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조선일보DB

26일 오후 1시 40분경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에서 별세한 고(故) 노태우 전 대통령은 1932년 경북 달성군 공산면 신용리에서 태어났다. 면 서기로 일한 아버지 노병수, 어머니 김태향의 장남으로 경북고등학교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해 군에 투신했다. 1979년 12·12 사태 당시 육사 11기 동기(同期)였던 전두환 전 대통령과 투합, 군내(軍內) 사조직 ‘하나회’ 세력을 규합해 군사정변(軍士政變)에 나섰다. 이후 전 전 대통령 다음가는 신군부(新軍部)의 2인자로 군림하며 수도경비사령관, 보안사령관을 거쳐 육군 대장(大將)으로 예편했다. 공교롭게도 노 전 대통령은 12·12 사태의 출발점이었던 10·26 사건, 즉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일인 10월 26일에 세상을 떠나게 됐다.

군복을 벗은 이후론 전두환 내각(內閣)에 정무2장관으로 참여해 정계 활동을 시작했다. 이어 초대 체육부 장관, 내무부 장관, 12대 국회의원을 거쳐 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 집권여당인 민주정의당 대표 등 중책을 맡으면서 5공화국의 후계자로 올라섰다. 1987년 6월 10일 서울 올림픽공원 실내체육관에서 진행된 민주정의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후보로 지명됐다.

그달 29일 국민들의 직선제 개헌 요구를 받아들여 이른바 ‘6·29 민주화 선언’을 발표했다. 그는 이 선언에서 대통령 직접 선거 선출, 민주화 인사 석방, 언론 자유 보장, 사회 각 부문 자유·자치 보장, 대학 자율화와 자유로운 정당 활동 보장 등을 약속했다. 직선제 개헌이 확실시되자 당시 야당 및 재야세력은 정권 교체를 희망했지만, 그해 대선을 앞두고 잠룡(潛龍)이었던 김영삼(통일민주당)·김대중(평화민주당) 전 대통령이 당파를 달리하면서 야권 분열 양상을 초래했고 김종필(신민주공화당 후보) 전 총리까지 대권은 노 전 대통령에게로 넘어갔다. 소위 ‘일로삼김(一盧三金)’ 구도가 낳은 결과였다.

당시 군 출신이나 직선제 개헌을 수용했다는 점에서 ‘보통 사람’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며 집권한 노 전 대통령은 재임 기간 민주주의 정착, 북방외교 추진, 범죄 소탕 및 서울올림픽 개최 등 업적을 세운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집권 초기 국회가 여소야대(與小野大)인 정국에서 정치적 시련을 겪으면서도 ‘통합 행보’를 이어왔고, 이후 1990년에는 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의 이른바 ‘3당 합당(合黨)’을 추진해 ‘민주자유당’이라는 거여(巨與)를 탄생시켜 정국의 주도권을 되찾았다. 그러나 당내 계파 갈등으로 인해 후계 구도가 불안했고, 결국 민자당 대통령 후보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선출된 이후에는 탈당(脫黨)한 뒤 권력의 뒤안길로 물러났다. 

퇴임 후에는 김영삼 정부의 ‘하나회 숙정(肅正)’ 조치에 따라 12·12 사태 주도 및 비자금 조성 등의 혐의로 전 전 대통령과 함께 수감돼 징역 17년에 추징금 2600억여 원을 선고받았다. 1997년 12월 특별사면으로 석방된 뒤로는 길고 긴 투병 생활을 이어왔다. 2002년 전립선암 수술 이후 병세가 악화됐고, ‘소뇌(小腦) 위축증’을 앓는 등 십수 년간 병마(病魔)와의 사투 끝에 오늘 다난(多難)한 생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