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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력계 내분만 없었다면 한국 이미 핵보유국 됐을 것”

⊙ 건국 후 최초의 하극상(下剋上) 사건인 ‘파이클럽 사건’… 초대 원자력과장 윤세원(尹世元) 사표로 봉합
⊙ 5·16 쿠데타 세력, 1962년 트리가 마크Ⅱ 원자로 기공식 테이프 끊고 원자력 개발 시동
⊙ 최형섭(崔亨燮) 소장 부임으로 원자력 행정 기틀 마련… KIST 설립으로 과학기술 도약 ‘시동’
⊙ 트리가 마크Ⅱ 1962년 3월 19일 오후 4시52분 핵분열 성공, 원자력 시대 도래

글 | 오동룡 기자   글 | 감수 신재인 전 국가핵융합연구소장

최형섭 초대 한국과학기술연구소장.
1962년 4월 원자력연구소장으로 부임해 연구소 내 내분을 잠재우고 행정적 기틀을 마련했다.
  2007년 한국원자력연구원으로 문패를 바꿔 단 원자력연구소가 지난 2월 2일 창립 57주년을 맞이했다. 이날 한국원자력연구원은 전·현직 임직원과 가족이 참석한 가운데 연구원 대강당에서 기념행사를 개최했다. 1959년 이승만(李承晩) 대통령 시절 원자력연구소로 출범한 한국원자력연구원은 국내 유일의 원자력 종합연구기관으로 원전 핵연료 국산화, 한국 표준형 원전 개발 등 기술 자립뿐 아니라 연구용 원자로 및 소형 원자로(SMART) 기술 개발과 해외수출을 이뤄냈다. 현재는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과 4세대 원자력 시스템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김종경(金宗經) 원장은 “앞선 57년간 연구원을 거쳐 간 선배들의 열정과 불굴의 의지가 지금의 원자력 기술을 만들었다”고 했다. 신재인 전 원자력연구소장, 소형 원자로 SMART 상용화에 공을 세운 김시환(金時煥) 전 한국원자력연구소 일체형 원자로 연구개발 사업단장 등 원자력계 원로들은 기념식을 마친 후, 지난해 4월 한미원자력협정 재개정 이후 주목받고 있는 파이로 프로세싱(Pyro-processing·건식고온재처리) 일관공정 시험시설(PRIDE)을 둘러보았다고 한다.
 
  이날 공개된 PRIDE는 파이로 프로세싱 전 공정을 공학 규모로 모의할 수 있는 세계 최초의 시설로, 2015년 12월 준공식을 갖고 본격 가동을 시작했다. 한국원자력연구원은 ‘모의 사용 후 핵연료’를 이용해 수행한 단위공정별 성능시험 결과를 바탕으로 각 단위공정 간 연계성을 강화해 일관공정 성능 실험을 수행할 계획이다.
 
  한국수력원자력 자료에 따르면, 2014년 3월 현재 우리나라가 보유하고 있는 사용 후 핵연료의 양은 1만5000톤에 달한다. 우라늄이 93.4%, 플루토늄 1.2%라고 한다. 핵무기 제조에 들어가는 원료인 핵분열 물질은 일단 확보한 셈이다. 게다가 증폭 핵분열탄과 수소폭탄 개발에 필요한 핵융합 물질인 중수소와 삼중수소도 확보하고 있다.
 
  통상적으로 중수소는 바닷물에서 추출하고, 삼중수소는 리튬6에 중성자를 대량으로 조사(照射)해 얻어진다. 리튬6과 삼중수소 모두 핵무기 개발에 이용될 수 있는 핵물질이어서 국제적으로 수출입에 통제가 따른다. 그런데 삼중수소는 리튬6을 통한 추출뿐 아니라 중수로의 부산물로도 나온다. 중수로 원자로의 중수(重水) 속에 존재하는 삼중수소를 액체 상태로 분리한 뒤 초저온(-256도) 상태에서 농축하면 순수한 삼중수소를 얻을 수 있다. 중수로인 월성 원전은 2007년부터 TRF(Tritium Removal Facility·삼중수소제거장치)를 설치해 자체적으로 삼중수소를 거의 무한정으로 생산할 능력을 갖추고 있다. 삼중수소를 추출하기 위한 촉매기술부터 저장용기까지 세계 두 번째로 자체 개발했다고 한다.
 
  그동안 사용 후 핵연료 재처리는 군사적 목적 전용의 우려 때문에 한미원자력협정에 의해 상당 부분 규제당해 왔다. 그러나 지난해 4월 한미원자력협정을 재개정하면서 ‘파이로 프로세싱에 대한 공동연구를 향후 10년간 추진하고 그 결과물을 바탕으로 연구 및 사업 방향을 정립한다’는 내용을 삽입해 재처리의 숨통을 틔웠다.
 
 
  일본의 고속증식로는 재처리 명분 쌓기용
 
일본 후쿠이(福井)현 쓰루가(敦賀)시에 있는 고속증식로 몬주의 모습. 현재 가동 중단 상태지만 연간 유지비가 180억 엔(약 2600억원)에 이른다. 일본은 핵연료 재처리를 명분으로 고속증식로를 보유하고 있다.
  ‘파이로 프로세싱’이란 재처리 기술 중 하나로, 사용 후 핵연료에 포함된 우라늄 등을 회수, 차세대 원자로인 고속증식로의 핵연료로 재활용할 수 있는 기술이다. 사용 후 핵연료에는 우라늄 약 96%, 플루토늄 약 1%, 넵투늄·아메리슘·큐륨·세슘·스트론튬 등 핵분열생성물(장반감기 핵종과 고방열 핵종)이 약 3% 포함돼 있다. 파이로 프로세싱은 이 사용 후 핵연료를 500℃ 이상의 고온에서 소금을 녹인 것과 비슷한 용융염 매질과 전기를 이용해 전기화학적으로 처리하는 기술이다.
 
  파이로 프로세싱은 기존의 습식 재처리에 비해 공정상 플루토늄을 단독으로 분리할 수 없어 핵무기 비확산성이 높고 우라늄 활용률을 거의 100% 가까운 상태로 끌어올릴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다만 플루토늄의 경우, 다른 물질과 섞여 추출되기 때문에 그 순도는 다소 떨어진다. 서균렬(徐鈞烈) 서울대학교 원자핵공학과 교수는 “파이로 프로세싱을 통해 얻은 플루토늄의 양은 매우 적고(약 1.2%) 불순물이 섞인 저순도지만, 고폭 화약을 이용해 압축하면 1억 도에 이르는 고온을 내기 때문에 증폭 핵무기 개발에 응용할 수 있다”고 했다.
 
