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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열린우리당 창당 반대에서 찬성으로 바뀐 이유는?

“내 고집만 내세울 수 없어 따라간 것”

⊙ 盧, 출소한 廉東淵 전 의원에게 “왜 당을 쪼개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
⊙ “내가 열린우리당 창당 못마땅하게 여긴 것 다 알지 않느냐”
(盧 전 대통령, 측근들과의 식사자리에서)
⊙ 盧 전 대통령, 分黨 후 창당 요구하는 신주류 측에 착잡한 심경
⊙ 盧, 심한 난투극과 욕설 오간 신당 추인 위한 민주당 당무회의 직후 분당 마음 굳혀
⊙ 후계자로 지목한 鄭東泳 ‘힘 실어주기 위한 결정’이란 분석도

글 | 권세진 월간조선 기자 2015-08-31 09:27

  2002년 12월 17일. 새천년 민주당(이하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노무현(盧武鉉) 전 대통령은 이날 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회견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당선되면 본격적인 정치 개혁과 민주당 개혁에 착수하겠습니다. 국민과 당원의 뜻을 모아 신당을 창당하는 방안도 적극적으로 검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당의 문호를 전면 개방하겠습니다. 새 정치와 뜻을 함께하는 젊고 유능하며 도덕성과 전문성을 겸비한 새로운 인재들을 적극적으로 영입해서 당의 면모를 일신하겠습니다. 특정 지역에 편중되지 않는 전국통합정당을 건설하겠습니다.”
 
  당시 회견을 취재하던 기자가 물었다. “민주당 개혁이 대대적 당직 개편입니까, 아니면 신당 창당입니까?”
 
  노 전 대통령은 “선거 과정(2002년 6·13지방선거, 8·8재·보선 참패)에서 나타난 민심을 더욱더 적극적으로 반영해야 하기 때문에 재창당, 신당을 포함해 민주당 대개혁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직 개편으론 되지 않습니다”고 답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김대중 정권의 부패와 실정에 책임 있는 세력과 인사들도 응분의 책임을 지우도록 하겠습니다. ▲낡은 권위주의 정치의 행태를 극복하지 못한 인사 ▲인사에 부당 개입하는 등 국정운영과 쇄신에 장애를 가져왔던 인사 ▲부패와 관련 있는 인사 ▲실정에 책임 있는 인사 등은 법적 혹은 정치적으로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회견 이후 언론은 일제히 〈盧 “당선되면 신당 창당”〉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쏟아냈다. 노 전 대통령은 회견 이틀 뒤인 12월 19일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유효투표 총수 2476만141표 가운데 1201만4277표(48.91%)를 얻어 1144만3297표(46.59%)를 얻은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됐다.
 
  노 전 대통령이 당선된 직후인 12월 22일, 신기남·정동영·추미애·유재건·송영길·이강래 의원 등 민주당 초·재선의원 23명은 당 쇄신의 일환으로 ‘민주당의 발전적 해체’를 주장하고 나섰다. 노 전 대통령이 후보 시절 밝혔던 정치 개혁에 대한 일종의 화답(和答)이었다.
 
  이때부터 민주당 내에서는 쇄신의 방향을 두고 구주류와 신주류의 피 튀기는 전투가 벌어졌다. 구주류는 동교동계가 중심인 세력(한화갑·박상천·김충조·이인제·최재승·김홍일·정균환 등)으로 민주당 의원을 모두 끌어안고 외부에서 플러스 알파를 수혈하자고 주장했다. 이들 대부분은 노 전 대통령이 후보 시절 흔들거나 끌어내리려 했다.
 
  반면 신주류는 대선 때 노 전 대통령 당선을 도운 세력(정대철·김원기·이해찬·이상수·천정배·신기남·정동영 등)으로 민주당을 깨는 ‘독자신당론’ 입장을 피력했다. 당초 정대철(鄭大哲) 전 대표 등 신주류 중진들은 ‘분열 불가론’ 입장이었다. ‘전통적인 민주당 지지층’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신주류 내 수도권의 소장 개혁파는 민주당을 뛰쳐나가 개혁당(유시민 세력), 친노 PK 세력과 함께 개혁정당을 만드는 구상에 동의했다.
 
  격한 대립 끝에 민주당 소속의원 40명은 당을 탈당, 한나라당 탈당파 의원 5명, 개혁국민정당 의원 2명과 함께 열린우리당을 창당(2003년 11월 11일)했다.
    
  “노무현, 당 깨자는 유인태 나무랐다”
 
민주당 노무현 대선경선 후보가 2002년 4월 23일 염동연 캠프 사무총장(가운데), 유종필 언론특보 등과 함께 참모회의를 갖고 있다.
  많은 논란 끝에 창당한 열린우리당은 ‘노무현 당’으로 불렸다. 처음 신당론을 띄운 게 노 전 대통령이고, 이후 많은 당내의 반대와 분란 속에서도 끊임없이 이를 밀고 간 게 바로 노 대통령의 핵심 측근들이란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열린우리당 창당이 노 전 대통령의 뜻이 아니었다는, 그동안 알려진 바와 전혀 반대되는 주장이 나왔다.
 
