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한국사 최초의 통일국가를 만든 문무대왕(文武大王)
 
 
경북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앞바다에 있는 신라 문무왕의 수중릉. 사적 제158호로 대왕암이라고도 한다.
      
  文武王의 水中陵
 
  문무왕(文武王)과의 시공을 뛰어넘는 대화는 어디에 가면 가능할까? 역시 감포 앞바다에 떠 있는 그의 수중릉(水中陵)부터 찾아야 할 것 같다. 일부 연구자들은 그곳을 수중릉이 아니라 그의 뼈가 뿌려진 산골처(散骨處)라고 주장하는데, 그래도 좋다. 어떻든 그곳은 우리 민족사상 최초의 통일을 완성한 대왕(大王)에게 경의를 표할 수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지난 5월28일 오후 2시, 필자는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해변에서 동해를 향해 마주 섰다. 파도가 계속 밀려왔다가 포말을 일으키며 하얗게 부서진다. 해변에서 200m 거리의 바다 가운데에 그다지 크지 않은 자연바위가 보이는데, 이곳이 바로 문무왕의 수중릉이다.
 
  필자는 여러 번 문무대왕릉을 참배했다. 1996년의 답사 때만 해도 해안에서 뱃삯을 지불하고 모터보트를 타면 주변 해역을 한 바퀴 빙 돈 다음 승객을 대왕암(大王岩) 위에 하선시켜 주었다.
 
  대왕암은 멀리서 보면 한 무더기의 바위섬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바위 한가운데가 백두산의 천지처럼 파여 있고, 둘레에 자연암석이 감싸고 있는 모습이다. 못 속 바닥에는 길이 3m가량의 편편한 돌이 얹혀 있다. 물은 바닥이 보일 만큼 맑다. 대왕암 가장자리에서 앉은 자세로 바지를 걷어올리고 발을 뻗어도, 편편한 돌 위에 발바닥이 닿지 않는 깊이이다.
 
  사방으로 트인 십자형 좁은 수로(水路)를 통해 흘러들어온 물이 서쪽으로 난 수로의 턱을 넘어 다시 바다로 빠져나간다. 그날, 대왕암 바깥에서는 제법 거센 파도가 쳤다. 그런데도 대왕암 안쪽의 바닷물은 잔잔했다.
 
  혹시, 못 속의 편편한 바위 밑에 유골함을 안치했던 흔적이라도 남아 있지 않을까? 필자는 물속에 얼굴을 넣고 편편한 바위 주변을 살폈지만, 사리함 같은 것이 들어갈 만한 人工구조를 발견하지 못했다. 수년 전, 「KBS 역사스페셜」 팀도 못 속의 바닷물을 모두 퍼내고 조사를 했지만, 유골 장치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한다.
 

 
  文武王의 산뜻한 실용주의
 
  문무왕은 7년에 걸친 나당(羅唐)전쟁에 승리해 삼국통일을 완수한 大王이다. 그렇다면 후계왕은 왜 대왕의 능을 번듯하게 지어 모시지 않고, 하필 동해구(東海口) 바다 속에다 장사 지냈던 것일까? 역사기록(삼국사기)에 따르면 바다 속 대왕암에 문무왕의 유골을 모신 것은 그의 유언에 따른 것이다. 문무왕의 유언은 참으로 산뜻하다.
 
 < 세월이 가면 산과 계곡도 변하고, 세대 또한 흐름에 따라 변하는 것이니, 오왕(吳王: 손권)의 북한(北山) 무덤에서 어찌 향로의 광채를 볼 수 있을 것이며, 위주(魏主: 조조)의 서릉(西陵)은 동작(銅雀)이란 이름만 들릴 뿐이로다. 옛날에 만기(萬機)를 총람(總攬)하던 영웅도 마지막에는 한 무더기의 흙이 되어, 나무꾼과 목동들이 그 위에서 노래하고, 여우와 토끼는 그 옆에 굴을 팔 것이다. 그러므로 헛되이 재물을 낭비하는 것은 역사서의 비방거리가 될 것이요, 헛되이 사람을 수고롭게 하더라도 혼백을 구제할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문무왕은 겸허했다. 그는 매머드級 무덤을 짓기 위해 백성들을 노역으로 모는 것이 후세의 비판거리이며, 무덤의 주인공을 위해서도 부질없는 일임을 일찌감치 깨달은 합리주의자였다. 이런 실용주의 노선이 아니었다면 삼국통일의 완수는 불가능했고, 한민족(韓民族)은 지금 중국의 55개 소수민족 중 하나쯤으로 전락해 버렸을 것이다.
 