  서 교수는 “우리는 30여 년 전부터 경수로보다 사용 후 핵연료가 몇 배나 더 많이 나오는 중수로 원전을 운용해 왔다”면서 “현재 중수로에서 나오는 사용 후 핵연료 물질은 엄밀히 따지면 미국의 통제권 바깥에 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고 주장했다. 월성 1호기의 경우, 캐나다의 캔두(CANDU)형 원자로 기술을 도입한 것으로 미국과는 무관하다는 이야기이다. 그는 “(월성 1호기 등) 중수로에서 나온 사용 후 핵연료에 대한 재처리는, 한미원자력협정에 위배될 것으로 보지 않는다”고 했다.
 
  재처리한 사용 후 핵연료는 고속증식로(高速增殖爐·Fast breeder reactor)라는 차세대 원자로에서 연료로 재활용한다. 종래의 원자로가 핵분열성 물질인 우라늄 235 분열에 중점을 두기 때문에 저속중성자를 사용하는 데 비해, 고속증식로는 천연 우라늄의 99%를 차지하고 있는 비(非)핵분열성 물질인 우라늄 238을 핵분열성 물질인 플루토늄 239로 변환시키는 원자로이기 때문에 고속중성자를 사용한다. 액체금속인 나트륨을 냉각재로 사용하기 때문에 액체금속로라고도 부른다.
 
  고속증식로는 플루토늄과 천연 우라늄을 함께 장전한다. 이때 연료인 플루토늄은 소모되지만, 우라늄 238이 반응을 통해 플루토늄 239로 바뀌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소모되는 플루토늄보다 더 많은 플루토늄을 생산한다. 우라늄 238 1g을 사용하면 원자로 내에서 1.17g 정도의 플루토늄 239로 증식되어 연료로 사용된다. 이 같은 고속증식로가 실용화될 경우 우라늄의 이용효율을 60배 정도 높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현재 고속증식로는 프랑스가 1989년 슈퍼피닉스(124만kw급, 1998년 12월 폐쇄)를 가동하고, 일본이 1995년 8월 몬주(28만kw급, 1995년 12월 가동 중지)를 건설했으나, 현재로서는 경제성이 없어 상용화를 미루고 있다. 냉각재로 사용하는 액체나트륨이 물·공기와 결합하면 폭발을 일으키고 파이프를 쉽게 부식시켜 이를 안정적으로 다루는 기술 확보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일본이 사용 후 핵연료를 ‘합법적으로’ 재처리해 플루토늄을 생산할 수 있는 것은 미국과의 원자력협정 때문이다. 그러나 그 협정(30년간 유효)이 2018년 7월 만기를 맞이하는 것이다. 현재 일본은 47.8t에 달하는 플루토늄을 어떻게 처리할지를 고민하고 있다. 이는 히로시마에 투하한 핵무기 6000발분에 해당하는 양이다.
 
  일본은 미국과의 원자력협정에 따라 ‘핵연료 주기(채광, 정제, 사용, 처분 등 핵연료 사용과 관련한 전 과정)’를 운용하면서 원전용 핵연료 재활용을 명분으로 제시해 왔다. 다시 말해 고속증식로 ‘몬주’를 비롯, 사용 후 핵연료 재처리를 통해 만든 플루토늄과 우라늄을 섞어 만든 혼합산화물을 원료로 사용하는 원자로 17~19기를 플루토늄의 사용처로 설명해 온 것이다. 그러나 후쿠시마(福島) 원전 사고의 여파로 대다수 일본 내 원전이 가동 중단 상태인데다 플루토늄의 최대 용처인 몬주는 가동 중지 상태에 놓여 있고, 플루토늄이 섞인 핵연료를 쓰는 다른 원자로의 재가동 전망도 불투명하다.
 
  협정을 개정하지 않으면 자동 연장되지만, 협정 만료 6개월 전에 한쪽이 일방 통보를 통해 파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일본으로선 미국의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이다. 일본 외무성 관계자는 현재의 미일 ‘밀월관계’를 감안할 때 자동연장은 문제없다는 견해지만, 미국의 분위기는 낙관할 수 없는 상황이다.
 
  2월 2일자 《요미우리신문》은, 미국의 유력 연구기관인 카네기국제평화재단의 제임스 액턴 선임 연구원이 작년 9월 “일본이 잉여 플루토늄을 가지지 않는다는 약속을 이행하도록 제도화해야 한다”며 협정 개정을 통해 플루토늄 감축 시한을 명기한 부속 문서를 만들자고 제안했다고 보도했다.
 
  북한의 4차 핵실험으로 한국 일각에서 ‘핵무장론’까지 나오는 상황에서 미국이 ‘일본 예외’를 계속 인정할 명분이 뚜렷지 않다는 것이다. 중국이 유엔 등 국제무대에서 일본을 ‘잠재적 핵보유국’으로 칭하며 미국을 압박하는 상황도 껄끄러울 수밖에 없다. 이에 반해 국내에서는 이미 자위적 핵무장이 폭넓게 힘을 얻고 있다. ‘한국이 핵개발을 포함한 모든 자위적 조치를 취할 수 있는 헌법적 권리와 국제법적인 권한을 가졌다’는 것이다.
 
 
  자재 구입·人事로 인한 갈등
 
  오늘날 한국이 세계 원자력 5대 강국 반열에 오른 이면에는 뼈아픈 인고의 세월이 있었다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나라 원자력 ‘행정’과 원자력 ‘연구’ 사이의 내분은 원자력법을 만들고 원자력원을 발족시키는 등 준비 단계부터 싹이 트고 있었다. 대한민국 건국 후 최초의 하극상(下剋上)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당시 원자력연구소 연구원들의 핵심세력은 자타가 공인하는 윤세원(尹世元), 김준명(金俊明), 김조규(金照圭), 이병호(李炳昊), 민광식(閔光植), 정구순(鄭求珣), 이진택(李鎭澤), 이수호(李洙灝), 현경호(玄京鎬) 등 소위 ‘스터디 그룹’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원자력법을 위시해 원자력 행정 체제와 연구 체제의 골격을 마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초창기부터 연구원들은 ‘원자력 창업 공신’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들은 처음부터 원자력 연구에 독립성을 보장받기 위한 자세가 강했다.
 
