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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남아 있는 덕수궁 전경. photo=문화재청

실제 궁궐을 하나씩 둘러보자. 먼저 덕수궁으로 더 많이 알려진 경운궁이다. 덕수궁은 원래 부왕이나 상왕의 만수무강을 위해 그들이 머무는 궁궐에 대해 한시적으로 붙이는 명칭이다. 고종 황제 사후 당연히 정식 명칭인 경운궁으로 환원되어야 했지만, 일제에 의해 의도적으로 덕수궁이라는 명칭이 유지됐다. 그러는 사이 덕수궁이라는 이름이 더 익숙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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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小田星五) <덕수궁사>에 전하는 경운궁 배치도. 붉은 색이 현존하는 건물이고, 노란색 영역은 일제에 의해 사라진 건물이다. 사진의 1번 영역은 미국 영사관, 2번은 영국영사관, 3번은 러시아 영사관이다. 러시아 영사관 옆으로 경희궁으로 넘어가는 길이 나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photo=대원사 <덕수궁>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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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평면도를 통해 덕수궁의 영역을 표시해 본 것이다. 현재 서울시청 광장 자리는 덕수궁 경운궁 궐내각사가 있던 곳이며, 대한문도 현재보다 앞으로 많이 나왔다. 고종 당시 조성된 미국대사관저와 영국대사관 터는 아직 그대로 사용되고 있으며, 가운데 덕수궁 돌담길이 나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경희궁과 경운궁 사이에는 상림원이라는 경운궁에 딸린 후원이 있었다. 러시아 대사관은 이 상림원 부지 일부를 매입해서 건립했다. photo=다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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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의 경운궁 정전인 중화전의 모습. 다른 정전과 마찬가지로 2층의 웅장한 모습이다. 뒤편에 서양식 구성헌 건물이 보인다. 1904년 화재 후 중화전은 현재 남아 있는 단층 건물로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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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운궁 함녕전(고종의 침전)의 정문이었던 광명문은 오늘날 제자리를 잃고, 흥천사 종과 자격루를 보관하는 장소가 되었다. 대한제국의 광명을 바라는 고종의 염원이 깃든 문이지만, 궁궐 한 구석에서 본래 기능을 상실한 채 쓸쓸하게 서 있다. 

 
현재 우리가 보는 경운궁은 1910년 보다 면적이 3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든 규모다. 일제 시대를 거치면서 건물은 대여섯 채가 겨우 살아 남았다. 우리가 경운궁을 대할 때 가장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바로 경운궁은 우리나라 최초의 황궁이자, 유일한 황궁이라는 점이다. 경복궁에서 아관파천 후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던 고종황제는 1897년 경운궁으로 옮겨온 후  곧바로 대한제국 성립을 선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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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구단. 고종황제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하늘에 제사 지내기 위해 남별궁 부지위에 세운 제국의 상징이다. 일제는 합방 후인 1913년부터 곧바로 이를 철거하기 시작했으며, 부지는 팔아버렸다. 현재는 황궁우만 남아 있다. 대한제국의 상징인 이 건물은 다른 곳에라도 장기적으로 반드시 복원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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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환구단 모습. 대한문에서 바라 본 모습이지만, 호텔숲 속에 가려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나마 최근에 사진에 보이는 환구단 정문도 복원지만, 제 위치는 아니다.
 
