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소인(小人)과 군자(君子)
 
본문이미지
공자.
정치는
본질적으로 권력을 차지하고 권력을 행사하는 행위다. 권력의 바탕은 폭력이다. 인류만 아니라 군거생활을 하는 동물(예를 들면 영장류, 코끼리)은 권력을 집단의 질서 유지를 위한 하나의 축으로 삼는 경우가 허다하다.
 
노(魯)나라 실권자 계강자(季康子)가 공자에게 ‘정치란 무엇이요’ 하고 묻자 공자는 ‘정치란 정의입니다(政者正也).’ 라고 대답했다. 권력에 도덕을 접목시킨 언명(言明)이다. 계강자가 부당하게 차지한 권좌(權座)와 그의 정의롭지 않은 정치 행위에 대하여 도덕적 압박을 가하자는 계산도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유교는 근본이 사나운 말 같은 정치에다 정의라는 굴레를 씌웠다. 희한하게도 중국을 위시한 동아시아 제국의 정치권력은 유교를 채택하고 자진하여 이 굴레를 썼다. 권력을 얻고 유지하는 데, 위선이든 진심이든, 정의만큼 큰 힘이 되어 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역사에 폭군과 암군(暗君)은 많다. 성군(聖君)과 명군(明君)은 매우 드물다. 공자는 전설 속의 성군인 요순우탕(堯舜禹湯)과 문무주공(文武周公) 등을 치켜세워 가며 정의 정치의 당위(當爲)를 외쳤다.
 
정치로 하여금 정의를 담당하게 하기 위하여 유교는 군자를 교육하여 양성하는 길을 택했다. 정치도 사람이 하는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유가는 춘추시대부터 세습적으로 교육에 종사하는 가문들이었다고 한다.
 
공자는 ‘군자는 의(義)에서 기뻐하고 소인은 이(利)에서 기뻐한다.(君子喩於義 小人喩於利)’고 했다. 유정기(柳正基)는 그의 저작인 홍도전서(弘道全書)에서 군자는 치자(治者)계급을, 소인은 생산계급을 지칭한다고 단언했다.
 
유교가 바라는 군자, 즉 치자 계급의 기본 자격은 학식과,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을 두루 갖춘 덕성이다. 그러나 이 둘 중에서 학문은 시험을 거쳐 가려 낼 수 있지만 덕성, 즉 인간성은 밝혀내기가 매우 어렵다. 본인이 자신의 학식은 나타내려 하지만 부덕(不德)은 감추기 때문이다.
 
그래서 덕성은 빠지고 지식이 군자의 유일한 외형적 자격이 된다. 공자가 살던 B.C. 5~6 세기의 중원 각국은 다투어 부국강병(富國强兵) 정책을 쓰고 있었다. 이런 정책을 수립하고 시행하는 데는 문자로 된 지식이 대량 필요했다. 그래서 등장하는 것이 전통적 치자 계급인 귀족을 보필하는 유식한 사(士) 계급이었다.
 
현실적으로 말하면 군자는 귀족이나 사(士) 출신이었다. 그러다가 진시황 시대에 이르면 봉건제도와 함께 귀족제도도 철폐된다. 혈통과 신분이 배제된 능력주의 관료제도만이 남게 된다. 지식이 계급을 결정하는 유일한 척도가 되었다.
 
논어를 위시한 유교 서적을 읽는 지금 사람들은 옛날에는 이 글들을, 극소수 예외를 제외하면, 오직 치자 계급만 읽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교육에 필요한 교사, 서책, 시간이 피치자인 서민에게는 그림 속의 떡이었을 뿐이다.
 
제자인 염구가 공자에게 정치의 목적을 묻자 공자가 대답했다. ‘백성들을 잘 살게 해 주는 것이다.’ 염구가 또 물었다. ‘백성이 잘 살게 된 다음에는 무얼 해야 합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그들을 교육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공자는 이 두 가지 목적을 이루는 데 실패하였다. 20세기 초 청(淸)과 조선의 멸망, 20세기 중엽 일본의 2차대전 패배가 공자의 이 두 실패의 대미(大尾)다.
 
백성을 잘 살게 하지 못 한 까닭은 소인이 이(利)를 추구하는 것이 도덕과 합치할 수 있음을 간과하고 오로지 억누르기만 하였기 때문이다. 물산(物産)은 의(義)에서 나오지 않고 이(利)에서 나온다. 소인 아닌 군자가 이(利)를 추구하는 것만 경계했어야 했다.
 
백성을 교육하는 것에 실패한 것은 이(利)에 대한 교육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육이 치자 계급을 위해서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기술, 과학, 상업에 관한 지식이 발전하지 못 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