  원자력원의 감독이나 원자력위원회의 행정 중심의 제약에서 벗어나 그야말로 원자력연구소 독자적으로 자유로운 연구 활동을 원했던 것이다. 연구 기자재의 구입이나 인사문제에 대해 불평이 많았고, 인사행정의 불공정성이 내분을 더욱 조장했다.
 
  특히 인사문제에 있어서는 연구소 발족 초기, 연구관 T/O(Table of organization·인원구성표)를 책정해 주지 않아 대부분 원자력연구소의 임시 촉탁연구관으로 발령했다가, T/O 범위에서 정식발령을 내면서 갈등이 커졌다. 개인 친밀도나 학연으로 발령을 빨리 내는 경우도 왕왕 있었는데, 급료는 정식연구관과 촉탁연구관의 경우 약 3배 가까이 차이가 났다.
 
  초창기 원의 사무직은 거의 모두 정식 직원으로 발령받았고, 연구소의 사무직은 임시 직원이 많았다. 원자력연구소 소속원들은 “원자력원의 횡포”라고 성토했다. 인사행정의 이러한 불평은 6·25전쟁을 겪는 동안 선후배의 졸업연도가 뒤바뀐 것에도 원인이 있었다. 또 하나는 원자력원장이 박철재(朴哲在) 원자력연구소장을 원자로 기공식 준비 때 관계자들로부터 기부금을 받은 혐의로 감사원에 고발했고, 이 때문에 결국 박 소장은 사표를 내고 출근하지 않다가 1960년 9월 사표가 수리됐다. 연구관들은 이것을 연구소의 부정으로 확대시킨 당시의 원장과 사무총장을 질타했다.
 
 
  최형섭 人事 문제
 
5·16 군사쿠데타 당시 원자력원장이었던 김양수 선생,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인사위원회 구성지침에 따라 임명한 기용숙 서울대 의대 교수, 서강대 부총장을 지낸 최상업 원자력연구소장(왼쪽부터).
  1960년 4·19혁명으로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면서 그해 6월 초대 김법린(金法麟) 원장에 이어 김양수(金良洙) 원장이 취임했고, 7월 말썽 많았던 김대만(金大萬) 사무총국장, 기감 서동운(徐同運)이 함께 사임하고 새로 서광순(徐廣淳)이 사무총국장으로 왔다. 연구행정 인사들을 새로이 충원하자 연구관들의 연구의욕도 살아났다. 이번에는 연구 기자재 도입이 발목을 잡았다. 연구행정이 느리고 일방적이어서 또다시 원자력원과의 감정이 나빠졌다. 게다가 원자력위원회 위원들이 원자력도 모르면서 직책상 연구성과 부진과 부실을 꼬집고 질책하는 바람에 관계 악화는 더욱 심해졌다.
 
  결국 원자력연구소는 직원 전원이 사직서를 쓰고, 결의문·건의문·연판장 등을 각계에 돌리며 원자력원, 원자력위원회에 대한 그동안의 울분을 드러냈다. 연구관들은 연판장에 사직서를 첨부해 행정절차를 무시하고 직접 국무총리실에 전달하려다 접수를 거부당하기도 했다. 이들은 원자력원장을 비롯해 상임 원자력위원, 사무총국장, 그리고 원 및 소의 총무과장 총사퇴까지 요구하고 나섰다.
 
  이미 완성해야 할 원자로 건설은 아직 요원했고, 이미 도입했어야 할 시설 및 기자재들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연구조건과 환경을 만들어 주지 않아 ‘페이퍼 워크’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하극상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 사건은 건국 이래 행정기관에서 발생한 최초의 하극상 사건으로 기록됐다.
 
  4·19혁명으로 자유의 바람을 타고 젊은 연구관들의 기세는 더욱 등등해졌다. 가끔 연구관답지 않은 돌출행동도 나타났다. 이때 모든 일이 합의에 의해 원만하게 처리되리라 기대했던 신임 소장에 대한 신뢰에 이미 틈이 생기고 있었다. ‘최형섭 인사’는 새로운 내분의 도화선이 됐다.
 
  당시 원자력연구소는 최상업(崔相業) 소장을 지지하는 그룹과 김태봉(金泰鳳) 동위원소부장과 윤세원 로공학연구부장을 지지하는 두 파로 나뉘어 있었다. 이때 최형섭(崔亨燮)의 인사 문제가 발생했다. 최형섭은 1944년 와세다대학 이공대학 채광야금과를 졸업하고, 1958년 미국 미네소타대에서 화학야금학으로 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해 새나라자동차 부평공장장(부사장급)으로 일하고 있었다.
 
  ‘최형섭 인사’ 문제는 박철재 소장 후임으로 최상업 소장이 취임하면서 최형섭을 1급 직원으로 전격 발령한 것을 가리킨다. 당시 1급 T/O는 하나였고, 그 자리는 윤세원 로공학연구부장(대리)이 승진해서 갈 것이란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실제 인사는 이런 일반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다. 당시 미국이나 유럽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돌아온 사람들의 친목단체로 ‘파이클럽’이란 것이 있었는데, 최형섭과 최상업은 그 중심멤버였기 때문에 갈등의 중심이 됐다. 원자력을 전공하지도 않았으면서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최형섭을 고위직에 기용했고, 그 배후가 같은 파이클럽인 최상업이란 것이다.
 
  이런 인사 문제를 사전 협의 없이 결정한 최상업 소장에 대해 김태봉, 윤세원 등은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내면서 왕따를 시켰다. 이들은 파이클럽이 국내파인 자신들에 대해 조직적인 도전을 한 것으로 보고 위기의식을 공유했다.
 
 
  군인들의 국무회의에 나타난 ‘한복 노인’
 
1962년 9월 제5차 국제원자력기구(IAEA) 총회에 참석한 정태하 원자력연구소장, 이영재 연구관, 이민하 보좌관, 신응균 주서독대사(왼쪽부터).
  이러한 가운데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 군인들이 주축인 국가재건최고회의가 국회를 해산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이들은 모든 행정기구의 부·처장을 군인으로 교체했다. 원장을 오원선(吳元善) 해병의무관(대령)으로 교체하고, 원자력원 사무국장에 경응호 해병대 중령, 연구소 감독관에 이동집(李東潗) 해병대 소령을 임명했다. 이동집 감독관은 군사쿠데타 직후 오원선 대령이 원자력원장으로 부임한 경위를 이렇게 설명했다.
 
