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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흔의 재(嶺) 너머 이야기

청산리 전투 승리에 빛나던 항일 독립군은 왜 갑자기 와해되었을까?

독립군 와해의 계기가 됐던 '자유시참변'

글 | 이상흔 조선pub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2016-08-18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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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끈 북로군정서군. 맨 앞에 앉아 있는 이가 김좌진 장군이다.

 
1920년대, 무장 독립운동의 시대
 
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을 완전히 강탈당한 후 독립운동의 주무대는 점차 해외로 옮겨졌다. 특히 191931 독립운동을 계기로 우리 민족이 많이 이주해 있던 만주, 러시아 등 국외에서는 독립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이 과정에서 김좌진, 홍범도, 이청전, 이동휘, 이용(이준 열사의 외아들) 등 수많은 이들이 적극적인 무장 독립투쟁에 나섰다.
 
191931 운동 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라는 임시정부 성격의 단체가 구성되었다(이해 8월에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통합하면서 대한국민의회는 해산). 대한국민의회는 31 운동 전후로 일본과 혈전(血戰)을 치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1919년 중국의 북간도에서 대한국민회(북간도국민회)가 결성되었다. 이 단체는 연길(延吉), 화룡(和龍), 왕청(汪淸), 혼춘 등지에 거주하던 한국인(韓國人)의 자치단체로 북간도의 4개 현에 거주하던 40만 한국인을 기반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2010월 청산리 전투에서 큰 타격을 입은 일본은 대대적인 독립군 토벌에 나선다. 이때 일본군은 독립군의 근거지를 말살하기 위해 192010월부터 3~4개월간 간도의 동포들을 수만 명을 학살하는 간도참변(경신참변)을 일으킨다. 일본군에 쫓긴 독립군 단체들은 새로운 활동 기지를 찾아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독립군은 중소 국경지대인 밀산을 거쳐 러시아 자유시(스보보드니)로 이동했다. 독립군이 자유시로 집결한 것은 안전지대를 찾아 분산돼 있던 독립군 부대들의 힘을 합쳐 대일항전을 펼치려는 목적에서였다.
 
자유시 참변과 무장독립투쟁의 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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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1월부터 3월까지 자유시에는 만주와 간도,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한인 독립군 3000여 명이 집결했다. 하지만 여러 독립운동 단체들이 한곳에 모이게 되자, 군권(軍權)을 놓고 갈등과 대립이 생기기 시작했다.
 
소련 적군(赤軍볼셰비키)의 지원을 받고 있던 이르쿠츠크파 자유대대의 오하묵(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과 이항군(상해파 고려공산당이동휘 파)을 이끌고 있던 박일리아 간 군권 장악을 위한 암투가 일어난 것이다.
 
당시 러시아는 191710월 혁명에 성공한 적군과 이에 반대하는 백군(볼셰비키) 간에 전투가 치열했다. 러시아에 있던 많은 한인(韓人) 무장단체는 러시아의 지원을 얻기 위해 적군 편에 가담했다. 일본은 백군을 지원한다는 명분으로 러시아에 출병했고, 이 기회에 한인무장 독립세력을 소탕하고자 했다.
 
자유시에 모인 독립군 간 갈등이 번지면서 소수의 이르쿠츠크파 측은 1921628일 소련 적군과 힘을 합쳐 다수인 사할린 의용대(자유시에 집결 후 개편된 독립군 이름)를 공격했다.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은 순수한 독립을 원하던 민족주의 계열의 상해파 고려공산당과는 달리 공산주의 사상으로 무장한 채 소비에트식 공산혁명을 꿈꾸는 이들이 조직한 당이다
 
이때 소련 적군의 공격을 받아 600여 명의 독립군이 사망 및 실종됐으며 생존자 전원인 900여 명이 포로가 되었다(또 다른 기록에는 960여명이 전사하고 1800여명이 실종 및 포로).
 