 
문무왕 수중릉의 안쪽. 사방으로 트인 십자형 좁은 수로를 통해 못 속으로 흘러 들어온 바닷물이 서쪽으로 난 수로를 통해 다시 바다로 빠져나간다. 못 속 바닥에는 길이 3m가량의 편편한 돌이 깔려 있다.
 
  韓國史 최대의 역사 발전
 
  삼국통일은 한국사 최대의 역사 발전이었다. 우선, 사람의 해골로 산야(山野)를 덮어야 했던 수백 년의 난세(亂世)를 치세(治世)로 바꿔 백성들의 살림살이가 크게 개선되었다. 삼국통일로 놀고 먹던 사람의 비율이 최소한 3분의 2가량 격감했기 때문이다.
 
  사서(史書)에 따르면 고구려에는 좌식자(坐食者)의 수가 인구의 3분의 1을 차지했다. 좌식자는 거의 전문전사(專門戰士)들이었다. 고구려의 영토는 신라+백제보다 5배가 넘었지만, 농업생산량은 남한지역의 5분의 1에도 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것은 후세의 「택리지(擇里志)」 등을 참고한 필자의 추정이다. 조선왕조 시대의 경우 평안도·함경도는 농업생산량이 낮아 북쪽 국경 수비군의 병량(兵糧) 공급 이외엔 조세(租稅)를 거두지 않았다. 따라서 농업생산력이 낮은 고구려는 태생적으로 약탈국가일 수밖에 없었다.
 
  3국의 인구는 백제·고구려·신라의 순이었지만, 거의 엇비슷했다. 농업생산량은 백제가 압도적 제1위였을 것이다. 그런 만큼 백제 왕실의 유흥과 낭비는 유별났다. 예컨대 백제의 마지막 임금 의자왕(義慈王)은 재위(在位) 초기의 성취에 자만하여 유흥시설을 대폭 늘리고, 그의 서자 40여 명을 한꺼번에 관등 제1위인 좌평(佐平)으로 올렸다.
 
  문무왕은 그와 7년전쟁의 상대였던 측천무후(측천무후)보다 도덕적으로 절대우위였다. 필자는 10여 년 전 서안(西安: 唐의 수도 장안)에 간 김에 거기서 북서쪽 200km에 위치한 당고종(唐高宗)과 측천무후가 합장된 건릉(乾陵)을 찾아간 적이 있다. 건릉은 진시황(秦始皇)의 여산릉에 버금가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인공조산(人工造山)이다.
 
 
  역사의 라이벌 文武王과 則天武后
 
利見臺. 대왕암이 내려다보이는 이곳에서 신문왕이 신라의 국보인 만파식적을 얻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여기서 문무왕의 라이벌을 약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당고종 이치(李治)는 아비 태종 이세민(李世民)으로부터 「정관(貞觀)의 치(治)」라고 일컬어지는 당제국의 극성기를 물러받은 뒤 나당연합군을 형성해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킨 황제다. 그러나 실제의 그는 매우 심약한데다 비만증 때문에 궁궐 안에서도 가마를 타지 않으면 기동이 불가능할 만큼 허약했다. 그의 재위기간 중 정사는 사실상 측천무후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다.
 
  측천무후는 원래 唐태종의 후궁 무(武)씨였지만, 황자 이치의 눈에 들었다. 唐태종이 죽자 당시의 관례에 따라 武씨는 감업사(感業寺)에 보내져 여승이 되었다. 황위에 오른 이치(唐고종)는 비구니 武씨가 일단 속세와 절연했으므로 딴 사람이 되었다는 괴상한 논리를 내세워 그녀를 환속시켜 그의 품에 안았던 것이다.
 
  아버지가 죽으면 아들이 아버지의 첩을 취(娶)하는 것은 흉노 등 북방 유목민족의 혼풍(婚風) 중 하나였다. 하기야 唐왕조의 李씨 집안도 원래 무천진(武川鎭) 군벌 출신으로서, 북방 유목민족의 피가 섞인 호한잡종(胡漢雜種)이었다. 그런 만큼 아비의 첩을 품에 안은 唐고종의 행태를 유교적 도덕관으로만 재단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신라김씨의 혼풍도 유교적 관점으로는 문란하기 마찬가지였다.
 
  674년, 唐고종은 천황(天皇), 측천무후는 천후(天后)로 호칭해 왕권의 2원체제를 공식화하고, 연호(年號)를 상원(上元)으로 바꾸었다. 683년 12월, 唐고종 사후에 측천무후는 그녀의 소생인 중종(中宗)과 예종(睿宗)을 황제로 세웠다가 모두 폐위시키고, 684년 周나라를 창업해 704년까지 중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여재(女帝)가 되었다. TV 역사 드라마 같은 데서는 화려하게 등장하는 여걸이지만, 국가경영보다 궁정의 파워게임에 능숙했던 그녀의 치적(治積)은 마이너스)였다.
 