  “혁명과 동시에 국가재건최고회의가 구성되고 각 부처의 군인장관들을 임명한 다음, 첫 국무회의를 소집했습니다. 군인장관회의였던 셈이지요. 그런데 회의에 군복이 아닌 하얀 한복 차림의 노인이 참석했습니다. 의장 비서실장(박태준 육군 대령)이 정중하게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느냐’고 하니, 그 노인은 ‘내가 원자력원장이오. 국무회의를 소집한다기에 연락을 받고 왔다’고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비서실장이 깜짝 놀라 그 사실을 내각수반(장도영)에게 알렸더니 ‘원자력원장은 오늘 회의엔 참석하지 않아도 되니 돌아가시게 하라’고 했어요. 당시 원자력원장은 장관급 각료였으나,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원자력원장을 장관급 관료인 줄 모르고 군인으로 교체하지 못했던 겁니다. 한복 입은 노인은 김양수 원장이었어요. 최고회의는 실수를 자인하고 당시 해병대 출신 김동하(金東河) 최고위원의 추천으로 해병대 군의관인 오원선 대령을 추천한 겁니다.”
 
  동시에 국가재건최고회의는 공무원 재임용 인사지침에 따라 각 부처의 3급 이상의 공무원에 대한 재신임을 물어 재임명하는 인사위원회의 구성을 서둘렀다. 위원장에는 원자력원 사무총국장 경응호 중령을 임명하고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인사위원회 구성 지침에 따라 기용숙(奇龍肅) 서울대 의대 교수, 박익수(朴益洙) 서울대 사범대 전임강사(작고, 전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위원장) 등 민간인 2명을 위촉했다.
 
  박익수 전 위원장은 “한미원자력쌍무협정을 비롯해 우리나라 원자력 산업에 대한 글을 일간신문에 자주 기고한 인연으로 군사혁명 후 오원선 대령이 나를 찾아와 자문을 요청했고, 후에 원자력원장 추천으로 혁명 초기 중앙정보부 부장 자문기관 판단관으로 일했다”면서 “기용숙 교수는 국가재건최고회의 홍종철(洪鍾哲) 위원장(경호실장 역임)과 특별한 관계에 있었고, 홍 위원장은 오원선 원장에게 기 박사의 자문을 받으라고 권유했다”고 회고했다.
 
  이때 기용숙 위원은 김태봉, 윤세원 두 부장의 편에 서 있었다. 기 위원은 “최상업, 김태봉, 윤세원은 그대로 두고, 그 외 3급 이상의 연구관에 대해 재심하는 것이 좋겠다”며, 3급 이상 연구관 중 분쟁 주동자 13명의 명단을 내놓으며 “이들의 사표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 그들은 원자력원 등과의 분쟁에서 선봉에 섰던 사람들이었다. 인사위원장 경응호 중령이 주관한 인사위원회는 명단을 중심으로 문제의 연구관들을 인사위원회에 불러 연구소 내 분쟁에 대해 해명할 기회를 주었다. 다음 조치로 오원선 원장은 기용숙 위원의 의견을 수용, 원자력연구소 감독관 이동집 해병대 중령에게 연구소장으로 하여금 13명의 사표처리를 상신하도록 지시했다.
 
  “상황 파악을 위해 일주일간의 말미를 달라”고 한 이동집 감독관은 일주일 후 오 원장을 찾아 “지명된 13명의 연구관들은 국비로 해외 교육훈련을 받은 원자력계의 유능한 인재들”이라며 “이들을 모두 내보내면 국가적으로 큰 손실일 뿐만 아니라 원자력 사업 추진에도 지장이 있으므로 지금까지의 분쟁의 책임을 실질적으로 총지휘해 온 그들의 상관 김태봉, 윤세원 두 사람에게 책임을 지우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결국 연구관 상급 책임자를 문책하느냐, 하급 책임자를 문책하느냐의 문제는 상급 책임자인 윤세원, 김태봉 두 사람의 사표와 함께 최상업 소장의 사표도 받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오 원장은 이동집 감독관의 판단이 옳다고 믿었다. 오 원장은 주저하지 않고 김태봉과 윤세원의 사표수리 사실을 국가재건최고회의 정세웅(鄭世雄) 인사위원장(해병대 대령)에게 통보해 원자력연구소의 내분을 마무리했다.
 
  1961년 6월 11일 오원선 원자력원장은 취임하면서 수습책을 내놓았다. 원자력위원 정태하(鄭泰河)와 연구소장 최상업을 직책을 바꿔 발령했다. 신임 정태하 소장의 임명에는 이동집 감독관이 간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1961년 10월 사무총국의 명칭을 사무국으로 개칭하고 기감제를 폐지하고, 3부 연구실을 6개 연구실로 연구조직을 개편하는 등 연구소 직제도 개편했다. 감투가 많아져야 싸움도 줄어들고 연구관 관리도 용이할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광물선광 전문가 崔亨燮의 연구소장 부임
 
  최형섭은 1961년 2월 민주당 정부하에서 원자력연구소 1급 연구관으로 발령받았으나, 파이클럽으로 몰려 내분상태였던 연구소에 바로 출근할 수 없었고, 전 직장인 새나라자동차 업무를 마무리해야 한다는 이유로 취임을 연기했다. 새나라자동차의 소형 자동차 시제품을 완성하기 위해 일본 후지중공업에 갔던 그는 그곳에서 시제품을 만들어 선적을 기다리다 5·16 군사쿠데타를 맞이했다. 실제로 최영섭이 귀국한 것은 이틀 후인 5월 18일이었다.
 
  최형섭은 당시 광물선광법(鑛物選鑛法)의 권위자였다. 그는 6·25전쟁 때 공군으로 복무하면서 박주성 장군을 알게 됐고, 박 장군은 훗날 장한제련소장으로 부임하면서 그를 스카우트했다.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되자, 최형섭은 가장 우선순위에 둔 ‘중석 제련 증산 계획’을 상공부 장관인 정래혁(丁來赫) 장군에게 보고했고, 최형섭을 눈여겨본 정 장군은 그를 상공부 광무국장으로 차출했다.
 