이것이 이른바 자유시 참변이다. 소련 적군의 배반으로 독립군 세력이 거의 와해되는 타격을 입게 된 사건으로, 공산 혁명 사상으로 무장한 이르쿠츠크파 한인 공산주의 독립군들이 소련 정부 및 적군과 내통하여 조국 독립을 위해 풍찬노숙해 온 독립군을 학살한 참변이기도 하다
 
근래 여러 자료를 통해 밝혀진 바로는 이미 소련은 1921년경 일본과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한인 독립단체의 무장을 해제한다는 방침을 정해 놓은 상태였다. 대다수 독립군의 믿음과 달리 소련 적군의 배신은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자유시 참변으로 무장독립투쟁은 사실상 막을 내렸으며, 민족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과 공산주의 계열 사이에 반목이 극심해지면서 민족 분열의 계기가 되었다. 
 
독립군의 무장해제
 
192112월 일본 시베리아 출정군은 이만에서 러시아 백군과 연합해 이용이 지휘하는 대한의용군을 공격했다(이만 전투). 포위된 3중대 1소대는 전멸했고, 중대장 한운용도 전사했다. 백군도 6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다.
이 당시 많은 항일 무장단체가 러시아 백군 및 일본군과 전투를 치렀다. 당시 백군이 일본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한인 무장독립단체들은 자동으로 적군 편에 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자유시 참변을 겪은 독립군들은 19229월 연길에서 의병장 출신인 김규식(金圭植)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고려혁명군을 조직했다. 이때 이용이 고려혁명군 총지부 북부사령관에 임명되고, 김경천 장군은 동부사령관이 된다.
하지만 1922년에 들어서자 소련 정부는 갑자기 노령 내의 모든 독립군에 대해 무장해제를 요구하고 나섰다.
 
일제가 시베리아 철병의 조건으로 노령 내 모든 한인 항일단체와 독립군 부대의 해산과 무장해제를 계속 요구하자 소련이 이를 수용한 것이다. 독립군은 조국 독립에 도움이 되는 길이라 여겨 소련 적군을 위해 목숨을 바쳤으나, 결국 돌아온 것은 배신뿐이었다.
 
당시 한인 무장세력 대부분이 일본의 탄압을 피해 러시아 영토로 넘어가 있었기 때문에 독립군 무장해제로 대일 무력투쟁은 결정적인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강제 무장해제를 당한 많은 독립군이 간도나 만주 등지로 이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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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헌신을 선언하는 광복군 대원들.

통합된 힘을 발휘하지 못한 광복군
 
이후 무장독립운동은 만주군벌과 결탁한 일제의 집요한 토벌에 의해 단합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점차 위축되었다. 1930년대 들어 만주국이 들어서고, 중일전쟁이 일어나는 등 만주가 일제의 손에 완전히 장악되면서부터 만주에서 조직적인 대규모 무장투쟁은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후 일부 독립군들은 의용대를 조직해 중공군이나 중국 국민당 군대와 손잡고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중국 공산군과 연계된 소규모 조선인 유격부대도 존재했는데 1940년대 들어서면서 이들의 활동도 사실상 자취를 감추었다. 이들 부대장 가운데 한명이 1941년 20명을 데리고 소련으로 피신, 소련의 꼭두각시가 되어 한반도 북쪽 지역을 통째로 넘겨받은 김일성이다. 
 
1937년 중일 전쟁이 발발하고 전황이 급격하게 돌아가자, 임시정부는 1940년 중경(重慶)에서 광복군을 창설했지만, 재정부족과 중국정부의 견제 등으로 활동에 어려움을 겪었다. 무엇보다 조국 독립보다는 공산화라는 딴 마음을 품고 있던 공산주의자들의 분열책동으로 통일된 항일(抗日) 전투태세를 갖추지 못했다. 
 
분열로 인해 조국독립의 충정에 불타던 수 백만명의 해외 동포들을 항일투쟁 전선에 전혀 활용하지 못한 것은 민족의 크나큰 손실로 이어졌다. 2차 대전 후 우리는 아무런 발언권을 행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점을 간파한 광복군은 만고의 노력을 기울여 미군과 함께 국내 진공작전을 펼치려고 준비 했지만, 일본의 이른 항복으로 아쉽게 뜻을 달성하지 못했다.
 
[이상흔 기자]
등록일 : 2016-08-18 08:48   |  수정일 : 2017-02-02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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