  건릉(乾陵) 답사 때 필자는 세마(貰馬)를 타고 건릉의 주위와 꼭대기를 구석구석 돌아보면서 이렇게 야무진 무덤 축조를 지휘한 사람은 병약했던 唐고종이 아니라 女帝 측천무후라고 판단했다. 왜냐하면 후세 사람의 도굴을 막기 위해 건릉 표면을 집채만 한 바윗돌로 빈 틈 없이 덮어놓은 것은 그녀다운 앙큼함의 발로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측천무후와는 달리 문무왕은 간소한 장례를 거듭 당부했다. 다음은 이어지는 문무왕의 유언이다.
 
 < 이러한 일을 조용히 생각하면 마음 아프기 그지 없으니, 이는 내가 즐기는 바가 아니다. 숨을 거두면 열흘 후 바깥 뜰 창고 앞(庫門外庭)에서 나의 시체를 불교의 법식으로 화장하라. 상복의 경중(輕重)은 본래의 규정이 있으니 그대로 하되, 장례의 절차는 철저히 검소하게 해야 할 것이다>
 
 
  『兵器를 녹여 農具로 만들라』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인용된 「감은사사중기(感恩寺寺中記)」에 의하면 문무왕은 왜병의 침입을 막기 위해 감은사(感恩寺)를 창건했으나 완공을 보지 못하고 죽어서 동해의 해룡(海龍)이 되었다고 한다. 세계제국 唐을 맞상대로 한 7년전쟁에서 승리한 문무왕―그런 그가 사후(死後)에 호국룡이 되어 왜적을 막겠다고 서원했다. 그럴 만큼 신라에게 왜국은 겁나는 존재였을까?
 
  이 점에 대해 뒤에서 상술할 것이지만, 당시 슈퍼파워 唐과 사생결단(死生決斷)의 전쟁을 벌였고, 임종 시점까지 긴장관계가 해소되지 않았던 신라로서는 배후의 왜국은 겁나는 존재였다. 만약 唐과 왜국이 손을 잡는다면 신라에겐 치명적이었을 수밖에 없었다. 병력상의 절대우위에다 공성전(攻城戰)에 능숙한 당군(唐軍), 기마전에 숙달된 말갈군과 거란군, 근거리에서 병참지원이 가능한 왜군이 연합한다면 신라는 단 몇 달도 견뎌낼 수 없었다.
 
  7년전쟁 이후 신라·왜국 관계를 추적하면 문무왕은 唐·倭의 연합을 깨기 위해 혼신의 외교력을 기울였다. 겉으로는 왜국에 친선의 메시지를 계속 던지면서도 내심으로는 왜국의 침략에 대비한 문무왕의 국가경영 ―이런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깔고 문무대왕의 수중릉을 바라보면 그것은 처절할 만큼 장엄하다.
 
  한국 역사상 그처럼 파란만장한 난세를 극복한 결단의 인물은 아무도 없다. 그의 유언의 첫머리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 과인은 어지러운 때에 태어난 운명이어서 자주 전쟁을 만났다. 서쪽을 치고 북쪽을 정벌하여 강토를 평정하였으며, 반란자를 토벌하고, 화해를 원하는 자와 손을 잡아, 원근(遠近)을 안정시켰다. 위로는 선조의 유훈을 받들고, 아래로는 父子의 원수를 갚았으며, 전쟁 중에 죽은 자와 산 자에게 공평하게 상을 주었고, 안팎으로 고르게 관작을 주었다>
 
  676년, 문무왕은 唐軍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민족사 최초의 통일국가를 건설했다. 이후 5년간 그는 민생의 안정을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이어지는 문무왕의 유언이다.
 
 < 병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어서, 백성들로 하여금 천수(天壽)를 다하도록 하였으며, 납세와 부역을 줄여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하여 백성들은 제 집을 편안히 여기고, 나라에는 근심이 없어졌다. 창고에는 산처럼 곡식이 쌓이고, 감옥에는 풀밭이 우거졌으니, 가히 선조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었고, 백성들에게도 짐진 것이 없었다고 할 만하다>
 
  문무왕은 재위 21년 만인 681년 7월1일, 56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조선왕조 임금의 평균 수명이 44세였던 만큼 결코 문무왕이 단명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삼국통일을 완수하는 데 일신의 에너지를 남김 없이 소진한 탓이라고 해도 좋다.
 