  당시 5·16 군사쿠데타 시절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요청은 직급이나 소속을 떠나 어떤 곳이든 어떤 일이든 협조해야 했다. 최형섭은 이미 원자력연구소 1급 연구관으로 발령받은 상태였다. 귀국한 최형섭은 최초 발령받은 원자력연구소에 부임하지 못하고 상공부 광무국장으로 일했다. 1급 발령을 받은 상태에서 2급(국장)으로 일한 셈이었다.
 
  그 무렵, 박동길(朴東吉) 상임 원자력위원은 ‘혁명정부에서 임명한 원자력원장을 내쫓고 원장을 하겠다는 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1962년 4월 정태하 소장의 사표를 받는다. 1962년 4월 11일 상공부에서 호평을 받은 최형섭을 정태하 후임 연구소장에 임명했다. 정 소장의 사표를 받은 오원선 원장이 정래혁 상공부 장관을 찾아가 삼고초려(三顧草廬)한 결과였다. 연구소 내분에 윤세원, 김태봉 두 사람이 책임을 지고 사퇴한 후여서 연구관들의 불만은 수그러들었다.
 
  최형섭은 1년 정도 연구소장을 하다 IAEA 연구비를 얻어 1963년 3월 캐나다로 떠났다. 원강(原鋼)에서 지르코늄을 추출하는 연구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정낙은(鄭樂殷)의 천거로 후임자는 조용달(趙容達) 당시 삼성물산 동경사무소장을 임명했으나, 연구소 내 잡음과 통솔력 부재로 1년 만에 물러났다. 1964년 5월 최형섭이 캐나다에서 귀국하면서 다시 소장으로 부임했다.
 
  원자력계 인사들은 최형섭을 한국 원자력계의 내분을 잠재우고 행정적 기틀을 세운 인물로 기억한다. 그는 1966년 2월 초대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소장으로 임명될 때까지 원자력연구소장으로 재직하면서 연구소를 원만하게 이끌었다. KIST 소장직에 있을 때 연구의 자율성과 연구 환경의 조성, 해외 인재 영입 등을 바탕으로 국내 과학기술 발전의 계기를 마련한 인물로 평가한다.
 
  그가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을 처음 안 것은 1965년 6월이었다. 이때 박 대통령이 존슨 미 대통령의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하기 직전, 정부의 연구소장들을 청와대로 불러 만찬을 했다. 그때 오원선 원자력원장이 최형섭을 박 대통령에게 소개했다. 박 대통령은 최형섭을 눈여겨본 다음, 며칠 후 그를 청와대로 불렀다. 박 대통령은 경제기획원 장관, 상공부 장관 등 주요 경제 관료들이 배석한 자리에서, “우리나라 과학기술 진흥에 관해 최 박사의 의견을 말해달라”고 주문했다. 당시 박 대통령은 경제개발계획의 핵심적 역할을 수행할 KIST의 초대소장 자리에 최형섭을 미리 점찍어 놓았던 것이다.
 
 
  방사선 의학연구소 설립
 
등록문화재가 된 연구용 원자로 트리가 마크Ⅱ의 가동 당시 모습.
  원자력원의 이전은 방사선의학연구소의 설립과 관련 있다. 원자력원은 출범 당시 옛 중앙청 옆 체신부 청사 일부를 빌려 사용하다 1962년 남산으로 이전했다가 얼마 후 다시 중구 태평로 조선일보사 미술관 아래의 신청사로 옮겼다. 당시 원자력원은 국가재건최고회의 문교사회위원회에 소속해 있었다. 이 위원회 소속 정세웅 위원은 오 원장의 업무보고를 받고 “연구용 원자로 건설을 위시해 모든 실행하는 업무에 실적이 없다”고 꾸짖었다고 한다. 이동집 감사관의 회고다.
 
  “오원선 원장이 정 위원 만남을 꺼려 대신 보고하라며 보낸 적이 많았습니다. 원래 정 위원은 해병대에서 함께 근무한 사이라 별 어려움 없이 가서 보고했습니다. 하지만 오 원장과 저는 늘 실용성 있는 원자력 사업을 해봐야겠다고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생각해 낸 것이 방사선의학연구소의 신설 계획이었습니다.”
 
  당시 일본은 이미 원자력 의학 관련 연구소를 설치해 운영하고 있었고, 의학박사였던 오원선 원장도 흔쾌히 동의했다. 더군다나 원자력원은 연구용 원자로 트리가 마크Ⅱ가 1959년 7월 14일 기공식을 한 이래 건설 예정날짜가 두세 차례 연기돼 국가재건최고회의에 면목이 서지 않았던 시기였다.
 
  방사선의학연구소 설립 소식이 알려지자 원자력연구소 측은 반발했다. 연구용 원자로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연구를 개시하기도 전에 방사선의학연구소를 설치하면 그만큼 정부 예산 배정에서 기존 연구소가 불리할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1962년 3월 오원선 원장은 그러한 지적에도 불구하고 법과 예산 조치를 받을 때까지 원자력연구소 내에 ‘방사선의학연구실’을 신설했다. 그러나 방사선의학연구실은 기존 건물로는 연구 활동을 해나갈 수 없었다. 방사선의학연구소를 설립하려면 방사선 및 방사성 동위원소를 이용한 진단과 치료를 할 수 있는 전문적인 원자력병원을 동시에 세워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남산청사로는 이러한 사업을 도저히 추진할 수 없었고, 불가피하게 청사 이전을 할 수밖에 없었다.
 
1962년 3월 26일 열출력 100kw 시험에 성공한 트리가 마크Ⅱ 원자로 위에서 오원선 원자력원장(왼쪽)이 이관 원자로공학연구실장(오른쪽) 등과 ‘제3의 불’ 성공을 축하하고 있다.
  원자력원은 부지 물색에 들어갔다. 당시 《조선일보》 본사(현 코리아나 호텔 뒤편 구관 건물) 뒤편 정동 2번지에는 공보부 산하 국제방송국이 사용하는 낡은 건물이 있었다. 군사쿠데타 이후 혁명정부는 그곳에 군 방송실을 두고 있었다. 오원선 원장은 당시 오재경(吳在璟) 공보부 장관을 찾아가 “현재 남산의 KBS 건물 바로 옆의 원자력원 건물과 정동 국제방송국 건물 자리를 바꾸자”고 교섭했다. 이동집 당시 감사관은 “정동의 국제방송국은 낡은 건물이라 새 건물을 지을 수 있는 명분도 될 뿐 아니라, 문공부 장관의 협력을 얻으면 그만큼 예산교섭을 하기 쉽다는 생각에서 그렇게 제의했던 것”이라고 했다. 오 원장의 제의에 오 장관은 흔쾌히 찬성했다.
 