원조 친노인 염동연(廉東淵) 전 의원은 지난 7월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나에게 노 대통령이 ‘어쩔 수 없이 승인하긴 했지만 대체 당을 왜 깨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하소연했다”며 이같이 밝혔다. 사실일까.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지난 8월 3일 염 전 의원을 다시 만났다.
 
  ―어떤 이유로 열린우리당 창당이 노 전 대통령의 뜻이 아니라고 확신합니까.
 
  “제가 2003년 구치소에 있었어요.(염 전 의원은 2003년 4월 30일 나라종금에서 2억8800만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다가 1, 2, 3심에서 모두 무죄를 선고받았다). 구치소에 있는데 언론에 노무현 대통령이 당을 깨고 열린우리당을 창당한다고 나오더군요. 이해가 안 가는 겁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면회 온 사람들한테 다 물어봤어요. 언론 보도가 사실이냐고요. 다 맞다고 하는데 이광재만 대통령 뜻이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이광재만 잘못 알고 있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후 (열린우리당 창당이 노 전 대통령 뜻이 아니라는) 확신을 하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제가 구치소에서 나와서(염 전 의원은 2003년 8월 11일 심장질환 치료를 위해 구속집행정지 결정을 받았다) 차에 타는데 전화가 울렸습니다. 노 대통령이더군요. 어디로 가느냐고 묻기에 병원으로 간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오후에 대통령이 병원으로 온다는 겁니다.
 
  대통령을 오게 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가 ‘대통령은 그렇게 쉽게 움직이는 것 아니니, 제가 찾아뵙겠다’고 이야기하고 그 다음날 와이프와 청와대에 들어갔지요. 대통령이 저를 보자마자 ‘왜 당을 깨야 하는지 이해를 못 하겠어요’라고 말하더군요. 아니, 묻지도 않았는데 ‘왜 당을 깨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이야기할까’하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제가 구치소에 면회 온 사람들 모두에게 ‘절대 당을 깨서는 안 된다’고 강력히 이야기했었거든요. 아마 면회 왔던 사람으로부터 제 이야기를 전해들었던 것 같아요. 노 대통령의 첫마디가 당을 절대 깨면 안 된다는 나의 의견에 대한 답이구나 판단했지요. 그때 ‘독자신당론은 대통령의 뜻이 아니구나’라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노 전 대통령 이야기가 본심이 아닐 수도 있잖습니까.
 
  “그래서 제가 ‘대통령 뜻이 그런데 왜 언론에는 대통령이 앞장서서 당을 깨고 신당을 창당한다고 나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본인의 뜻이 아니면 아니라고 확실히 이야기해야지, 왜 침묵합니까?’라는 질문을 우회적으로 한 것이죠. 그랬더니 하는 이야기가, ‘내가 청와대 정무수석이 당을 깨야 한다는 식으로 신주류 내 소장 개혁파와 늘 이야기한다는 보고가 들어와서 왜 그 짓거리 하느냐고 신당파 쪽 이야기만 들으면 안 된다고 상당히 꾸짖었어요’였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언론이 청와대 관계자들의 의중을 자신의 의중으로 해석해서 보도한다는 뜻으로 이해했습니다.”
 
  ―당시 정무수석이 유인태(柳寅泰) 현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었는데 노 전 대통령 이야기가 맞는지 확인해 봤습니까.
 
  “제가 유인태를 정무수석으로 추천한 사람입니다. 유인태 의원과 아주 가깝지요. 노 대통령 이야기를 듣고 제가 유 의원에게 물어봤어요. ‘당신이 당 깨자고 하는 것 맞느냐’고요. 그랬더니 ‘맞다’고 하더군요. ‘그 일로 대통령한테 깨졌느냐’고 물었더니 ‘깨졌다’고 해요. 그래서 ‘정무수석이 대통령 뜻과 다르게 왜 그랬느냐?’고 물었죠. 유 의원이 ‘우리가 2등 당인데 상황을 보니 특단의 변화를 가져와서 민심을 얻기 전에는 총선이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롭고 개혁적인 사람이 주도하는 당이 나오는 것이 한나라당과 싸워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해서 밀어붙이고 있다’고 하더군요. 뭐 사실 틀린 이야기는 아니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열린우리당이 탄핵 열풍 때문에 과반이 넘는 152석을 확보했지, 그렇지 않았으면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상대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실제 유 의원은 2003년 6월 26일 신당 창당에 반대하고 노 전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대해 비판해 온 구주류 인사들을 향해 “신당을 하자는 것은 지역주의를 넘어서는 정당을 만들자는 것인데 지역주의에 안주하거나 맹주(盟主)가 되려는 사람은 신당에 참여할 자격이 없다”며 ‘독자신당설’에 힘을 더한 바 있다.
 
  유 의원은 2004년 1월 3일 《주간경향》과의 인터뷰에서 열린우리당 창당과 관련 이같이 이야기했다.
 
