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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 문재인이 변호한 동의대 방화사건 주범 윤 모 씨의 행적

“민주화 유공자 인정받은 동의대 사건의 주역, 방화·경찰폭행 심한 시위 다수 가담”

⊙ 윤씨, 2009년 경찰에 죽봉(竹棒) 휘둘러 부상 입혔던 ‘고 박종태 투쟁정신 계승 1·16 전국 노동자 대회’ 때 시위대 선동
⊙ 2005년 전국운송하역노동조합 위원장 환송 집회서 대치 중인 전·의경과 몸싸움 종용
⊙ 화물연대 간부로 있던 시기 파업 때마다 다수의 방화 사건
⊙ 문재인 전 대표, 과거 동의대 사건 주역으로 검찰로부터 사형 구형된 윤씨 적극 변호
⊙ 문 전 대표, 대법원이 윤씨 무기징역 선고하자 “정치적 사건에 대해 증거법칙이 무시돼 온 사례를 또다시 보여줬다”
⊙ 윤씨 등 동의대 사건 관련자 민주화 유공자로 인정한 2001년 10월 29일에 개최된
제45차 관련자 분과위 회의에 문 전 대표 참석
⊙ 문 전 대표 자서전 《운명》에 “목숨을 잃은 경찰관이나 형을 살았던 학생들이나
모두 시대의 피해자, 가해자가 있다면 그런 상황을 만든 독재정권”이라고 써

글 | 최우석 월간조선 기자

▲ 동의대 방화 사건으로 순직한 경찰관과 전경 등 7명의 넋을 기리기 위해 1991년 5월 3일 충북 중원군 중앙경찰학교에 세워진 ‘충의선양탑 제막식’에서 유족이 오열하는 모습. 사진=조선일보
  윤모씨는 민주화 유공자다.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민주화보상위원회 분과위원으로 있을 때 의결됐고 그가 중도 사퇴한 후인 2002년 4월 27일 최종 결정됐다. 윤씨와 문 전 대표와의 인연은 뒤에 설명하겠다. 민주화 운동이 오늘날 대한민국이 누리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했다는 점에서 보면 윤씨는 존경받아야 할 인물이다.
 
  2015년까지 화물연대 간부를 지낸 윤씨는 크고 작은 시위에 앞장서 왔다.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눈에 띄는 점은 그가 기획하거나 총괄한 시위가 조용하지만은 않았단 것이다. 특히 공권력에 대한 폭력이 심했다. 이는 검찰 수사기록, 판결문에 근거한다. 비조합원에 대한 방화 사건도 끊임없었다.
 
  인터넷 등에 공개된 자료(구글 검색)를 보면 윤씨가 사실상 시위를 기획한 화물연대 간부로 있을 시기인 2006년 총파업 때 비조합원 화물차 파손 및 방화 사건이 47건에 달했으며, 2009년 총파업 시엔 차량 손괴 10건에 방화 6건이 발생했다. 2012년 총파업 당시에는 20대 이상 비조합원의 화물차를 연쇄 방화했다. 화물운수업 종사자의 처우 개선을 위해 출범한 화물연대가 정작 노조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동업자들의 생계수단을 불태워 버렸다는 점에서 큰 비난을 받았다.
 
화물연대
 
  민노총 공공운수노조 소속이다. 화물차주 1만4000명이 조합원으로 가입해 있다. 조합원 수는 국내 전체 화물차주(약 35만명)의 4%에 불과하지만 한국 경제의 ‘대동맥’ 역할을 맡는 만큼 파업에 들어갈 경우 경제에 미치는 여파가 상당하다. 2008년 6월 8일간의 총파업 때는 총 7조원에 이르는 피해가 있었던 것으로 당시 정부는 추산했다.
 
