근무를 자청한 1988년부터 1992년까지 시짱티베트자치구 당 서기가 후진타오였다. 결국 후진타오는 집권 때인 2006년 후춘화를 공청단 제1서기에 발탁해 차기 ‘황태자 코스’를 밟게 한다. 그의 나이 43세 때의 일이다. 공청단 제1서기를 지낸 후야오방(胡耀邦)·후진타오는 당 총서기를 지냈고 리커창은 총리로 있다. 후진타오는 2008년 후춘화를 전국 최연소 허베이성 성장으로 보냈고 1년 뒤인 2009년에는 네이멍구몽골족자치구 당 서기로 영전시켰다. 후진타오는 2012년 퇴임하면서까지 국무원 부총리로 영전한 왕양의 후임 광둥성 서기 자리에 후춘화를 앉히면서 중앙정치국에 입성시켰다. 후진타오는 지난 1월 중국 최대 명절인 춘절 때도 후춘화와 함께 세계 최대 광저우 꽃시장에 모습을 드러내며 최대 후원자임을 드러냈다.
   
   아직 정치국원 가운데 경력 면에서 후춘화를 능가하는 인물은 없다. 무엇보다 후춘화의 최대 무기는 젊음이다. 당 총서기 후보군이라 할 수 있는 25인의 정치국원 가운데 1963년생으로 가장 젊다. 정치국 내 경쟁자인 천민얼 충칭시 서기가 1960년생, 리창 상하이시 서기가 1959년생, 리홍중 톈진시 서기와 리시 광둥성 서기는 1956년생이다. ‘50허우(後)’인 리창, 리홍중, 리시가 시진핑 이후 10년 대권을 맡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다. 덩샤오핑이 제시한 당 간부 선발 기준인 ‘간부4화’(혁명화·연경화·지식화·전문화) 중 핵심인 ‘연경화(年輕化)’ 방침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신임 정치국원 가운데 딩쉐샹(丁薛祥) 신임 중앙판공청 주임이 1962년생으로 ‘60허우’지만 지방 최고책임자 경력이 없는 것이 결격사유다. 결국 좁혀지는 후춘화의 최대 경쟁 상대는 1960년생으로 ‘60허우’에 해당하는 천민얼 충칭시 서기다. 후춘화와 천민얼의 피 터지는 승부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등록일 : 2017-11-10 11:32   |  수정일 : 2017-11-10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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