  “문희상 실장은 물론, 이해찬-정대철 등 다들 분당, 신당에는 반대했죠. ‘천(정배)-신(기남)-정(동영)’이 분당을 주장했고요. 내 생각엔 과거의 틀로는 호남당으로 굳어져 어차피 한나라당에 1등을 줄 수밖에 없었어요. 망해봤자 2, 3등인데 10명이건 20명이건 어떠냐고 생각했죠. 과거 DJ는 장사가 안 되면 음식 메뉴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간판만 계속 바꿔 다는 식당처럼 선거 때마다 당명을 바꾸며 6번이나 ‘신장개업’을 했잖아요. 국민회의, 새정치국민회의, 새천년민주당 등등요. 그건 국민을 속이는 거죠. 노 대통령이 신당의 배후세력이라고 하는데 그건 아니에요. 당시 민주당 인기도가 꼴찌였고 대통령은 ‘나는 어차피 공천권도 없지만 내가 밀어줘도 확실히 당선될 곳이 한 군데도 없는데 남의 정치운명에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은 무리’라며 나서질 않으셨어요.”
    
  盧 “열린우리당 창당, 어쩔 수 없이 따라간 것”
 
노무현 당선자가 2003년 1월 7일 대통령직 인수위 회의에 앞서 김병준 정무분과 간사와 악수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 있다. 맨 오른쪽은 임채정 인수위원장.
  과연 노 전 대통령의 진심은 무엇이었을까. 노 전 대통령이 염 전 의원에게 털어놓은 이야기는 진실일까. 검증을 위해 노무현 정부 핵심 인사를 다수 접촉해 당시의 상황을 들었다.
 
  김병준(金秉準) 국민대 교수는 “염 전 의원의 인터뷰를 읽었다”며 “염 전 의원이 전한 열린우리당 창당에 대한 노무현 대통령의 진심은 맞는 이야기”라고 했다. 김 교수는 노무현 정부 임기 내내 청와대 정책실장과 교육부총리 등을 맡은 핵심 인물이었다. 당연히 노 전 대통령을 독대(獨對)하는 경우도 잦았다. 김 교수의 이야기다.
 
  “염 전 의원 이야기가 100% 맞아요. 열린우리당 창당은 노무현 대통령이 원해서 한 것이 아닙니다. 노 대통령은 창당을 원하지 않았어요. 당시 노 대통령과 가까운 측근 그룹이 신당 창당을 주장했는데 노 대통령은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어요.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채 무리하게 정계개편을 추진하면 죽도 밥도 안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물리적인 분리보다는 화학적인 통합을 원했던 셈이죠.”
 
  그가 말을 이었다.
 
  “노 대통령이 저뿐만 아니라 다른 측근들과의 자리에서도 ‘내가 열린우리당을 만들고, 나중에 당을 부쉈다고 하는데 다 알지 않느냐. 내가 (민주당을) 쪼개고, (열린우리당을) 부수고 한 것이 아니지 않으냐. 당 일각에서 열린우리당 창당을 강하게 추진했는데 추진한 사람들은 내가 놓칠 수 없는 인물들이고 주변에서도 그게(열린우리당 창당) 맞다고 하니, 내 고집만 내세울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내가 따라간 것 아니냐’는 이야기를 여러 번 했습니다. (노 대통령의 하소연은) 다 맞는 이야기지요.”
 
  노무현 정부 당시 열린우리당 창당에 앞장섰던 신기남(辛基南) 새정치연합 의원도 “노 대통령이 열린우리당을 창당할 때 상당히 우려하고 반대했다”고 밝혔다. 신 의원의 기억이다.
 
  “열린우리당을 창당할 때 노 대통령 중심으로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민주당이 100석 가까웠는데 대통령은 그런 의석의 뒷받침을 포기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열린우리당 창당은) 정동영, 천정배 등 창당 주역 동지들이 한 것이지, 대통령이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노무현 정부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인사도 “노 대통령이 정말 당을 쪼개고 싶어 했다면 훨씬 일찍 신당이 창당됐을 것”이라고 했다.
    
  과거 記事를 살펴보니
 
2003년 11월 11일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열린우리당 창당대회에서 당기를 흔드는 지도부.
  노 전 대통령이 열린우리당 창당을 반대했다는 이들의 주장이 맞는지 검증하기 위해 과거 언론 보도를 샅샅이 훑었다. 당시 언론보도를 종합해 봤을 때 노 전 대통령이 당을 쪼개 나가 독자적인 신당을 창당하는 데 반대했다는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 있었다.
 
  첫 번째, 노 전 대통령은 신주류 인사들에게 주로 구주류 쪽이 주장하던 ‘통합신당’ 창당을 받아들이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몇몇을 제외한 민주당 의원 대부분을 끌어안고 외부에서 플러스 알파를 수혈하자는 구주류 주장에 힘을 실어준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은 2003년 6월 2일 노무현 정부 출범 100일 기자회견에서 이같이 밝혔다.
 
  “신당 창당에 대해서는 관여하지 않습니다. 다만 민주당이 가진 정통성은 그대로 갖고 갈 것입니다. 민주당 정체성을 배반하고 훼손한 일이 없습니다. 정당하게 제시된 노선, 정통성에 근거한 것을 다 계승하고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2003년 6월 20일 《조선일보》는 이런 내용을 보도했다.
 
  〈민주당 신주류가 추진 중인 신당 창당 문제와 관련, 노무현 대통령이 신주류 인사들에게 주로 구주류 쪽이 주장하던 ‘통합신당’ 창당을 받아들이겠다는 입장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노 대통령은 신주류 인사들과의 만남, 전화통화 등을 통해 민주당의 당내 사정 등을 고려할 때 당내 합의를 통한 통합신당 창당을 받아들이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복수의 신주류 인사들이 전했다.〉
 
  노 전 대통령이 신주류 측의 ‘독자신당’ 주장에 착잡한 심경을 보였다는 기사도 있었다.
 
