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위 있는 죽음’의 첫 관문이 열렸다. 회복이 불가능한 환자에 대해 연명 의료를 중단하는 이른바 ‘웰다잉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여야는 9일 오후 국회 본회의에서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안’을 재석 의원 203명 중 찬성 202명, 기권 1명으로 의결했다.
 
그간 웰다잉법은 국회에 오랫동안 계류돼 있었다. 18대 국회에서 관련 법안 두 개(‘존엄사 법안’ ‘삶의 마지막 단계에서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이할 권리에 관한 법률안’)를 발의했지만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자동 폐기됐고, 19대 국회에서도 분위기는 비슷했다. 존엄사 관련 법안들은 꾸준히 발의돼왔지만 11월까지 논의조차 되지 않아 이번 국회에서도 무산될 것이라는 관측이 많았다. 이런 분위기에서 한 달 여 만에 일사천리로 관련 법안이 통과된 것이다.
 
이번 웰다잉법 통과는 1997년 가족의 요청에 따라 연명치료를 중단한 의료진에게 살인방조죄를 적용한 ‘보라매 사건’ 이후 19년만이고, 가족의 요청을 받아들여 회복이 불가능한 김할머니의 연명치료 중단을 받아들인 2009년 ‘김할머니 사건’ 이후 7년만이다.
김할머니 사건 이후 사실상 연명치료를 허용하는 분위기가 마련됐지만 정작 중환자실에서는 달랐다. 여전히 연명치료 중단을 꺼리는 의사가 많았다. 법적 근거가 없었던 탓이다. 이로 인해 의료진과 가족 간 법적 분쟁이 끊이지 않았고, 회복가능성이 없는 환자에게 들이붓는 막대한 의료비 때문에 빚더미를 떠안는 가족도 허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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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23일 오전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서 사위 심치성(사진 맨 왼쪽)씨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의료진이 김씨(77)의 인공호흡기를 떼냈다. 하지만 김씨의‘본능’은 여기에 저항하며 생명을 위한 사투(死鬪)를 시작했다. 김 할머니는 2008년 2월 폐암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조직검사를 받다 과다 출혈에 따른 뇌손상으로 식물인간 상태에 빠졌으며, 환자의 자녀들은 기계장치로 수명을 연장하지 않는 것이 평소 어머니의 뜻이라며 소송을 제기,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했다.
 
 
법안 통과까지 질질 끌어온 데에는 죽음을 터부시하는 사회적 분위기 탓이 크다. 한국인은 ‘죽음’을 금기시한다. 나이든 사람 앞에서 ‘죽음’ 운운하면 큰 결례가 되고, 중환자실에서 산소호흡기 등의 목숨연장을 위한 도구를 주렁주렁 단 환자의 가족이 ‘연명치료 중단’을 요구하면 불효자식 취급당하기 십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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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존엄사를 위한 법적·제도적 장치가 마련됐다. ‘품위 있는 죽음’을 본격적으로 논의할 때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만큼 ‘어떻게 죽을 것인가’도 중요하다. 죽음을 삶의 연장선으로 받아들이고 품위 있는 죽음을 준비한 사람만이 한 번 뿐인 인생을 잘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사)사전의료의향서 실천모임(회장 노연홍)에는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받지 않겠다는 의향을 미리 밝혀두는 ‘사전의료의향서’ 서식을 신청하는 사람이 급증하고 있다. 나이 많은 환자는 물론 건강한 젊은이들 중에서도 이 의향서를 써 두는 사람이 많다.
 
이 실천모임에서는 얼마 전 ‘사전의료의향서 상담사례집’을 발간했다. 사례집에는 20대의 말기암 환자, 아픈 어린 딸을 둔 40대 아버지 등 가슴 아픈 사연들이 가득하다. 사례집에 따르면, 의향서 신청 사연 중에는 ‘병을 겪고서’가 가장 많았다. 그 다음으로는 ‘친지의 임종을 겪고서’ ‘연명의료를 목격하고서’가 뒤를 이었다. 그 다음 이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바로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죽음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죽음의 방식’까지 고민하는 사람들이 늘었다는 얘기다.
 
랍 몰의 저서 ‘죽음을 배우다’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영양공급 튜브는 환자에게 고통을 주면서 죽음의 과정을 연장하는 일이다. 신체기관을 멈추는데 집중되어야 할 에너지가 음식을 소화하는데 사용되기 때문이다.” 사전의료의향서 실천모임에서는 ‘당하는 죽음’이 아닌 ‘맞이하는 죽음’을 지향한다. 02-2281-2670으로 전화하거나 온라인(sasolmo@hanmail.net)으로 신청하면 무료로 사전의료의향서 서식을 보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