  화물연대 간부 윤씨
 
2009년 5월 20일 오후 경기도 고양시 서울경찰수련장에서 의경 600여명이 두 패로 나뉘어 죽봉과 죽창 공격에 대한 방어훈련을 하고 있다. 최근 죽봉을 든 시위대가 다시 등장함에 따라 서울지방경찰청 기동본부 소속 5개 기동단은 죽봉 공격을 막기 위한 훈련을 했다. 사진=조선일보
  #2001년 10월 27일
  〈1988년경 운송 또는 하역을 담당하던 화물 관련 노동조합들이 모여 전국화물운송노동조합연맹으로 기업별 조직을 결성했고, 그 후인 1999년 3월경 연맹에 소속됐던 노동조합 상당수가 모여 산업별 조직인 하역노조를 결성했다. 2002년 5월경 화물차량 지입차주들이 하역노조에 가입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한 것을 계기로 하역노조의 간부들이 여러 차례 논의를 거쳐 하역노조 산하에 화물연대를 조직하기로 계획, 2002년 6월 6일 화물노동자 공동연대준비위원회를 만들었다. 윤씨는 2001년 준비위원회 핵심 간부로 활동했다. 그는 화물연대 조직 구성을 위한 기획업무를 담당했다. 그는 2002년 10월 27일 부산대학교에서 개최된 화물연대 전국 8개 지부 연대 출범식에 참석, 사회를 보면서 화물연대 조합원들로 하여금 주요 요구 사항을 구호제창하도록 유도하는 등 행사를 총괄했다. 2003년 4월 13일에는 부산역 광장에서 ‘화물노동자 생존권 쟁취 및 화물악법 철폐를 위한 투쟁결의대회’에서도 사회를 봤다. 집회 관여 정도 등을 보면 윤씨는 화물연대 실질적인 핵심인물이다. 그는 운송거부 행위의 진행과정에서 화물연대 회원들의 운송거부에 참여하지 않는 운전기사들에 대한 업무방해 행위가 뒤따를 것을 충분히 인식하는 자리에 있었다. (부산지법 판결문 중)〉
 
  #2005년 1월 9일
  〈윤씨는 2005년 1월 9일 당시 화물연대 의장 겸 전국운송하역노동조합 위원장이 부산 남부경찰서에 자진 출두하는 것에 대한 환송집회를 여는 과정에서 대치 중인 전·의경과 몸싸움을 하게 했다. (부산지방법원 동부지원 판결문 중)〉
 
  #2006년 3월 18일
  〈윤씨는 화물연대 간부로서 2006년 3월 18일 광주 광산구 흑석동 사거리에서 화물연대 회원 약 1000여 명과 함께 ‘전국화물노동자대회’ 집회를 열었다. 윤씨와 회원들은 방송차량을 선두로 각종 플래카드와 깃발을 들고 약 2km 떨어진 주식회사 삼성광주전자 정문을 향하여 행진했다. 시위대는 전·의경들에 의해 저지당하자 “삼성자본 박살 내자” 등의 구호를 외치고 욕설을 하면서 돌과 물병 등을 전·의경들에게 던지고 위 컨테이너 상단에 부착된 고리에 밧줄을 걸고 끌어당겨 1차 저지선을 통과한 후 1차 저지선을 구축하고 있던 전·의경들을 힘으로 밀어붙였다. (광주지방법원 판결문 중)〉
 
  #2006년 3월 28일
  〈윤씨와 각 시도 지부장 등 화물연대 회원 900명은 삼성광주전자 주변 도로에 트레일러를 지그재그로 주차해 놓는 방법으로 도로를 봉쇄했다. 이후 계획에 따라 차량을 이용, 조선대학교 구내에 무단 침입했다. 이들은 하남공단 입주 업체들의 화물운송 업무를 방해했다. (광주지방법원 판결문 중)〉
 
  #2009년 5월 16일
  〈윤씨는 2009년 5월 16일 대전에서 개최한 ‘고 박종태 투쟁정신 계승 1·16 전국노동자대회’에 참가했다. 윤씨와 화물연대 조합원 등 시위 참가자 6000여 명은 대한통운 대전지사 쪽으로 행진을 시도하다 경찰에 제지당했다. 그때 일부 집회 참가자들은 들고 있던 만장 깃대에서 만장을 떼어내고 대나무 끝 부분을 바닥에 수차례 내려쳐 끝을 날카롭게 만든 후(죽봉이라 칭함) 경찰을 향해 휘둘렀다. 서울지방경찰 소속 강○○ 의경은 이 죽봉에 찔려 왼쪽 눈의 각막이 손상됐다. 그럼에도 집회를 기획한 윤씨는 “이곳까지 투쟁해 왔다. 나를 비롯한 지도부들은 체포영장을 감수하고 이 투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며 시위대를 선동했다. 경찰은 시위대가 행진하지 못하도록 폴리스라인과 차벽을 설치하고 시위대의 행진을 저지했으나 공공운수연맹 조직실장 곽○○가 손짓을 하자 시위대는 일제히 경찰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방송장비가 설치된 트럭에 탄 윤씨는 “전경차 있는 데에서 저지선을 뚫고 이동하겠습니다”라고 했다. 윤씨는 집회 참가자들과 함께 집단으로 경찰관을 폭행하고, 경찰버스를 손괴했다. 시위로 인해 경찰공무원 100명이 전치 3~4주의 상해를 입었고, 103대의 경찰버스가 부서졌다. (수리비 3억8900만원 상당) 윤씨는 시위 전 화물연대 조합원들에게(타 시위 참가자 포함) 마스크와 반 코팅 장갑, 3~5m의 대나무로 만든 만장 깃대(1000여개)를 나눠주는 등 폭력 집회 시위를 전개하기 위한 준비작업을 진행했다. 사건 집회 참가자들의 폭력행위로 인해 발생한 인적, 물적 피해가 상당한 점, 위험한 물건인 죽봉 등을 사용한 그 범행수법에 비추어 보아도 죄질이 결코 가볍지 아니하다. (대전고등법원 판결문 중)〉
 