  예산은 국가재건최고회의 정세웅 최고위원과 김학열(金鶴烈) 당시 경제기획원 기획실장(경제기획원 장관 역임)이 협력해 무난히 딸 수 있었다. 그 결과 ‘방사선의학연구실’은 ‘방사선의학연구소’로 승격, 부속병원인 원자력병원을 설치하는 직제를 법제처와 총무처에서 승인받았다.
 
 
  삽은 이승만이 뜨고, 테이프는 박정희가 끊고
 
1962년 11월 17일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오원선 원장, 이후락 청와대 공보실장, 최형섭 소장, 박정희 의장, 이창건 박사(한 사람 건너) 등과 원자로를 시찰하고 있다.
  5·16 군사쿠데타 직후 원자력계 초미의 관심사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원자력에 대한 인식이었다. 대부분의 원자력 관계자들은 “박정희는 원자력 산업을 일으킬 것”이라고 예상했다. 당시 원자력계 인사들은 건설 중인 연구용 원자로 트리가 마크Ⅱ에 대한 부정적 시각 때문에 은근히 걱정을 하고 있었다.
 
  4·19혁명으로 민주당 정권이 들어선 이듬해인 1960년, 미국 아머연구재단(Armour Research Foundation)의 라이펠(Reiffel) 연구원은 1960년 10월 27일자로 발표한 〈한국 원자력 연구에 대한 보고서(Report on Atomic Research in Korea)〉에서 한국의 원자력 연구상황은 전반적으로 낙후했다는 요지의 내용을 주장했다. 한국 언론은 1960년 12월 31일자 조간에서 ‘한국이 도입하기로 한 연구용 원자로는 구식의 폐로(廢爐)였다’고 보도했다. 게다가 기초과학 분야의 전문가가 빈약하고, 한국이 원자로와 건물을 건설해 운영하려면 5년 이상이 걸릴 것이라는 전망까지 내놨다. 이 때문에 정치권에서는 원자력연구소를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흘러나왔다. 그러한 상황에서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세력이 이제 싹트고 있는 신생국의 원자력 연구를 어떻게 할지에 자연스레 관심이 쏠렸던 것이다.
 
  이때 혁명정부는 원자력원 이민하(李敏厦) 기획조사과장에게 원자력 산업의 개관을 이해하기 위해 ‘원자력 계획서’를 작성해 제출하라고 했다. 이민하 전 동양고속 회장은 박종규(朴鐘圭) 전 청와대 경호실장의 처남으로, 1980년대 초 미국 노스롭사의 F-20 전투기 도입을 추진하기도 했다.
 
트리가 마크Ⅱ 원자로 가동 기념우표.
  이민하 과장은 회고에서 “상공부와 한전, 석탄공사 등 관련 기관의 협조로 각종 통계자료를 참고해 계획을 더욱 발전시켰다”면서 “그 결과 1962년 경제기획원이 작성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장기 원자력 발전소 도입계획’을 포함시켰다”고 했다.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이 과장이 작성한 〈원자력 발전 사업 장기계획〉을 살펴보았다. 보고서에는 원자력 발전소 부지와 예산 등 원자력 정책에 대한 대강이 담겨 있었다. 박 의장은 이 과장을 불러 직접 설명을 들은 후, 계획서에 서명했다. 이로써 박정희 의장도 원자력 발전에 관심이 있다는 것이 확인됐고, 군사쿠데타 이후에도 원자력 산업은 흔들리지 않고 진행될 수 있었다.
 
  원자력 산업에 대한 박정희 의장의 관심은 트리가 마크Ⅱ 준공식 때 확인할 수 있었다. 원자력연구소는 5·16 이듬해인 1962년 초 원자로 설치 공사를 완료하고, 그해 3월 19일 10시50분 핵연료를 장전했다. 이어 오후 4시52분 핵분열에 들어감으로써 한국은 마침내 원자력 시대를 맞이했다. 트리가 마크Ⅱ는 3월 23일 100kw 정격출력에 도달했다. 원자력연구소는 정상작동을 확인하자 3월 30일 트리가 마크Ⅱ 준공식을 가졌다.
 
  준공식은 식민지배와 전쟁의 고통을 겪은 대한민국에 너무나도 뜻깊은 행사였다. 정부는 원자로 준공을 기념해 기념우표까지 발행했다. 행사에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비롯해 수많은 인사가 참석했다. 트리가 마크Ⅱ는 1969년부터 출력을 250kw로 올려 가동했다. 이 실험용 원자로는 원자력 관련자들을 위한 교육, 중성자 빔을 이용한 물성 연구, 방사성 동위원소 생산 등 다양한 분야로 활용됐다. 그러나 트리가 마크Ⅱ의 출력이 너무 작다는 것이 문제가 돼 가동 3년 만인 1969년부터 새로운 연구용 원자로 도입을 추진하게 된다.
 
 
  예정工期보다 7배나 더 걸린 이유
 
  트리가 마크Ⅱ 원자로는 준공하기까지 커다란 우여곡절을 겪었다. 5·16 직후에도 원자로 탱크 용접 부위의 균열로 인해 원자로 설치 공사는 중단돼 있었고, 군사정부도 오원선 원자력원장을 중심으로 내분을 신속하게 수습하고 원자로를 신속히 완성해야 했다. 1961년 6월 25일 부임한 정태하 소장은 미국에서 오랜 기간 유학하고 조선전업에서 3개 화력발전소를 건설했던 인물이었다. 군부세력은, 원자력원장에는 오원선 대령을 임명했지만, 연구소장에는 영어도 유창하고 미국과 인적 네트워크가 강한 인물을 임명해 일을 신속하게 추진할 필요가 있었다.
 
  정태하 소장이 취임했을 때, 설계자, 원자력연구소, 시공업자 사이의 여러 가지 문제로 공사는 반년 넘게 중단상태였다. 원자로 설치는 제너럴 어토믹사(General Atomic)의 하청사인 홈스나버(Holmes Narver)가 담당했다. 고작 우리 손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중앙산업이 담당한 토건업무였다. 더구나 중앙산업은 자금난으로 공사를 제대로 진행하지 못했다.
 