 < 내가 풍상을 겪어 드디어 병이 생겼고, 공사(政事)에 힘이 들어 더욱 병이 중하게 되었다. 운명이 다하면 이름만 남는 것은 古今에 동일하니, 홀연 죽음의 길로 되돌아감에 무슨 여한이 있으랴! 태자는 일찍부터 덕을 쌓았고, 오랫동안 동궁(東宮)의 자리에 있었으니, 위로는 여러 재상으로부터 아래로는 낮은 관리에 이르기까지, 죽은 자를 보내는 의리를 잊지 말고, 산 자를 섬기는 예를 잊지 말라. 종묘의 주인은 잠시라도 비워서는 안 될 것이니, 태자는 내 관 앞에서 왕위를 계승하라!>
 
국보 제112호 감은사 터의 쌍탑. 통일신라시대의 걸작으로서 장중하면서도 상승감을 느끼게 한다.
 
  법령과 格式이 불편하면 즉시 바꾸라!
 
  그의 죽음 후에 정해진 文武王이란 시호는 그냥 부여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마상(馬上)에서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고, 세계제국 唐과의 7년전쟁에서 승전했기 때문에 「武」 자를, 신라국가의 각종 제도 개혁에 탁월한 업적을 남겼기 때문에 「文」 자를 받은 것이다. 그의 유언은 다음 구절로 끝을 맺는다.
 
 < 변경의 성과 요새 및 州와 郡의 과세 중에 절대적으로 필요하지 않는 것은 잘 살펴서 모두 폐지할 것이요, 법령과 격식(格式)에 불편한 것이 있으면 즉시 바꾸어서 알릴 것이며, 원근에 선포하여 이 뜻을 알게 하라. 태자가 王이 되어 이를 시행하라!>
 
  봉길리 언덕 위에 있는 이견대(利見臺)로 올라갔다. 이견대에서 동해의 바람을 맞받으면 오장육부가 시원해진다. 이견대는 해룡이 나타났다는 설화가 전해지는 곳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682년 5월, 신문왕은 이곳에서 해룡으로 화한 문무왕으로부터 만파식적(萬波息笛)을 만들 대나무를 얻었다. 만파식적은 그것을 불면 국태민안(國泰民安)이 이뤄진다 하여 신라의 국보로 삼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현재의 이견대 건물은 1970년대에 정부가 대지(臺地)에 남아 있던 초석을 근거로 해 신라 건물 양식으로 재건한 것이다.
 
 
  金春秋의 아들이자 金庾信의 조카
 
  그렇다면 민족사상 최초로 통일한 문무왕 김법민(金法敏)은 누구인가? 그의 아버지는, 황음무도하다고 해서 578년 왕위에서 쫓겨난 진지왕(眞智王)의 손자 김춘추(金春秋)다. 어머니는 532년 신라에 의해 멸망당한 가락국(금관가야) 최후의 왕 구형(仇衡)의 증손자 김유신(金庾信)의 여동생 문희(文姬)이다. 김법민은 처음부터 태자는커녕 왕자로 태어난 신분도 아니었고, 그의 어머니 김문희는 김춘추의 정실부인도 아니었다.
 
  필사본 「화랑세기(花郞世紀)」에 따르면 김유신은 15世 풍월주(風月主), 김춘추는 18世 풍월주다. 풍월주는 요즘 육군사관학교의 「대표화랑」에 해당하지만, 그들에 대한 신라사회의 기대와 성망(聲望)은 절대적이었다.
 
  김춘추-김문희 결혼의 기획자는 망국의 후예로서 신분상승의 비원을 품은 가야김씨 유신이었다. 그는 8세 年下의 신라김씨 춘추를 유인해 그의 여동생 문희와 혼외정사(婚外情事)의 분위기를 만들었다. 축구를 하다가 고의로 옷자락을 찢어 놓고 꿰매 주겠다며 춘추를 자기 집 안으로 데리고 갔던 것이다.
 
  유신의 첫째 여동생 보희(寶姬)는 달거리 중이어서인지, 바느질을 사양했다. 이때 둘째 여동생 문희(文姬)가 앞으로 나아가 춘추를 모시고 바느질을 하게 되었다. 유신은 일부러 그 자리를 피했다. 그러고 나서 몇 달 지나 문희의 배가 불러왔다.
 
  당시 춘추에게는 이미 보라궁주(寶羅宮主)라는 미색(美色)의 정실부인이 있었다. 보라궁주는, 「프리섹스의 화신」이었던 미실(美室)의 손녀였다. 미실은 일찍이 화랑 김사다함(金斯多含)의 연인이었고, 그가 전사한 후에는 진흥왕·진지왕·진평왕과 운우(雲雨)의 정(情)을 나누면서, 화랑 조직을 움직인 배후의 실력자였다.
 