  고 박종태씨는 화물연대 광주지부회장으로 대한통운·개인 택배 사업자 간 분쟁에 개입하고 집회를 주도한 혐의(업무방해)로 수배됐다가 2009년 5월 3일 대전의 한 야산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시위 이후 대전 ○○경찰서 정보관은 《조선일보》에 이런 글을 보내 왔다.
 
  〈지난 16일 대전의 ‘죽창 시위’ 현장에서 한 경찰관이 무전기를 들고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구급차 좀 빨리 불러줘. 경찰이 길바닥에 쓰러졌어. 기동대인 것 같은데 크게 다쳐서 움직이지도 못해. 이거 큰일 났네.” 무전기를 든 경찰관은 빗물이 고인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에 피를 흘리며 쓰러진 동료가 체온이 떨어져 의식을 잃을까 봐 담요를 덮어 주면서 안타까움에 발을 동동 굴렀다. 그날 이렇게 다친 경찰이 무려 100여 명이었다. 시위대가 말하는 ‘만장용 대나무 깃대’라는 ‘죽봉’이란 것도 사실은 사전에 대나무 끝 부분을 예리하게 자른 ‘죽창’이 많았다. 끝이 뭉툭한 것은 ‘죽봉’이지만, 날카롭게 사선(斜線)으로 비스듬하게 잘린 것은 ‘죽창’이다. 살상용이란 뜻이다. 만장만 떼어낸 대나무는 경찰의 머리를 내리치는 ‘죽봉’으로 쓰였지만, ‘죽창’은 경찰의 눈과 복부를 겨냥한 공격용으로 사용됐다.〉
 
  2009년 8월 14일 자 《연합뉴스》에 따르면 재판장은 윤씨 등 특수공무집행방해 치상 등 혐의로 구속 기소된 조합원 5명에게 “끝이 뾰족한 대나무로 조카이자 동생 같은 경찰을 찔러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한 점은 화물연대 지휘부와 조합원이 반성해야 한다”며 “일부 무죄가 선고된 것도 경찰의 인력 부족으로 채증이 부족했기 때문일 뿐 피고인들의 잘못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고 지적했다.
 
 
  윤씨의 과거, 그리고 문재인 전 대표와의 인연
 
1989년 동의대 방화사건 현장.
  윤씨가 주도한 시위 형태를 해당 판결문과 공개된 통계를 통해 소개한 것은 그와 경찰, 방화 사이의 연관성을 설명하기 위해서다. 윤씨는 동의대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받은 인물이다. 동의대 사건은 1989년 5월 3일 부산 동의대 캠퍼스에서 전투경찰을 납치한 대학생들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학생들이 던진 화염병 등으로 경찰관 7명이 사망한 사건을 말한다. 당시 동의대 학생들은 입시부정과 관련해 진상 규명을 요구하며 시위에 나섰으며, 5월 1일 노동절을 거치면서 화염병이 등장하는 등 시위는 과격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급기야 2일에는 학생들이 전투경찰 5명을 납치해 중앙도서관에 감금했으며, 이들을 구출하기 위해 경찰 600명이 도서관 7층에 진입했다가 학생들이 뿌린 석유와 시너에 화염병의 불이 옮겨 붙어 순식간에 경찰관 7명이 목숨을 잃고 10명이 중화상을 입었다. 사건 직후 당시 평민당 총재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은 기자간담회에서 “이번 기회에 영원히 이 땅에서 폭력이 추방될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여 나가겠다”고 했다.
 
