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이미지

3일에 한 번 총 1,350여 회 백운대 오른 북한산 마니아의 인생역경 등행기
 
북한산 정상 백운대에 가면 항상 태극기를 볼 수 있다. 늘 깨끗한 태극기는 북한산 백운대의 또 다른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서 가장 높은 정상에 태극기가 휘날리는 건, 당연한 일이며 상징성이 있다.

백운대는 서울에서 가장 바람이 거센 곳이다. 바람이 강할 때는 일주일이면 태극기가 해져 버린다. 워낙 심하게 펄럭이는 통에 천이 버티지 못하고 찢어지는 것이다. 때문에 태극기를 1~2주 간격으로 교체해야 한다. 이 일을 개인택시 기사인 정왕원(65)씨가 하고 있다.

개인택시는 3부제로 운영되기에 이틀 운행하면 하루는 의무적으로 쉬어야 한다. 이렇게 쉬는 날 정왕원씨는 무조건 북한산을 찾는다. 산세가 복잡하고 다양한 코스가 있는 북한산이지만 그는 오로지 백운대만 찾는다. 우이동 도선사에서 정상으로 이어진 길만 매주 2~3회씩 찾는 것이다. 지금까지 백운대만 1,350여 회 올랐다. 이렇게 찾을 때마다 태극기 상태를 확인해 수시로 교체하는 일을 2000년부터 해왔다.

도선사 코스는 백운대에 이르는 최단 코스지만 가파른 돌계단이 많아 쉽지는 않다. 특히 정상의 거대한 암벽지대는 등산객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스릴 있는 구간으로 유명하다.

“3일 만에 태극기가 해진 적도 있어요. 그렇다보니 태극기 값도 적지 않게 나가죠. 찢어진 태극기는 수선할 수 없고 빨아도 소용없어요. 그래서 지금은 태극기 공장과 직거래를 해서 대량으로 구입해요.”

본문이미지
개인택시 기사인 그는 이틀 운행 후 하루 쉬어야 하는 3부제 일정에 맞춰 쉬는 날은 무조건 백운대를 올랐다.

처음 백운대에 태극기를 게양한 사람은 ‘백운대 전속 사진사’인 박현우(70)씨였다. 1985년 백운대에 처음 깃대를 세우고 15년간 태극기를 갈아 왔던 박씨는 1968년부터 백운대에서 등산객을 상대로 사진을 찍어 주는 일을 했다. 그는 매일 백운대에 오르며 ‘서울에서 가장 높은 이곳에 태극기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나무 깃대를 세웠는데 바람이 워낙 거세 수시로 부러졌다. 한 장당 1만2,000원씩 하는 태극기 값도 만만찮은 금액이었지만 의무감으로 이어왔다. 우연히 백운대를 찾은 전관(72) 백마부대장이 그의 노력을 보고, 며칠 뒤 부대원들을 보내 쇠로 된 깃대를 세워 주었다. 서울의 어느 구청장은 1년간 태극기를 지원해 주기도 했다.

그러나 디지털카메라와 휴대폰 카메라가 등장하며, 백운대 사진사인 박현우씨는 생계를 유지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는 백운대에서 만난 산친구였던 정왕원씨에게 태극기 교체 작업을 물려주었다.

정왕원씨는 “내가 태극기 작업을 이어받아도 되겠냐”고 물었다. 박현우씨는 기다렸다는 듯 흔쾌히 수락했다.

“사람들은 정상에 태극기가 항상 있는 줄로만 알아요. 태극기가 떨어져 나가면 사람들은 북한산국립공원사무소에 연락을 해요.”

정왕원씨는 북한산사무소에서 태극기를 교체하는지 보려고 시험 삼아 그냥 둔 적도 있었다. 허나 해져서 사라질 때까지 그대로 두었고, 계속 그가 교체를 해왔다. 그는 “녹슨 깃대를 사무소에서 알루미늄으로 교체해 줬다”며 “도르래가 달려 교체가 훨씬 쉬워졌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에 북한산사무소에서 태극기를 관리하려나 싶었지만 역시 관리가 되지 않았다.

월간<山> 취재진은 태극기를 교체하는 모습을 촬영하기 위해 3월 중순 백운대를 찾았다. 태극기를 교체하는 사진 찍는 모습을 본 관리공단 직원은 대뜸  “무슨 일로 태극기를 교체하느냐, 사무소에 취재 협조요청은 했느냐”며 제지했다. 정왕원씨가 “내가 해오던 일”이라고 얘기하자, “관리소에서 해온 일인데 그게 무슨 소리냐” 따지듯 했다. 어이없는 상황에 정씨는 가슴을 치며 답답해했다. 그간의 사정을 모르는 입사한 지 2개월 된 북한산국립공원사무소 직원이었다.