  더욱이 김춘추와 보라궁주 사이에는 이미 고타소(古陀炤)라는 딸이 있었다. 춘추는 보라궁주를 사랑했기 때문에 감히 문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숨기고 있었다. 김유신은 결혼동맹을 성사시키기 위한 최후의 이벤트를 감행했다.
 
  김유신은 그의 집 뜰에 땔나무를 높이 쌓아 놓고 처녀가 애를 뱄다고 외고 펴면서 짐짓 문희를 불사르려고 했다. 이때 김춘추는 선덕(善德)공주를 따라 남산에서 노닐고 있었다. 선덕공주가 연기 나는 곳을 보고 그 까닭을 물으니 좌우 신하들이 자초지종을 고해 바쳤다. 선덕공주가 김춘추에게 말했다.
 
  『당신이 상관된 일인데, 어찌 가서 구하지 않으시오!』
 
  김춘추는 곧장 남산에서 내려와 문희를 구하고, 혼례 올릴 것을 사당에 고했다. 그 얼마 뒤 보라궁주는 아이를 낳다가 죽고, 문희는 뒤를 이어서 정실부인이 되었다. 이처럼 김법민은 철저한 정략결혼의 산물이었다.
 
  김법민은 궁중에서 자란 인물이 아니다. 궁중에서 자란 태자나 왕자는 미식(美食)과 여색(美色), 그리고 운동부족에 의해 야성(野性)을 지니기 어렵다. 唐나라와 싸워야 했던 결단과 투쟁의 시기에 야성을 지닌 문무왕이 在位했다는 것이야말로 신라의 축복이며, 우리 민족 형성의 결정적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했다.
 
  김법민은 약관 23세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삼국사기」 진덕여왕 4년(650) 6월조에 『왕은 비단에 5言詩 태평송(太平頌)을 써서, 이를 춘추의 아들 법민으로 하여금 唐 황제에게 바치도록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태평송은 겉보기에 아부의 극치이다.
 
 < 위대한 대당왕업(大唐 王業)을 열었으니/드높은 황제의 앞길 번창하여라/전쟁을 끝내 천하를 평정하고/……/빛나고 밝은 조화 사계절과 어울리고/해와 달과 오성(五星)이 만방에 도는구나/……/삼황(三皇)과 오재(五帝)의 덕이 하나가 되어 大唐을 밝게 비추리로다>
 
  650년이라면 唐고종 즉위 다음 해인 영휘(永徽) 원년이다. 그렇다면 태평송에 대한 唐고종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삼국사기」는 『고종이 이 글을 아름답게 여기고, 법민에게 대부경(大府卿)을 제수하여 돌려 보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해에 신라는 처음으로 唐의 연호(年號)인 영휘를 시행했다.
 
 
  3面 포위 공격받은 신라
 
  태평송을 음미하면 신라의 고뇌를 느낄 수 있다. 신라의 저자세 外交는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기 때문이다. 신라는 고구려·백제·왜국이란 3正面의 적에 대처해야 했다. 이런 국가존망의 위기 상황에 직면하게 된 원인에 대해 약간 짚어 볼 필요가 있다.
 
  광개토왕 이래 신라는 고구려를 섬겨 백제·왜국·가야의 3面 포위공격에서 살아남았다. 427년 고구려의 장수왕이 만주의 국내성(집안)에서 평양으로 수도를 옮겨 남진정책을 감행하자, 신라는 백제와 공수동맹을 맺어 고구려의 침략에 맞섰다.
 
  백제는 475년 고구려군의 침략을 받아 수도 한성(漢城)을 빼앗기고, 개로왕은 사로잡혀 참수되었다. 신라는 이때 원병 1만 명을 파견했지만, 한성이 이미 공파(空破)당한 후였다. 이때 개로왕의 동생 문주(文周)는 지금의 공주로 남하해 웅진백제 시대를 열었다. 이후 백제와 신라의 동맹은 더욱 굳어진다.
 
  드디어 551년 고구려에서 내분이 일어난 기회를 이용해 백제·신라 연합군은 고구려군을 한강유역에서 몰아냈다. 백제는 자신의 옛 수도권인 한강 하류지역을 탈환하고, 신라는 죽령과 조령을 넘어 한강 상류지역을 차지했다.
 
  그러나 고대국가의 속성상 강 하나의 유역을 나눠 가지는 동맹체제가 지속될 리 만무했다. 553년 신라는 기습공격을 걸어 백제가 회복한 한강 하류지역까지 차지하고 신주(新州)를 설치했다.
 