경운궁(덕수궁): 아관파천 후 황궁 면모 갖췄지만 화재로 대부분 잿더미
 
고종황제가 이 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경운궁은 명실상부한 황궁으로서 면모를 갖춰가기 시작했다. 4개 대문을 갖추고, 정전인 중화전, 침전인 함녕전, 태조의 어진을 봉안한 흥덕전, 역대 왕들의 어진을 모신 선원전, 황실 도서관인인 중명전 등 수많은 전각이 새롭게 배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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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대화재 전의 덕수궁 모습. 왼편에 보면 궁궐 정면을 둘러싼 담을 확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1904년 대화재가 발생, 그동안 신축했던 중요 건물 대부분이 잿더미로 변했다. 조선을 삼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던 일본에게 고종황제는 ‘눈엣 가시’ 같은 존재였다. 경운궁에 고종이 거처하는 것을 싫어하는 일본인들이 일부러 불을 질렀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하지만 고종은 잿더미의 덕수궁을 다시 한번 재건했다. 1905년 즉조당, 석어당, 경호전, 함녕전 등이 중건 되었고, 이듬해 대안문(大安門)을 대한문(大漢門)으로 고치고 궁궐의 정문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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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재로 잿더미가 된 경운궁(위). 고종황제는 이에 굴하지 않고, 곧바로 궁궐 재건에 들어간다.  아래는 경운궁 화재에 대한 삽화 그림. 백성들과 관리들이 광명문을 통해 허둥지둥 뛰쳐나오는 가운데 일본군이 이를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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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1922년 경운궁을 둘로 가르기 위해 만든 이른바 ‘덕수궁 돌담길’. 왼쪽이 미대사관저이고, 왼쪽 정동길을 따라 올라가면서 오른쪽 편은 사실상 덕수궁 부지였다. 구한말 이 일대에 각국 영사관이 밀집했는데, 외교를 통해 일본을 몰아내고 독립을 유지하려던 고종의 몸무림과 무관치 않다. 정작 나라가 망할 때는 이들로부터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했다.
 
덕수궁은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23년간 머물다가 결국 망국의 한을 품고 승하하는 모습을 지켜본 장소다. 고종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자 3·1 운동이 들불처럼 번졌다. 고종이 승하하자 마자, 일제는 기다렸다는 듯 본격적으로 궁궐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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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의 죽음을 슬퍼하는 신민들(위). 아래는 고종의 장례 행렬이 대한문을 나와 오늘날 서울시청 광장 앞을 가로지르고 있는 모습. 일본군이 욱일승천기를 앞세우고 행진하고 있다. 고종의 갑작스런 죽음은 백성들의 억눌렸던 반일 감정을 폭발시켰고, 3·1 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고종 승하하자 마자, 일제 본격적으로 궁궐 해체
 
1922년 일제는 이른바 ‘덕수궁 돌담길’을 뚫으면서 고종이 외국 대사를 접대하던 돈덕전과 선원전 영역을 헐고, 덕수궁을 둘로 갈랐다. 선원전에는 영친왕의 모친인 엄비(嚴妃)의 혼전(魂殿)이 있었지만, 이곳에 ‘경성제일여자고등학교’를 지었다. 이것이 오늘날 빈터로 남아 있는 경기여고 부지다. 1933년엔 궁궐 내 대부분의 건물들을 팔아버리고, 공원으로 만들어 일반에 공개했다. 고종황제가 대한제국을 선포한 우리나라 첫 황궁이 공원으로 전락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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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도로 확장으로 덩그라니 섬처럼 남은 대한문(조선일보 보도사진). 이후 대한문은 뒤로 33m 정도 후퇴한 오늘날의 자리로 옮겨진다. 이후 궁궐 담장도 투시가 가능한 형태로 바꾸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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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무렵의 대한문(위). 광복 70주년을 맞아 옆의 건물에 대형 태극기가 걸려있다. 정작 대한문은 큰 빌딩 숲에 짓눌린 모습이다. 아래는 대한문 정문의 월대모습. 제대로 복원하지 않고, 그냥 돌사자를 바닥에 덩그렇게 놓아두었다.

경희궁: 경운궁과 맞닿아 있었고, 육교인 홍교로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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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된 경희궁 숭정전. 경희궁은 임진왜란 이후 근 300년 가까이 이 나라 정치의 질곡을 지켜본 중요한 궁궐이다. 흔적도 없던 이곳에 최근 몇 개의 전각과 회랑을 복원해 놓았으나, 아직은 도무지 궁궐의 면모가 서지 않는다. 아래는 동국대 정각원으로 사용중인 원래 숭정전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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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공사관 언덕에서 내려다본 경희궁. 빌딩 숲에 가려 잘 보이지 않지만, 이곳 어디를 통해 예전에 경희궁과 경운궁을 연결하는 홍교가 있었을 것이다. 사진에 서울 역사박물관의 모습이 보인다.
 
