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연합뉴스TV 캡처

전두환 전 대통령의 동생이자 5공화국 시절 새마을운동중앙본부 회장을 지낸 전경환씨가 21일 사망했다. 고인은 그간 뇌경색과 다발성 심장판막질환 등으로 투병 생활을 이어오다 이날 향년 7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빈소는 서울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에 차려졌다.

1942년 경남 합천에서 태어난 전씨는 육군고급부관학교와 영남대 경영학과, 고려대·하버드대 대학원을 졸업했다. 군인 출신으로 예편 후 삼성그룹 비서실을 거쳐 청와대 경호계장으로 근무,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거한 10·26 사태 당시 형인 전두환 보안사령관에게 상황을 직보(直報)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전 전 대통령이 집권하자 청와대 경호실 보좌관, 새마을운동중앙본부 사무총장과 회장·명예회장 등으로 활동했다. 이른바 ‘5공 실세’로 불린 전씨의 생애를 이하 《월간조선》 기사(2009년 7월호 ‘병상에 누운 전경환 전 새마을운동본부 중앙회장’)의 한 대목을 인용해 살펴본다.

〈전경환 전 새마을운동본부 중앙회장은 전두환 전 대통령을 떼 놓고는 말할 수 없다. 그는 5공 시절 최고 권력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는 1980년 전두환 대통령이 정권을 잡자, 그해 말 새마을운동본부 사무총장이 됐다. 그의 나이 37세 때였다. 전씨는 실제 나이(1939년생)보다 호적 나이가 네 살 어리다.

당시 회장이 있었지만, 37세의 전경환 사무총장이 새마을운동본부 운영을 주도했다. 당시 새마을운동본부는 ‘제2의 청와대’ ‘등촌동 왕국’이라고 불렸다. 전경환씨의 힘이 한창일 때는 새마을운동본부 중앙회장 외에, 사회체육진흥회장, 대한체육회 이사, 지도자 육성재단 이사장 등 10여 개의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月刊朝鮮 1988년 4월호 기사에 따르면, 매일 평균 4~5개 단체 약 300~400명의 사람이 그를 만나기 위해 새마을운동본부에 찾아왔다고 한다. 국내 인사들뿐만 아니라 外賓(외빈)들이 당시 우리나라를 방문할 때 반드시 찾는 곳이 새마을운동본부였다.

K씨는 당시 전경환씨의 권세를 알려주는 에피소드 한 토막을 들려줬다.

“저희 학원강사들이 가끔 회식을 합니다. ‘회식 때문에 평소보다 일찍 가야 한다’ 하면, 전경환씨나 손춘지 여사가 당시로서는 귀한 고급 양주를 몇 병씩 챙겨줬습니다. 회식 자리에 가서 양주 포장지를 풀면, 양주 상자에 ‘합참의장 ○○○ 드림’ ‘국방부 장관 ○○○ 드림’이라고 적혀 있어요. 당시 대한민국을 쥐락펴락하던 사람들의 이름을 심심치 않게 봤습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릴 것 같았던 권력도, 한순간에 떨어졌다. 제6공화국 초에 불어닥친 ‘5공 비리 청산’ 바람에 전씨 집안 3형제(전기환·전두환·전경환)는 줄줄이 구속됐다. 1988년 전경환씨는 새마을 비리와 관련, 7년형을 선고받았다. 수감된 지 3년 6개월 만인 1991년 6월, 감형으로 풀려난 전경환씨는 한동안 언론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전경환씨는 오랜 침묵을 깨고, 지난 2000년 4월 총선 당시 대구 달서을에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그는 낙선했지만, 사람들은 ‘5공의 소통령’ 전경환의 정치권 귀환에 관심을 가졌다. 전경환씨의 知人(지인)은 “전경환씨는 5공 때 국회의원에 출마하기를 바랐지만, 당시 ‘3許(허)씨(허문도·허화평·허삼수)’의 반대로 무산됐다”며 “대구에서 무소속 출마 낙선 후에도 국회의원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했다”고 했다.〉

전씨는 노태우 정권이 들어선 1989년 새마을운동본부 회장으로 재임하며 공금 76억 원을 횡령한 혐의로 징역 7년, 벌금 22억 원 등을 선고받았다. 이로 인해 1987년 받은 국가 훈장 ‘새마을훈장자립장’은 30년 만인 2017년 취소됐다. 이후에도 금품 수수, 사기 등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나 지병으로 형집행 정지 처분을 몇 차례 받은 뒤 2017년 3월 가석방 출소했다. 고인의 발인은 오는 24일 오전 8시 30분, 장지는 용인 평온의숲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