  백제의 성왕(聖王)은 신라의 배신에 보복해야 했다. 성왕은 3만 명의 백제·가야·왜 연합군을 결성해 신라 영토의 허리를 끊기 위해 관산성(管山城: 지금의 충북 옥천)에 진주시켰다. 554년의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을 비롯한 3만 병이 전멸하고, 오직 왕자 여창(餘昌: 후일의 위덕왕)만이 필마단기로 신라군의 포위망에서 빠져나와 수도 사비성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562년, 신라는 가야연맹제국의 마지막 맹주 대가야까지 먹었다. 이제 신라는 낙동강·한강 유역을 확보해 농업생산력이 급증하고, 당시 東아시아 세계의 중심 중국과 직통할 수 있는 남양만(南陽灣)의 당항성(黨項城)을 보유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신라국가에게는 미증유의 위기를 불러왔다. 신라는 백제·고구려·왜국 공동의 적이 되었다. 어떤 국가도 3正面 공격에는 견딜 수 없다. 김춘추는 3면 포위를 풀기 위해 신명을 걸었다.
 
  642년 7월, 무왕에 이어 즉위한 백제 의자왕은 신라의 40여 성을 점령했다. 8월에는 고구려와 백제 연합군이 신라를 침공해 서해안의 당항성을 함락 직전까지 몰고 갔다. 특히 백제군 1만여 명은 신라 수도권의 요새 대야성(大耶城: 경남 합천)을 함락시켰다. 이때 김춘추의 사위이며 성주(城主)인 품석(品釋)과 고타소(김춘추의 딸) 부부가 백제군에게 참수되었다.
 
 
  同盟을 찾아나선 金春秋
 
국보 제25호 태종무열왕릉비. 용머리 돌과 거북등 받침만 남아 있고, 碑身은 멸실되었다. 머리를 치켜들고 네 발로 힘껏 땅을 밀치는 모습은 삼국통일기 신라의 약동하는 사회상을 드러내고 있다.
  김춘추는 복수전을 위한 모험외교에 몸을 던졌다. 그해 11월, 김춘추는 고구려로 들어가 對백제 군사동맹을 제의했다. 그러나 쿠데타로 막 집권한 연개소문(淵蓋蘇文)은 신라가 점령한 죽령(竹嶺) 이북의 땅을 반환할 것을 역(逆)제의함으로써 회담은 결렬되었다. 이때 김춘추는 고구려에 억류되어 목숨까지 위험한 지경에 처하기도 했다.
 
  이어 647년, 김춘추는 숙적(宿敵) 왜국으로 건너가 對백제 견제외교를 전개했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이때 김춘추의 모습에 대해 『용모가 출중하고 담소를 잘했다(美姿顔善談笑)』라고 기록되어 있다. 회담의 결과에 대한 역사 기록은 없지만, 왜국은 그들의 본국 혹은 선조의 땅이었던 가야제국(諸國)을 병합한 신라에 대해 우호적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648년 羅·唐 비밀협약
 
  648년, 김춘추는 唐에 건너가 唐태종을 만났다. 이때 唐태종은 김춘추에게 『내가 두 나라(고구려·백제)를 평정하면 평양 이남과 백제의 토지는 모두 신라에 주어 길이 편안토록 하려 한다』고 약속했다.
 
  이것이 이른바 「648년 밀약」이다. 이후 東아시아 세계는 고구려-백제-왜국의 南北동맹과 신라-당 東西동맹의 두 진영으로 집단화해 대립했다.
 
  654년, 진덕여왕이 병사하고 후사가 없자 화백(和白)회의는 처음엔 김알천(金閼川)을 밀었지만, 백제·고구려의 공세를 자신의 실력으로 막아 온 김유신의 위엄에 눌려, 김춘추를 만장일치로 후계왕으로 추대했다. 김춘추-김유신 결혼동맹의 승리였다.
 
  父王의 등극 후 김법민은 곧 태자가 되었고, 병부령(지금의 국방부 장관)을 겸임했다. 660년 7월, 당장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치기 위해 13만 대군을 이끌고, 남양만으로 들어오자 태자 김법민은 대선 100여 척을 이끌고 덕적도(德積島)에서 접응했다. 7월13일, 나당(羅唐)연합군에 의해 사비성이 함락되자 태자 김법민은 의자왕의 왕자 부여융(扶餘隆)을 말 앞에 꿇어 앉히고 그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꾸짖어 말했다.
 