본문이미지
백운대 암릉구간을 오르는 정왕원씨. 1,350회에 걸쳐 백운대를 올랐지만, 지금도 정상에 서면 그렇게 좋을 수 없다고 한다.

운도 복도 없었던 지난날들

가난한 집안의 4형제 중 막내로 태어난 정왕원씨는 네 살 때 부친이 작고해 서울 영등포에서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했다. 그는 “가족은 있었지만 제대로 된 집도 가정도 없었다”고 한다. 그는 초등학교를 나오자마자 신문배달 등을 하며 직업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그는 운도 지지리 따르지 않았다. 21세에 베트남전에 참전하려 해병대에 지원했으나 혈압이 높아 탈락했다. 육군 지원 신체검사에서는 결핵 판정을 받았다. 제대로 먹지 못하고 따뜻한 집에서 제대로 못 자며 힘들게 일해 왔기에 생긴 병이었다.

모친 역시 근근이 하루하루를 일하며 버텼는데, 막내아들의 꿈인 중장비 기사자격증을 따도록 쌈짓돈을 모아주었다. 중장비 학원비를 마련한 것이다. 그는 감격하여 “꼭 취직해서 독립하겠다”고 모친께 약속했다. 중장비 교육을 마쳤지만 학원에서 일을 알선해 주지는 않았다. 그는 무작정 경부고속도로 공사 현장에 가면 일을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으로 추풍령으로 갔다. 허나 이제 갓 학원을 나온 22세의 어린 청년에게 일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독립하겠다고 어머니와 약속했었기에 집에 갈 수 없었다. 어렵게 리어카를 사서 서울역 뒤 염천교 청과시장에서 짐 날라주는 일에 뛰어들었다. 생면부지의 청년에게 상인들은 일을 주지 않았고 그는 시장바닥에서 노숙을 했다. 상인들에게 얼굴을 알리고 버텨야 하는데 밥 먹을 돈조차 없으니 리어카를 끌 힘도 없었다.

시장 과일가게 점원으로 6개월 일했으나, 주인이 의심이 심하고 급여를 주지 않아 그만 두었다. 숙식이 제공되는 청계천의 대형식당에 취직해 잠깐의 봄날을 맞기도 했다. 결핵이 치유되고 성실함을 인정받아 직급도 올라갔지만 2년 만에 사업장이 망하고 말았다. 이후 숙식 제공되는 사진관에서 일하던 그는 같은 건물에서 일하던 아내와 결혼하게 되었다. 그는 “아내를 납치하다시피 하여 결혼선언을 했다”고 한다.

귀농을 마음에 두고 있던 그는 김포에서 돼지 사육하는 일을 배우게 되었다. 이후 땅을 빌려 영돈을 시작했지만 일은 시원하게 풀리지 않았다. 그는 “경영 능력도 없는 데다 자본이 없으니 농장이 크지를 못했다”고 한다. 답답한 마음에 청와대에 장문의 편지를 두 번 썼다. 이 편지로 김포군청 직원들이 비상이 걸려 그를 찾아왔다. 그는 “도와 달라”고 청했고 군청에서는 농민후계자가 될 자격을 갖추라고 조언했다. 1년 동안 농업교육을 받고 600만 원이라는 당시에는 큰돈을 낮은 이자로 대출을 받았다.

자본이 늘어도 일은 잘 풀리지 않았다. 10년 동안 대출금도 못 갚고 빚만 늘어갔다. 영돈 일과 화물차 우유 배송일을 겸하던 중에 그는 실수로 교통사고를 냈지만 보상금을 줄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그는 “집사람의 피눈물 나는 정성으로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 그의 아내가 피해자의 집에 가서 지극정성으로 빌어 겨우 합의할 수 있었다.

1992년 김포 생활을 청산하고 서울로 나와 화물차로 맥주 배송 일을 했다. 이때부터 조금씩 일이 풀리고 모처럼 가정이 안정되었다. 그러나 1999년 그가 50세가 되던 해에 맥주회사가 바뀌면서 일을 잃었다. 다행히 화물차 운전 경력으로 개인택시 자격을 얻게 되어 2000년부터 지금까지 핸들을 잡고 있다.

그는 옛날을 회상하면서 혼잣말처럼 “끔찍했다”고 내뱉었다. 그만큼 힘들었던 과거였지만 그를 빛의 세계로 끌어준 것은 북한산이었다. 맥주 배송을 하며 44세에 등산을 시작했다. 집이 삼양동이었기에 자연스레 북한산을 찾았다. 처음 찾은 북한산 백운대에 그는 반했다. 첫 백운대의 기억이 너무 강렬했기에, 그는 일이 안정이 되자 “나도 이제 등산을 할 수 있겠구나” 하며 기뻐했단다.