  〈청와대 관계자는 “신주류 의원들이 최근 면담 신청을 많이 했지만 모두 완곡하게 거절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렇게 볼 때 노 대통령이 신당 문제에 다소 실망해 착잡한 심경을 갖고 있는 게 아니냐는 추측이 가능하다.(연합뉴스 2003년 7월 25일)〉
 
  노 전 대통령은 당 쇄신 방안과 관련해서는 거리를 두려 했다. 노무현 정부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관계자는 “노 대통령은 당정 분리 원칙에 따라 신당에 대해 구체적인 입장 표명은 삼갔다”며 “‘나도 말할 권리가 있고, 의사를 표명할 때가 되면 당 중진의 한 사람으로서 언젠가 얘기하겠다(2003년 5월 1일 TV토론)’고 말하기도 했지만 2003년 8월에 민주당 정대철 대표에게 ‘신당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고 했다.
 
  정대철 전 대표는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확실하지 않은데, 노 전 대통령과 신당과 관련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던 것 같다”고 했다.
 
  당시 보도를 찾아보니 정 전 대표는 2003년 8월 18일 민주당 대표 자격으로 노 대통령으로부터 ‘신당 문제에 관여해 온 적이 없고, 앞으로도 관여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직접 확인했다.
    
  측근의 주장을 盧心으로 해석
 
  사실이 이런데 왜 민주당 신주류 강경파의 신당 추진이 노무현 대통령과 의 교감(交感) 아래서 진행된 것처럼 기정사실이 됐을까.
 
  친노 핵심의 전직 의원은 “언론과 다수의 정치권 인사들이 측근들의 주장을 노 전 대통령의 뜻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노 대통령과 핵심 코드를 맞춰온 측근 인사들의 발언을 곧 ‘노심(盧心·노무현 대통령의 마음)’의 반영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실제 당시 노 전 대통령의 핵심들은 동교동계 구주류를 강력히 비판하며 독자신당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노심이 신당에 있다고 충분히 생각할 만했다.
 
  다음은 당시 노 전 대통령 측근들의 발언을 모은 것이다.
 
  〈안희정 현 충남도지사-“국민 경선으로 뽑힌 합법적 후보(노 대통령)에게 (대선 과정에서) 사퇴하라고 요구했던 그들이 지금 총선 승리를 위해 자신의 지구당위원장 자리를 내놓으라는 대의에는 반대하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2003년 3월 20일 기자들과 만난 자리)
 
  이강철 전 시민사회수석-“동교동계가 빨리 좀 나가줬으면 좋겠다. 동교동계가 없다고 해서 내년 총선에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다.”(2003년 3월 25일 기자들과 만난 자리)
 
  이호웅 전 의원-“신당 추진에 위험이 따른다는 것은 알지만, 당 개혁안의 정신이 전혀 반영 안 되면 (당을) 깨고 나가는 방안도 검토 안 할 수 없다.”(2003년 3월 26일 언론 인터뷰)
 
  이상수 전 의원-“민주적 원리에 의해 정치인의 진입, 퇴출이 이뤄지는 정치시장의 유연화가 필요하다. 그래서 다당제(多黨制)로 가는 게 필요하다.”(2003년 3월 26일 고려대 언론대학원 특강)
 
  이해찬 새정치민주연합 의원-“민주당의 틀로는 한계가 있다는 말.”(2003년 4월 28일 친노 인사 모임)
 
  유시민 전 의원-“여러분이 노 대통령이라면 지금 저 민주당과 함께 일하고 싶겠느냐. 노심은 신당에 있을 것이다. (노 대통령의) 속은 뻔하고 그 뻔한 속은 우리가 추진하는 개혁신당에 있다고 봤기 때문에 자신있게 이야기하는 것이다.”(2003년 5월 14일 《부산일보》 강당에서 열린 ‘범개혁 단일정당’ 추진을 위한 토론회)〉
 
  이 대목에서 드는 의문 하나. 노 전 대통령과 핵심 코드를 맞춰온 인사들이 ‘어떤 이유로 노무현의 본심을 파악하지 못했을까’이다. 이와 관련, 염 전 의원은 “내가 알기로 대통령에게 직접 입장을 물은 사람은 한 명도 없다”고 했다. 측근들은 노 전 대통령이 과거부터 주장해 온 지역구도 타파를 위한 민주당의 환골탈태를 ‘독자신당 창당’으로 지레짐작했다는 것이다. 열린우리당 창당을 주도했던 천정배(千正培) 의원도 “노무현 대통령에게 당을 만들겠다고 결재를 받은 적은 없다”며 “다만 노 대통령이 명시적으로 반대하지 않으니까 밀고 나간 것”이라고 했다.
 
  김병준 교수는 “노 대통령은 지역구도 타파를 위해 늘 똑같은 이야기를 해왔다”며 “그럼에도 신주류와 구주류가 서로 입장에 따라 자의적으로 해석하다 보니 혼란이 온 것이다. 내가 알기에 노 대통령은 지역구도 타파를 위해서는 선거구제 개편(소선거구제의 중·대선거구제 전환)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고 했다.
 