  검찰은 현장에 화염병을 던져 방화한 윤씨에게 사형을 구형했다.
 
  사형이 구형된 윤씨의 변호인은 지금 대선 후보 가운데 지지율 1위를 달리는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였다. 그는 조석래 변호사 등과 변호인단을 구성, 윤씨 등 동의대 사건 연루 학생을 변호했다. 당시 문 전 대표는 “경찰 관계자에게 업무상 과실치사상의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1989년 7월 12일 《한겨레》)
 
  경찰관들이 사고 현장인 도서관에 진입할 때 내부구조와 화염병 등 인화물질이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들어가 더 큰 피해를 봤다는 것이다.
 
  문 전 대표는 “사건 현장인 7층 세미나실 복도에 진입하였다가 살아남은 경찰관 박중길씨 등 10명이 진압작전 당시 지휘자가 사고 현장에 인화물질이 있음을 알고 있었음에도 이런 사실을 진입 경찰관들에게 사전 알려주지 않았다고 진술했다”며 “진입 경찰관들이 내부 구조를 알았더라면 희생자 폭이 줄었을 것이다. 고층작전 때 반드시 지켜야 할 근본적인 안전수칙을 전혀 도외시한 채 무모한 작전을 강행한 경찰 지휘자의 과실도 사고의 중요한 원인”이라고 했다. (1987년 7월 12일 《한겨레》)
 
  화염병을 던져 경찰을 불에 타 죽게 한 학생을 변호하면서 경찰 수뇌부 책임론을 제기한 셈이다.
 
  이후 문 전 대표 등 변호인단은 1989년 9월 26일은 “학생들의 책임과 잘못도 충분히 추궁되고 규명되어야 하지만 결과만 놓고 농성 학생들이 무조건 일방적으로 매도당해서는 안 되는 만큼 안전대책을 무시한 경찰의 작전 잘못에 대한 책임도 함께 물어야 한다”며 당시 작전을 지휘한 부산시경 간부 4명을 업무상 과실치사상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문 전 대표를 비롯한 변호인단의 열성적 변호에도 불구, 대법원은 1990년 6월 26일 윤씨에게 원심대로 무기징역을, 또 다른 피고인 오씨에게는 징역 20년을 확정했다.
 
  대법원 확정 판결에 대해 문 전 대표는 “화재 원인 규명을 위해 현장실험을 통한 과학적인 규명을 줄기차게 요구했으나, 2심 때 형식적인 실험만 시행됐을 뿐 묵살되고 말았다”며 “정치적 사건에 대해 증거법칙이 무시돼 온 사례를 또다시 보여주는 결과를 빚었다”고 비난했다. (1990년 6월 27일 《한겨레》)
 
  문 전 대표 등 변호인단으로부터 과실치사상 혐의로 검찰에 고발된 당시 부산시경 김정웅 국장, 김덕오 1부장, 정덕용 정비과장, 박정호 부산진경찰서장은 1992년 2월 1일 무혐의로 판결이 났다.
 
  검찰은 “경험칙상 점거농성 학생들은 건물로 병력이 진입해 들어가는 방향 등에서 투신하는 것이 상례여서 당시 학생들의 투신이 예상되는 건물의 앞쪽과 남쪽 바닥에 경찰이 그물과 매트리스를 설치한 것은 적절한 것이었고, 경찰관들이 화염병에 의한 화재로 질식 상태에서 추락할 것이라고는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조사 결과 숨진 경찰관들의 추락 사고 지점에 그물과 매트리스를 설치하지 않았던 것은 죄가 될 수 없다”고 했다. 이에 문 전 대표는 “검찰이 진상을 규명하려는 의지 없이 형식적으로 사건을 처리했다”며 “항고·재항고·헌법소원 등 가능한 법적 절차를 모두 밟아 진실을 규명해 내겠다”고 밝혔다. (1992년 2월 2일 《한겨레》)
 
  이후 문 전 대표는 5·3 동의대 사건에 대한 정부 차원의 진상규명과 국회청문회 개최 등을 촉구하는 부산지역 범시민대책모임에 합류했다. 당시 모임에는 변호사였던 문 전 대표를 비롯하여 송기인 신부, 박순보 부산연합 상임의장, 임종석 전 전대협의장 등이 참여했다.
 