본문이미지
백운대의 태극기를 교체하는 정왕원씨. 누구나 마음속에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있다고 얘기한다.

인수봉 오르는 것이 남은 소망

택시가 쉬는 날이면 수유사거리에서 아침부터 오전 10시까지 교통정리를 했다. 교통정리가 끝나면 늘 북한산을 올랐다. 지금까지 백운대를 1,350회 올랐다.

10년간 해오던 교통정리 봉사를 4년 전 그만둔 뒤부터는 아침 6시 30분에 북한산 산행을 시작한다.

“정상에서 태극기 갈고 바로 안 내려오고, 경치 구경을 해요. 우두커니 앉아 있어도 너무 좋거든요. 보통 1시간 이상은 머물러요. 백운대 터줏대감은 까마귀떼인데 비행하는 모습이 에어쇼가 따로 없어요. 바람 불지 않는 곳에 앉아서 빵 먹고 커피 마시고 하면 시간 가는 줄 몰라요.”

그에게 “3일에 한 번씩 찾는데 지루하지 않냐”고 묻자 “3일마다 풍경이 변한다”고 답한다. 미세한 계절의 변화가 있다는 것이다.

“태풍이 지나간 다음날 백운대에서 강화 앞바다를 본 적이 있어요. 평소에는 시야가 아무리 좋아도 김포까지만 보이는데, 무척 귀한 풍경이었죠.”

돌 많은 가파른 코스이기에 관절에도 무척 신경을 쓴다. 행여 연골이나 관절이 상해 백운대를 못 오게 될까봐서다. 하산 시 스틱을 쥐고 하중이 무릎에 집중되지 않게 살금살금 내려가는 것은 기본이고, 연골 예방 차원에서 정형외과를 찾아 무릎연골 예방주사를 6개월마다 맞고 있다.

그가 북한산만 다닌 건 아니다. 동네 산악회를 따라 전국의 명산을 두루 다녔고 지리산 종주는 8번 했다. 그는 “전국을 다녀 봐도 북한산만 한 산이 없다”고 변함없는 백운대 사랑을 드러낸다.

“지리산 천왕봉이나 설악산 대청봉이나 백운대만 한 감흥이 없어요. 개인적으로 정상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맛은 백운대가 최고라고 생각해요. 천왕봉이나 대청봉이나 다 그냥 걸어서 가잖아요. 백운대는 손발을 다 써서 위험한 암릉을 올라야 하니 감흥이 더 커요.”

그는 “백운대는 항상 위험이 존재한다”며 “이게 산행의 재미”라고 말한다.

정왕원씨처럼 북한산을 자주 찾는 마니아들은 그의 노력을 알기에 “고맙다”는 말을 자주 한다. 그럴 때면 그는 “이 일을 넘겨 준 박현우씨에게 고맙다”며 “마음속에는 누구나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있다고”고 한다. 태극기를 교체하고 깨끗해진 태극기 앞에서 사람들이 기념사진을 찍을 때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 없다.

개인택시를 운전하다 보면 취해서 주먹질을 하는 손님부터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 별의별 손님이 다 있다. 하지만 “사람은 기본적으로 선하고, 선한 사람이 세상에는 훨씬 많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그는 “관대할 수 있는 마음을 산에서 배웠다”고 한다.  

그의 남은 소망은 인수봉을 오르는 것이다. 백운대에서 인수봉 정상에 선 사람들을 보면 ‘저 사람은 참 행복하겠다’는 생각이 들며 그렇게 부러울 수 없다. ‘나도 젊을 적 환경이 좋았다면 저 무리들 사이에 끼어 있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도 든다. 등산학교는 일하는 시간 때문에 다닐 수 없지만, 기회가 된다면 두레박(로프에 끌려 올라가는 것)으로 가더라도 꼭 한 번 올라보고 싶다고 한다. 그에게 백운대가 어떤 존재인지 물었다.

“나를 키워 준 마음의 스승입니다. 제가 경제적으로나 학벌로나 밑바닥 인생이지만, 백운대를 오르며 열등감을 버리고 포용력을 갖게 됐어요.”

최근 불경기와 고용 불안으로 도시인들의 스트레스가 늘어나고 있다. 불만과 슬픔이 소리 없이 쌓여 속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는 것이다. 그런 현대인들에게 정왕원씨는 “백운대를 한 번 올라보라”고 권한다. 세상 속에서 올려다만 보지 말고, 세상 밖에서 내려다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