  『예전에 네 아비가 내 누이를 죽여 옥중에 파묻어, 나는 이 일로 20년 동안 가슴이 아팠는데, 오늘은 네 목숨이 내 손에 달렸구나!』
 
  김법민으로서는 백제 왕가에 대한 해묵은 사원(私怨)을 통쾌하게 풀었던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승자의 태도는 결코 전략적이지는 않았다. 7월18일, 웅진성(熊津城: 지금의 공주)으로 도주했다가 사비성으로 되돌아와 항복한 의자왕도 치욕적인 모욕을 당했다. 의자왕은 羅唐연합군의 전승축하연에 불려나가 승장(勝將)들을 위해 술을 쳐야만 했다. 승자의 오만이 저지른 두 사건은 백제부흥군 봉기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661년 7월, 금마저(지금의 익산)에서 백제부흥군을 진압하던 태종무열왕 김춘추가 돌연 병사했다. 태자 김법민이 신라 30대 왕으로 등극했지만, 신라는 기로에 처하게 되었다. 내친 김에 신라까지 먹으려는 唐의 속셈이 이미 드러났고, 백제부흥군의 저항이 치열했으며, 고구려와 왜국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았다.
 
  이 해 9월, 왜국에 체류하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扶餘豊)이 백제부흥군의 지도자 복신(福信)의 요청에 의해 귀국하여 백제왕으로 추대되었다. 이때 왜왕 덴지(天智)는 장군 사이노 무라지(狹井連)와 에치노 다쿠쓰(朴市田內津)에게 병력 5000을 주어 부여풍을 호위하도록 했다. 화살 10만 개 등 군사물자도 지원했다.
 
  부여풍은 주류성(周留城: 충남 홍성군 대흥면 鶴城)을 백제부흥군의 지휘본부로 삼고, 복신(福信)·도침(道琛)과 왜장들을 이끌고 항전태세를 증강시켰다. 백제부흥군은 한때 200개 성을 탈환할 만큼 맹위를 떨쳤다. 웅진도독부가 공주-부여 일원만 겨우 장악하고 나머지 백제 고토가 모두 부흥군의 수중에 떨어졌던 것이다.
 
 
  문무왕·신문왕 父子가 창건한 感恩寺
 
안압지. 문무왕 14년(674)에 축조된 인공호수로 못가에 임해전을 지어 東宮과 영빈관으로 삼았다.
  이견대(利見臺)에서 내려와 감은사 터로 갔다. 문무왕은 동해구에 절을 지어 부처님의 힘으로 왜구를 격퇴시키려 절의 이름을 「진국사(鎭國寺)」라고 하였으나, 절을 완공하기 전에 위독하게 되었다. 그는 승려 지의법사(智義法師)에게 『죽은 후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겠다』고 말했다. 신문왕(神文王)이 부왕의 뜻을 받들어 662년 절을 완공하고 감은사라고 명명했다.
 
  감은사 터의 금당의 하부구조를 보면 절묘하다. 용혈(龍穴)을 파서 용으로 화한 문무왕이 해류를 타고 출입할 수 있도록 구조되어 있다. 절터에는 국보 제112호인 동·서 3층석탑 2기가 남아 있다. 탑의 제일 윗부분인 찰주(擦柱)의 높이까지 합하면 국내의 현존하는 석탑 가운데 가장 큰 것이다.
 
  감은사 터 쌍둥이 동·서 3층석탑은 오후 4시경 햇빛을 받을 때가 가장 아름답다. 필자도 그 시각에 맞춰 감은사 터에 도착했지만, 마침 서탑(西塔)이 보수중이었고 날씨도 갑자기 기울어졌다.
 
  감은사를 뒤로 하고 50리 대종천(大鐘川)을 따라 이어진 929번 지방도로와 4번국도를 따라 경주시내를 향해 출발했다. 대종천이란 이름에도 문무왕과 관련한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고려 고종(高宗) 25년(1238), 몽골의 침략으로 황룡사의 9층탑을 비롯한 많은 문화재가 불타 버렸다. 이때 황룡사에는 봉덕사 종(성덕대왕신종)의 4배가 넘는 무게 약 100t의 큰 종이 있었는데, 몽골군들이 이 종을 탐내어 그들 본국으로 가져가기로 했다. 뱃길을 이용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 운송수단이었던 만큼 토함산 너머에 있는 하천을 이용하기로 했다.
 
  그러나 문무왕의 화신(化身)인 해룡은 몽골 병사들의 약탈을 가만 내버려 두지 않았다. 갑자기 폭풍우가 일어나 종을 실은 배가 침몰되면서 종도 바다 속에 가라앉았다. 이후 「종이 실려 간 하천」이라 해서 대종천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옛날 같으면 꾸불꾸불 추령고갯길을 넘어야 했지만, 이제는 추령터널이 뚫려 길이 훨씬 쉬워졌다. 깊은 계곡 위에 놓인 추령교 부근은 『추령고개 못지않다』는 감탄을 연발할 만큼 절경이다.
 