  임종석 전 전대협의장의 이름이 눈에 띈다. 후에 국회의원까지 역임한 임 전 의원은 현재 문 전 대표의 비공식 캠프에서 핵심 역할을 맡고 있다. 임 전 의원은 서울시 정무부시장을 지내 박원순 서울 시장의 측근으로 분류됐지만 2016년 12월 14일 문 전 대표 지지 선언을 했다. 임 전 의원은 “박 시장께는 죄송하지만 (문 전 대표를 돕겠다는) 생각을 한 지는 오래됐다”며 “문 전 대표가 (대선 레이스) 처음부터 같이했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했다”고 밝혔다.
 
 
  윤씨가 받은 민주화 운동 보상금 5000만원
 
1989년 5월 3일 화재가 발생한 동의대 7층 모습. 사건이 일어난 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화재 원인은 아직도 정확히 규명되지 않았다. 사진=동의대 5·3 동지회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 가던 이 사건이 다시 주목받은 것은 김대중 정권 출범 이후인 2002년 4월이었다. ‘민주화 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이하 민주화보상위)’가 찬성 5명, 반대 3명, 기권 1명의 다수결로 “동의대 사건 가담자 46명을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인정한다”고 결정한 것이다.
 
  민주화보상위는 “(가담자들이) 고의적으로 살인한 것이 아니고, 중대한 결과가 발생하리라는 것을 예견할 수 없었다”며 “당시의 일반적인 시위 방식에 따라 화염병을 사용한 사실이 인정되므로, 경찰관이 사망했다는 결과만으로 민주화 운동 관련성을 부인할 수 없다”고 결정 이유를 밝혔다.
 
  당시 민주화보상위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초대 대표를 지낸 조준희 경기합동법률사무소 대표를 위원장으로 ▲김철수 서울대 법대 교수 ▲노경래 법무법인 화백 대표변호사(현 법무법인 화우 고문변호사) ▲김정기 한국외국어대 신방과 교수 ▲김경동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백화종 《국민일보》 편집인(별세) ▲이우정 민주당 고문(별세) ▲김상근 제2의 건국위원회 상임위원장(현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대표) ▲최학래 《한겨레》 대표(현 《한겨레》 고문) 등 9명으로 구성됐다.
 
  당시 찬성표를 던졌던 김상근씨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학생들이 의도적으로 경찰을 살인한 것이 아니고, 시위진압이 폭력적·억압적이었기 때문에 화염병을 던진 것도 이해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역시 찬성 입장을 밝힌 김정기 한국외대 교수는 “좌우를 막론하고 학생들의 행동이 순수한 측면이 있었다는 점을 고려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경동 교수와 노경래 변호사, 김철수 교수 등 위원 3명은 민주화보상위 결정에 반발해 위원직을 사퇴했다. 노 변호사는 당시 “경찰을 방화치사까지 한 자연범을, 그것도 대법원 판결이 난 사람까지 민주화 운동자라고 하는데, 이런 데 휩쓸려 간다면 큰일 아니냐”고 말했다.
 
  《월간조선》이 입수한 당시 민주화보상위 문건에는 ‘소수의견’이라는 제목으로 이런 내용이 있다.
 
  〈동의대 학생들이 이 사건 일련의 행위 중 문제가 되는 부분은 동의대학교 건물 내에서 점거농성한 피고인들 가운데 방화로 인하여 경찰관 등을 사상에 이르게 한 행위, 즉 방화치사상죄가 판결에 의하여 유죄로 확정된 사람들에게까지 당시 일련의 행위를 민주화 운동으로 해석할 것인지에 있는바, 방화치사상 행위에 대한 확정판결이 재심절차에 의하여 취소된 바 없고, 방화치사상 등 행위는 소위 자연범으로서 당시 실질적인 민주화 의식이나 행위를 억압하기 위한 행정범 또는 사실상 목적범과는 전혀 궤를 달리하는 생명침해 행위로서 위 행위를 민주화 운동에 포함되는 행위라고는 도저히 볼 수 없음. 방화치사상 행위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행위로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들까지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보는 것은 부당하다고 판단된다.〉
 
  민주화 유공자로 결정된 동의대 사건 관련자 46명은 1인당 평균 2800만원씩 보상금을 받았다. 화염병을 던져 무기징역을 받은 윤씨는 5000만원을 받았다. 윤씨는 김영삼 정부 때 2번의 감형으로 총 6년3개월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1995년 8·15 특사로 출옥했다.
 