  노 전 대통령은 지난 2003년 4월 2일 국정연설에서 “내년 총선에서 특정 정당이 특정 지역에서 3분의 2 이상의 의석을 독차지할 수 없도록 선거법을 개정하면 총선에서 과반수 의석을 차지한 정당에 내각의 구성 권한을 이양하겠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盧心에 대한 다른 해석
 
2004년 4월 21일 청와대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정동영 당의장 등 열린우리당 총선 지도부가 만찬 장소로 들어서고 있다.
  노무현 캠프 총무본부장을 맡은 바 있는 이상수(李相洙) 전 의원은 측근들이 노심을 잘못 읽고 독자신당 창당에 나섰다는 주장에 이의를 제기했다. 이 전 의원은 “‘노 전 대통령이 당을 쪼개고 신당을 창당하라’고 직접 지시한 적은 없지만 이야기하다 보면 노 대통령은 ‘독자신당론’ 쪽으로 기울어 있는 것으로 확실히 느껴졌다”고 했다. 그의 말이다.
 
  “2002년 대선이 끝나고 한화갑 대표와 정균환 원내총무가 물러나야 한다는 의견이 강하게 나왔습니다. 상식적으로 노 대통령을 밀어내려고 한 사람들이 계속 지도부에 있는다는 게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이야기했어요.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으니까, 새로운 사람이 대표가 돼야 당·청 관계도 매끄럽게 돌아간다. 잠깐만 물러나 있어 달라고요. 그런데 물러나지 않는 겁니다. 정치 도의상 있을 수 없는 일 아닙니까. 그래서 다시 한화갑 대표를 찾아가서 ‘선배님이 물러나지 않으면 여러 가지로 어려워진다’고 사퇴를 부탁했습니다. 그러니까 한 대표가 ‘당신이나 김원기 이런 사람들이 와서 이야기하면 못 물러나겠다. 노 대통령이 직접 나에게 물러나라고 한다면 물러나겠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노 대통령을 찾아가서 ‘지금 사정이 이러니 대통령께서 한 대표를 만나 좀 다독이면서 물러나라고 해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대통령이 ‘나는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처리하세요’ 이러는 겁니다. 한화갑 대표가 물러나지 않으면 당이 쪼개지는 것이 기정사실이었습니다. 저는 노 대통령이 분당을 막으려는 마음이 정말 있었다면 한 대표를 만나 사퇴를 종용했을 거라고 봅니다. 본인이 ‘민주당 플러스 알파’로 가려 했다면 한 대표를 주저앉혔겠지요.”
 
  ―노 전 대통령은 당을 쪼개고 열린우리당을 창당하는 데 반대했다고 하던데요.
 
  “그분이 반대할 이유가 뭐가 있습니까. 본인이 원하는 당이 만들어지면 좋지 않겠어요. 저는 분당의 일차적인 원인은 당시 지도부에 있다고 봅니다. 노 대통령 안 도왔던 사람이 계속 지도부에 있으면서 당을 장악하려고 하니까, ‘독자신당 창당론’이 나온 것 아닙니까. 그다음 원인은 노 전 대통령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당을 깰 마음이 없었다면 저희의 부탁을 들어줬어야 합니다. 한 대표를 모양새 좋게 물러나게만 했다면 당이 깨지는 일은 없었을 겁니다.”
 
  이에 노무현 정부 청와대에서 근무했던 인사는 “한화갑 대표를 만나지 않았다는 이유 하나로 노 대통령이 열린우리당 창당에 반대했다는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며 “노 대통령이 당시 한 대표를 만나지 않은 것은 인간적으로 싫어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당시 구주류로 분류됐던 전직 민주당 당직자는 “2003년 초에 노 대통령의 최측근인 이강철씨가 민주당 대구시지부장에 내정됐는데, 국회의원도 아니고 지구당위원장을 맡고 있는 것도 아닌데 시도지부장이 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며 “당시 당내에선 노 대통령이 신당 창당에 대비, 이 실장을 미리부터 내년 총선 ‘TK(대구·경북) 사령탑’으로 전진 배치해 놓은 것이란 말이 나왔다. 이씨가 독자신당 창당을 강하게 주장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몇 번 있어서 ‘노심’이 신당 창당에 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고 기억했다.
 
  이와 관련해서도 노무현 정부 청와대에서 근무했던 인사는 “2004년 총선을 앞두고 신당을 만드니 마니 할 때 노 대통령이 한탄하면서 나한테 한 말이 있다. ‘대한민국에서 단 한 곳도 내 공천장을 갖고 안정적으로 당선될 곳이 없다. 그런 내가 어떻게 남의 정치적 운명을 이래라저래라 하겠느냐’고 했다. 분당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게 노 대통령의 뜻이었다”고 반박했다.
    