 
  신라의 對唐戰을 도운 吐藩의 역할
 
태종무열왕릉의 발치에 있는 金仁問의 묘. 김인문은 前後 20여 년간 唐에 머물면서 신라의 국가이익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경주시내에 들어와 우선 국립경주박물관 건너편에 위치한 임해전지(臨海殿址)를 찾아갔다. 필자에겐 임해전(臨海殿)이라는 이름보다 「기러기와 오리가 노니는 연못」이라는 뜻의 안압지(雁鴨池)라는 이름이 더욱 친숙하다.
 
  안압지는 문무왕 때 조성한 연못이다. 「三國史記」 문무왕 14년(674) 2월條에는 『대궐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었으며, 珍寄(진기)한 새와 짐승들을 길렀다』는 기록이 있다. 문무왕 14년이라면 아직 羅唐전쟁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반월성 부근에 인공호수를 조성할 여유가 있었을까?
 
  이 점에 관해 뒤에서 상세히 쓸 것이지만, 674년은 唐과 당시 서역의 강자 토번(吐藩: 티베트) 사이에 지금의 청해성(靑海省)과 신강(新疆)위구르자치구의 타림분지 일대에서 실크로드(비단길)의 패권을 다투는 전쟁이 재발했던 시점이다. 이 때문에 한반도의 임진강 계선에서 신라군과 결전을 벌이던 唐軍이 서역 전선으로 대거 이동해 羅唐전쟁은 일시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아무튼 토번과 唐의 전쟁은 羅唐전쟁에서 신라가 승리하는 데 결정적인 외생변수(外生變數)가 되었다. 이 시대의 슈퍼파워 唐제국도 東西의 2正面 전쟁을 감행하기는 어려웠다. 羅唐전쟁은 그 후 675년 9월29일 매소성(買肖城) 전투와 676년 11월 기벌포(伎伐浦) 해전에서 결판이 나지만, 이에 이르는 과정은 다음 호에서 상술할 것이다.
 
  안압지 답사 중이던 오후 5시경,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고 「우르릉 쾅쾅」 천둥번개가 치더니만, 「후두둑 후두둑」 굵은 비가 쏟아졌다. 장대비야 두려울 바 없는 것이지만, 뜸을 두고 거듭되는 천둥번개는 사뭇 위협적이었다. 복원된 임해전 처마 밑에 들어가 그 위세를 잠시 피했다.
 
  안압지는 문무왕 때 축조하고 못가의 임해전 등 부속건물 등은 통일신라시대 여러 왕들이 세워 왕자가 거처하는 동궁(東宮)으로 삼았다. 나라의 경사스러운 날이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연회를 베풀었던 곳이기도 하다. 931년, 서라벌을 예방한 고려 태조 왕건(王建)도 임해전에서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敬順王)에게 따뜻한 접대를 받았다.
 
  현재의 모습은 1975년부터 2년간 실시된 발굴조사 결과로 복원한 것이다. 이곳에서는 신라시대 상류사회의 생활유물이 다량 출토되어 이웃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唐, 신라 내부의 골육상잔 유도
 
  어두웠던 하늘이 좀 밝아지고, 빗발도 가늘어졌다. 그러나 박물관에 입장하기엔 너무 늦은 시각이었다. 안압지를 나와 西川을 건너 선도산 자락에 있는 문무왕의 동생 김인문(金仁問)의 묘를 찾아갔다. 필자가 굳이 김인문의 묘를 찾아간 까닭이 있다. 나당전쟁 시기, 김인문은 唐나라에서 머물면서 「전쟁외교」라는 난제를 수행했다.
 
  드디어 唐은 문무왕과 김인문 형제의 골육상잔을 유도하는 독수(毒手)를 휘둘렀다. 674년, 唐고종은 문무왕의 관작을 삭탈하고 김인문을 신라왕으로 올려 귀국하게 하면서, 유인궤(劉仁軌)를 계림도대총관, 이필(李弼)과 이근행(李謹行)을 부대총관으로 삼아 신라를 공격하게 했다.
 
  김인문의 인물됨에 대해 「삼국사기」는 『유가·장자·노자·불교 서적을 섭렵하고 활쏘기·말타기에 능숙하며, 식견과 도량이 넓어 사람들의 추앙을 받았다』고 묘사했다. 이런 김인문이 唐의 농간에 넘어갈 리 없었다. 그는 형의 왕위를 넘보지 않았다.
 
  사후에 김인문의 시신은 신라로 옮겨져 태종무열왕릉의 발치에 묻혔다. 태종무열왕의 능비는 비신이 망실된 채 이수(용머리돌)와 귀부(거북 모양의 받침돌)만 남아 있다. 이수에 쓰인 「太宗武烈王陵碑(태종무열왕릉비)」라는 전세체(篆書體)의 일곱 글자는 김인문의 글씨다. 대단한 명필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