  윤씨는 2009년 3월 3일 인터넷 언론 《참세상》과의 인터뷰에서 민주화보상위 결정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2002년 위원회 결정 때 살인에 고의가 없었다고만 했을 뿐 동의대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밝히진 못했다. 그 때문에 늘 가슴 한 곳에 응어리가 있다. 출소 이후 지금까지 10년 넘게 화물노동자를 조직하는 노동운동을 하고 있는데 동료들은 날보고 ‘지금도 감옥 안에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내게 89년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동의대 사건은 보수와 진보 모두에게 소외돼 왔다. 보수는 우리를 맹비난했고, 진보 진영조차도 우리를 뜨거운 감자로 여겼다.”
 
  그는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엔 이같이 답했다.
 
  “민주화운동보상위원회 등은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 자행된 많은 조직사건을 민주화 운동으로 재조명해 주었다. 그러나 학생운동이나 정치인 관련 사건들의 경우 인정 사례가 많지만, 가장 낮은 곳에서 고생하신 노동운동 사건들은 몇몇 대표적인 사건을 빼고는 대부분 인정받지 못했다. 민주화 운동에도 진골, 성골이 있어서는 안 된다.”
 
  윤씨를 포함, 경찰관의 목숨을 앗아간 방화범들은 ‘민주 헌정 질서 확립에 기여하고 국민 자유와 권리를 회복·신장시킨’(민주화운동보상법 2조) 유공자가 되고 불법시위 진압에 나섰다 순직한 경찰관은 졸지에 민주화 운동을 탄압한 정권의 하수인이 돼 버렸다. 당시 숨진 경찰과 전경 유족들에게 주어진 건 공무원연금법과 군인연금법에 따른 단순 유족보상금 368만~1890만원이 전부였다.(2012년 2월 제정된 ‘동의대 사건 희생자의 명예회복 및 보상에 관한 법률’에 따라 순직한 경찰관 유족에게는 순직 당시 공무원 전체의 기준 소득월액 평균액의 44.2배에 달하는 금액을, 사망한 전투경찰 순경의 유족에게는 당시 소령 10호봉 보수월액의 55배에 달하는 금액을 현재 가치로 환산해 지급.)
 
  유족들은 2005년 심의위의 결정이 고인들의 명예를 떨어뜨렸다며 헌법소원을 냈지만, 헌법재판소는 당사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각하(却下)했다. 그 후 경찰 총수들은 사건 발생 20년이 흐르도록 순직 경찰관 추도식에 얼굴도 비치지 않았다. 당시 전신 화상을 입은 한 전경은 전역 후 몇 번씩 재수술을 받으며 정부의 냉대(冷待)에 울분을 삭여 오다 간암으로 사망하기도 했다.
 
 
  민주화보상위 심사분과위 위원으로 활동한 문재인
 
2016년 12월 10일 오후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가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7차 촛불집회에 참석, 세월호 유가족들과 함께 행진하고 있다.
  화염병을 집어던지다가 경찰관 7명을 죽음에 이르게 한 부산 동의대 사건 관련자들이 민주화 운동 관련자가 되고, 보상금을 받는 과정에도 문 전 대표가 등장한다. 문 전 대표는 2000년 10월 12일부터 2001년 11월 30일까지 보상심의위의 ‘관련자 및 유족 여부 심사분과위’ 위원으로 활동했다. 심사분과위는 2001년 10월 29일에 주요 관련자 9명을 민주화 유공자로 인정했고, 11월 26일에 37명을 추가로 인정해 모두 46명을 민주화 유공자로 인정했다. 문 전 대표는 그 직후인 11월 30일에 위원직에서 중도 사퇴했다. 민주화보상심의위는 2002년 4월 27일 46명 모두를 민주화 유공자로 최종적으로 인정했다.
 
  문 전 대표가 몸담았던 심사분과위는 본 위원회 의결에 앞서 신청자의 민주화 운동 관련성을 사전 심사하는 게이트 키퍼(gate keeper)의 역할을 하는 곳이라고 한다. 문 전 대표가 재임하던 시절에는 심사분과위원 결정이 본 위원회에서 뒤집힌 적이 없다.
 
  새누리당은 2012년 대선 당시 이런 이유로 “문 전 대표가 동의대 사건 가해 학생들의 변호인으로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민주화 유공자로 인정하는 과정에도 참여한 것”이라고 공격했다.
 