  李美卿 의원이 머리채 잡힌 것 보고 마음 굳혀
 
2003년 9월 4일 신당 문제를 결판내기 위해 열렸으나 또다시 난장판이 돼 버린 민주당 당무회의에서 구주류 한 여성 당직자가 신주류인 이미경 의원의 머리카락을 낚아채며 “나갈 테면 나가라”고 고함치고 있다. 이 의원 옆에서 놀란 표정으로 여성 당직자를 말리는 사람은 박금자 당무위원.
  지금까지 취재 내용을 종합하면 노 전 대통령은 ①민주당이 쇄신해야 한다는 점에는 찬성했지만, 신주류 강경파의 ‘독자신당 창당론’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입장이었고 ②신주류 중진과 구주류가 주장하는 ‘당을 쪼개지 않은 통합신당’ 쪽에 힘을 실어주는 모습을 보였다.
 
③하지만 노 전 대통령의 핵심 측근들은 동교동과는 절대 같이할 수 없다며 신주류 강경파의 ‘독자신당 창당’을 주장했고 ④언론과 대다수의 정치인은 이를 노심이라고 믿었다. ⑤노심이 신당에 있었다고 해석할 만한 일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노 전 대통령이 본인 입으로 직접 독자신당을 지지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노 전 대통령이 열린우리당 창당을 반대했다는 주장이 객관적 사실에 가깝다는 결론이다. 하지만 결국 노 전 대통령은 열린우리당 창당을 허락했다. 천정배 의원의 이야기다.
 
  “노 전 대통령이 허락했기 때문에 열린우리당이 탄생한 것이죠. 대통령이 받쳐주지 않는데 저희가 무슨 재주로 신당을 만들겠습니까. 결국 노무현 당입니다. 열린우리당은.”
 
  그렇다면 당을 쪼개고 신당을 창당하는 것에 반대하던 노 전 대통령의 마음이 갑자기 돌아선 이유는 무엇일까.
 
  염 전 의원은 “노 대통령이 (민주당이라는) 배를 수리하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진 결정적인 이유가 있다”고 했다.
 
  “2003년 9월 4일 신당 추인을 위한 당무회의가 소집됐습니다. 이때도 민주당+알파(전국의 범개혁세력이 연대)를 할지, 독자신당으로 갈지 결론이 나지 않았지요. 그런데 이날 사달이 난 겁니다. 구주류가 당무회의 육탄 저지로 맞서면서 회의장이 뒷골목 싸움판처럼 변한 것이지요. 민주당에서 잔뼈가 굵은 구주류 여자 당직자가 신주류 이미경 의원 등 뒤로 다가가 머리끄덩이를 힘차게 잡아당겼는데 이 의원의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 다음날 《조선일보》 1면에 나왔어요. 이후 신주류 중진들이 ‘구주류와는 절대 같이할 수 없구나!’라고 마음을 굳혔습니다. 대통령께도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당을 깨야 할 것 같습니다’고 의사를 전달했지요. 대통령도 동의했습니다. 그 모습을 본 대통령의 마음이 어땠겠습니까. 당시에 ‘《조선일보》의 머리끄덩이 사진이 신당을 도왔다’는 말이 나온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지요.”
 
  염 전 의원의 증언대로 2003년 9월 4일 신당 추인을 위한 민주당 당무회의는 심한 난투극과 욕설이 오간 무법천지였다.
 
  유인태 의원도 언론 인터뷰에서 “분당의 최대공신은 ‘문팔괘(文八卦·당시 여성특위 부위원장)’란 여성이에요. 이미경 의원의 머리채를 낚아챈 그 여자요. 그걸 보고 다들 ‘같이 일 못 하겠다’며 당이 깨진 거죠. 그 사건이 없었고, 공천방식이 바뀌지 않았으면 열린우리당 탄생도 없었고 제1당도 못 됐을 겁니다.”
 
2003년 8월 28일 열린 민주당 당무회의에서 신·구주류 간 당원들의 몸싸움으로 난투극이 벌어졌다.
  당시 상황을 자세히 묘사한 2003년 9월 5일자 《조선일보》 보도 내용이다.
 
  〈오전 9시30분에 시작한 회의는 지루한 입씨름과 정회 소동 끝에 정대철 대표가 속개를 선언한 오후 3시38분부터 즉각 전운(戰雲)이 감돌았다. 정 대표와 박상천 최고위원 간 최종 협상이 결렬된 직후였다.
 
  “그간 충분히 토론했다. 이제 민주적 절차에 따라 표결할 수밖에 없다.”
 
  정 대표가 “뭐가 민주적인 것이냐!”는 구주류 이윤수 의원의 반발을 무시하고 “표결을 선언합니다”라며 의사봉을 세 차례 두드리는 순간 회의장은 아수라장으로 돌변했다.
 
  정 대표 좌측의 정균환 총무가 방망이 소리와 동시에 정 대표의 왼쪽 팔을 잡았고 순간 신·구주류 측 당원들이 일제히 몸을 던졌다. “죽여!” “밀어버려!”란 고함과 함께 정 대표의 의자가 뒤편 벽 쪽으로 밀려났고, 대표 비서실 직원 등 10여 명이 황급히 정 대표를 에워쌌다. 불과 1~2초 사이였다. 흥분한 당원들은 책상 위로 올라가 물을 뿌리고 일부는 책상을 발판 삼아 정 대표 쪽으로 몸을 날렸다. 김원기 고문은 비서들에게 보호된 채 비통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오후 3시45분. 정 대표가 회의장을 피하자 이번엔 신기남 의원에게 화살이 날아들었다.
 