경희궁은 광해군 이래 300년 간 이궁(離宮: 화재나 의외의 재난에 대비하여 만든 궁궐)으로 제 역할을 충실히 해왔으며, 조선 중기 이후 정치적 격변의 중심에 있던 궁이다. 정조, 헌종, 철종 등 여러 임금이 이곳에서 즉위했고, 정사를 돌봤다. 경희궁은 광해군이 원래 경복궁 옆 인왕산 아래 인경궁과 함께 지었지만, 인경궁은 사라지고 경희궁은 구한말까지 제 위치를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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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궁의 전체 모습을 그린 서궐도. 남아 있는 도안 그림에 채색을 한 것이다. 경희궁의 전체모습을 그린 것으로 정문인 흥화문이 동쪽을 향해 나있다.
 
경희궁의 전경을 그린 서궐도를 보면, 정문인 흥화문이 오늘날 구세군 회관쪽에서 종로와 마주보며 동쪽을 향해 나있다. 거기서 약 400미터 안쪽에 정전인 숭전전이 남향을 하고 서 있다. 서쪽으로는 서대문과 맞닿은 성벽이 궁궐의 경계선을 이루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사직으로 통하는 문이 있었다.
 
경운궁과는 길 하나 사이에 두고 맞닿아 있었으며, 두 궁궐은 육교인 홍교가 연결되어 있었다. 흥화문에서 조금만 내려가면 6조 거리가 나왔기 때문에 경복궁과도 가까운 위치에 있었다. 경희궁은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에 사용할 비용 마련을 위해 많은 전각이 헐렸다. 그래도 주요 전각과 부지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국권이 강탈당한 후에는 전각은 물론이고, 부지까지 완전히 없어지는 비운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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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서울 장충단 동쪽 현재의 신라호텔 자리에 있던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사찰 박문사를 세우고, 그 북쪽 입구로 경희궁 정문인 흥화문을 옮겨왔다.

일제 경희궁 부지 전매국에 넘겨…남은 곳엔 일본인 학교 세워
 
1910년 일제는 경희궁 부지를 전매국에 넘기고, 남은 부지에 일본인 학교인 경성중학교를 세웠다. 또한 궁궐 일대를 일본인 거주지역으로 만들기 위해 높은 지형은 깎아내고, 낮은 지형은 메워버렸다. 정전인 숭정전은 1926년 일본 불교의 한 종파인 조계사에 매각, 옮겨져 다시 세워졌다. 현재 이 건물은 동국대 법당인 정각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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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리는 경희궁. 정문인 흥화문 주변에 이미 담장과 전각이 보이지 않는다. 비운의 흥화문이 말없이 내려다보고 있다.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은 한반도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기리기 위해 1932년 남산 자락에 세운 절인 박문사(博文寺)의 북문으로 옮겨졌다. 1988년까지 신라호텔 영빈관 정문으로 사용되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었다. 이후 현재 위치로 이전했지만, 제 위치에 복원하지 못한 채 남향을 유지 하고 있다.
 
왕의 침전이던 회상전은 임시소학교인 교원양성소의 교실과 기숙사로 쓰였다. 이후 1928년 조계사에 매각, 주지 집무실로 사용되다가 소실되었다. 임금의 편전인 흥정당은 광운사로 옮겨 세워졌고, 황학정은 사직단 뒤로 옮겨졌다. 그나마 아직도 활터에 건물이 남아 있는게 다행이랄까. 어쨌든 1920년대를 지나면서 경희궁은 지도상에서 말끔히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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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1909년 대 초기에 제작된 지도에 경희궁이 표시되어 있다. 지도의 왼쪽 하단 넓은 공터다. 경희궁의 서쪽 경계는 서대문과 이어지는 성곽임을 알 수 있다. 하단 지도는 1958년 지도인데 경희궁터에 서울중학교가 표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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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성곽 바깥쪽은 경희궁이라는 이름이 붙은 아파트 건설 공사가 한창이다. 위쪽 사진 성곽 안쪽이 경희궁 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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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박물관 자리 앞에 복원한 경희궁의 금천교. 동쪽 종로와 일직선상으로 놓였다. 맞은편에 보이는 구세군회관 건물 쪽에 흥화문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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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박물관 전경. 우여곡절 끝에 어렵게 마련한 경희궁 부지에 박물관을 지어놓았다.
 
<3편에 계속>
 [이상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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