  당시 문 전 대표 측은 “문 전 대표가 보상심의위 분과위원으로 활동했던 것은 맞지만, 동의대 사건에 대해서는 본인이 변호인을 맡았다는 이유로 스스로 제척 사유가 된다고 밝히고 일체의 의견을 밝힌 적도 없고 찬반 표결에도 참여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월간조선》이 입수한 민주화보상위 심사자료를 보면 문 전 대표는 2001년 10월 29일에 개최된 제45차 관련자 분과위 회의에 참석했다. 이날 회의에서는 윤씨를 비롯해 오○○(징역 15년), 김○○(징역 15년), 이○○(징역 13년 및 자격정지 2년), 이○○(징역 10년), 하○○(징역 7년) 등 6명을 포함 총 9명의 동의대 사건 관련자들을 민주화 유공자로 의결했다. 문 전 대표의 중도 사퇴 시기(2001년 11월 30일)는 그 이후다. 최종 결정(2002년 4월 27일)은 문 전 대표 사퇴 이후 이뤄졌다. 앞서 언급했듯 문 전 대표가 재임하던 시절에는 심사분과위원 결정이 본 위원회에서 바뀐 적이 없다.
 
 
  전국운송하역노동조합 소송대리인은 법무법인 부산
 
부산 동의대 사건 유족 대표 정유환씨가 2013년 4월 1일 오후 대구 중구 자택에서 동생 정영환 경사의 사진과 자료 등을 보며 이야기하고 있다.
사진=조선일보
  윤씨와 문 전 대표의 관계는 직접적이진 않지만 2003년에도 이어진다. 윤씨가 간부로 있던 전국운송하역노동조합(원고)이 컨테이너화물의 하역, 운송업 등을 해 온 회사(피고)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는데 원고 측 소송대리인이 법무법인 부산의 정재성 변호사였다. 1982년부터 노 전 대통령과 변호사 동업을 했던 문 전 대표는 1990년엔 노 전 대통령의 조카사위(누나의 사위)인 정재성 변호사와 동업을 했고, 1995년 7월 법무법인 부산을 설립했다. 문 전 대표는 2000~2003년 초, 2008~ 2012년 4월, 법무법인 ‘부산’의 대표 변호사를 맡았었다.
 
  전국운송하역노동조합 소송 당시 문 전 대표는 노무현 정부 민정수석이었다. 소송 결과는 ▲1심 판결 중 피고 패소 부분 취소하고, 취소 부분에 해당하는 원고 청구 기각 ▲원고 항소 기각 ▲소송비용 제1, 2심 모두 원고 부담이었다.
 
  문 전 대표는 2009년 3월 11일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화염병을 집어던지다가 경찰관 7명을 죽음에 이르게 한 부산 동의대 사건 관련자들이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은 것과 관련 이같이 밝혔다.
 
  “신분만 다를 뿐이었지, 학생·전경 모두 암울한 시대를 살았던 젊은이들이다. 언뜻 가해자와 피해자로 비칠지 몰라도 권위주의 시대의 폭압 속에서 똑같이 희생을 치렀다. 학생이 원인 제공을 한 것은 맞지만, 경찰이 진압 수칙만 잘 지켰더라면 끔찍한 사고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세월이 더 흐르기 전에 진상이 밝혀져야 한다.”
 
  그는 이런 얘기도 했다.
 
 
  “동의대 사건에서 교훈 얻지 못해 용산 참사가 터진 것”
 
  “이런 비유를 하고 싶다. 일제시대의 독립운동 유공자를 지정할 때, 사회주의 계열 운동가들을 인정하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다. 사회주의 활동에 대해 이러저러한 평가를 하는 것과 조국 독립에 기여한 것은 별개의 문제인데, 지금도 이를 싸잡아서 ‘빨갱이가 무슨 유공자냐’는 식으로 비난하는 분도 있다. 이런 식의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좌익이건 우익이건 조국의 독립에 기여한 것은 맞지 않나? 동의대 사건도 민주화 운동의 성격이 있는 부분은 그대로 인정하고 학생들의 폭력성 부분은 별개로 판단하자는 얘기다.”
 