  “신기남이 죽여버려!” “쌍놈의 ××” “골목에서 만나면 죽어!”…. 한 부위원장은 회의 테이블 위로 올라가 신 의원 보좌진 10여 명이 짠 스크럼 위로 생수통을 뿌렸다.
 
  맞은편에선 한 구주류 여성 당직자가 신주류의 이미경 의원에게 달려들어 “한나라당에서 오며 당엔 100원짜리 한 장도 안 낸 사람!”이라며 뒤에서 목걸이와 머리채를 잡아당겼다.
 
  ‘너와 나 하나 되어 힘차게 나아가자 민주당~.’ 소요를 진정시키기 위해 누군가 당가를 틀었으나 육박전을 진정시킬 순 없었다. 김경천 의원은 “뭐 땜에 신당 한다고 당을 이 모양으로 만들어 놔!”라고 절규했고, “노무현이에게 이 꼴을 보여줘야 해”하는 목소리도 들렸다.
 
  결국 당무회의는 회의 시작 7시간 만인 오후 4시44분쯤 성과 없이 끝났다. 2000년 총선을 앞두고 만들어진 민주당이 분당으로 발걸음을 떼는 순간이었다.〉
  
    鄭東泳을 염두에 둔 판단?
 
2003년 4월 29일 오전 여의도 맨하탄 호텔 양식당에서 민주당 정동영, 천정배, 신기남, 정세균, 허운나, 이종걸 등 바른정치모임 의원들이 모여 신당 창당 논의를 하고 있다.
  노무현 정부의 ‘순장조(殉葬組)’로 불린 한 인사는 “노 대통령이 정동영 전 의원을 후계자로 키우기 위해 막판에 열린우리당 창당에 동의한 것”이라고 했다. 그의 이야기다.
 
  “노 대통령이 독자신당 창당을 허락한 데에는 정동영 전 의원이 핵심적인 부분을 차지했습니다. 노 대통령은 정 전 의원을 괜찮게 봤습니다. 차기(次期)가 가능하다고 본 것이지요. 노 대통령이 생각하는 리더십은 자기가 소수파라고 튀어나가려고만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두 함께 가야지, 마음대로 안 된다고 쪼개려 하는 것은 훌륭한 리더가 아니라고 봤지요. 그런데 정 의원이 ‘당을 쪼개지 않고서는 희망이 없다’고 주장했어요. 대통령이 정 의원을 키워주고 싶어했는데, 정 의원이 독자신당론을 주장하니까 마지못해 따라간 것입니다.”
 
  또 다른 관계자도 비슷한 견해를 보였다.
 
  “제가 알기에는 정 의원 본인이 신당을 창당해야 클 수 있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동교동계나 중진이 많으면 성장이 힘들지 않습니까. 이런 점을 노 대통령한테 이야기했는데 대통령도 정 의원을 차기로 점찍었었기 때문에 귀를 기울여줬던 것 같습니다.”
 
  실제 노 전 대통령은 2001년, 본인이 대선 후보가 되기 전부터 정동영 전 의원을 차차기 후보로 봤다. 그는 2001년 4월 8일 한 골프모임에서 “차차기는 정동영, 김민석 의원 등의 몫”이라고 말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정 전 의원이 새천년민주당 경선 때 ‘경선 지킴이’로 경선을 완주해 노 대통령을 빛나게 하면서 더욱 돈독해졌다.
 
  열린우리당 창당에 앞장선 정 전 의원은 창당 이후 열린 첫 의장 경선에서 승리, 51세 때 정당 지도자가 됐다. 전두환(全斗煥) 전 대통령이 지난 81년 50세에 민정당 총재가 된 것을 빼면, 정 전 의원은 지난 74년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이 47세의 나이로 신민당 총재 경선에 당선된 이후 가장 젊은 지도자였다.
 
  정 전 의원이 열린우리당의 선장이 되는 데에는 노 전 대통령의 힘이 컸다. 당초 열린우리당은 여당 조직을 소장파가 이끌기엔 무리가 있다며 정식 지도부를 간선제(間選制)로 구성키로 의견을 모았다. 그러니까 신당의 안정을 위해 당 의장은 간선으로 뽑고 총선 선대위원장에 젊은 얼굴을 포진시킨다는 복안이었다. 간선으로 뽑는다면 당 의장은 김원기 열린우리당 창당준비위원장이 유력했다. 하지만 정 전 의원을 비롯한 소장파는 직선제(直選制)를 들고 나왔다.
 
  “정치 개혁을 명분으로 출발한 신당이 한나라당과 민주당도 하지 않는 간선으로 당 대표를 뽑자는 발상은 어처구니없다”는 게 이유였다.
 
  당 의장 선출 방식을 놓고 ‘김원기 그룹’과 ‘소장 그룹’이 첨예하게 맞서면서 공은 청와대로 넘어갔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은 직선제를 지지한 것으로 알려진다.
 
  당시 일했던 당직자는 “당시 김근태 원내대표 쪽으로부터 ‘노 대통령이 당 의장 직선제를 지지한다는 뜻을 피력했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들었다”며 “노 대통령이 유인태 정무수석을 통해 김원기 공동의장에게 당내 민주화를 위해서는 의장 직선제가 바람직하지 않겠느냐는 뜻을 전달한 것으로 안다”고 했다.
 