  정 소장은 부임하자마자 원자로 탱크 용접 부위 균열 문제부터 수습에 나선다. 제너럴 어토믹사의 프레드릭 호프먼 사장과 직접 담판한다. 마침 이탈리아 국립원자력위원회가 도입한 한국과 동일기종의 연구용 원자로의 내벽 에폭시 도장(塗裝)이 방사선 조사로 손상돼 원자로 냉각수가 누설됐다는 보고를 받자, 이를 제너럴 어토믹사에 보완대책을 요구해 결국 알루미늄 라이너를 무상으로 제공하겠다는 답변을 받아냈다. 1961년 8월 29일 제너럴 어토믹은 약속대로 알루미늄 라이너를 제작해 보내왔고, 원자로 공사는 재개된다. 당시 우리나라는 알루미늄 용접기술이 없어 2만 달러를 주고 미국에서 용접기사를 불러와야 했을 정도였다.
 
  정태하 소장의 능숙하고 신속한 대처로 원자로 탱크의 균열을 신속히 복구했다. 그러나 제너럴 어토믹은 원자로 계통만 공급하기로 돼 있었고, 2차 계통인 배관 계통은 우리가 자력으로 설계와 시공을 끝내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연구소 내분으로 그동안 원자로 공사의 주축을 담당했던 윤세원, 김태봉 핵심 부장 인력들이 해임돼 그 공백이 컸다.
 
  문제는 그뿐이 아니었다. 당초 설계에는 원자로 건물 내부의 열교환기만 포함돼 있었고, 외부 냉각타워가 빠져 있던 것을 뒤늦게 발견했다. 외부 냉각타워는 원자로에서 빠져나온 뜨거운 냉각수를 전동팬으로 강제 냉각해 열을 대기로 방출하는 공랭식 냉각장치다. 이관(李寬) 연구관과 장근수(張根秀) 연구관의 주도로 냉각타워를 설계하고 자체 제작도록 했다.
 
  그해 10월 원자로 건물 외부에 설치하고 있던 냉각타워 공사가 완료돼 냉각계 시험도 성공적으로 끝마쳤다. 이때 원자로는 제너럴 어토믹사와 공급계약에 의해 도입한 것이라 우리 측에 설계도면을 넘기지는 않았다고 한다. 장지영(張志瑛) 연구관 등은 미국 측 기술진이 퇴근한 후 원자로 부품 하나하나와 설치절차 및 연결상태 등을 일일이 스케치했다고 한다. 원자로실 크레인도 이병호(李炳昊) 연구관이 최초설계를 보완해 다시 제작했다. 두 달간의 숨가쁜 사투가 이어졌다. 원자로 설치 준비가 비로소 끝난 것이다.
 
  1962년 1월 18일, 제너럴 어토믹사의 원자로 엔지니어인 존 배치(John Batch)가 원자로 최종 조립을 위해 방한했다. 존 배치는 1961년 9월에도 원자로 조립을 위해 왔으나, 우리 측 담당 부분이 너무 미흡하다며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던 인물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연구소 연구관들은 존 배치를 도와 송요택(宋堯澤), 이병호, 이관, 장근수, 장지영 연구관 등이 기계설치에 참여했고, 운전제어실의 설치와 계측제어장치의 실험은 김종련(金鍾鍊) 연구관이 참여했다. 정태하 소장과 연구관들은 매일 자정 무렵까지 야근을 하고 철야도 불사했다. 존 배치는 2개월여 동안 한국에 머물며 그해 3월 18일 원자로 설치공사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다. 단 5개월의 공기(工期)로 계획한 원자로 건설공사를 내분과 사고 등으로 7배의 시간이 더 걸려 장장 2년8개월 만에 완료한 것이다.
 
 
  ‘원자력 동기생’ 중국과 일본의 약진
 
중국 최초의 핵실험을 참관한 뒤 저우언라이에게 전화로 성공을 보고하는 부총참모장 장아이핑 상장.
  1964년 10월 16일, 신장자치구(新疆自治區)의 고비사막에서 버섯구름이 솟아올랐다. 아시아에서 터진 세 번째 핵무기이자 아시아인들이 보유한 첫 원자탄이며 또한 유색 인종의 첫 원자탄이었다. 대륙의 수억 중국인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소형화에도 실패해 거대탑에서 떨어뜨린 초보적 원폭에 불과했음에도 말이다. 그러나 중국은 보란 듯이 1967년 수소탄 실험에 성공했다.
 
  6·25전쟁에서 미국의 핵무기를 우려했던 중국은 자연스레 핵 연구에 박차를 가했고, 소련은 중국과 이런저런 조약을 맺어 핵의 평화적 연구와 무기연구에서 협력하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1953년에 스탈린이 사망하고 흐루쇼프가 권력을 잡자 상황이 바뀌었다. 소련은 1959년 연구용 샘플로 제공하기로 했던 원자탄을 주지 않고 핵 관련 과학자들을 전부 중국에서 철수시켰다. 중국은 소련이 핵연구 협력을 파기한 시간을 기념해 ‘596계획’이라고 부른 프로젝트를 가동하기 시작했다. 중국 군대 10대 원수의 한 사람인 녜룽전(聶榮臻)이 총지휘자로 나섰고 과학자들을 총동원했다.
 
  중국은 원전 르네상스를 구가 중이다.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따르면, 1991년 원전 가동을 개시한 중국은 현재 총 23기를 가동 중이며, 26기를 건설 중이다. 중국 국가에너지청(CNEA)은 원자력 발전에 관한 ‘13차 5개년 개발 계획(2016~2020)’의 거시적 윤곽을 발표하고, 장기적으로 100기 이상의 원자로 확보를 목표로 하고 있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이전 원자력 연구에 착수했던 원자력 선진국이다. 주요 선진국이 원자력 연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 일본 육군은 1939년 이화학연구소에 원자력 연구를 의뢰, 원자핵실험실을 운영했었다. 태평양전쟁 와중에서 일본의 원자력 연구는 진척을 보지 못했고 패망으로 이어졌다. 일본의 원자력 연구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군정이 종식되고 독립국가가 되면서 비로소 시작됐다.
 
나카소네 전 총리는 1950년대 후반부터 일본 원자력법 제정을 주도하는 등 일본 원자력 산업의 기틀을 다진 인물이다.
  최전선에서 일본 원자력 산업을 이끈 인물은 동경대 법학과 출신으로 태평양전쟁에 해군 대위로 참전했던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의원이었다. 1959년 과학기술청 장관에 취임한 그는 본격적으로 일본 원자력 산업의 토대를 구축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한국 원자력의 대부(代父)라면, 나카소네는 일본 원자력 산업의 대부다.
 