  문 전 대표는 “당시 여론을 좌우한 언론에 대해 아쉬운 점은 없나?”는 질문에는 “경찰관 여러 명이 진압 과정에서 죽고 다치는 일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사건을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보기 힘든 면도 있었다. 어쨌든 언론들은 처음부터 ‘학생들이 엄청난 양의 석유와 시너를 바닥에 뿌려 놓고 경찰이 올라오기를 기다렸다가 불을 붙여서 죽였다’고 전했고, 사람들의 인식도 이 보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며 “(정권은) 이러한 언론보도를 학생들의 과격성·폭력성을 비난하는 데 써먹었고, 신공안정국이 조성됐다. 재판 과정에서는 사실이 아닌 부분들이 상당 부분 드러났음에도 언론이 제대로 다뤄 주지 않았다. 경찰들의 죽음도 한스러운 일이지만, 과도한 비난에 시달린 학생들도 큰 상처를 받았다”고 답했다.
 
  그는 1989년 동의대 사건으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해서 20년 후 용산 참사가 터졌다는 견해도 전했다.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날 밝으면 피랍 전경들을 풀어 주겠다’는 학생들의 약속이 있었는데도 당일 새벽 경찰이 학교에 진입한 점이다. 용산 참사도 경찰이 진압을 서두르다가 생긴 일 아니냐?”
 
  문 전 대표는 자신의 책 《문재인의 운명》에서 “목숨을 잃은 경찰관이나 형을 살았던 학생들이나 모두 시대의 피해자”라며 가해자가 아니라고 썼다. 아주 잘못된 얘기는 아닐지라도 경찰이 듣기에는 시위 학생들을 감싸는 듯한 말로 들리지 않을까.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동의대 사건의 상처는 아직도 깨끗이 아물지 않았다.⊙
 
[월간조선 2017년 2월호 / 글=최우석 월간조선 기자]
등록일 : 2017-02-13 09:01   |  수정일 : 2017-02-13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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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  ( 2017-02-14 )  답글보이기 찬성 : 17 반대 : 2
반미 반일 종북의 문재인 대통령되면 한국 적화위기 산케이 보도

일본 산케이 신문 (sankei.co.jp 국제면 2017.2.6 11:31)에
아래 제목의 '한국 적화 위기의 반일 종북 문재인 지지율 톱' 보도
내용중에 반일 종북 반미의 정치가로 알려진 문재인인데
한미일동맹 파괴와 적화통일 안될랑가 모르겠다고 함

조선에서 이런 보도를 해야 하는데 공영방송(국영방송 포함) 정부 언론도
장악한 문재인 일당입니다 .KBS YTN EBS 연합뉴스 서울신문

H1
韓22269;「赤化」危機 潘基文氏潰され…次期大統領選、「反日」「24467;北」の文在寅氏が支持率トップ/H1H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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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  ( 2017-02-14 )  답글보이기 찬성 : 16 반대 : 1
2012년 조선 기사 보고 올린 토론마당에 문재인 비판 기사댓글이 불법선거운동의 선거법으로 구속해서 문재인은 저를 처벌해달라고 재판부에 탄원서 제출과 노무현 조카사위 정재승을 증인 세워(두번 모두 법정에 안나왔음) 전라도 신헌석 재판장(현재 서부지원) 징역 1년 만기 출소.구치소 교도소에서 전라도 교도관이 조폭 동원해서 죽을뻔했습니다, 얼마전에 문재인은 털어서 먼지 안나온다고 큰 소리쳤습니다.2011년 헌재에서 선거법 93조 1항 위헌 판결하면서 인터넷글은 선거법으로 처벌할 수 없다고 판결했습니다
배용립  ( 2017-02-14 )  답글보이기 찬성 : 39 반대 : 2
당시 동의대 사태는 정치사건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학내문제로 발단된 사건이였다. 그리고 당시 정권이 독재 정권이면 경찰관을 신나로 화형을 시켜도 당사자는 책임이 없고, 그 당시 정권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건가? 그럼 당시 강도 살인범들 다 석방해야겠네....이석기 석방을 주장하는 이런 매국노가 어째서 대통령 후보로 지지율 1위일까? 정말 답답하다.
강양호  ( 2017-02-13 )  답글보이기 찬성 : 97 반대 : 2
대한민국 공산화를 위해 굉장한 수훈감이로구나
정소희  ( 2017-02-13 )  답글보이기 찬성 : 144 반대 : 3
문재인은 대한민국에 암덩어리다.
      답글보이기  재인이는  ( 2017-02-14 )  찬성 : 70 반대 : 1
흙수저나 노숙자, 곤란에 처한 사람들의 피를 빨아먹는 기막힌 재주를 가진 타고난 기술자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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