  노 전 대통령은 정 전 의원을 ‘통일부 장관’으로 기용, 대권수업을 받게 하기도 했다. 원래 통일부 장관에는 김근태(金槿泰) 전 의원을 임명하고, 정 전 의원은 보건복지부 장관을 시키려 했는데 발표를 며칠 앞두고 뒤집혔다.
 
  노무현 정부 핵심 관계자는 “원래 노 대통령이 노인폄하 발언으로 위기에 처한 정 전 의원에게는 보건복지부 장관을, 통일부 장관에는 북한과의 관계를 고려해 김근태 전 의원을 임명하려 했는데 바뀌었다”며 “이유는 정 전 의원이 강력하게 반발했기 때문이라고 알고 있다.
 
아마 통일부 장관 앞에 북핵은 물론 남북 장성급회담, 개성공단 건설 등 굵직한 남북관계 현안이 줄 서 있는 것을 염두에 뒀을 것”이라고 했다. 정 전 의원이 차기 대선 주자 수업용으로는 보건복지부보다 통일부 장관이 괜찮다는 판단을 했다는 것이다.
 
  당시 갑자기 열린우리당 내부에서 6·25 때 실종된 친형들의 일을 들어 통일부 장관 업무 수행에 차질을 줄지 모른다는 논리가 등장했는데, 김근태 전 의원은 그 배후에 정 전 의원이 있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어쨌든 승승장구한 정 전 의원에게는 ‘참여정부 황태자’란 별칭이 붙었다.
 
  끝까지 함께할 줄 알았던 두 사람의 관계도 정 전 의원이 장관직에서 물러나 당으로 복귀하면서 균열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변곡점은 7·26 재보궐 선거. 선거를 앞둔 7월 초 노 대통령은 정 전 의원을 청와대로 불러 서울 성북을 보궐선거 출마를 권유했다. 정 전 의원은 5·31지방선거 완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두 번째 열린우리당 의장직에서 물러난 상태였고, 7·26 재보궐 선거는 열린우리당의 재기 가능성을 가늠하는 시험대였다. 그러나 정 전 의원은 독일 베를린자유대학 연수를 선택했다.
 
  당시 정 전 의원 측은 “정동영을 죽이기 위한 음모”라고 의심했으며, 노 대통령 측은 “떨어지면 어떠냐. 당이 진짜 어려울 때 희생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것 아니냐”며 불쾌해했다. 정 전 의원은 2006년 10월 독일에서 귀국한 뒤 “열린우리당은 결과적으로 실패했다”고 선언했다.
 
  대선 행보를 본격화한 2007년 초, 정 전 의원은 새천년민주당 분당, 노 대통령이 주도한 대북송금 특검과 노 대통령의 대연정 제안 등에 대해 사과했다. 4월 말 청와대 회동에서 노 전 대통령과 정 전 의원은 열린우리당 해체를 놓고 충돌하고 나서 완전히 갈라섰다.
    
  釜山 그룹의 조언 있었나?
 
  노 전 대통령이 생각을 바꾸고 열린우리당 창당을 지지한 데에는 부산 그룹의 조언도 한몫했다는 주장이 있다. 염 전 의원은 “염동연·안희정·이광재 세 명만 청와대에 있었으면 노무현 정권이 이런 평가를 받지 않았을 것”이라며 “문재인-이호철로 이어지는 부산팀이 (분당을 주장하는 등) 대통령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했다.
 
  친노 그룹의 관계자는 “부산 그룹이 분당한 뒤 열린우리당을 창당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을 수는 있다. 그들은 그런 위치에 있었다”면서도 “그렇다고 노 전 대통령이 부산팀의 말만 듣고 결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등록일 : 2015-08-31 09:27   |  수정일 : 2015-09-03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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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홍원  ( 2015-08-31 )  답글보이기 찬성 : 9 반대 : 3
열우당 백년간다했으니 벌써 백년이 지난것인가 백년이지낫으니 당을 또깨자 이것인가
박정일  ( 2015-08-31 )  답글보이기 찬성 : 22 반대 : 4
재수없는 인간
김일순  ( 2015-08-31 )  답글보이기 찬성 : 5 반대 : 6
후게자가 알고보니 문재인이 아니구먼. 그런데 왜 치노라면서 문재인이 설치지?
이상하네.
오태영  ( 2015-08-31 )  답글보이기 찬성 : 14 반대 : 5
해장국의 뼈다구는 왜 또 끄집어내냐? 잠 좀 자게 내버려 둬라.
김재만  ( 2015-09-01 )  답글보이기 찬성 : 26 반대 : 8
김대중 노무현은 북한쪽에선 훌륭한 북핵변호인이었다??이상주의자 대통령되면 절때안된다는걸 두분이 보여줬다??그덕에 한국민 머리위에 핵폭탄 얺고 살게됬다??아직 느끼지멎하는 한국민??결국 북핵이 끝끝내 한국 평화를 망칠것이다??핵폭탄가진 북한을 지원할수없고 북한은 안주는 한국을 꿑없이 괴롭힐것이다 천안함 연평도 지뢰 디도스공격이 다그런것이다
서종식  ( 2015-09-03 )  답글보이기 찬성 : 5 반대 : 2
머리끄덩이녀의 원조가 저 동네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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