  나카소네는 1954년 일본 정부예산 수정안에 2억7000만 엔의 원자력 연구 관련 항목을 끼워넣어 일본 원자력계가 부활할 계기를 마련했다. 이듬해 나카소네는 원자력기본법 제정을 주도했다. ‘원자력 연구개발과 이용은 평화적인 목적으로만 한다’는 약속 아래 국제사회의 우려를 불식해 가며 법의 국회 통과를 관철했다.
 
  일본은 1959년 이미 중수로형 연구용 원자로를 자력으로 건립해 당당한 원자력 자립국 대열에 올랐다. 이어 일본 정부는 원자력국을 과학기술청 창설로 확대하는 작업을 추진했다. 과학기술청은 원자력연구소 운영과 함께 우주개발 연구를 맡아 현재 H-2A 우주발사체를 제작해 자국의 첩보위성을 하늘로 쏘아 올리는 데 성공했다.
 
  이후 일본은 1973년 미일 원자력협정을 개정해 연간 335톤의 농축 우라늄을 미국에서 수입하게 됐고, 일본이 갖고 있는 플루토늄을 제3국으로 이전해도 좋다는 동의까지 받았다. 이 덕분에 일본은 영국과 프랑스로 위탁 재처리도 가능해졌다. 일본은 1977년 마침내 최초의 상업용 원전인 도카이무라(東海村)에 연구용 재처리 시설을 짓는 데 성공한다. 원폭 두 발을 맞고 패망한 전범국(戰犯國) 일본이 원자력 대국으로 성장한 것이다.
 
  1959년 7월 연구용 원자로 트리가 마크Ⅱ의 첫 삽을 뜬 한국은 출발선은 중국, 일본과 같았으나, 원자력연구소 내분에 휩싸이면서 동력을 상실해 레이스에서 뒤처지고 말았다. 원자력계의 원로 K씨는 “오늘날의 자위적 핵무장론을 바라보면서, 당시 핵 레짐(Nuclear Regime)이 느슨했던 시기에 중국처럼 전력투구했다면 5년 안에 충분히 핵을 보유할 수 있었을 것”이라며 “그렇다면 지금 북핵을 놓고 국민 전체가 생존의 위협을 받으며 골머리를 않는 일도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또 “초창기 원자력 관련 기관의 내분 원인은 사람을 잘못 임명해서 빚어진 일”이라며 “현재도 원자력 주무부서인 미래과학부 수뇌부 인사들은 IT만 챙기는 원자력 문외한들이 대부분이고, 거대과학국 우주원자력정책관 산하 원자력진흥정책과 등의 실무부서도 비전문가들이 앉아 원자력 행정을 주무르고 있다”고 했다.
등록일 : 2016-03-05 02:44   |  수정일 : 2016-03-05 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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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세호  ( 2016-03-12 )  답글보이기 찬성 : 0 반대 : 3
당시 한국의 전력사정을 고려한다면 말도 되지도 않는 공상입니다. 덩치 큰 중국이야 기존 전력에서 1%만 핵 농축에 돌려도 차고 넘치지만... 당시 대한민국은 전력난으로 제한 송전을 밥먹듯 하는데다가 규모 자체가 비교도 안되지요. 의지만 가지고는 안되는 일이고... 돈이 있다고 해도 당장 어디서 전력이 조달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져 공상일뿐 이지요.
배영문  ( 2016-03-08 )  답글보이기 찬성 : 0 반대 : 3
한국의 원자력계 연구소와 기업체는 과거에서도, 지금은 더더욱, 미래에도 이런 마피아적 구조 자체이다. 목표를 향해 전력하는 연구원이나 엔지니어는 반드시 죽게 되어있고 원자력 전공자이면서 창의력 없고 스펙만 앞세운 반대를 위한 반대가 대단한 자기위상을 높인다고 생각하는 꼰대들이 있는한 그럴 것이다. 단기 프로젝트를 장기프로젝트 계획을 잡고 시행하는 정부예산 흡혈귀이다. 거미줄처럼 그리고 수치와 객관적 규제보다는 원자력쟁이를 먹여살리는 목적하에 관념적인 규제치와 모두 가정치를 대입한 넘처나는 평가서를 무수히 요구하는 최소한 현재의 원자력산업은 전혀 희망적이지 못하다. 방법이라면 물리적으로 수없이 많은 좌파적 시야를 가진 관리자나 규제연구원을 도려내야 한다. 가능한 예기인가? 새로운 지역에 새로운 인물로 담아야만 가능하다. 음습한 현재의 지역은 정말아니다!!!
김대진  ( 2016-03-05 )  답글보이기 찬성 : 48 반대 : 4
초대 대통령으로서의 이승만 대통령의 공과도 다시 평가되어야 한다.
임욱  ( 2016-03-05 )  답글보이기 찬성 : 6 반대 : 0
그만큼 처음부터 세계적으로 앞서 있다는 것. 원전도 거의 없고 한국과 달리 핵융합 기술이 없는 독일과 대조적. 중국은 100초 한국은 20초.
유병용  ( 2016-03-05 )  답글보이기 찬성 : 35 반대 : 4
이나라 국민들은 자기 이기주의 때문에 국가 미래.전략적 이득 이런 큰것은 생각지 안고 싸움만하는 어리석은 민족이다 일제때 조선인과 명태는 때려야 부드러워 진다고 말했다 자기 책임을 안하고 권리만 주장하는 이기주의 기술보다 빵을 더좋와하는 어리석은 인간들은 주인 밑에 사양개 같은 인생을 원하니 민족성이 너무 불쌍다 외세의 현실속의 치욕스러움을 없에려면 이스라엘을 본받고 살아야한다...
민덕규  ( 2016-03-05 )  답글보이기 찬성 : 25 반대 : 1
정치란....합의란...하나로 뭉치는 방법은 === 내 주장을 좀 내려놓고 상대방 주장을 좀 받아들이고 그 중간에서 합의하는 겁니다.
민덕규  ( 2016-03-05 )  답글보이기 찬성 : 26 반대 : 2
우리민족은 왜 그런가...사람간 분열, 이기적 욕심 ....글쓴이는 그걸 질타하면서 또 다른사람 탓.....서로조정하고 양보하고 합의하는 움직임이 우리민족에는 왜 없는지.....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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